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빛날 테니까.

SF물을 빙자한 무언가.

“…그렇게 2XXX년인 현재, 우리들은 굉장히 발전된 과학기술로 보다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죠. 아마 인간은 지금보다 풍족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일 터입니다. 비록 각국의 자원이 현저히 부족한 상황이지만 지금까지 쌓아올린 기술력이 있으니 후대도 분명 괜찮을 것입니다. 이 세대에 태어난 여러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니 하고 싶은 것은 전부 하고 살도록 합시다!”

삑.

집중해서 듣고 있던 수업이 일시정지되어, 나는 책상에 올려져 있던 오렌지 쥬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하아, 하고 한숨을 쉬자 그제야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자에서 가볍게 일어나 기지개를 키고 있자, 위잉 소리와 함께 내 옆의 벽이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휴식 시간을 가질게. 오늘도 잘 다녀와. 3시까지는 돌아와야 하는 거 알지? 1분 전에 알람 장치가 울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유의하고 있어.]

“알고 있어. 가면 갈수록 잔소리쟁이가 되는 것 같다니까. 대체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대한민국 현행법 상으로, 17살은 여전히 미성년자야.]

“네, 네. 알았네요~”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진 다니까, 라고 불만스레 말하는 나에게 ‘소리’는 조그맣게 웃었다. 아무래도 성격 설정을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며 외투를 챙긴 나는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자연스레 그 벽을 통과했다.

그러자 방금과는 확연히 다른 시원한 풀내음이 풍겨왔다. 눈앞엔 익숙한, 하지만 늘 새로운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군데군데 꽃이 피어 있었고 저 너머엔 아주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오늘은 이런 풍경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팔등에 새겨진 시계를 들여다보니 아직 20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길게 늘어진 머리를 검지로 가볍게 쳐서 묶은 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부신 인공 햇빛의 너머로 조그맣게 날씨 조절 장치가 보였다. 오늘 이 구역의 날씨 예정이 맑음인 것은 이미 확인했다. 물론, 맑음이 아니더라도 초소형 날씨 조절 장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근방의 날씨를 바꿀 수는 있지만.

“그건 조금 낭만이 없지!”

기분 좋은 상쾌함을 느끼며 커다란 나무를 향해 들판을 거닐자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그에 따라 조그마한 꽃들이 규칙적으로 흔들리며 다리를 스쳤다. 이제는 이 느낌도 무척이나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 이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현실 구현 공간인 ‘초원’이다. 생물을 제외하고 옛날의 자연 환경을 그대로 구현한 ‘초현실 구현 공간’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지금 시대엔 인기가 사그라들었지만 오히려 인적이 드물다는 이유로 찾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이 ‘초현실 구현 공간’은 테마에 맞게 세계 각지의 자연 환경을 구현해 두어, 그 종류가 각 테마마다 100만개 이상이 된다고 한다. 게다가 공간의 풍경 뿐만 아니라 소리, 향기, 날씨… 심지어는 대기 환경까지 구현해 놓았기 때문에 질릴 일도 없다. 10년 동안 ‘초원’을 들락거린 나도 여전히 새로운 경치에 놀라곤 하니까.

“쓰읍, 하아……. 좋다. 바깥에 심어져 있는 인공 풀에서는 이런 냄새가 잘 안 난단 말이지. 왜 다들 모르는 걸까~ 소리였으면 동의해 줬을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리는 냄새를 맡을 수 없는 보이스형 인공지능이다. 이럴 땐 가끔 형태가 있는 개체를 구매할 걸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태어나 처음으로 직접 고른 인공지능이기에 처분하기도 아까운 마음에 계속 데리고는 있지만.

“…어라?”

나무에 가까워질수록 그 주변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멀리서 보고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거대한 나무와, 그 밑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그는 들에 피어있는 꽃에 지지 않을 정도로 색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팔을 뻗고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긴 소매와 치마가 펄럭거렸다. 길게 풀어진 검은 머리가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고, 그 밑의 풀들이 마치 그에 맞춰 움직이듯 흔들거리는 게 보였다. 그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지만 나풀거리는 동작과 나뭇잎 사이로 드는 햇빛에 비춰지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게만 느껴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지개, 같다…….”

그래서 그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주 작게 내뱉어진 말이었지만, 그에게는 닿은 것인지 하늘에 손을 뻗은 채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던 춤선과 옷에 비해 그 눈에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빨개진 눈가를 소매로 문지르며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내게서 눈을 돌려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마치 아주 멀리 있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풀이 밟히며 파스락 거리는 소리에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으며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 그 또한 살며시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거, 이식…… 받은 거야?”

그리고는 내 왼팔을 가리켰다. 그곳엔 시계가 새겨진 나의 피부가 있었다.

‘하긴, 보통은 이런 식으로 직접 몸에 새기진 않으니까. 칩을 이식하거나 하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프지 않지만, 아주 어릴 때. 소리를 만나기도 전에 집이 전소할 만큼 큰 불이 났다고 한다. 부모님은 그 사고로 사망, 나는 방화 대책이 철저하게 되어 있는 방에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왼쪽 팔과 손 부분에만 큰 화상을 입었고, 나를 거둬준 할머니께서 그 부위에 인공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을 해주었다…고 들었다.

끄덕인 나를 보고, 그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대체 뭐지?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 그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너는 뭐야? 왜 이런 곳에서 그런……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서 춤을 추고 있는 거야?”

내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자 그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불쑥 들이밀어진 나의 얼굴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가 나의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바라는 것이…… 있어.”

“바라는 것? 그거랑 춤이랑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하면 이루어진다고, 엄마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눈앞의 그가 한숨을 푹 쉬더니 나무 그늘 아래에 철퍼덕 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다리를 모아 끌어안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시금 말하기 시작했다.

“비가, 왔으면 좋겠어. 이곳에.”

“비? 그거라면 날씨 조절 장치를 쓰면…….”

“안 돼. 그러면 무지개가 뜨지 않으니까.”

“무지개…….”

그의 옷이 무지개처럼 형형색색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무지개를 보고 싶다면 홀로그램으로 키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태여 입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 얼굴에서 그것을 읽은 것인지, 소매를 꼼지락거리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때로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무지개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

“뭐? 그건 불가능하잖아!”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무지개는 자연이 풍부했던 옛날에도 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자연 환경이 살아남지 못해 인간의 과학기술로 그것들을 대체하기 시작한 지금의 시대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비조차 충분히 내리지 않아 초대형 날씨 조절 장치를 쓰는 시대에, 그 바람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말하는 그의 눈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기적을 일으켜야 해.”

“너…… 완전 옛날 사람 같다.”

“뭐?”

그는 내 말에 황당하단 듯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요즘 세상에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은 전부 이 공간처럼 구현하면 그만이다. 앉은 자리에서 더 강하게 느껴지는 풀내음, 잠이 올 정도로 포근한 햇빛, 원한다면 저 하늘에 무지개조차 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적’을 입에 담는단 것이 정말 100년 전, 아니 어쩌면 천 년 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상처, 아프진 않았어?”

갑자기 웬 상처? 싶은 생각에 잠시 고민을 하다, 이내 내 손등의 것을 얘기한단 것을 깨달았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어릴 때 다친 거라 아무렇지도 않아.”

“그럼 그 상처에 새겨진 기억도, 아프지 않아?”

“뭐?”

이번엔 내가 그의 말에 반문했다. 상처에 새겨진 기억이라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에 나는 아무런 말도 돌려줄 수 없었다. 또다시 길고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한숨처럼, 그 말이 이어졌다.

“나는, 엄마가 죽었어. 얼마 전에. 이곳은 엄마랑 어릴 때 함께 살았던 장소와 닮았거든. 물론 그곳도 진짜 자연은 아니었고, 이런 식으로 구현된 장소였지만. 엄마는… 평소에 많이 우울해 해서,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적어도 엄마가 뭐에 슬퍼하고 뭐에 기뻐하는지 열심히 살폈어. 그리고 무지개를 발견했지.”

“발견했다고?”

“응. 근처에 나이가 아주 많은 할아버지가 사셨는데, 늘 풀에… 아, 그걸 뭐라고 하더라. 아무튼 무슨 옛날 장치로 물을 뿌리셨어. 아마 자신이 마실 물을 나눠서 뿌리셨던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식으로 쓰는 물은 늘 구하기 힘드니까…….”

“정부에서 보급하는, 그 물을? 너무 아까운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도, 누구도 말리지 않았어. 물을 뿌리실 때의 얼굴이, 늘 행복해 보였거든. …아무튼 그래서 그날도, 할아버지가 물을 뿌리고 나랑 엄마는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물을 다 뿌리고 집으로 들어가신 후에, 본 거야. 아주 조그맣게 뜬, 무지개를.”

조그마한 기적. 순간적으로 그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사실 그게 우연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어. 엄마도 물, 정확히는 비를 좋아하셨거든. 요즘 사람 치고는 감상적이라며, 다들 한마디씩 하곤 했지만. …엄마가 있잖아. 그걸 보고 엄청 좋아했어. 평소에 잘 웃지도 않는 사람이,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했다니까. 나는 그래서 엄마한테 꼭, 다시 한 번 무지개를 보여줘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그리듯 희미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 말끝을 점점 흐렸다. 그제서야 이야기의 서두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결국엔 못 보여줬어. 이 옷도, 떼를 써서 물려받은 건데. 그러니까, 나는…….”

‘그 상처, 아프진 않았어?’ 이 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발전된 과학기술로도 치유할 수 없는, 무어라 이름붙일 수도 없는 종류의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이다.

“사후세계가 없다는 건 알아. 그것도 얼마 전에 밝혀진 거잖아. 그래도 있잖아. 문득, 엄마가 날 보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 정말 이상하지…….”

마치 혼잣말처럼 조용히 읊어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나의 팔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곳이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보니, 나는 왜 이곳만 다친 걸까……?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해보았자,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춤을 추는 거야. 비가 오기를 바라며. 무지개가 뜨기를 기다리며. 햇빛만 있는 세계는, 너무 쓸쓸하니까…….”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초원’의 공간을 다시금 둘러 보았다. 내가 아주 좋아했던 풍경이, 어쩐지 지금은 너무도 삭막하게 느껴졌다. 똑바로 바라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은, 인공 햇빛만이 조그마한 세상을 고요히 비추고 있었다.

삐비빅.

문득 손목에서 울린 알람 소리에 나는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보니 아직 수업을 다 듣지 않았었지. 서둘러 가지 않으면 소리가 걱정할 것이다.

“아…… 그게…… 나는, 이제 가야 해.”

그를 혼자 두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우물쭈물하며 건넨 말에 그는 나를 따라 천천히 일어났다. 희미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그의 눈에서는 여전히 깊은 슬픔이 느껴졌지만, 왠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올 거야?”

“…너는?”

물음에 물음으로 답한다며 어이없는 듯 쓴웃음을 지은 그가 이내 숨을 들이쉬고, 나에게 한걸음 다가와 아주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난 절망이 두려운 게 아냐.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지금은 이렇게 아프고 괴로워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비가 내려도….”

언젠가 빛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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