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이젤과 에스티니앙이 진짜로 친구인 이야기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포일러 주의

2019. 05. 30 최초 작성

2019. 05. 31 1차 수정

2023. 12. 14 포스타입에서 옮김

파이널판타지14 팬픽션

현대 AU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포일러

 창가에서 조용히 나부끼는 흰 커튼, 열린 창으로 비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싸구려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 테라스에 내걸린 채로도 가붓한 듯 실려 오는 제라늄의 향기, 지절거리는 이름 모를 도시 새의 지저귐. 봄철 느긋한 오후의 온전한 휴일. 그러나,

 "......이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에스티니앙이 천천히 눈을 떴다. 부연 시야 너머로 카디건을 탁탁 털어 걸고 있는 이젤의 모습이 보인다. 몸을 일으키자 시트와 함께 가슴께에서 책 한 권이 굴러떨어졌다. 금색 활자로 'LAB GIRL'이라는 타이틀이 박힌 책을 내려다보다 가만 접어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책을 펼친 채로 엎어두지 말라는 잔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젤은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

 "깼나."
 "...여행 간다더니."
 "귀찮게 굴어서 찼다."

 애인과 며칠 여행을 다녀온다는 말에 안방에 있는 침대를 차지한 터였다. 귓가에 걸려있는 안경을 고이 접어 책 위에 내려둔 에스티니앙이 머리를 대충 쓸어넘겨 정리하며 침대 헤드에 기댔다. 가끔 있는 일이다. 이젤의 연애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끝나곤 했다.

 "밥은."
 "있는 걸로 먹었다. 크림스튜 괜찮지?"

 좋아, 내 저녁은 사라졌군. 밤이 되기 전에 내려가서 중국 음식이라도 포장해 와야 하나 싶던 차에 웬일로 이젤이 당번을 자처한다. 더러운 기분을 털어내려 부러 바쁘게 움직이는 걸지도. 밖을 향하는 이젤을 따라 느릿느릿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이젤은 벌써 부츠를 신는 중이다.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이젤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에스티니앙이 선반 위를 더듬어 자동차 키를 찾아냈다. 열쇠를 가볍게 던지자 날렵하게 잡아챈다.

 "차키는 왜?"
 "술 먹지 말고 들어오라고. 오늘은 정말로 경찰서 갈 힘 없으니까."

 픽 코웃음 친 이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쇠를 쥔 채로 밖으로 나갔다. 평소라면 신발장 위에 탁 소리나게 내려두고 갔을 그가 웬일로 들고 간 걸 보니 제 꼴이 말이 아니긴 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넘게 이어진 철야를 마치고 간신히 잠에 든 참이었다.

 서너 시간 정도 잤으니, 됐지. 잠을 포기한 에스티니앙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외우고 있는 몇 안 되는 번호를 눌러 입력하고 통화를 연결한다.

 "아이메리크."

 '오, 에스티니앙. 오랜만이군. 작업은 잘 끝냈나?'
 "언제나처럼. ...시간 좀 돼?"
 '괜찮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젤 녀석. 괜찮은 와인 있으면 한 병 들고 와."

 식탁에 앉아 아무 의미 없이 카탈로그를 넘겨보던 에스티니앙이 괜찮은 쿠폰을 하나 발견하고 볼펜으로 표시해둔다.

 '와인만 보내지. 직접 가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아.'
 "알았다. 루키아는?"

 수화기에서 멀어진 목소리가 무언가를 묻는 듯하다. 옆에 있나보군. 느긋이 기다려 얻어낸 루키아의 방문 소식에 불편한 마음이 한결 가신다. 저야 뭐, 싸구려 여관에라도 가서 자면 되는 일이고. 베드버그만 없다면야 아무래도 좋다.

 '그나저나... 둘은 아직도 같이 있는 건가?'
 "그렇지, 뭐."
 '......'

 잠시 침묵이 흐른다.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행위를 음색으로 그려낸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책상을 일정한 리듬으로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이메리크는, 말을 고르고 있다.

 '이제 그만 그녀를 놓아주는 게 낫지 않겠나? 이젤은 훌륭한 여성이야, 하지만...'
 "내가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놓아주긴 뭘 놓아줘? 그건 이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진 알겠는데, 성별이 다른 사람과 같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평판이니 명예니 하는 말을 꺼내기엔 시대가 너무 현대 아니냐?"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다 보니 대응도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것마냥 자연스레 구술된다. 그만큼 이런 말을 수없이 들었다는 사실에 새삼 세상과 그들의 거리랄지 괴리랄지, 그런 것을 느낀다.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 다만,'
 "어떻게 포장해도 결국은 그 말이잖아. 이젤은 그런 걱정 원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네게 말하는 것 아닌가. 이제 학생도 아닌데,'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아이메리크 드 보렐."

 드물게 미들네임과 성까지 붙여 말하는 에스티니앙의 단호함에 아이메리크가 한 발짝 물러섰다. 깊은 한숨이 전해진다. 알았다, 다음에 다시 통화하자. 뚝.

 "하......"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이메리크라고 해서 쉽게 꺼낸 말은 아닐 거다. 그렇지만 말하는 입장에선 한 번만 얘기를 꺼낸다는 게 듣는 입장에선 벌써 수십 번도 더 들은 얘기란 말이지.

 에스티니앙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침실에서 책을 가지고 나왔다. 테이블에 앉아 자세까지 바르게 하고는 전투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간만에 발휘된 집중력에 영 진도를 나가지 못하던 책도 태어난 소임을 다하게 됐다.

 "그건 그렇고 네가 웬일로 책을 다 읽지?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이거, 루키아가 호프와 빌의 관계가 너와 내 관계 같다면서 추천해준 책이거든? 아이메리크한테도 준 모양이던데."

 이젤이 부츠를 벗어 정리하고, 차키를 선반 위에 걸어두고, 에스티니앙에게 장 봐온 것들을 건네면서 물었다. 흘러내린 긴 머리를 손으로 넘긴 그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채로 엎어진 책을 집어 들더니 가름끈을 끼우고 접어 다시 내려놓는다. 이젤은 이미 이 책을 읽었는지 에스티니앙의 말을 듣자마자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야, 거기에 비유되기엔 우리 우정이 너무 가볍지 않냐."
 "그러게나 말이다."

 식재료를 팬트리에 차곡차곡 정리한 에스티니앙이 테이블로 돌아와 느른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그나저나 뭐야, 책이 재미없어서 그런 표정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 헤어진 건 난데 왜 네가 똥 씹은 얼굴이야?"
 "학생 때 나는 아이메리크랑 같이 살았고, 너는 루키아랑 같이 살았잖아. 아이메리크가 같이 방 보자고 할 때 나 바이라고 말했다고. 걔는 알아, 하고 답했고.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무 일도 없었거든? 그냥 잘 지냈다고. 그런데 그게 성별 하나 바뀐 거 가지고 이렇게 잊을 만하면 한 소리 들을 일인가 싶어서 그런다. 그것도 온 세상에서."

 이젤이 그게 아니지, 하면서 에스티니앙의 눈앞에 검지를 세워 흔들어 보였다.

 "자, 봐봐. 에스티니앙. 시스젠더, 헤테로, 유성애자. 이 셋이 따로따로 있어도 이해받기 힘들진대 셋이 하나다? 이해는 포기하는 게 빨라. 딱히 이해받을 필요도 없고, 원하지도 않지만. 뭐, 그래도 나름 귀엽지 않아? 보아하니 저도 실례되는 말이라 생각해서 지금까지 입 안 연 모양인데. 결혼식이 다가오니 아이메리크도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지."
 "그러고 보니, 슬슬 준비해야겠지..."

 에스티니앙이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별 생각 없이 긴 손가락으로 책을 팔랑거리던 그가 문득 이젤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너, 신부 측 들러리로 들어가던가?"
 "그렇지. 너도 신랑 쪽으로 들어간다며."
 "그랬지."

 나무늘보마냥 영원히 늘어져 있을 것 같은 무기력한 모습임에도, 이젤의 말에 별안간 몸을 똑바로 세운다. 그러더니 퍽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망갈까."
 "야, 그건 예의가 아니지. 신랑도, 신부도 아니고, 들러리가 도망을 가?"
 "친한 친구와 친한 친구가 결혼하면 도망가라던데. 내 몸은 그날 아플 예정은 없는 건가."
 "시간 정해놓고 병 걸리는 놈은 또 처음일세."

 기인 보듯 내려다보던 이젤이 뭐가 문제냐며 에스티니앙의 반대편에 앉았다. 

 "이제 그 녀석, 우리 보고 잘 어울린다고 차라리 결혼하는 건 어떠냐고 헛소리한다는 데 5유로 건다."
 "뭐, 루키아가 잘 해결할 거야. 돔 페리뇽이라도 쥐여준다면 그 정도 헛소리는 들어줄 수도 있고."
 "그 말, 녀석 앞에선 하지 마. 진짜로 주면서 잔소리한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이만 자라."

 이젤이 언제 몸서리쳤느냐는 듯 다시 늘어진 에스티니앙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포슬포슬하니 언제 만져도 촉감이 좋다. 슬금슬금 머리카락을 가져다 땋던 이젤이, 만사가 귀찮은 흐느적티앙이 저지를 포기하자, 대놓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자긴 뭘 자. 오늘 저녁에 루키아 온댄다. 난 대충 너네 둘 안주나 만들어주고 나갈 테니까, 밤새 병나발을 불든지 파자마 파티를 하든지 맘대로 해."
 "뭐야, 새삼 내외하냐?"
 "그게 아니라,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런다. 며칠 밤 새도 끄덕없던 새내기 시절은 한참 전에 지났잖냐."

 묶을 것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던 이젤이 빵끈 하나를 찾아 머리카락을 묶었다. 그러더니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풀어서 이번엔 둘둘 말아 나무젓가락 한 쌍을 비녀 삼아 뒤통수에 고정한다.

 "아, 하긴 그러네. 그럼 아이메리크 집 가서 자. 한 일주일쯤 자라. 그럼 그 녀석도 우리 사는 방식에 더는 토 안 달겠지."
 "그럴까."
 "나와, 데려다줄게."

 추진력 빼면 시체인 얼음심장께서 친히 운전을 자청하셨다. 에스티니앙이 됐다는 의미로 손을 내젓는다.

 "뭘 데려다주기까지."
 "너 지금 상태로 혼자 운전하긴 글렀고, 버스 태워 보냈다간 잠든 채로 종점까지 갔다가 집에 돌아온다고 맞은편 버스 타서 다시 반대쪽 종점까지 갈 테니까. 이번에도 하루 종일 버스에서 잘 거 아니면 얌전히 차에 타. 너 배달해놓고 나도 루키아 데려오게. 아니다, 방도 많은데 그냥 나도 루키아랑 거기서 놀다 자련다. 헛소리에 대한 소소한 복수치고는 괜찮지."
 "...전화 해야겠군."
 "오냐."

 이젤이 천천히 나오라며, 먼저 열쇠를 가지고 나갔다. 오래된 차라, 미리 나가 예열을 해두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에스티니앙은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그들의 낡고 작은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방 하나는 창고 겸 그림 보관소, 방 하나는 침대와 옷장, 거실엔 데이베드와 이젤 두 개. 오래된 흑백 TV와 라디오 하나. 처음에는 둘이 작업실로 비용을 반반씩 나누며 쓰던 곳이었다. 그러나 각자의 하숙집 월세를 유지하며 작업실 비용까지 대기엔 그쪽이나 이쪽이나 가난한 대학생이었던지라, 결국 합의하에 한 명씩 정리하고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각자 갈 길을 갈 때까지, 잠시 이곳에 머물자고. 이제는 둘 다 그림으로 제법 버는 화가가 되었건만 그들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이런 삶의 방식이 익숙해서, 굳이 변화할 필요가 없어서, 지금으로도 만족해서.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아파트 곳곳엔 그들의 삶의 흔적이 여실했다. 안방 침대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규칙에 매일 쟁탈전을 벌이던 나날들, 이층으로 분리되는 데이베드의 아랫칸을 빼서 소파로 쓰며 캔맥주 하나씩 나눠 마시던 어느 저녁, 숨죽인 채로 옛 공포영화를 틀어주는 어느 채널을 보다가 수신이 잘 되지 않자 이젤이 고쳐보겠다며 때려서 결국 망가져버린 오래된 TV, 매일 아침 이젤이 틀어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그에 맞춰 커피를 내리는 자신, 한때 아이메리크를 좋아했던 나, 그녀를 정말 좋아했었다며 어깨에 기대어 울던 이젤, 각자의 전시회를 열던 날 같이 마셨던 어느 비싼 술, 서로 좋아하는 피자집이 달라서 어느 쪽 쿠폰을 모을지 다퉜던 우리, 비 오는 날 싼값에 떨이해서 사 왔다던 제라늄 화분, 더는 실패한 연애로 울지 않는 이젤, 더는 아이메리크를 좋아하지 않는 자신, 갑작스런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 가던 날 제 손을 잡고 저보다 창백하게 굳어있던 이젤, 이제는 땅콩은 못 먹겠다며 애써 웃던 이젤, 제라늄 증식에 성공해서 너 의외로 가드닝에 소질이 있다며 이젤이 놀랐던 날, 아픈 이젤, 망쳐진 그림, 찢어진 캔버스, 결국 구급차를 불렀던 날, 토해낸 붉은 피와 차가웠던 이젤의 손, 부를 부모도 친척도 형제도 없어 보호자란에 대신 서명했던 자신, 그날 가족이라는 이름이 멀어 그 옆에서 함께 울었던 우리, 양아버지의 무덤에 같이 방문했던 날, 완성된 조각, 그 모든 실패, 그 모든 성공, 그 모든 삶을, 우리는. 

 이것은 사랑이 아니나 우정도 아니며 다만 우리는 서로의 옆에서 삶을 함께 했다고. 그렇게 되었다고.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삶의 겹침을 어떻게. 다만 우리는 이곳에 있음을 어떻게.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사랑하지 않은 채로 가족이 되는 것을 어떻게, 루키아와 아이메리크처럼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은 채로 가족이 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젤과 에스티니앙이 진짜로 친구인 이야기

 이젤과 에스티니앙이 사실은 친구가 아닌 이야기

 이젤과 에스티니앙이 다만 가족인 이야기


후편 부서진 마음의 잔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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