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호

J에게

saponin by ceram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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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존재를 상실한 계절.

거두고 먹여준 원장께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범신론이란 건 납득할 수가 없다. 당장 우리의 출생이 증명하듯. 비쩍 말라붙은 육체 앞에서 신의 자녀란 말을 논하다니. 주신이란 게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버러지 같은 생을 선물한단 말이냐. 가당치도 않다. 그럼에도 걔는 형형하고 꼿꼿하게 당도한 내 옆에 서서 수장을 맞대더랬지. 의아했다. 이 모든 일에. 잘못 없는 자도 사죄를 구하는 교회의 방식에. 겨울 밤. 고초 지하의 덥고 더딘 심박을 영위하는 유언을 품고, 등 뒤 단조롭고 위태한 호흡을 뒤로 한 채. 발 아래는 깨진 가로등 파편. 눅눅한 대기. 녹색 잔상. 지하도 아래 토화가 가득한, 유리 천장과도 같은 곳에 버려져서는. 옆 방에서 말라죽어가는 어린 영혼을 보고,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매의 폐부는 절대로 버텨주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까 충동이 아니라
아주 계획된 탈주극이다.

풀벌레와 점멸하는 가로등 소음만이 주인이 된 밤. 뜀박질 소리는 불청객이다. 걸음을 멈춘 건 새벽이 끝날 때쯤. 흑색 동자에 천궁이 거꾸로 걸렸다. 그건 참. 나의 얄팍하고 좁은 식견과 말솜씨론 헤아리기 어려운 광경이라. 무지개란 건 보육원 책장 한켠에 꽂혀 있던 애새끼들 그림책보단 훨씬 가늘고, 희미하며, 아름답지가 않았다. 아무개가 지껄이길 흑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여, 반사하지도 못해 검게 고여 있는 것이랬다. 그러니 내 눈동자에 감회로이 비칠 리가.

천정호는 사실 무지개와는 그 원리가 달라서, 그러니까 J, 아직까지 난 무지개를 본 적이 없다. 오색 찬란한 것이라곤 어느 부유한 가정 어린 소녀가 날리는 비눗방울이나, 얼룩진 바닷가에 비친 기름때라거나, 유리창에 달라붙은 형광등의 잔상 뿐이라. 당신의 눈으로 본 세상은 어떤 색감인지. 나는 평생 알 길이 없겠지. 언젠가 당신이 나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 그 때 당신이 보았던 것을 토로해주길. 나의 짤막한 일대기는 여기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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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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