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마음의 잔해
창천의 이슈가르드 및 용기사 잡 퀘스트 스포일러 주의
2019. 06. 06 최초 작성
2023. 12. 14 포스타입에서 옮김
파이널판타지14 팬픽션
현대 AU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포일러
용기사 잡 퀘스트 스포일러
전편 이젤과 에스티니앙이 진짜로 친구인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거주지역, 구름안개 지구를 통과하는 버스는 붉은색이다. 이름 그대로 구름이며 안개가 자주 끼는 낮은 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런 색을 썼다. 이젤과 에스티니앙은 이 버스를 자주 이용했다. 이젤이 가끔 공연하는 펍에 가거나 캔버스와 붓 따위를 사러 갈 때, 혹은 공공기관에 들를 일이 있을 때 등등. 버스 토큰은 하루 단위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어 둘은 많은 일정을 한번에 몰아서 처리하곤 했다.
언젠가 에스티니앙이 불면증을 앓았던 적이 있다. 입학보다는 졸업이 가까웠던 어느 시기에. 그때 에스티니앙은 그답지 않게 꽤 짧은 주기로 버스를 이용하곤 했다. 딱히 할 일이 있거나 갈 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더는 못 버틸 것 같을 때 그런 선택을 했다. 평일 하루 날을 잡아서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시내를 도는 순환 버스 구석에 앉아 가만히 잠을 청하곤 했었다.
이젤이 에스티니앙의 그런 습관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느 날 급한 일이 있어 버스를 탔고, 그곳에 에스티니앙이 있었고, 그날 에스티니앙에게 어떤 일정도 없다는 것을 이젤은 당연히 알았고, 애초에 에스티니앙을 병원에 데려간 게 이젤이었고, 뭐 그런 얘기다. 약도 소용없는 꽤 심각한 불면증이었다. 그렇게라도 잠을 잘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이 버스, 우범지역을 지나는 버스였다는 게 문제다.
왜 하필 이 노선을 선택한 거지? 대학을 지나는 경로를 이용해 아예 반대로 도는 순환 노선도 있었다. 그쪽이 훨씬 안전할 텐데. 그 방면에 에스티니앙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게 있던가. 있는 거라고 해봤자 루키아의 아파트, 에스티니앙의 본가, 학교, 보석홀장 거리, 경찰청, 보렐 가 저택으로 돌아갔다던 아이메리크 정도인데. 에스티니앙이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해하진 않았으므로 보석홀장이나 경찰청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본가나 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오.
얼마 전 루키아와 아이메리크의 약혼식이 있었다. 가엾은 녀석. 이젤은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에스티니앙의 옆자리에 앉으며 이젤은 생각했다. 에스티니앙은 진심으로 피곤한 표정이었다. 잠들어 있는데도 그랬다. 창문에 기대어 있는 모습조차 불편해 보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젤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라던 어느 책의 구절이 떠오른다. 사랑이 인간만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역시 한때 거쳐왔고 또 거쳐 갈 일이므로 이젤은 같은 병을 앓게 된 에스티니앙의 옆에 그저 묵묵히 있어주기로 했다. 한때 에스티니앙이 그에게 해주었듯이.
버스가 정해진 트랙을 도는 동안 이젤은 잠든 에스티니앙의 곁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조용히 그를 기다리곤 했다. 이따금 그가 제 어깨에 기대게 하거나 이어폰 한쪽을 그의 귀에 끼워주기도 하면서. 숙면에 도움이 되는 음악이라나 뭐라나. 불면증을 앓게 된 이후로 작은 소음에도 깨곤 하는 그였기 때문에 처음엔 조심스러웠으나 이때만큼은 뭘 해도 깨지 않는다는, 아니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스스럼없이 음악을 공유했었다. 기껏해야 2~3시간 남짓의 휴식이다. 질이라도 높았으면 하는 게 이젤의 바람이었다. 안타깝게도 간혹 끙끙 앓거나 식은땀을 흘리던 것으로 봐선 그다지 편안하지 못한 휴식이었던 모양이지만.
그때는 봄이 여름을 향해 가는 시점이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비가 자주 내렸다. 쏟아지는 일은 드물고 점점이 바닥을 적시거나 추적추적 내리거나 하는 정도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우울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날도 비가 왔었다. 차창에 내리려던 빗방울이 버스의 속도에 토도도독, 파이 밑면의 포크 자국처럼 부서진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자국이 여러 개. 그나마 힘껏 남겼을 자욱조차 뒤를 잇는 빗줄기에 쓸려 내려갔다. 간만에 내리는 비다운 비였다. 금속 지붕에 고였다가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빗줄기들이 쏟아내지 못한 눈물 같았다. 마음을 죽이지 못해 그것이 몸으로 드러나는 것인지, 죽은 마음의 잔해가 몸으로 표현되는 것인지 모르게 에스티니앙은 일주일째 앓고 있었다. 미열이 가시질 않는다. 이젤은 그저, 가만히, 에스티니앙의 손을 잡아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따뜻한 치킨 수프를 끓여 먹자고 속삭였다. 그다음에 약을 먹고 푹 쉬면 나을 거라고. 잘 수 없는 마음도 얼른 졌으면 좋겠다고, 이젤은 생각했다. 열흘 붉은 꽃 없듯 이룰 수 없는 사랑도 그리 빨리 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젤은 한때 자신이 앓았던 열병을 떠올렸다.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우리 둘 다 사람이어서 이렇게 되어버렸네. 이젤은 앞을 향해 가는 버스에서 침묵으로 그를 위로하며 앉아 있었다. 오래도록.
결혼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에스티니앙은 편의점에 들러 술을 차곡차곡 쌓았다. 도수 높은 증류주 몇 병, 맥주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마시고 죽게? 하며 그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이젤이 속 버린다며 마른안주를 몇 봉 집었다.
"대학생 때, 아이메리크를 좋아했었어."
"그걸 지금 나를 만난지 12년 만에야 말하는 거냐? 대체 누가 얼음심장이라는 건지. 아니지, 이런 경우엔 강철 혀라 해야 하나."
"시끄러워. 그 녀석..."
딱히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던지 에스티니앙은 그저 술 몇 모금만 넘긴다. 한참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오대양 육대주 중에서도 에오르제아라는 대륙에 이슈가르드라는 국가가 있다고 하자. 그 안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주인 커르다스 주에 이슈가르드의 수도, 성도 할로네가 있다. 할로네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 고로 중앙에 위치한 성 앙달림 대학을 중심으로 7개의 지구로 쪼개진다. 이 도시는 계획도시이므로 각 지구는 그를 관통하는 대로의 이름을 지구의 이름으로도 쓰게 된다. 개중에 상업지구라고 불릴만한 곳이 있다. 제6지구, 보석홀장 거리. 빛 뒤에 그림자가 있듯 화려함의 이면엔 가난함이 있다. 보석홀장의 뒷면을 거미줄처럼 엮어낸 빈민가. 빈곤한 자들의 성지. 그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모르며 형제도 없다. 그저 누군가의 선의와 동정에 기대어 자라났고 재빨리 제 몫을 해야 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 버려진 물감의 뒤를 터 말라비틀어진 가루를 물에 개어 바닥이며 벽면에 칠하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는 어떤 아이가,
그래, 그런 아이가 있다고 치자. 그래서 언제나처럼 소매치기를 나서야 했다고 하자. 지갑을 훔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주인에게 들켜버렸고 그 주인은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자. 오히려 아이의 손톱 밑을 잔뜩 물들게 한 잿빛 코발트 블루의 잔해를 보고 아이를 입양했다고 하자. 땟국물과 먼지에 뒤덮여 코빼기만큼도 물감처럼 보이지 않았던 그것에서 어떻게 창공의 푸른 기를 발견했는지, 그건 아마도 그가 한때 이슈가르드에서 최고의 화가로 불리웠던 알베리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치자. 한 줌 재능이 훌륭한 스승 밑에서 꽃을 피웠고 그것이 이 아이, 에스티니앙의 별볼일 없는 일대기쯤 되리라.
예술가들은 다 그렇지만, 화가에게도 재능이란 있어도 있어도 부족한 것이다. 알베리크가 붓을 놓은 것도 아마 그런 종류의 내면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알베리크는 에스티니앙이 그림을 즐기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화가로 성장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운명이 일하는 방식이 흔히 그렇듯 아이에게도 결국 호기심이 찾아왔던 것이다. 알베리크가 그리는 방식을 아이는 서툴지만 본질만은 정확하게 따라 했다. 하나만 가르쳐본다는 것이 최소한만, 조금만 더, 기본기까지만, 그렇게 늘어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아이는 그림을 사랑했다. 알베리크는 아이를 사랑했다. 알베리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많았다. 좋은 집, 따뜻한 목욕물과 부드러운 빵, 일상복과 잠옷의 구분, 파란 시트가 덮인 어린이 침대, 문학 전집 같은 것들. 그러나 아이가 원하는 것,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알베리크의 그림. 그래서 알베리크는 그것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거네. 뭐, 지금은 아니면 됐지. 말 꺼낸 거 보면 얘기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다 털어버려. 언제부터였는데?"
"첫 학기 끝날 무렵."
"본인도 알고?"
"알아."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약점을 약점으로 만드는 어떤 감정이 있다. 어린 에스티니앙에게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그리하여 아이가 알베리크에게 입양되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기쁨도 안도도 아닌, 그 더러운 골목에서 혼자 살아 나왔다는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그곳은 가난한 자들의 요람이자 무덤이었으므로 마땅히 에스티니앙도 죽을 때까지 그곳에 속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그러나 그만은 이렇게 살아 나오게 되지 않았던가. 그것이 오래도록 그 아이의 뒤를,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아이의 아홉 번째 해부터 열여섯 번째 해까지, 아이는 알베리크와 함께 했다. 그는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실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법. 알베리크가 끝내 실패했던 바로 그것.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알베리크는 말했다.
'너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가니, 내 지난 삶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의 답은 '아버지'였다. 알베리크도 아저씨도 아닌, 아버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이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마치 지금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꼭 들어맞는 마지막 답을 내놓았다. 알베리크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이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끝으로 숨을 내쉬고, 평온하게 삶 너머로 건너갔다. 한 아버지로서.
알베리크의 사후에서야 아이는 그 가르침을 깨우칠 수 있었다. 알베리크의 흔적들, 알베리크와 함께했던 기억들을 상자에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아이는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고자 했던 어떤 좋은 것, 에스티니앙을 비로소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알베리크 최후의 역작으로서 그에 걸맞게 빛나고 행복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그가 살아있을 때 그런 다짐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괜찮았다. 알베리크는 하늘에서 아이의 성장을 기쁘게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에스티니앙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는, 아이메리크를 만났다.
"...나보다도 먼저 알았던 것 같아."
"그런데도 같이 살자고 했어? 그 녀석도 대단하네."
"나를 믿었다기보다는 그냥 어떻게 돼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이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그 녀석, 그때는 자기비하적인 면이 있었어. 아버지, 그러니까 친아버지 말인데. 공공연한 비밀이니 너도 알겠지. 그 인간 때문에."
이슈가르드에는 거물 정치인이 있었다. 늙고 노련한, 그리고 아마도 아이는 얻을 수 없을 것이라던 어떤 정치가가. 그러나 이 무슨 날달의 장난인지 하룻밤 외도에 아이가 생겼다.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아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이 이슈가르드를 완성할 아이. 그러나 떳떳한 아이도 아니었고 지금의 위상을 손에 넣기 위해 정략혼을 치렀던 명망 높은 가문의 아내 역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다. 그는 보렐 가의 품에 아이를 맡기고 조용히 기다렸다. 오쉬온이 아내의 시간을 거두어가기까지.
아이에게는 아마도 유일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보렐 부부는 따뜻하고 자상한 이들이었고 아이를 정성 들여 키웠다. 따뜻한 벽난로와 안락한 흔들의자 앞에서 조용한 저녁 기도와 함께 자라난 아이는 맑고 건강했다. 훗날 아이는 옳고 그름과 도덕과 윤리는 모두 그곳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사정이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그의 아래서 어떤 괴물로 자랐을지 두렵다고도 말했다. 그 일곱 해가 그의 시간에서 가장 행복했다고도, 더는 그런 행복은 없을 것만 같다고도.
아이는 빠르게 순종을 배웠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힘과 상황 앞에서 침묵하며 체념하는 법도. 매일 밤 기도를 올리며 신을 찾았으나 응답받은 적은 없었다. 그리하면 신을 버릴 법도 한데 아이는 그저 인내하며 기다렸다. 나날이 깊어지는 지식과 이상, 그 이면에 믿음이 있었다. 식탁에서 채소를 골라 버린 적은 없었지만 배우는 것들 중에서 썩어빠진 것은 몰래 골라 버렸다.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의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엔 막연한 희망을 간직했다. 유년기에 그의 양부모가 남겨주려 했던 어떤 단단함은 아이의 안에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말이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아이는 한 번도 집밖에 나와본 적이 없었다. 유명 대학의 학위까지 홈스쿨링으로 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아마 그때가 첫 외유였을 것이다. 조그마한 자유에 숨통 트이기엔 마음의 너무 많은 부분이 이미 검게 말라죽은 뒤였다. 자신에게 실패란 것이 허용되기는 하는지, 도전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희망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다못해 그에겐 위험에 빠질 자유마저 없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어두운 뒷골목을 돌아다녀도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시선과 보호와, 감시가, 있었다.
"그때의 아이메리크는 위태롭고, 위험했고,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았어."
"전혀 몰랐네. 낮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완벽주의자니까. ...그래야 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에스티니앙과 아이메리크는 미술사 교양 수업에서 만났다. 알베리크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소소하게 그리웠던 에스티니앙은 역대 화가들의 계보를 짚어 내려가며 양아버지를 그리고자 했고 아이메리크는 예술에서 나름의 위안을 찾고자 했던 모양이다.
에스티니앙은 아이메리크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정확히는 그 죄책감을.
"루키아는 루키아대로 나는 나대로 녀석을 붙들어놓으려고 노력했지. 각자의 자리에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이었다면 아예 가까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치기어린, 말 그대로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같은 감정을 안았던 사람으로서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던 건지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갚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건지 지금에 와선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뒤섞여버린 감정을 풀어내어 그 끝에 걸린 것을 알아내기엔 너무 늦었고 또 그 낡은 갈래를 더듬어보기엔 너무 오래된 일 아닌가. 이미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녹아 한 덩어리로 뭉쳐졌을 뿐인 어느 감정들. 다만 그 시절에 어룽어룽 어린 눈물과 젊음과 방황 같은 것들.
어느 날 술을 마시던 아이메리크가 말했다. 어머니... 얼굴 한번 뵙지 못한 분이지만 내 친아버지의 아내 되는 분께서 돌아가시고 양부모님이 그 뒤를 잇듯이 돌아가셨다. 자연사라고 결과는 받았지만 늘 의문스러웠지. 이제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분들이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그 상냥하고, 무고한, 분들이.
에스티니앙은 말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 너를 남기고 가서 행복하셨을 거라고. 아무리 옆에서 누군가가 상기시킨다 해도 스스로 깨닫기 전까진 아무 힘이 없는 말이다. 그래도 에스티니앙은 노력했다. 무수히 많은 별들과도 같은 나날을, 그의 곁에서, 텅 비어버린 내부에 뭔가를 채워 넣기 위해.
뒤를 떠도는 음험하고 때론 더럽기까지 한 소문을 종식하러 돌아다니고 동기들에게 그런 말 말라고 윽박지르던 끝에 에스티니앙이 아이메리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소문들을 가만 놔두는 거냐고. 아이메리크는 슬프고 처연하기까지 한 미소로 응답했다. 아무 의미 없는 일들이라고. 그 소문 중 어떤 것도 그분이 원하지 않았더라면 나돌아다니지 않았을 것이니 아마도 그분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려 하신 모양이지. 어쩌면 이 정도도 해결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자식이라 여기실 수도 있겠고. 하지만 딱히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어. 무슨 반항 같은 거냐고 묻자 아이메리크는 그저 웃었다. 그런 걸 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했겠지. 어떤 것도,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에스티니앙.
"내가 줄 수 없었던 의미와 안정 같은 것들을 루키아가 줄 수 있었다면 그것도 다행인 일이겠지.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축하했던 마음은 진짜야. 그건 좋은데... 마음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해서 그게 바로 되는 게 아니잖아?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집에서 나와주는 것 정도였지. 아이메리크도 붙잡지 않았고."
늘 고맙다, 아이메리크가 남긴 말은 그 정도였다. 2학년 말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이메리크가 루키아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 것도, 스치듯 지나가는 미소를 그려볼 수 있게 된 것도, 아, 이젠 끝이겠구나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아이메리크의 진심으로 웃는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기에 에스티니앙은 두말없이 물러났다. 자신의 감정은 자신이 처리해야 할 문제였으므로 아이메리크와 루키아에겐 어떤 부담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루키아는... 아나?"
"모르겠어. ...모르길 바랄 뿐이지. 지금이었다면 애초에 아이메리크에게 들키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때는 어리고 미숙했으니까. 그래도 루키아에게만은 알려지고 싶지 않아서 정말로 노력했다. 아이메리크에게 하는 것보다도 더."
같이 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아직 아이메리크에겐 도움이 필요했고 루키아와 에스티니앙은 각자의, 그러니까 조금 달라진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그를 지지해주었다. 그게 쉬울 거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어려울 줄은 또 몰랐다. 질투라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 자신도 몰랐던 사실이지만 에스티니앙은 감정적으로 꽤 담백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를 좀먹는 것은 루키아를 향한 죄책감이었다. 역시나 스스로도 몰랐던 사실이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서까지 꽤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너는 사랑 두 번은 못하겠다. 아주 그냥 말라죽겠어."
"그러잖아도 그 녀석 이후로 소식이 없어서 감사하고 있다."
이제 내가 없어도 괜찮겠다 생각됐을 무렵에, 그쯤이었던 것 같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접어졌다.
"사랑이었다는 걸 의심하진 않지만 연민이나 동정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스물부터 스물일곱까지, 오래도 사랑했지. 이젠 정말 괜찮겠구나 싶어서 안심되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녀석이 신랑 들러리를 서달라고 했을 땐,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녀석 둔한 건지 잔인한 건지 모르겠군. 물론 난 녀석의 가장 친한 친구고 일반 하객으로 가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일 건 알아.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거잖아.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 친구가 결혼하는데 내가 들러리를 서는 거. 이게 무슨 웃기지도 않은 치정극이야? 아무리 지금은 마음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네가 신부면 그 상황에 가만 있겠냐? ...뭐, 루키아가 가만히 있었던 걸로 봐선 모르는 모양이니까 그건 다행인데 당최 녀석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가 없어. 나만 껄끄러웠던 건가? ...어찌 됐건 와달란 대로 간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닌데, 거절하면 또 녀석 그 처량한 얼굴로 내 친구는 루키아와 너뿐인데 운운했을 거라서. 뭐 그래도 후련, 해."
에스티니앙은 진심으로 안도하는 것 같았다. 기실 어딘가 해방된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더이상 녀석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챙겨주지 않아도 되고, 한번씩 연락 없이 쳐들어가서 사립탐정마냥 몰래 여기저기 뒤지면서 술 숨겨놓은 거 없나 안 찾아봐도 되고, 어딘가 불안한 모습에 사고 치는 건 아닌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거리를 두어도 되는 게 좋다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결혼한 후엔 불쑥 찾아가거나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실례니까. 정말 놀라울 정도로 후련해. 마음도 놓이고. 이제 아이메리크는 루키아의 영역인 거겠지. 둘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
툭, 잔을 맞댄 에스티니앙이 단숨에 내용물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은 그가 물끄러미 이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땐 고마웠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됐다. 새삼스럽게."
이젤이 무슨 간지러운 소리냐며 손을 내젓는다.
"아니, 진심으로. 알베리크 경... 아버지 집에 같이 간 건 너뿐이야. 아이메리크한테도 보여준 적 없으니까."
"뭐야, 프러포즈냐?"
"뭔 소리야?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서로 기대는 사이가 되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은 사치라고. 기대기는커녕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마련이니까. 그 녀석을 선택한 건 나지만, 그래도 그런 녀석의 가장 친한 친구로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아니었어."
네가 없었다면 하지 못 했을 거라고 에스티니앙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젤은 어떤 파문도 일지 않는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가라앉아 건지지 못한 슬픔이나 회한 따위가 있는지를 살펴보듯이, 아주 오래도록.
"그래, 고생 많았네. 오늘은 마시고 죽자."
"오냐. ...혹시나 아이메리크한테 전화하려고 하면 말려라."
"너야말로. 내가 그 애한테 전화하려고 하면 말려."
에스티니앙이 제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더니 이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 위에 제 것도 끄집어내 올린 이젤이 그가 어딘가에 잘 두겠거니 하며 잔에 술을 채운다. 그러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아무 거실 서랍장 안에 두 개의 전화기를 던져넣고 잠근 뒤 열쇠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이젤이나 할법한 행동'에 이젤이 웬일이냐 소리를 한다.
"어쩌려고 그러냐."
"집 열쇠도 아닌데, 뭐. 여분 열쇠는 있다."
"그럼 다행이고."
둘은 나란히 거실 TV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 영화 채널이나 틀어놓고 새어나가지 않을 정도로만 음량을 높인 이젤이 리모컨을 데이베드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다. 주거니 받거니 오고 가는 잔 속에 그동안의 모든... 아무튼 뭔가를...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들은 오래도록 잔을 마주 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전여친이나 전남친 결혼식도 가서 딱히 할 말은 없다만.', '청첩장 준다고 다 가냐?', '둘 다랑 각각 사귀었는데 우리 셋이 친구거든.', '그건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관계야?', '이 판 좁다니까.' 따위의 아무래도 좋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다음날이면 미처 쳐두는 것을 깜빡한 커튼 때문에 그들의 머리 위로 똑바로 내리쬐는 햇살에 찡그리며 일어나겠지. 두통에 불평하며 물을 찾다가 미리 끓여둔 토마토 달걀 수프로 속풀이를 할 것이다. 그 다음엔 부스스한 머리를 감으러 네가 먼저 가니 내가 먼저 가니 욕실 사용 순서를 두고 다투겠고. 그렇게 여느 때처럼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것이다.
그래, 언제나처럼.
부서진 마음의 잔해,
그러나 깨지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답게 반짝일 수 있는 어떤 파편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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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와 명왕과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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