레디메이드 英雄

[마족] /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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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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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벌 사용 가능 (1회 한정)

†★ ! 특별 미션 ! ★※

「 마왕 」 의 존재를 없애세요!

보상 : 세계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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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번호 팔렸나. 박덕개는 오늘도 제게 온 스팸 문자를 차단하며 한숨을 쉬었다. 며칠 전부터 빠짐없이 오던 똑같은 내용의 스팸은 차단을 해도 해도 끝없이 다른 번호로 오는 탓에 며칠째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이었다. 딱히 정보가 팔릴만한 건덕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주인 속도 모르는 개인정보들은 저 대신 즐겁게 세계여행이나 하는 듯했다. 모르겠다. 지구 어딘가의 또 다른 덕개라도 잘 살길. 박덕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다시 발을 옮겼다.

여긴 이상하게 안 망한단 말이야. 박덕개는 본래 자신의 목적지였던, 늘 손님이라고는 저밖에 없는 동네 작은 슈퍼로 들어갔다. 오렌지 주스 하나, 감자 칩 두 봉, 아이스크림…. 기깔나는 방학 한량 생활을 위한 준비물을 고른 덕개는 계산대에 물건을 올렸다.

"사장님! 잠뜰 사장님! 계산이요."

덕개는 오늘도 한결같이 마트 밖 평상에 자리 잡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슈퍼 사장을 불렀다. 손님 없는 슈퍼와 그런 슈퍼에 드는 도둑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가게에 무관심한 사장. 정말 어떻게 안 망하는 거람. 피라미드고 공중정원이 다 뭔가. 박덕개에겐 이 자그마한 슈퍼가 7대 불가사의나 다름없었다.

사장이 바코드를 찍는 동안 박덕개는 계산대를 대강 둘러보았다. 어 사장님. 이거 새로 들이셨어요? 못 보던 건데. 덕개는 계산대 한쪽에 놓인 검고 큰 구슬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거, 방범용이야. 침입자 막아주거든. 그렇게 말한 사장은 이어서 특정인이 손대면 작동되는거네 뭐네 하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덕개는 담담하게 대답하는 사장이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분 어디서 다단계 당한 거 아니야? 정말…, 이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시려고…. 덕개는 구슬에 손을 올리고 사장에게 사기 조심할 것을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하려 했다.

쾅. 굉음과 함께 슈퍼의 반절이 날아갔다. 박덕개가 구슬에 손을 대자마자 벌어진 일이다. 이거 설마 내가 한 거야? 아니지? 원래 말하려 했던 것도 잊은 덕개의 조그만 머리통에 수천수만가지의 생각이 지나간다. 그중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단연 보상에 관한 문제. 다 물어내라고 하면 어떡하지. 덕개는 이런저런 생각 끝에 슈퍼 사장을 쳐다보았다. 일단 빌자. 빌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무리 계획 없이 사는 인간이래도 이런 순간에는 재빠르게 계획을 세워야 하는 법이다. 죽이되던 밥이되던 싹싹 비는 것.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너 용사였냐?"

사장이 입을 열기 전까진. 이 사람 괜찮은 건가?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머리가 돌아버린다는데, 박덕개에겐 슈퍼 사장이 딱 그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하하! 게다가 사장은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기 시작하더니 덕개의 팔을 덥석 잡았다. 왜, 왜 이러시죠. 덕개는 갑작스럽게 절 잡은 손을 떼어내려다 곧 그만두곤 반대 손으로 사장의 손을 토닥였다. 에고 불쌍한 사장님…. 눈도 완전 돌아버리셨네….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설마 너, 니가 용사인 거 오늘 처음 안 거야? 너 완전 햇병아리구나? 지가 용사인 줄도 모르는 걸 보면. 너 이거 한 번도 안 써봤지? 자아, 손이나 뻗어 봐. 옳지. 뭔가 느껴지지 않아? 내보낸다고 생각하고 손바닥에 힘을 모아 봐. …오. 전에 애들보다 볼품없네. 이래서 요즘 것들은……."

박덕개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이제 슈퍼 천장이 시원하게 날아간 건 그에게도 뒷전이 되었다. 용사? 힘? 제 손에서 나오는 이상하고 뜨거운 빛기둥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혼란 속에서 불현듯 아까 받은 스팸 문자가 생각났다. 덕개는 핸드폰을 꺼내 그 문자를 사장에게 조심스레 보여주었다. 저어…, 이런 문자를 받긴 했는데…. 그걸 본 사장은 한 차례 더 뒤집어진다. 아 천계 자식들 일 똑바로 안 하네. 이따위로 보내니까 애가 믿질 않지. 사장의 반응과 제 손에서 나오는 판타지적인 힘을 보니 스팸인 줄 알았던 그 문자들이 진짜였나보다. 세계 일주하고 있을 줄 알았던 내 개인정보가 사실 하늘나라 여행 중이었다니. 한평생 종교와 관련 없이 살아온 박덕개한테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덕개를 뒤로하고 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완전 레디메이드(Ready-made) 용사구나?"

"레디…, 메이드요?"

"응 레디메이드."

순간 박덕개 머리에 지난 어느 날 영어 단어장에서 스치듯이 본 단어 하나가 지나간다. 레디메이드, 기성품의. 근데 그게 용사랑 무슨 상관이지? 덕개가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얼굴을 하자, 사장이 피식 웃으면 말했다. 저 위쪽 하늘에서 마왕 하나 잡겠다고 용사를 천만씩이나 만들었다는데, 그런 너희가 기성품이 아니고 뭐겠니? 슈퍼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더없이 활짝 웃었다. 열 받았지만 부정할 순 없었다.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다짜고짜 하루아침에 용사가 된 본인이 기성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기성품 용사. 그보다 제게 잘 어울리는 말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뭐 하는 인간이길래 이런 걸 다 알고 있지. 덕개는 뒤늦게 슈퍼 사장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설마 선배 용사라도 되나? 방금 전의 모욕도 잊은 그는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그렇지.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가 있으면 그 옆에 뉴비 이끌어 줄 고인물 하나쯤은 있어 줘야지. 성격은 좀 안 좋아 보였지만…. 뭐, 용사라고 성격이 다 좋으라는 법도 없고, 정말 하늘에서 천만 명씩이나 용사를 만들었다면 개중에 인성 더러운 사람 없을 가능성이 더 희박했다. 덕개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사장님은 제가 용사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야 내가 그 마왕이니까."

들려온 답변은 청천벽력이었지만.

"구, 구라치지 마세요."

"진짠데? 뭐, 자기소개라도 해 줄까?"

이름은 너도 알다시피 잠뜰. 나이는…, 하도 오래돼서 나도 모르겠다. 마왕이랑 슈퍼 사장 겸직 중이었지. 비록 누가 다 무너뜨렸지만. 박덕개의 소심한 현실 부정에도 사장은 제 이름까지 소개해가며 마왕임을 적극 어필한다. 심지어는 얼빠진 표정으로 넋 놓고 있는 덕개가 아직 믿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미소를 싹 거둔 뒤 손에서 검은 빛을 만들어내었다. 헉. 순식간에 덕개의 숨이 턱 막혔다. 온 세상의 검정을 먹어버린 듯한, 궁극적인 어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따끔거린다. 벌벌 떠는 덕개를 응시하던 마왕은 힘을 거두곤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믿지? 덕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용사 좋아하시네. 아무래도 하늘에서는 자기를 버린 게 틀림없었다. 막 각성한 쪼렙 뉴비 용사 옆에 시작부터 막보스라뇨. 박덕개는 이제 제가 꼼짝없이 뒤졌구나 생각했다. 죽이겠지. 응, 분명 죽일 거야. 저를 위협할 용사들이 천만 명이나 있다는데, 걔네가 싸그리 몰려오기 전에 하루빨리 조그만 싹이라도 잘라버리는 것이 마왕에겐 이득일 게 뻔했다. 안 되겠다. 덕개는 아까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한 계획을 다시 끌어왔다.

"살려주세요!"

아까 보셨지만 저 힘도 제대로 못 쓰고 별로 위협적이지도 않고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게다가 오늘 용사인가 뭔가라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곤 손바닥에 불 날 정도로 절박하게 싹싹 비는 박덕개는 참으로 비굴해 보였다. 덕개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왕은 그런 덕개를 가만히 바라보다 웃었다. 마왕의 웃음 한 번에 수명이 오르내리는 기분이었다. 살려줄 거야. 살려주는 거겠지? 덕개는 그 웃음이 제발 제 생명의 초록 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좋아."

마왕의 한 마디에 힘이 탁 풀렸다. 됐어. 일단 살았어. 비굴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아는 있어야 반격하든 도망치든 하는 법이다. 덕개는 마왕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 은혜 잊지 않고 앞으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당히 외친 덕개는 다짐했다. 앞으로 이 슈퍼가 있는 쪽으로는 머리도 안 누이리라고. 근데 아직 내 말 안 끝났는데. 누가 마왕 아니랄까 봐. 속으로 잔치를 열고 있던 박덕개에게 그는 찬물을 끼얹었다.

"너 여기서 알바해라."

제, 제가 왜…. 갑작스러운 마왕의 제안에 말문이 턱 막혔다. 막 방학을 맞아 시간이 넉넉한 건 고사하고, 어떻게 해서든 마왕이 제 고용주가 되는 꼴은 막아야 할 것 같았다. 마왕은 절 옆에 두고 감시하겠다 했다. 허튼짓이라도 하면 바로 처단해버린다는 무서운 말까지 덧붙이며. 그래서 얼씬도 안 하겠다고 약속드렸잖아요! 억울한 티를 한껏 내며 호소해봤지만, 젠장. 상대는 마왕이었다.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말한다. 한낱 인간이랑 하는 구두 약속을 내가 어떻게 믿겠느냐고.

"뭐, 정 싫으면 다른 방법도 있긴 한데…."

마왕의 말에 방금까지 발발 떨던 덕개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게 뭐죠. 마왕과 더 엮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마왕 옆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쌔빠지게 구르며 남은 평생을 보낼 순 없었다.

"내일까지 여기 수리비 물어내면 보내줄게."

"사장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제 3 금융권까지 빚지고 확실하게 인생 망하는 것보단 마왕 껌딱지로 사는 불확실한 미래가 더 낫지. 그렇고 말고. 덕개는 아직 미소를 잃지 않고 제게 허튼짓하기만 해보라는 마왕의 시선에서 얼굴을 돌렸다. 아무래도 아까의 쾅 소리가 슈퍼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라 박덕개 인생 꼬이는 소리였나보다. 덕개는 절 이 꼴로 만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고 푸르른 여름 하늘은 애석하게도 평소와 구름 한 점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모르겠다. 덕개는 평소에도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던 제 운빨에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천사의 가호 준다는데, 마이너스인 제 운도 전보단 나아지지 않겠는가. 축복 확실하게 안 내려주면 천계 찾아가서 신 멱살 잡아야지. 비로소 하드코어 생존 대서사시의 시작이었다.

레디메이드 英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용사 박덕개도 마왕과 지낸 지 삼 주쯤 되니 마왕 비위 맞추는 덴 도가 텄다. 까라면 까고 구르라면 구르고. 박덕개가 타고나길 을로 난 건지, 마왕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갑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덕개는 제 상사가 마왕이라는 것만 빼면 꽤나 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손님도 없는 한적한 슈퍼 알바가 할 일은 거의 청소에서 끝났으니까. 자연스레 마왕과 노가리 까는 시간만 늘다 보니 덕개는 마왕을 얼추 파악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중 특이했던 건 크게 셋 정도.

하나, 마왕은 의외로 상식적이다.

알바로 채용되자마자 덕개는 마왕 밑에서 오지게 굴렀다. 여기까진 예상한 일이었다. 단지, 덕개가 예상 못 했던 건, 마왕이 저를 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굴릴 거란 것이었지. 24시간 무급 노동이라도 시킬 기세였던 마왕은 의외로 근로 계약서부터 들이밀었다. 너 아직 청소년 아냐? 일할 땐 이런 거 다 챙기고 해야 하는 거야.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슈퍼 업무를 알려주었다. 덕개는 생각했다. 마왕 밑에서 일하는 거, 나쁘지 않을지도?

물론 그 생각은 한 시간도 안 돼서 깨졌지만. 일하는 측면에서는, 꿀알바가 맞았다.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 돈은 꼬박꼬박 나온다니. 알바생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개꿀일 수는 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일적인 부분만 봤을 때의 얘기였고. 박덕개는 오지게 굴려졌다. 사장, 아니 마왕에게. 마왕은 매번 손님 없는 슈퍼를 버려두고는 덕개를 슈퍼 앞 공터로 호출했다. 그리곤 똥개훈련을 시켰다. 용사의 힘을 꺼내 보라고 닦달하질 않나, 갑자기 덕개에게 마왕 자신의 힘을 날리고는 막아보라고 하질 않나.

"사장님…! 방금 거 못 막았으면 저 진짜 죽었어요!"

"그러게. 아쉽게 아직 살아있네."

매번 이런 식이야. 덕개는 오늘도 툴툴대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을 누인 곳이 흙바닥인 건 전혀 중요치 않았다. 아이고 삭신이야. 손님도 없는 슈퍼에서는 일할 것도 없었는데 덕개의 몸에는 매일 근육통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왕이 저를 굴리는 연유가 무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그 무시무시한 생명의 위협을 겪으며 날이 다르게 성장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덕개에게 다가온 마왕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렇게 비실비실해서 어디 용사 하기나 하겠어? 덕개는 마왕 손을 잡고 일어나며 생각했다. 마왕은 왜 저를 도와주는 걸지. 본인을 죽일 수도 있는 싹이라면, 진작 잘라버려야 될 게 맞지 않을지를.

"근데 사장님. 저 이렇게 도와주셔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너 같은 오합지졸들 단체로 몰려와도 나 못 죽여."

그리고 재밌잖아. 원래 초보자 놀리는 게 제일 재밌어. 마왕은 웃으며 그렇게 덧붙였다. 아하. 그냥 본인이 겁나 세서 그런 거였군. 아무래도 마왕에게 덕개는 잠깐 갖고 놀 수 있는 유흥거리쯤인 게 분명했다. 견뎌내라 박덕개. 굳세어라 박덕개. 덕개는 오늘도 마왕에게 굴려진 저 자신을 연민했다.

둘, 마왕은 욕심이 없다.

잠뜰. 나이 불명. 직업은 슈퍼 사장 겸 마왕. 좋아하는 것은 막대 아이스크림. 마왕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단 존재치고는 참으로 소박했다. 애초에 마왕씩이나 돼서 하는 일이 동네 슈퍼 사장님이라는 것도 웃겼다. 마왕 정도면 뭐 세계정복 같은 간지나는 것쯤은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뭔가 김샌 기분에 덕개는 늘상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마왕에게 말을 건넸다.

"사장님은 마왕씩이나 되는데 왜 동네 슈퍼나 하고 있어요?"

"얌마. 자본주의 사회에선 왕보다 무서운 게 사장이야."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남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입에 물었다. 아하 자본주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 잘 나가는 회사 사장도 아니고 동네 구멍가게 사장을 추구미로 삼는 마왕이 신기하긴 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던데, 정작 그 악마들의 지배자라는 마왕은 꽃무늬 바지 차림으로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나 쪽쪽 빨아대고 있다. 세상의 삿된 것들을 모조리 끌어안은 존재. 공포 위에 군림한 자. 거창한 타이틀을 가진 마왕은 프라다는 커녕 브랜드 붙은 옷조차 사 입지 않았다. 만화 속의 악마들은 온갖 화려한 것으로 몸을 휘감던데, 그는 그 흔한 시계도 금붙이도 차고 다니는 일 없이 시장에서 원 플러스 원 떨이로 팔 법한 싸구려 티셔츠만 줄기차게 돌려 입었다. 사장님 혹시 돈 없어요? 궁금해 미치겠어서 언제 한 번 물었더니 마왕은 빙긋이 웃으며 이리 답하더라.

"덕개야. 겸손은 미덕이고 사치는 죄악이란다."

아 옙. 박덕개는 짜게 식은 눈으로 오늘도 시장제 꽃무늬 바지를 입은 마왕을 바라봤다. 악의 군림자 이딴 거 다 취소. 저게 무슨 마왕이야. 확실히 악마가 할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셋, 과거는 마왕의 역린이다.

박덕개는 분수를 알았다. 세상을 구할 수도 있는 용사라곤 하지만 그 또한 제 옆의 마왕 손길 한 번이면 가차 없이 바스러질 이름이다. 용사이기 전에 한낱 슈퍼마켓 알바생일 뿐인 박덕개는 본인이 마왕의 손바닥 안에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목숨값 아까운 줄 모르고 마왕에게 살금살금 기어오르며 맞받아치는 일은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왕이 암묵적으로 용인해주는 범위 내에서였고. 제 분수를 아는 용사와 그런 용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마왕 덕에 덕개는 나름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딱 한 번 빼고.

모든 건 창고를 뒤지다 발견한 책 한 권 때문이었다. 먼지 쌓이긴 했지만, 꽤나 잘 보존되어있는 책 상태와 여기저기 묻어있는 손때가 책 주인이 책을 얼마나 아꼈었는지를 나타내는 듯했다. 덕개는 책을 펼쳤다. XX년 X월 X일. 날씨 맑음. 어라, 이거 일기 아닌가? 가만히 책을 읽어내린 덕개는 확신했다. 이건 분명 마왕의 일기다. 남의 일기 훔쳐보는 거 아니랬는데……. 머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손과 눈은 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덕개는 아예 박스 위에 앉아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일기라기보단 무언가의 보고서에 가까운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딱한 내용. 형식적인 문체. 허나 그 사이사이에 건조하게 묻어나오는… 인간에 대한 애정. 이거 정말 마왕이 쓴 게 맞나? 때로는 불같고 때로는 차가운 지금의 마왕의 성격과는 정반대인 기록이었다.

기록의 뒷부분은 찢어져 있었다. 덕개는 종잇장을 펄럭이며 생각했다. 꽤나 애지중지한 것 같은데, 뒷부분은 왜 날아가 있지. 찢어진 뒷부분을 매만지던 도중, 뒷골이 서늘해졌다. 에어컨 바람이라던가 하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본능이자 직감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죽을 것이라는 직감에서 나오는, 위험 신호.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 덕개의 뒤통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밌니?"

아뇨 하나도 재미없어요. 떼어지지 않는 덕개 입에서 그 말만이 맴돈다. 평소와 달리 차갑기 그지없는 마왕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속이 차게 식는 것 같았다. 돌아서 나 봐. 마왕이 말했다. 그것은 부탁이라던가 요청이 아닌 명령. 오싹한 명령에 두려움을 누르고 애써 뒤를 돌아보자 창고 벽에 기대어 있는 마왕이 보였다.

덕개야.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단다. 그렇게 말하는 마왕은 분명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입만' 웃고 있었다. 그간 동네 작은 슈퍼 사장님이라며 편하게 불러왔지만, 어찌 됐든 사장 잠뜰의 본질은 마왕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용사 덕개를 곁에 두어 감시하고 성장시키지만, 동시에 그 용사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간단히 지워버릴 수 있는 마왕. 웃지 않는 마왕의 눈은 무섭게도 깊었다. 즐겨봤던 판타지 소설에서나 마주하던 살기라는 단어. 졸지에 21세기 인간 박덕개는 원치 않게도 판타지 소설 속에서 나올법한 살기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네가 옆에서 뭘 쫑알거리든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이 있는 거 아니겠니."

우리 서로 과거는 건들지 말자? 이건 프라이버시의 영역이잖아. 마왕의 싸늘한 목소리에 덕개는 입도 못 연 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머리에 새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왕의 역린을 건들지 말자고.

뭐 어쨌거나, 박덕개는 나름대로 지금 인생에 만족하고 있었다. 자길 죽일 줄 알았던 마왕은 딱히 용사를 해치거나 할 생각도 없어 보였고, 텅 비었던 덕개의 통장은 나날이 두둑해졌으니. 게다가…. 인정하긴 싫지만 마왕과 지내는 게 꽤 재밌기도 했고. 그냥 평생 눌러앉아 살아버릴까. 나중에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덕개에게 최고의 선택지임은 분명했다. 상사가 좀 많이 무섭긴 하지만, 뭐 사회생활 안 빡세고 인간관계 안 어지러운 곳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지금의 평화가 지속만 된다면야, 덕개는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잘 눌러앉아 있을 자신이 있었다. 저를 멋대로 용사로 만드신 신이시여. 용사고 마왕이고 다 좋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대로만 지내게 해주십쇼.

그리고, 제멋대로인 신이 제 기도에는 쥐뿔도 관심이 없음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딱 일주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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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은 달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데, 알바로 채용된 이래로 박덕개 인생엔 큰일이 너무 많았다. 딱 그 한 달 전부터 지금까지 평생 겪을 고난이란 고난은 다 겪은 듯한데, 이상하게 큰일 하나가 지나면 더 심각한 큰일 하나가 찾아오게 되더라. 개학이라는 최악 뒤 간 알바에서 덕개는 저기압 상태의 마왕이라는 더 심각한 최악을 마주했다. 오늘은 그냥 닥치고 있어야겠다. 지난 한 달간 굴려지며 누적된 데이터에서 도출된 값이었다.

"덕개야."

"네."

"저어쪽에서 소금 하나만 좀 꺼내와라."

근데 닥칠 틈을 안 주시네. 덕개는 평소와 달리 찍소리도 내지 않은 채 순순히 마트 구석으로 갔다. 평소보다 미간이 2밀리 정도 좁아져 있는 마왕님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활화산 같았다. 젠장. 일 괜히 시작했어. 그는 소금이 있을 법한 곳을 뒤적이며 괜히 늦은 후회를 해 본다. 아니 이런 구멍가게에 무슨 히말라야 핑크 솔트밖에 없담? 박덕개는 딱 하나 남은 히말라야 핑크 솔트를 들고 털레털레 계산대로 돌아갔다.

"여기요 사장님."

"아 이거 비싼 거잖아. 딴 거 없어?"

"이거밖에 없던데요."

"하…. 됐다."

땅이 꺼질세라 한숨을 푹 쉰 마왕은 나름 고급스러워 보이는 통에 들어있는 소금 뚜껑을 땄다. 뭐지. 악마들은 간식으로 소금 퍼먹나? 덕개는 시답잖은 상상을 하며 가만히 멍을 때렸다. 딸랑. 소금 파티를 여는 악마들까지 생각이 뻗어있던 찰나, 사람 없던 슈퍼의 문이 열렸다.

"어, 어서 오세요!"

아 씨 혀 씹었어. 딴생각했다고 벌 받은 기분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되나보다. 그새 짧은 자아 성찰까지 마친 덕개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보인 마왕은….

"나가라 이 천사 자식아!"

손님에게 히말라야 핑크 솔트를 힘차게 뿌려대고 있었다……. 와중에 손님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쟁반을 가져다가 그 소금을 쳐내고 있었고. 혹시 이거 상황극인가요? 둘 중 하나를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영화 같은 광경을 보던 박덕개는 이것도 본인의 상상이 보여주는 환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소금으로 때리고, 피하고. 개판 5분 전인 작은 슈퍼 안에서 홀로 멀쩡히 서 있는 알바생 박덕개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음에도 오히려 비정상 같았다. 아아 신이시여. 용사가 천만 명씩이나 된다고 제 기도 하나쯤은 그냥 가볍게 무시해버리시는 겁니까. 바닥에 톡, 토독, 하고 부딪히는 초라한 소금 알갱이 떨어지는 소리를 가만히 듣던 덕개는 신을 원망하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방금 바닥 청소했는데. 정말이지 최악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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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개는 카운터에 덩그러니 남아 창문 너머로 밖에서 얘기하는 두 사람…, 아니 마왕과 천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곤 아까의 상황을 잠깐 회상했다. 소금 한 통을 손님한테 뿌리는 데 다 쓴 사장님이 이젠 카운터 옆에 꽂혀있던 별사탕까지 집어 들던 모습과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그것에 반격할 준비를 하던 손님을. 저, 저기 잠시만요! 끼어들면 뒤질 거라는 생각이 머리 끝까지 들었지만 이대로 두다간 이 작은 구멍가게 하나가 저 둘의 손에 싸그리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덕개는 발발 떨리는 손으로 열려 있는 출입문을 가리켰다. 두 분 싸우실 거면 나가서 싸우시면 안 될까요…? 소금으로 난리 나 있던 가게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이렇게 갑자기 진정할 줄은 몰랐는데. 박덕개는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이 어색해 식은땀을 흘렸다. 수락이든 거절이든 다 좋으니 누가 말 좀 해주세요. 슬슬 출입문을 가리키는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야. 나가자."

저리다 못해 굳을 지경이었던 박덕개 팔의 구원자는 마왕님이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박덕개는 속으로 울다시피 하며 마왕에게 여러 번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곤 밖으로 사라지는 둘을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죽일 듯 소금 전쟁을 벌이던 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게 밖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일단 한시름 놨나…? 오늘도 슈퍼의 평화를 지켜냈다. 세계 평화는 무슨. 용사로서 지켜야 될 건 슈퍼의 평화가 분명했다.

용사가 된 후 가장 큰 골칫거리는 감각이 예민해졌다는 것이었다. 작게 들리던 새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바람에 쓰레기 날아다니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잠을 푹 자본 것도 이젠 옛날 일이 되었고. 하지만 박덕개는 이 순간만큼은 저가 용사라는 것에 감사했다. 시한폭탄인 저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가게 안에서도 얼추 훔쳐 들을 수 있으니.

왜 여기까지 왔어. 이 꼴 된 거 구경하려고? 마왕은 아까보단 누그러진, 그러나 날 서 있는 목소리로 빨간 머리의 손님을 다그쳤다. 얼핏 들은 거지만…, 아까 사장님이 분명 그 손님보고 천사라고 했지. 마왕과 천사. 이 얼마나 전형적인 대립 구도인가? 박덕개는 그들의 대화에 마저 귀를 기울였다. 잠뜰님… 처분… 복귀…… 젠장. 아까보다 목소리가 작아져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빨간 머리의 손님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긴 말을 이어 나갔다.

쾅.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손님의 긴 말이 끝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덕개는 재빠르게 카운터를 박차고 나갔다. 무슨 일이…….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 그에 종잇장처럼 나부끼는 온갖 사물들. 덕개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 마왕님 개빡치셨다. 마왕의 옷은 화려한 꽃무늬로 가득하던 방금 전과 다르게 새카맣고 차분한 정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머리에 솟은 뿔. 어깻죽지에 달린 검은 날개. 온 세상의 악을 끌어안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받아냄에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어져 온다. 이게 마왕의 본모습이구나. 그 한마디를 끝으로 박덕개의 머릿속에 단 한 가지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 도망쳐.

"야. 넌 내가 이렇게 됐다고 만만하게 보이냐?"

"글쎄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멋대로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시 오라고? 옛날부터 생각한 건데 너네 돌아가는 꼴 진짜 이상해. 평등? 공정? 다 집어치워. 그거 다 허울 좋은 소리인 거 너네만 모른다고."

마왕의 손에서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검은 빛 덩어리가 뭉쳐졌다. 뭔진 잘 모르지만 예감이 안 좋았다. 저게 날아가면 이 일대가 초토화가 될 것이라는 확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왕이 제 힘을 내보이자 어느새 천사도 그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큰일 났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겼는데? 박덕개는 힘이 풀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애써 지탱했다. 저가 슈퍼의 평화만 지키면 되는 용사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세계 평화도 지켜야 하는 용사긴 한가보다. 덕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 세계의 멸망이냐 나 혼자만의 개죽음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압도적으로 이득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덕개는 마왕에게 굴려지며 나름의 발전을 이룩한, 하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힘을 전신에 둘렀다. 어차피 말려도 뒤지고 안 말려도 뒤질 거라면, 뭐라도 해보고 뒤지는 게 더 명예롭지 않겠는가? 덕개는 막 부닥치려는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잠깐만요!"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가라앉았다. 야 이 미친, 네가 거기 왜 끼어들어! 답지 않게 마왕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럼 님들 그대로 놔두고 세계 멸망 직관하라고요? 분명 박덕개는 이렇게 말대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가 목구멍 끝에서 막혔을 뿐. 점점 눈앞이 흐릿해져 왔다. 아 용사로 살기 개 빡세네. 사장님한테 시급 올려달라 해야겠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박덕개의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

 

_

"야. 야 일어나. 안 일어나는데? 제대로 힘 쓴 거 맞아?"

"그러게요. 보통 이쯤이면 일어나야 하는데. 용사 맞아요?"

"니네가 얘한테 용사 시켰잖아."

"아 그러네."

아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무심코 대답하던 박덕개는 섬찟한 기분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우리 덕개 죽다 살아났더니 간땡이도 부었나 보구나? 눈앞에 입꼬리를 한껏 올린, 하지만 어딘가 오싹한 분위기의 마왕이 보였다. 여기 혹시 지옥인가요? 눈 뜨자마자 보는 게 사장님이라니. 죽어서도 마왕과의 갑을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덕개가 절망했다.

"정신은 안 돌아온 거 같은데?"

"아까 어디 잘못 맞았나."

박덕개는 그제야 깨닫는다. 본인이 아주 잘, 사지 멀쩡히 살아있음을. 사장님 저 왜 살아있어요? 이게 살려내도 난리네. 마왕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얘한테 감사해. 얘 아니었으면 너 진짜 지옥에서 나 만났어. 가, 감사합니다…? 아직 모든 게 얼떨떨한 박덕개는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천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천사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 마왕에게 말을 걸었다. 잠뜰님 잠깐만 얘 좀 빌릴 수 있어요? 할 얘기가 있어서. 어라 저는 할 말 없는데. 박덕개는 이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갑작스럽게 천사를 마주한 것도, 그 천사 아녔으면 벌써 뒤지고도 남았을 거란 것도, 그리고 그 천사가 저와 단독 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까지. 사장님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박덕개는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마왕을 빤히 바라봤다. 부디 그가 제 속내를 알아채 주길 바라며.

"애한테 헛소리하기만 해 봐."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던 마왕이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덕개를 보냈다. 사장님 안 돼요. 이 무표정하고 무서운 천사한테 저를 맡긴다뇨. 덕개는 천사에게 질질 끌려가며 어느새 다시 꽃무늬 옷으로 돌아온,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마왕의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 덕개는 천사를 근처 카페로 안내했다. 천사도 커피를 먹고 사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입에 뭐라도 물고 있어야 좀 살 만할 것 같았다. 박덕개 이 불쌍한 것. 덕개는 언제나처럼 자신을 연민했다. 방금까지 죽다 살아났는데 세상이 그에게 단 한숨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라더라고 한다. 보시다시피 천사고."

"아, 어, 옙. 덕개예요."

바보 같은 통성명이 끝나자 불편한 정적이 찾아왔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나오는 편안한 카페 분위기와 달리, 덕개의 머릿속은 심히 어지러웠다. 긴장도 긴장이려니와, 정말 제 앞에 앉아 있는 존재가 일개 인간 운명 하나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천계에서 오신 귀한 몸이라는 게 믿기 지 않았기에. 무표정을 넘어 무감정해 보이는 천사는 덕개의 상상과는 달랐고, 그렇기에 두려우나 그에게는 언제나처럼 경외보단 호기심이 앞섰다. 쉬이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둥둥 떠다녔다. 왜 저를 용사로 만들었는지,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마왕과는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입이 쉬이 떨어지질 않는다. 갑자기 덕개의 머릿속에서 한 달간의 생고생들이 모조리 지나갔다. 덕개는 울컥하는 마음에 무심코 입을 뗐다.

"날 왜 용사로 만들었어요?"

왜 날 용사로 만들어서 이런 생고생을 시키냐고요. 정말 따지고 싶었던 뒷말은 꾹 삼켰다. 아까 마왕과 싸우던 상황을 보아, 천사라고 해서 인성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대체 누가 일개 고등학생에 불과한 자신을 용사로 만들었는지. 저 천계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했기에 이런 결정을 내렸을지가 궁금했다. 덕개는 여러 가지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라더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냥?"

그냥? 그냐앙? 라더의 싱거운 대답에 힘이 쭉 빠진다. 이어진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마왕이 대충 대한민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걸로 추정은 되는데, 정확한 위치가 잡히질 않으니 용사를 랜덤으로 한 천만 명쯤 뽑아 놓으면 그중 하나는 분명 접점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였댄다. 그럼 왜 문자는 그따구로 보낸 거냐 물었더니, 21세기 대한민국에 핸드폰 안 갖고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받는 것 같은 문자 형식대로 보냈단다. 그러니까 애초에 한 놈만 걸려라 식으로 이 사단을 벌였다는 말이군. 난 재수 없게도 거기에 걸려버린 거고. '너 완전 레디메이드 용사구나?' 이전, 마왕이 저를 놀리듯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박덕개 속에서 열불이 끓었다. 마왕 말이 맞았다. 나는, 용사는 레디메이드 제품에 불과할 뿐이었다.

라더는 그런 덕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음료수 더 없냐 요구해오기나 했다. 네에. 천사님께서 원하신다면야. 덕개는 새로 시킨 음료를 라더에게 건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천사라는 말뜻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천사는 무슨. 깡패 자식들임이 분명했다. 현타 온 덕개가 더 이상 말이 없자 이번에는 라더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잠뜰님을 설득해주길 바란다."

"설득…, 이요?"

갑작스레 튀어 나온 천사의 진지한 부탁에 어색한 기분이 든다. 라더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어서 말했다. 아까 잠뜰님이 본모습을 보였을 때, 날개 봤지? 그 말에 덕개는 눈을 감기 전의 마왕을 떠올렸다. 처음 살기를 느꼈을 때만큼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기운. 그 거대한 기운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자신. 그 사이의 마왕은 검었고, 어두웠다. 그리고 그의 날개는…, 분명 왼쪽이 반밖에 안 남아있었지.

잠뜰님은 천계의 죄인이다. 그 날개는 천계에서 추방당할 때 불타 그리 된 거고. 박덕개는 혼란스러웠다. 죄인이라니. 사장님이? 그보다 천계에서 추방당했다는 건…….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건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있는 덕개에게 라더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사장님이 사실 천사였고, 죄를 지어 추방당했다는 것. 추방당한 사장님이 마계로 내려가 스스로 모든 악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를 추방한 신이 이제는 죄인의 복귀를 명령하고 있다는 것을. 박덕개에게는 채 정리되지 않을 만큼의 충격적인 사실들을 라더는 아무렇지 않게 턱턱 내뱉었다.

"잠깐, 잠깐만요. 그러니까 라더… 님의 말은 제가 사장님이 천계로 돌아갈 마음을 먹도록 설득하라는 건가요?"

라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게 천계에서 용사를 만든 이유이자, 용사의 사명이라고. 사명 좋아하시네. 덕개는 조소했다. 사람 의지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멋대로 용사로 만들더니, 이젠 멋대로 저에게 사명이랍시고 임무를 부여하는 꼴이 웃겨서. 덕개는 가까스로 화를 참아내며 말했다. 전 못해요. 설득하다 누구 죽어 나갈 일 있나? 게다가 아까 마왕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그는 두 번 다시는 제가 떨어져 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함이 분명해 보였다. 애초에 위대하신 천사님도 못 한 걸 한낱 인간인 제가 어떻게 하냐고요. 덕개는 온 힘을 다해 라더에게 따졌다. 라더에게는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할 수 있다."

라더는 처음과 한 치 달라짐 없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 속 터지는 꼴을 보며 박덕개는 생각한다. 얘 지금 자기 일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 아냐? 의심스러움을 차마 감출 수 없는 덕개를 빤히 보던 라더는 말을 더 잇는 대신 덕개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니, 마왕이고 천사고 왜 이렇게 남 손목부터 붙잡고 보는 건지. 아무 말도 없이 덕개의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대던 라더는 대뜸 한 부분을 짚었다. 이거 보이지? 라더의 손이 가리킨 곳엔 웬 못 보던 문양 하나가 있었다. 검정 잉크가 튄 듯한 작은 자국. 뭐지. 나 죽었다 깨어난 사이에 누가 타투라도 했나? 덕개는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검은 자국을 응시했다.

"마왕이 너와 계약을 맺었다. 네가 마왕에게 쓸 수 있는 소원권을 부여받는 내용으로. 계약자가 마왕에 증인이 천사이니 깨질 수 있는 계약도 아니고."

예? 소원권이요? 금시초문인 라더의 말에 덕개는 또다시 얼탄 표정을 짓는다. 정신 잃고 좀 누워 있었더니, 제삼자들이 제 몸에 별별 짓을 다 해놓은 모양이었다. 근데 사장님은 왜 순순히 소원권을 내놓은 거지? 천사가 계약을 보증했다는 건 또 무슨 소리고? 조막만 한 머리통에 과부하가 왔다. 어쩌다 계약이 된 건지 라더에게 물어봐도 그는 답하기를 꺼리는 것마냥 일부러 주제를 돌렸기에 경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덕개는 차라리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마왕의 소원권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덕개 입장에서 손해 본 건 없는 듯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그거 대가 후불제다. 큰 거 바라면 대가도 큰 법이니까 허튼 거 빌 생각하지 말고."

아 넵. 운 좋게 당첨된 공짜 로또 쯤이라 생각했는데, 이럴거면 왜 당사자 동의도 없이 막 체결하냐구요. 괜히 눈치 보여 입 밖으로 투정부리지 못 한 덕개는 속으로나마 툴툴대본다. 가뿐하게 세계정복 쯤 빌어볼까 하던 아까의 욕망은 조용히 사그라든 지 오래이다.. 옛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역시 제 분수에 맞게 사는 게 최고였다. 라더는 덕개의 현란한 표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하곤 입을 뗐다.

"뭐, 우리 쪽이야 이득이지만. 사실 계약까지 갈 게 있나 싶긴 했지. 어차피 네 부탁이면 들어줬을 게 뻔하니."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왜 사장님이 제 말을 들어줄 거라 확신하세요?"

그거야, 잠뜰님은 인간에게 약하니까. 박덕개 오늘 어이 털릴 일 많네. 덕개는 입을 떡 벌렸다. 오늘 들었던 충격적인 소리들 중 단연 최상을 달리는 말이었다. 사장님이 약하다고요? 인간한테? 하하, 농담도. 저한테 하는 꼴을 보시면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마왕에게 먼지 나도록 털렸던 지난 날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몇 번은 정말 죽을뻔했고. 그런 마왕이 인간에게 약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보다 더한 말이 아니던가?

라더는 말을 이었다. 하긴, 마왕이 인간을 지극히도 아꼈다는 게 믿기지 않겠지. 하지만 사실이다. 잠뜰님은 여타 천사들과 달리 인간과 가까웠고, 친했으며, 그들에게 깊숙이 녹아들고자 했으니. 덕개는 저가 잘 모르는 마왕의 과거가 새로웠다. 마왕 앞에서 과거의 얘기는 금기인 것이나 가까웠으니까.

덕개는 곰곰이 생각했다. 소원권을 씀에 따라올 평화와 하늘로 되돌아갈 타락한 선을. 그리고, 왜 마왕이 제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그토록 싫어할까에 대한 답을. 그걸 사장님한테 직접 여쭤보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지. 마왕 자신이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한 본인의 과거를 한낱 인간이 속속들이 알아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소원 계약이고 나발이고 덕개가 먼저 죽어 나갈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라고, 덕개는 간접적으로나마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저….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나요?"

라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개는 망설이듯 조심히 제 호기심을 털어놓았다.

"사장님은…, 어떤 죄를 지으신 건가요?"

덕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큰 죄를 지었길래 그들의 세계에서 추방당하고 날개가 불탈 정도의 고행을 겪어 살아온 건지. 마왕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게 아닌가 함에 왠지 오싹해졌지만서도, 덕개는 라더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이때가 아니면 영영 알 수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라더는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답했다. 언제나처럼 무감정한 투의 한마디였다.

"감정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그분의 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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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얘기를 했길래 이렇게 늦게 와."

마왕은 투덜거리며 입을 내밀었다. 평소같이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이는데도 덕개는 왠지 모르게 마왕이 평소보다 힘 빠져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까의 대화를 캐물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마왕은 그 말 이후 더는 묻는 것이 없었다. 덕개만 괜히 혼자 찔려 답을 내뱉었다.

"라더님은 아까 떠났어요. 배웅하느라 좀 늦었네요."

"앞으로도 오지 말라 그래 그거."

그렇게 말한 마왕은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그 천진한 모습이 이젠 곧이곧대로만은 보이지 않았다. 덕개의 품 안에는 아까 라더에게서 받은 책 한 권이 있었다. 죄인 잠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적혀있다는 천계의 기록. 유출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물어봤더니 하늘은 용사의 편이라 괜찮다더라. 라더를 보낸 덕개는 그 자리에서 빠르게 책을 훑었다. 천사란 누구보다 공정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그들에게 금기되는 감정. 그러나 인간을 아낀 나머지 감히 그것을 어기고 감정을 알게 된 천사. 그렇기에 인간을 더더욱 놓지 못했고, 종국엔 그들의 운명을 바꾸는 데 일조한 한 천사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괜히 알았어. 덕개는 탄식하며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이런 걸 읽으면, 악에 이입할 수밖에 없잖아. 어쩐지 서러워졌다. 그는 필히 선의 편에 서야 하는 용사였기에.

입에 아이스크림을 문 마왕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덕개도 그를 따라 옆자리에 앉았다. 여름 날씨 때문인지 공기가 텁텁했다. 자리에 앉기 전, 자연스럽게 마왕이 건네준 아이스크림 봉지를 뜯은 박덕개는 고민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볼 지, 혹은 그냥 내버려 둘지를.

"사장님."

"왜."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그러던가."

마왕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무심하게 답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덕개는 숨을 들이켰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질러본 건데. 일단 한숨 놓았다. 저번처럼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던가, 하며 살기가 형형한 눈빛으로 쏘아보면 어떡하나 했었는데. 살짝 얼빠진 듯한 오늘의 마왕님은 어딘가 누그러져 보였다. 덕개는 침을 꿀꺽 삼키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건 도박이다. 방금 살아난 내 목숨줄을 건 도박. 아직 본론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입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가장 처음 느꼈던 감정이 뭔지, 기억해요?"

마왕은 답이 없었다. 덕개도 그를 따라 입을 다물었다. 어떡하지. 대판 깨질 걸 각오하고 건넨 물음인데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답을 들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다지 큰 기대는 없었다. 마왕은 과거 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덕개는 구태여 용의 역린을 더 파헤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그저, 그런 질문을 하고도 아직 목이 붙어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마왕은 여즉 말이 없었다. 둘 사이에 늦여름 바람에 누가 먹다 버렸을지 모를 과자봉지 채는 소리만이 부스럭거리며 들려왔다.

"까먹었어."

마왕은 두 눈만 끔뻑거리다 어깨를 으쓱하곤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곤 느릿한 몸짓으로 냉동고에서 새 아이스크림을 다시 꺼내 입에 물었다. 그 일련의 행위를 지켜보던 박덕개는 짧게 답했다. 그렇군요. 박덕개는 마왕을 뒤로하곤 밀린 창고 정리를 하겠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였으면 대답이 너무 성의 없다며 투정이라도 부려봤을 텐데, 덕개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마왕은 분명 서글퍼 보였다. 멍때리는 듯했던 그 시선의 끝엔 박덕개와 함께 지내는 현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덕개는 그 눈을 마주함에 느껴지는 어색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과거의… 그리운 어떤 것을 좇는 듯한… 그런 애달픈 눈을.

"말도 안 돼."

나 지금 불쌍해한 거야? 저 무시무시한 마왕을?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이거 원, 누가 누구를 불쌍해하는 건지. 덕개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연민은 가진 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감정을 적선하는 행위. 내 여유분을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그 행위가 가히 자선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때문에 분명 박덕개는 일평생 자신을 제외한 남을 연민할 일 없이 살 이였다. 그의 일상에는 여유가 있을 리 없었고, 그렇다고 누군가의 위에 군림할 수 있을 위인은 더욱 아니었기에. 그렇다면, 명백한 을의 위치인 자가 갑을 연민하는 것은…. 모두를 평정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그의 안이 사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있었음을 언젠가 눈치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덕개는 천계의 기록이라는 책 사이에 끼워진 쪽지를 펼쳤다. '9월 9일 20시'. 그때까지 마왕을 돌려보내겠단 선택을 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그를 데리고 갈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는 라더의 마지막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덕개의 소원으로 마왕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감이 모두에게 이로울 것임은 분명하다. 강제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전투로 인한 불필요한 피해는 없어지고, 선을 주관하고 있는 신은 만족할 것이며, 대악이 귀속된 세상은 평화로울 테니. 라더는 그 쪽지를 쥐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용사의 역할이자 의무이며 희생 없이 모두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하지만 박덕개는 그 모든 이득을 뒤로하고 한 가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럼 사장님의 행복은 누가 지켜주는 거지?

깔끔히 닦이지 않은 유리창 너머로 의자에 앉아있는 마왕이 보인다. 아까까지 세계 하나쯤 날려버릴 것처럼 난리를 치던 게 무색하게 마왕은 본인이 떨어져 내려온 푸른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다. 꼴 보기도 싫다고 바락바락 외쳤으면서. 그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듯한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히 미천한 인간은 알 수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꼴을 본 박덕개는 대신 울고 싶어졌다. 정작 마왕의 표정은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주제넘게도 연민하는 것 같다. 모든 악의 지배자이자 추락한 선의 대리인을. 쥐가 호랑이를 동정하는 격이라, 몇 번씩을 그리 되뇌는데도 기록의 구절들이 눈앞에 붕붕 맴돈다. 웃기는 짓이다. 신이 멋대로 만든, 이름뿐인 용사 박덕개는 저와 함께 지내는 무시무시한 사장의 손짓 한 번이면 그 자리에서 재가 될 게 뻔한 한낱 인간에 불과할 뿐인데도, 그를 동정하다니.

어휴 먼지 봐. 애써 마왕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가게 창고로 들어간 박덕개는 이곳저곳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을 묵묵히 집어 든다. 여긴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니까. 시답잖은 말을 중얼거리며 물건을 정리하던 그는 무심코 아까의 적막을 회상했다. 그리곤 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사장님은 바보예요. 거짓말 완전 못하는데, 본인만 몰라. 기껏 진정시킨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_

덕개는 그날 이후로 마왕을 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약속한 날이 가까워질수록 마왕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거북해지기까지 했다. 마왕의 존재를 없애라는, 용사로서의 사명. 분명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일 텐데도 사악한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라더의 말이 맞다. 설령 소원이라는 억지 매개체가 없더라도, 덕개가 잠뜰에게 인간을 위해 마왕을 그만두고 돌아가 달라 읍소하면 분노 끝에 정을 둔 마왕님은 못 이긴 척 천계로의 귀환을 고민할 테니.

하지만 덕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떻게 그를 기쁨도 슬픔도 없는 공간으로 밀어 넣겠는가. 어떻게 그에게서 다시 감정을 앗아가겠는가. 그렇게도 웃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에게서…. 한참을 고뇌하다 보니 어느새 결전 전야였다. 덕개는 생각했다. 본인이 버린 사자를 돌려놓으려는 신은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든 악의 지배자가 사라진 세상의 악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애초에 선과 악의 구분은 누가 정한 것인지를.

한참을 생각하던 덕개는 핸드폰을 켰다. 생각도 많이 안 하고 살던 인간이 철학적인 고찰을 하자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가만히 폰을 보던 덕개는 무심코 레디메이드를 검색했다. 화면을 꽉 메우는 '기성품'이라는 단어 사이로 한 글이 보였다. 레디메이드-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작품이 된 기성품. 덕개의 머릿속에 잔뜩 끼어 있던 안개가 확 걷힌다. 레디메이드, 그것은 그저 하나의 기성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성품임과 동시에 선택과 의미 부여에 의해 새롭게 탄생하는 예술 작품. 덕개는 그 글을 가만히 바라보다 마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음이 몇 번 가자 스피커 너머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 같이 있었는데도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먹먹한 그의 목소리가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덕개는 겨우겨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꺼냈다. 사장님 전데요.

"있잖아요."

"말해."

"라더님한테 들었어요. 그…, 저한테 소원권이 있다고."

마왕은 말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마왕을 뒤로하고 덕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거 정말 뭐든 다 들어주실 거예요? 수화기 너머는 여전히 조용했다. 덕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마왕의 답을 기다렸다.

"계약이니까."

"정말요?"

"그렇다니까."

"…정말 어려운 부탁이어도 상관없어요?"

"왜, 세계정복이라도 하고 싶어서?"

마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계정복이든 뭐든 대가만 제대로 치러진다면 상관없으니 말하기나 하라고. 근데 자긴 비싼 몸이니, 대가는 단단히 각오해야 할거라며 장난스레 겁을 준다. 마왕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덧붙여 물었다. 모르는 사람 다섯 죽는 거에도 기겁하며 혼절할 것 같은 놈이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그러냔다. 덕개는 내일 만나서 말씀드리겠다 말하곤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혹시라도 제가 쓸 소원을 들킬까 봐. 핸드폰을 멀리 치운 덕개는 제 팔에 새겨진 검은 자국을 한참 바라보았다.

무언가의 결심이 선 듯한 결연한 얼굴로.

_

약속의 날, 덕개는 익숙한 공터에 도착했다. 여름이라 그런지 시간이 늦었는데도 아직 해가 산 너머에 걸려있었다. 황량한 공터를 꽉 메운 저녁노을 사이로 마왕과 천사가 보였다. 아직 약속 시간은 멀었는데. 덕개가 일찍 나온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약속 장소에 와 있는 그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던 걸까. 저 둘 사이에 무엇이 오간 걸까. 당사자를 쏙 빼놓고 결정한 일방정 계약의 주체는 과연 용사가 맞긴 한 거였을까…. 덕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들의 수많은 시간을 상상하며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덕개는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잠뜰의 앞에 서게 되었다.

"사장님."

덕개는 드디어 잠뜰의 눈을 마주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 하지만 분명 그의 눈 속에는 여러 감정이 얽혀 있었다. 슬픔, 불안, 분노, 후련함…. 어쩌면 그것들은 거짓말로 얼버무려졌던 이전 질문에 대한 진짜 답변일지도 모른다. 덕개는 깊은 눈 속 묵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잠뜰은, 덕개가 생각하기에 마치 이송을 기다리는 죄인과도 같았다. 마치 덕개가 무슨 말을 할지 모든 계산을 끝냈다는 것처럼. 그래서 제게 닥쳐올 미래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는 애초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라더가 덕개에게 한 제안도, 덕개가 그의 과거를 모조리 알아버렸다는 것도. 제아무리 용사라지만 결국 인간에 불과한 덕개의 감각이 그렇게 좋은데 마왕이라는 존재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테니. 박덕개는 숨을 크게 들이쉬곤 손목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소원권, 지금 쓸게요. 잠뜰의 표정은 한 치 달라짐이 없었다. 기꺼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마냥.

"…가지 마세요."

잠뜰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람, 당황, 의문, 그리고… 찰나의 안도. 잠뜰의 얼굴에 가지각색의 감정이 스치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너…,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덕개는 그런 잠뜰의 말을 끊고 토해내듯 내뱉었다.

"알아요. 나도 다 안다고. 내가 사장님을 여기 묶어둠에 따라올 위험도 알고, 하늘이 제멋대로 만든 용사인 내가 짊어진 책임도 알아요. 이게 하늘에 대한 배신인 것도 알고, 작게는 이 동네가, 자칫하면 이 세상이 통째로 날아갈 수 있는 것도 알고 있다고요."

근데…. 그 모든 걸 아는데도 차마 못 돌려보내겠는데 어떡하라고. 말을 끝맺은 덕개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잠뜰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대신 덕개는 주먹을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덕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사장님. 그냥 저랑 여기서 평생 같이 슈퍼 일해요. 내가 제일 원하는 게 그거니까."

덕개는 손목을 부여잡고 말했다. 검은 자국 밑으로 어느 때보다 빠른 맥박이 느껴진다. 사장, 아니 마왕 잠뜰이 천계로 돌아가지 않게 해주세요. 어떻게 써야 되는지도 들은 바가 없어 횡설수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손목이 뜨거워지며 문양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고개를 들자 그런 자신을 응시하는 잠뜰이 보였다.

"…그대의 소원, 접수되었다."

검은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았던 전과 달리 편안하고 따뜻하기까지 한 빛이었다. 어둠이 사라진 후, 잠뜰은 제 입술을 깨물곤 바들바들 떨더니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이 멍청아. 소원이 아니라도 들어줄 수 있단 말야, 그런 건. 아무래도 울고 싶은 건 저뿐이 아니었나 보다. 한참을 감정을 추스르던 잠뜰은 작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원래의 말끔한 상태로 돌아왔다.

덕개는 잠뜰에게서 몸을 돌려 라더에게 외쳤다. 이게 용사로서의 내 선택이고, 내가 빈 소원이라고. 언제나처럼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이 모든 걸 담담히 지켜보던 라더는 덕개를 가리켜 말한다. 사욕에 눈이 멀어 대의를 저버리는 멍청한 인간이라고.

"그것이 너의 선택이라면."

그는 어느새 빛나는 검을 꺼내 겨누고 있었다. 잠뜰과 덕개도 그에 맞서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했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고요함. 그 속에서 덕개는 생각한다. 사욕에 눈이 먼 멍청한 인간이면 어떠랴. 인간은 본래 그러한 동물인데. 감정이 있기에 누군가를 아낄 수 있고, 감정이 있기에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라는 족속에게 사명만으로 이 모든 걸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건, 확실히 감정이 없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안일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덕개의 눈에 인간과 같이 감정을 아는 또 다른 존재가 들어온다. 평소와 달리 끝없는 어둠을 머금은 잠뜰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사장님도 긴장되는 거였어. 그는 아마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제 목숨은 고사하고도, 과거에 선이었던 존재와 현재의 선이라고 불리우는 존재들의 충돌에 잿가루가 되어 날아갈 이 세상을. 진짜 마음 여린 게 누군데. 덕개는 제가 알게 된 마왕의 특이점에 하나를 더 덧붙인다. 마왕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명을 단 존재치고 잠뜰은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덕개는 잠뜰에게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천사들은 원래 저렇게 싸가지가 없어요? 공기조차 날 서 있는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는 장난스러운 질문이었다. 분위기 파악 못 한다며 한바탕 깨질 각오를 하고 꺼낸 말이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냈지, 긴장과 진중함은 마왕 잠뜰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은 잠뜰의 눈이 땡그래졌다. 하하! 예상과 달리 그에게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원전까지 다 뒤져도 천사보고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잠뜰은 웃었다. 이전, 덕개가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용사임을 알고 바닥에 구를 정도로 웃어댔던 그날처럼. 그래서 덕개도 따라 웃었다. 심각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그들 사이엔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는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행복에 칼을 겨누고 있는 저 무감정한 천사는 아마 평생토록 이해하지 못할 축복이리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신성한 빛에 대적하며 덕개는 생각한다. 세상이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 웃음을 지켜내 다행이라고.

돌아가지 말라는 애원. 이것은 기성품에 불과했던 용사 박덕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온전한 제 선택이었다. 정의를 새롭게 정의한 용사는 자신의 선택으로 레디메이드가 된다.

비로소, 진정한 영웅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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