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빛전] 시나브로
* 커미션
* 커미션으로 작업한 FF14 그라하티아 X 빛의 전사 드림 커미션 글입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간질거리는 썸 관계의, 크리스탈 타워 조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소재를 받아 작업했습니다.
신청자분의 가내 빛의 전사 캐릭터 설정 및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랑말랑한 미코테 헤테로 커플이라 작업하면서도 너무 귀여웠어요 >///<)♥
* 작중 시점은 신생이며, 크리스탈 타워 연대기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총 글자수 33,402자로 작업하였으나, 샘플로 초반부분인 10,647자만 발췌하여 올려둡니다 :)
감사합니다!
커미션 페이지 : https://glph.to/nrg8cb
고요한 야영지에 타닥, 타닥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만 요란할 때 묵묵히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그라하 티아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저 혼자만 멀뚱히 깨어있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자그마한 액세서리를 꺼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느라 미간이 구겨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의 불침번은 그라하 티아가 하는 날이 아니었고 노아의 대표로 샬레이안 의회에 보고하기 위해 올드 샬레이안까지 갔다가 이제 막 돌아온 참이라 밤을 꼴딱 새우기보다는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텐트에 들어가 푹 쉬고 나오는 게 평소의 그다웠을 텐데도, 그라하 티아는 간헐적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액세서리를 꾹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평소의 자신이 그런 액세서리에 관심이 있었냐, 하면은 절대 아니었고, 제 몫의 연구비나 식비, 혹은 텔레포 비용으로 나온 길들을 쪼개고 아껴 노상 서점을 기웃거리거나 저명한 학자들이 기술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구매하고 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있어 처음으로 구매한 사치품이었기에 더더욱 심란했다.
제 귀에 달기에는 민망한, 자그마한 꽃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누가 봐도 ‘여성용’이라 주장하는 액세서리 같은 건, 정말로 처음 구매하는 거였으니 정말로, 자신이 이런 걸 왜 구매했는지 모르기에 심란하다 못해 가슴이 울렁거려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느릿하게 토해내며 도르륵, 하고 또다시 손가락으로 굴리고 또 굴렸다.
차라리 이런 걸 평소에 자주 선물했었다던가, 주변에 이런 걸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더라면 덜 심란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싶은 것이, 그라하 티아라는 사람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씨족과 떨어져 홀로 샬레이안에서 살아온 탓에 가까운 사람에게 액세서리를 선물하는 경험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발데시온 위원회에 들어오게 되면서 갈러프 씨를 주축으로 하여 교류하던 쿠루루하고는 이런 것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했던 건 아니어서 더더욱, 이런 여성용의 액세서리 같은 건 그에게 있어 구매할 일이 없는 ‘사치품’이라는 생각이 더욱더 강했고, 저로서는 생각한 적도 없었던 액세서리를 손에 쥐고 심란해하는 것은, 이 액세서리를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자꾸만 그 녀석이 머리에 끼우고 다니는 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터였다.
하필, 처음 구매한 액세서리가 그 녀석과 닮은 거라니. 대체 이런 거에 왜 눈길이 간 거지? 다른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어봐도 자기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라하 티아는 신경질적으로 모닥불에 꼬챙이를 찔러넣어 괜스레 뒤적거리고, 불이 조금 더 오래 갈 수 있도록 마른 장작을 욱여넣었다가도 하아아아- 하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토해내며 액세서리를 눈앞까지 들어 올려 보았다.
한쪽 눈을 감고, 청록색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고 저주스러운 마안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손바닥 안에 데로록 굴리고 있는 자그마한 액세서리는 여전히 하얗고, 작고, 오밀조밀해서 자꾸만 그 녀석 생각이 나게 했다.
제 한쪽 눈과 비슷한 녹색의 눈을 가지고 있는, 동그랗고 하얗고 자그마한 모험가를.
당장 내일이면 저기 보이는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하러 가야 해서 지금 쿨쿨 자고 있을 녀석이 왜 자꾸 아른아른 떠오르는 건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라하 티아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봤지만, 보는 순간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구매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 자꾸만 다른 변명거리를 찾고 또 찾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기에 또 한숨만 푹 쉬고, 머리를 벅벅 긁을 뿐이었다.
말랑하고 몽실몽실한 게 모그리 같이 생겨서는, 할 때는 제대로 하는 모험가니까 그 녀석이 활약하는 걸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었던 마음이 미련처럼 찝찝하게 남은 걸까?
물론, 시드가 저를 저지하면서 했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현인 그라하 티아로서, 또는 조사단 ‘노아’의 리더로서, 객관적인 판단으로는 시드의 말이 옳다는 것을 절절히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돌파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인 크리스탈 타워의 내부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방어벽을 뚫은 시드를 포함하여 여기 있는 그 아무도 모르기에, 뚫고 조사하는 팀과 잔해를 파악해 구조 원리를 분석해야 하는 팀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자신이 발데시온 위원회로서 세계 곳곳의 미지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일을 해왔다지만 힘으로는 모험가 부대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도, 혹시라도 모험가 부대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후속 부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여기에 있는 그 누구보다 알라그 지식에 정통한 사람이기에 제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크리스탈 타워를 돌파해도 그에 얽혀있는 것들을 해석해 낼 사람이 없는 것도, 정말 그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분하고 서러웠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뒤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명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아예 무력이 없는 학자 타입이라면 모를까…… 활이라면 자신도 자신 있게 쓸 수 있는데.
아예 처음부터 탐색과 조사로 나뉘었다면 덜 서러웠을까? 당장 내일 함께 돌파한다고 신이 나서 샬레이안까지 그 비싼 텔레포까지 써가며 다녀왔던 그라하 티아로서는 계속 투덜투덜 불만만 튀어나올 뿐이었다.
입술이 불만스럽게 삐죽 튀어나왔다가 들어가며 한숨과 함께 흐트러지면서, 똑 부러진 것 같으면서도 때때로 멍하게 있는 녀석이 과연 잘 해낼까, 싶은 걱정도 들고, 그러다가도 코끝을 찡긋거려 가며 다시금 불만스럽게 혀 위에서 단어가 데로록 구르다가 한숨으로 변해 새어 나왔다.
이렇게 투덜거리고 불만스러워해봤자 이미 결정된 일인데 어떡하겠나. 그저 무사히, 아무 탈 없이 모험가들이 다 때려 부수고 말짱히 돌아오기를 지식신 살리아크에게 기도할 수밖에.
그러니까, 모든 생각의 끝에 결국은 그 녀석이다.
차라리 저처럼 제 잘난 맛에 우쭐대며 사는 녀석이라면 덜 걱정했을 텐데, 퐁실퐁실하니 후- 하고 불면 당장 바스스 흩어질 것만 같은 녀석이라서. 에테르 모래를 찾는 여정에, 그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 제 두 눈으로 봤음에도 야영지에서 함께 지내며 그 녀석이 얼마나 어벙한 녀석인지 보고 듣고 겪었기에,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드는 거겠지. 그래, 분명 그래서일 터였다.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 앞에서도 멍때리고 있는데, 타워 안에서 멍때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테니까. 이거야 원,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라하? 불침번이야?”
“우왁!”
한참을 그렇게 표정을 구겼다가 풀었다가 하며 파닥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목소리에 그라하 티아는 깜짝 놀라 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고 말았다.
몸만 튀어 올랐을까, 꼬리도 펑 터져서 북슬북슬해지고 양 귀도 삐쭉하니 솟아서 누가 봐도 깜짝 놀랐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는 통에, 말을 건 사람까지 민망해져 두 사람은 커다란 눈동자만 한창 끔뻑거리고 있었다.
“뭐, 뭐야! 언제 나왔어……. 아니, 왜 안 자고 나온 거야?”
멋쩍고 민망해서 버럭 성질을 내듯 말하는 그라하를 보며 하룬은 옥색 빛의 눈동자를 느릿하게 끔뻑거리며 손가락으로 뺨을 살짝 긁적거렸다.
무언가 고민이 있어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처럼 눈 아래는 거뭇거뭇하고 평소보다 눈썹이 더 처져 있는 게, 모닥불의 불빛에서도 잘 보이는 탓에 그라하는 언제 언성을 높였냐는 듯 목을 가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물론, 그때까지 손에서 굴리고 있던 액세서리는 주머니에 처박듯 집어넣고서.
“잠이 안 와?”
“……응.”
티를 내지 않으려 했던 불안이, 그라하 티아에게 쉽게 읽힌 것을 보고 하룬은 길쭉한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라하 티아는 앉을래? 하며 살짝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하룬은 망설이지 않고 그 옆에 앉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타닥, 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야생 짐승의 소리가, 누군지 모를 텐트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코골이 소리와 섞여 다소 평화롭게까지 들리게 했지만, 그럼에도 하룬은 진정되지 못한 마음을 꾹 눌러 삭히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꾹 누른 채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뜨면, 너는 크리스탈 타워로 가게 되겠지.”
그라하 티아는, 하룬을 바라보지 않고 그렇게 운을 떼었다.
그녀의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겠다는 것처럼 툭 내뱉은 말에 하룬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그를 바라봤고, 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러우면서도 당찬 말투로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너라면 잘 해낼 거라고 믿어. 나도, 시드도, 아마 여기 있는 람부르스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을 거야. 너는 그만큼 실력이 보증된 모험가니까.”
“……그래서 그래. 만약에, 내가 실수하게 되면.”
너희가 믿고 있는 내 실력이, 크리스탈 타워 안에서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룬의 불안은 거기에서부터 기인했다. 지금껏 상대해 왔던 야만신이나, 야만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미지 그 자체의 공간을 탐험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을 터였다.
자신이 토벌해 왔던 것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탐색이 되어 있었던 탓에, 약점을 노리거나 혹은 힘으로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해결이 되었었지만, 그 시드조차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깰 수 있었던 두꺼운 방어막 너머로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정말 자신이 최초로 탐험하는 사람이 된다는 부담감이 그녀의 작은 어깨를 짓누른 탓에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함정임을 알면서도 밟고 마는 성격의 자신이 덤벙거린 탓에 저뿐만 아니라 다른 모험가들까지 위험하게 만들지 걱정스러워서, 혹은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에,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바람이라도 쐬려 했건만. 예상치 못하게 그라하 티아가 있을 줄 몰랐고, 제 가슴속 깊은 곳에 있었던 불안을 그에게만 슬쩍 꺼내보았더니 더더욱 불안해져서 하룬은 앉은 다리를 모아 턱을 괴고는 가만히 생각하다, 느릿하게 툭 내뱉었다.
“미궁을 헤매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코코를 여기에 두고 가는 게 좋을까? 나는 어떻게든 나올 수 있겠지만, 코코가 위험해질까봐 걱정돼. 너무 작아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쉽게 휘말려 버릴 텐데……. 넓은 곳에서 찾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되어서…….”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정말 솔직한 하룬의 마음이었다.
정말 위험하고 어려우면 안전하게 돌아 나와서 다시 작전을 짜고 진입하면 될 일이었다.
에오르제아를 모험하는 모험가들이란, 다들 생과 사를 걸고 난전을 겪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제 목숨 귀한 줄은 알고 피해야 할 때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들만이 모험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모르도나까지 올 수 있었기에, 적어도 ‘성 코이나크 재단의 조사지’까지 올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실력은 보증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걸 그 누구보다 하룬이 잘 알고 있었기에 모험가들에 대한 걱정은 없었었다. 만에 하나라도 제가 덤벙거려 실수한다 한들, 어느 정도 수습이 되겠지. 하지만, 자신의 자그마한 친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과연 살아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그녀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듯 불안감이 커져서는 다른 모험가들에 대한 걱정으로 번지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고.
“네 너츠 이터를 말하는 거지?”
묵묵히 끄덕여지는 하룬의 고갯짓을 보고, 그라하 티아는 진지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녀가 얼마나 코코를 아끼는지, 코코 또한 하룬을 얼마나 따르는지 익히 봐 왔기에 입 안에서 단어가 구르고 굴러,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진심을 담은 대답이 나왔다.
“자그마한 녀석이니까 잔해 사이에서도 잘 빠져나올 거야. 지금껏 너와 함께 다닐 만큼 똑똑한 녀석이잖아. 만약, 일이 잘못되어서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코코도 잊지 않고 꼭 찾아줄게.”
“그러면……. 그라하는, 내가 코코를 데려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네 파트너잖아. 나라면, 파트너가 위험하다고 나만 두고 가는 건 좀……. 싫을 것 같아.”
그라하 티아는 하룬에게 말하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남겨져야 하는 사람으로서, 어쩐지 너츠 이터가 겪을 마음이 이해가 된 탓에. 연약하므로 위험을 피해 안전한 곳에 남아야만 한다면… 자신은 차라리, 함께 위험해지고 힘을 모아 같이 탈출하리라.
자그마한 너츠 이터가 그렇게 생각할 일은 없겠지만 그라하 티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게 저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서.
나만 두고 가는 건 좀, 싫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 줘.
그라하 티아의 마음은 그랬다. 모든 것이 정해졌으니, 이제 와 이야기한들 그라하 티아가 따라갈 수 없기에 꾹꾹 눌러 담은 그의 본심.
“…….”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감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룬은, 조금 더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혼자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땐 가슴이 울렁거려서 밤을 꼬박 새울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조금 시원해져서 가물가물 눈이 감겨왔기 때문이었다.
계속 신경을 곤두세운 채 고민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아무도 없이 마음이 잘 맞고 대화가 잘 통하는 편안한 사람 옆이라, 혹은 제 고민에 답을 내려준 사람이 있어서 긴장이 풀려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하룬은 아예 얼굴을 파묻은 채로 느릿하게 호흡하다 고개를 들지 않고 그라하 티아의 옷자락을 붙잡고 꾸욱 잡아당기며 느릿하게 말했다. 아무리 편안한 사람이어도, 제 불안을 티 내고 싶지 않은 것도 솔직한 마음이기에.
“그라하, 괜찮으면……. 그거 해 줄 수 있어?”
“그거…라니? 뭘?”
하룬의 목소리에 그라하 티아가 되묻다가도, 어이없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설마, 노래해 달라는 거야?”
“응.”
“나는 음유시인이 아니야. 넌 나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치만, 그라하가 부르는 노래가 좋아. 네 일족에 전해지는 노래라면서?”
“나 참…….”
하룬의 둥그런 머리를 바라보며 그라하 티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선 목을 가다듬었다.
일족에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를 잊지 않고 부르는 건, 제 뿌리와는 멀어졌지만, 스스로가 그 씨족의 미코테임을 잊지 않기 위한 발버둥에 가까웠다는 걸 이 녀석은 알고서 말하는 걸까? 뭐,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지금에야 취미 삼아 부르게 된 거지만, 샬레이안에 막 왔을 때만 해도…….
“……싫으면 안 불러도 돼.”
“아, 진짜……!”
머릿속에서 멜로디를 가다듬고 부를 준비를 하고 있던 그라하는 하룬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캬아악, 하고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듯 날 선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니, 다른 때도 아니고 그렇게 시무룩죽죽해져서는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안 하겠느냔 말이야. 나 참, 울적하다는 티나 내지 말던가! 눈앞에서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어. 제 딴엔 티 안 낸다고 하는 거 같은데, 그럴수록 더 신경이 쓰인다는 건 정말 모르고서 저러나? 당장 아침이면 크리스탈 타워로 가야 하는데, 제일 선두에 설 사람이 저러고 있으면 뒷사람들이 퍽이나 안심하겠다……!
그라하 티아는 뜻 모르게 부글부글 끓는 마음으로 씨근덕대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서 뾰로통하게 말했다.
“한 번만 부른다?”
“응!”
악기도 뭐도 없이, 단둘이 모닥불에 앉아 부르는 노래는 다른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아주 자그마해서 툭, 툭 끊기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그라하 티아의 초록빛 눈과 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바라보며, 때로는 지그시 감긴 채로 느릿하게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힘 있게, 허밍이나 휘파람처럼 부는 소리였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하룬에게는 누구보다 선명히 들리는 목소리라 하룬은 조금 더 그라하 티아에게 가까이 붙어 앉아, 모르도나의 차가운 밤바람에 식어버린 몸을 데워 가며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착 감겨들고, 노랫소리에 집중할수록 밤새워 그녀를 괴롭히던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것만 같아 뻣뻣하게 들어갔던 힘도 풀린 채로 느슨히 앉아 그저 그라하 티아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하룬과는 반대로 갑작스레 제게 달라붙은 몸에 깜짝 놀라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던 그라하 티아는 귀를 삐쭉 세우고 어깨를 뻣뻣하게 굳히고 말았지만,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을 보고서 유달리 추위에 약했던 그녀가 추워서 온기를 찾아 붙었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살짝 하룬 쪽으로 기댄 채로 노래를 이어갔다.
끊어질 듯 이어져가는 노랫소리는 그라하 티아가 종종 허밍처럼 부르곤 하던 부분으로 들어가, 익히 들어왔기에 조금은 익숙해진 하룬이 자기도 모르게 입 안에서 작게 흥얼거리듯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설프고, 때로는 생략된 부분이 많은 노래지만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른다는 느낌이어서 그라하 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도, 부스스 웃으며 자연스레 제 허벅지를 천천히 두드리며 박자를 만들어 그다음 부분을 천천히 부르고 길게 이어가며 자장가처럼 느릿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노랫말을 이어갔다.
그런 그라하 티아에게 호응하듯 하룬도 고개를 슬쩍 들고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고, 무언가 뭉글뭉글하게 제 몸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에 눈을 부드럽게 접어 웃고는 그라하와 함께 노래하자, 그는 조금씩 조금씩 띄엄띄엄 부르기 시작하다 완전히 입술을 닫아 물고는 하룬을 빤히 바라봤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일렁거리는 주홍빛 불길에 추위로 발갛게 튼 뺨까지,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들이라 그라하 티아는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지만,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기에 그는 충동적으로 주머니에 쑤셔 박았던 액세서리를 꺼내 하룬에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시무룩하게 있지 말고 이거나 받아.”
그라하 티아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하룬은 두 눈을 끔뻑거리다 그의 손바닥에서 반짝이는 귀걸이를 보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가 다시금 손바닥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제 얼굴과 손바닥을 훑는 것을 느낀 그라하 티아는 민망해진 나머지, 하룬의 시선을 피하며 귀며 꼬리를 연신 파닥거리다 못해 사춘기 남자아이처럼 새된 목소리로 투덜거리듯 그녀 쪽으로 내밀고 말았다.
“뭐, 마음에 안 들면 버리던가.”
“버리다니! 선물을 어떻게 버려.”
그의 퉁명스러운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확 쳐든 하룬은 그녀치고는 제법 큰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라하 티아에게는 사치품일지라도, 그녀 같은 모험가에게는 별것 아니었을 작은 액세서리 하나에 왜 그런 반응인지 모르겠기에 그라하 티아는 고개를 원위치로 돌렸다가 숨이 멎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하룬의 눈동자가 유독 반짝거린다 싶더니, 눈가에 자그마하게 물기가 반짝거리고 있어서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랐다는 듯이 귀를 파닥거리면서도, 소중하게 손에 쥐고선 환히 웃는 얼굴은……. 그녀가 울고 있다는 충격적인 상황 앞에 다 지워져서는, 그라하 티아는 그답지 않게 입술을 바르르 떨며 손을 어쩌질 못하고 당황하고 말았다.
“너, 너 왜 울어!?”
“감동이잖아……! 이런 선물, 너한테 받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뭐, 뭐 그런 걸 받았다고 울어!”
손까지 파닥거려가며 크게 당황한 그라하 티아 앞에서 하룬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다시금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제게 선물을 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상대에게 받은 선물에 저를 잠 못 들게 했던 고민 따위는 저 멀리 날아가고 삽시간에 얼굴이 발갛게 물들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라하 티아의 선물을 자기 귀에 걸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어때, 잘 어울려?”
“……!”
자신의 선물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을 보고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녀의 웃는 얼굴이나, 귀에 매달린 자그마한 자신의 선물 같은,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라하 티아에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온 탓에 그는 또다시 속이 울렁거린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애써 고개를 돌리고는 투덜거렸다.
대체 왜 이러지? 어제 먹은 게 잘못되기라도 했나? 아니면, 인제 와서 에테르 멀미라도 하는 건가? 그런 속마음은 꾹꾹 눌러 감추고, 손끝으로 하늘을 쿡 찌른 채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해 뜨잖아, 지금이라도 좀 눈을 붙이는 게 좋지 않아? 피곤해서 둔해진 몸으로 피할 것도 못 피하면 시드를 볼 낯이 없잖아.”
“아.”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조금씩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것을 이제야 본 하룬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이거 고마워-!” 하며 자신의 텐트로 빠르게 돌아가서, 그라하 티아는 그제야 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 잠깐 사이에도 그녀의 귀에 착 달라붙어 달랑거리던 자그마한 것에 시선을 잠깐 뺏겼던 것도 얼굴이 벌겋게 익을 만큼 부끄럽게 해서 마음이 싱숭생숭해 괜히 모닥불만 뒤적거리고 또 뒤적거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악령에게 잠시 씌기라도 했던 건지 뭔지. 액세서리를 샀을 때부터 충동적으로 하룬에게 줘 버렸을 때까지도, 라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자신답지 않은 일이라, 그는 다시금 혼자가 된 모닥불 앞에서 뒷머리만 벅벅 긁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친하니까. 걔를 닮은 액세서리라 그런 거지 뭐. 걔 닮아서 산 건데 다른 사람한테 주기도 그렇잖아? 아니, 솔직히 따지고 보면 걔랑 닮은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했지, 응. 멀리 가지 않아도, 발데시온 위원회에서도 연구비로 충동구매를 해서 경위서를 쓰는 사람도 종종 있었잖아? 샬레이온 의회에서 전체적으로 공문이 내려온 적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 별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샀다는 거에도 적당한 개연성이 있어. 그렇게 예쁜 사치품을 처음 봐서, 그래! 예뻐서 그래. 예뻐서.
하룬한테 주려고 샀던 건 절~대 아니라고. 그럼!
그라하 티아는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지만, 하룬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꼬리는 멈추지 않고 파닥파닥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혼란스럽고 기쁘고 조금 설렜던 주인의 마음을 비쳐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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