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Colony

블루 콜로니. 27

CN by BX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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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방심

차에서 나온 노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10월 말의 기온은 셔츠 한 장으로 버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가 팔을 쓸어내리며 클럽 입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노먼이 다가가자, 가드가 벽에 설치된 화면을 가리켰다.

"선불입니다. 결제부터 해주십시오."

노먼은 화면에 적힌 입장료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뭔 클럽이 이리 비싸요?"

"이런 데 처음 와봐요? 에덴 같은 곳에 비하면 여긴 그냥 거저 들여보내 주는 거지. 불만이면 딴 데 가시든가."

가드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에덴인지 뭔지, 이런 곳의 시세를 알 도리가 없는 노먼은 한숨을 내쉬며 화면 위로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음료는 무료겠죠?"

"무슨 소리. 전부 가격표가 있지."

결제가 완료되고, 노먼은 이건 반드시 FBI에 조사비로 청구하겠다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까 코너가 지나쳤던 곳과 비슷한 복도로 들어가자 곧바로 삑삑대는 소리가 울리고, 가드가 그를 멈춰 세웠다.

"전자기기는 못 가지고 들어갑니다."

"없어요. 다 차에 두고 왔다고요."

가드가 노먼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하. 거 진짜 빡빡하시네…."

노먼이 투덜대며 시계를 내밀었고 가드는 뒤에 있는 락커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찾으러 올 테니 잘 보관해 주세요."

"저런 시계는 누가 가져갈 생각도 안 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노먼은 헛웃음을 흘렸다. 가드부터 이런 식이면 이곳 종업원들의 태도도 별반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런 곳을 찾아 꾸역꾸역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그저 놀라웠다. 노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가 끝나는 지점에 로비가 보이고, 귀가 아플 정도로 쿵쿵대는 음악이 고막을 찔러왔다. 노먼은 춤을 추느라 정신없는 사람과 안드로이드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로비 가장 안쪽의 검은 문을 향해 다가갔다. 마치 빨간 원을 덧댄 것처럼 문에 달린 창문 내부로 붉은 조명이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선 노먼은 어렵지 않게 코너를 찾을 수 있었다. 홀 구석에 위치한 기둥 한편에 꼿꼿이 선 안드로이드는, 이 공간에 있는 누구보다 단정하고 정갈해서 마치 종업원처럼 보였다. 코너가 부드럽게 지은 미소에 지미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잔뜩 걱정했던 것과 달리, 퍽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 모습에 노먼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코너는 말하다 말고 문득 머리를 들어 노먼과 시선을 마주했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뜬 그에게, 노먼은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다행히 그의 신호를 알아들은 건지 코너는 지미에게 몇 마디를 뱉은 후 밖으로 나갔다. 인간은 코너의 뒷모습을 보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노먼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노먼은 지미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몸을 돌리려다가 뒤에 있던 누군가와 쿵, 하고 부딪혔다. 노먼이 옆으로 휘청댔고 상대는 노먼의 어깨를 받쳐주었다. 곧바로 중심을 잡고 선 노먼이 고개를 들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남성이, 노먼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하지만 노먼의 신경은 온통 뒤에 쏠려있었다. 지미가 그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고, 퍼킨스에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던 노먼도 지미를 직접 마주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잠깐만…."

남성이 뭐라 하려 했지만, 노먼은 그저 얼굴을 숙이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홀 한편에 길게 설치된 바로 향한 그는 테이블 주변을 둘러싼 인간 사이에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만취한 인간 하나가 눈이 풀려 무어라 중얼대며 옆으로 비켜났고, 노먼은 홀이 훤히 보이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위스키 한 잔 주세요."

바텐더가 말없이 테이블 한쪽에 위치한 태블릿을 가리켰고 노먼은 화면에 손을 얹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결제가 완료되고 노먼은 화면에 표시된 가격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 고생을 하는 스스로가 FBI로부터 공짜 술 정돈 얻어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비싼 술값을 보고도 약간은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었다.

눈을 들어 홀을 쭉 둘러본 노먼은 아까 부딪힌 남자가 지미와 대화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지미의 말을 듣고 있었고 지미는 마치 보고를 하듯 쉼 없이 이야기했다. 남자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다말고 노먼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둘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지만, 지미가 덩달아 남자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한 탓에 노먼은 괜스레 몸을 틀어 술병 진열대를 구경하는 척했다. 잠시 뒤 다시 돌아보니 이제 지미는 다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코너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안드로이드는 인간들 틈새에 선 노먼과 곧장 시선을 마주했다. 노먼은 바텐더가 건네는 잔을 받아들며 의연한 표정으로 머리를 다른 쪽으로 향했으나 눈동자만큼은 계속해서 코너를 힐끔댔다.

안드로이드는 손에 무언가를 들지도, 그렇다고 어딘가에 기대지도 않은 채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그에게 쉴 새 없이 다가오고 말을 거는 인간들로 인해 꽤 잘 어우러져 보였다. 코너는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의 말에 잘 응대하는 듯했다. 굳이 어색한 점을 찾자면, 군인처럼 양팔을 몸 옆에 붙이고 차렷하고 선 자세랄까. 노먼은 다음번엔 좀 더 자연스럽게 인간처럼 서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위스키를 홀짝였다.

"파트너를 기다리는 중인가요?"

노먼이 옆을 돌아봤다. 검은 머리카락을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안드로이드가 노먼이 들고 있는 잔에 손을 얹으며 웃었다.

"청승맞게 술이나 마실 얼굴은 아닌데. 우리랑 놀지 않을래요?"

다른 안드로이드도 다가와 노먼의 팔을 잡았고 노먼은 난감한 미소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서요."

"왜요? 여자들은 싫어요? 제 친구 중에 남성형도 있는데, 소개해 줄까요?"

노먼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고맙지만 됐습니다."

안드로이드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이며 노먼의 잔을 뺏어 들었다.

"술 마시려고 이런 곳에 온 건 아니잖아요? 뭐야, 거의 마시지도 않았네?"

그러곤 잔의 내용물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노먼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런 걸 먹어도 괜찮아요?"

옆에 선 다른 안드로이드가 깔깔대며 웃었다.

"쟤는 조리사로 일하던 안드로이드예요. 몸 안에 음식을 맛보고 처리하는 저장고가 존재하죠. 그리고, 다른 안드로이드도 이 정도는 분해할 능력이 되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술잔을 테이블 위에 거꾸로 엎어놓은 안드로이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저 남자에게 관심 있으면 가서 얘기라도 걸어보는 게 어때요?"

노먼은 여자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코너는 이제 또 다른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노먼이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처럼 청승을 떨고 싶은 날이라서요."

거듭된 거절에, 두 안드로이드는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노먼은 테이블 위 텅 비어버린 잔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마시지않고 있기엔, 자꾸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신경 쓰여 결국엔 또다시 손을 들어 바텐더를 불러야했다.

"여기, 위스키 한 잔만 더 주세요."

“위스키는 떨어졌습니다.”

바텐더의 냉담한 어투에 노먼이 미간을 치켜올렸다.

“저 사람들이 마시는 건 뭔데요?”

"저게 마지막입니다."

노먼은 피곤한 얼굴로 손을 휘적였다.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

바텐더가 태블릿을 가리키자, 노먼은 눈알을 굴리며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뭔지는 몰라도 더럽게 비싼 술이 결제되었고, 바텐더가 병을 들고 술을 꼴꼴 따라 노먼 앞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잔뜩 태워 먹은 커피처럼 시꺼먼 액체 속에 체리 하나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노먼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게 뭔가요?"

"시그니쳐 칵테일, 블랙입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생긴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본 노먼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생각보다 훨씬 달짝지근한 향에 조금 놀랐지만,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노먼은 잔을 옆에 내려두고 다시금 홀을 둘러봤다. 코너는 코너대로 계속해서 주변을 관찰하는 듯했고, 노먼도 코너를 주시함과 동시에 수상한 인물이 있는지 살폈다. 범인의 프로파일과 비슷해보이는 자들이 몇 있긴 했으나 그들 모두 당장의 욕구를 채우기 급급해보일 뿐, 따로 안드로이드를 꼬셔서 데리고 나가려 하지는 않았다. 노먼은 무료한 표정으로 꾸준히 자신에게 다가오고 말을 거는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단답으로 쫓아내며, 지미가 멀리서 코너의 얼굴을 힐끔대는걸 구경했다.

그리고 노먼은, 어느순간 자신도 모르게 공을 쥐듯 손가락을 둥글게 굴리고 손목을 꺾어 작게 튕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릿속으로 퉁, 퉁,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ARI도, 장갑도 없지만 이미 수천번 플레이한 게임은 노먼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았고, 노먼은 상상속의 공을 잡아채고 다시금 던졌다. 공은 바닥을 한 번 튕기고 역시나 상상속의 벽에 맞은 후 노먼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노먼은 자신의 앞에 ARI 창이 보인다는 듯이, 손가락을 옆으로 살짝 밀어 게임을 종료시키는 손짓을 했다. 옆에 앉은 취객이 이상한 눈으로 노먼을 바라봤고 노먼은 아무렇지 않게 턱을 괴고 눈을 꿈뻑였다.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덧 11시 반을 향해가는 중이었고, 노먼은 작게 입을 벌리고 하품했다. 코너는 지겹지도 않은지 꼿꼿한 몸으로 인간들과 대화하는 중이었다. 야무진 태도와 멀리서도 맑게 빛나는 눈빛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날카롭게 번득였지만, 인간인 노먼은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DPD에 들리느라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데다가 하루 종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이제는 환기도 안 되는 지하 클럽에 앉아 끈적이는 신음성을 배경음으로 듣고 있자니 집중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노먼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칵테일 잔 아래에 가라앉은 체리의 꼭지를 손가락으로 집어 올려 무심한 얼굴로 입에 가져갔다. 검붉은 색의 알을 깨물자 톡 쏘는 향과 함께 시큼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적셨고, 술에 절인 탓인가 과일은 한층 더 달콤하고 쌉싸름하게 느껴졌다. 노먼은 텁텁해진 입을 쩝, 다시며 바텐더에게 말했다.

"물 한 잔 부탁합니다."

이제는 바텐더가 태블릿을 가리켜도 놀라지 않았다. 결제가 완료되자 바텐더는 컵에 수돗물을 받아 건네주었다.

"…손님을 아주 벗겨 먹으려는구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투덜댄 노먼이 물을 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니 졸음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지루한가?"

노먼이 눈을 돌려 옆에 선 사람을 바라봤다. 깔끔히 넘긴 금발 군데군데 흰머리가 비쳤고, 이 붉은 공간과 약간 이질적으로 보이는 파란 눈을 가진 중년 남성이 그를 향해 빙긋 웃고 있었다. 아까 자신과 부딪힌 사람이란걸 알아챈 노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약간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나 봐?”

노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봤다. 지미와 코너의 행동을 생각하면 이미 둘이 약속을 잡은 게 분명했고, 퍼킨스가 내려오지 않은 걸 봐서는 그에게 대기하라 말했을 터였다. 다만 그게 언젠지 알리가 없는 노먼에겐 그저 하염없이 기다려야하는 이 시간이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노먼은 또다시 얕게 하품했다.

“피곤하면 들어가지 그래?”

“그러려고요.”

노먼이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냉담한 그 반응에도 남자는 자리를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노먼 옆에 놓인 잔을 보곤 말했다.

“술이 입에 맞지 않나 보네.”

“저한텐 조금 달아서요.”

“어떤 걸 좋아하는데? 한잔 사줄게.”

노먼은 남자를 쳐다봤다. 꽤 준수한 인상의 남자는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괜찮습니다. 남이 사는 술은 안 마셔서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조심성이 많으신 분이군. 하기야, 무서운 세상이니 신중해서 나쁠 건 없지.”

노먼은 피식 웃었다.

“마음이 상당히 넓으시네요. 과연, 이런 곳을 경영하는 분이시라면 웬만한 성품은 아닐테죠.”

남자가 놀란 눈으로 노먼을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지?”

“여기 직원들이 당신을 대하는 걸 봤으니까요. 입은 옷과, 나이를 봐선 그 정도 직위는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눈썰미가 좋네. 맞아. 이 클럽의 오너, 대런이야.”

노먼은 아까부터 이 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찌를듯한 그 시선은 졸지에 자신이 감시당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줬다. 불편하긴 했지만 딱히 귀찮게 구는 것도 아니었고, 노먼이 찾는 목표는 따로 있었기에 애써 무시하며 수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남자는 기어코 말을 걸어왔고 이제는 노먼에게 악수까지 청했다. 노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대충 상대해 주고 보내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노먼이, 결국 몸을 돌려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생각보다 강한 악력에 노먼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손이 꽤 크시네요.”

“손만 큰 건 아니지.”

대런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노먼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대런이 가까이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안드로이드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던데, 인간은 어때?"

노먼은 순간 얼굴로 훅 끼쳐오는 그의 숨결에서 익숙한 향을 맡았다. 무겁고도 달콤한 냄새가 시원한 박하 향과 어우러졌고, 스파이스 계열 특유의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멘톨, 바닐린, 계피, …던보 로얄. 낮에 지미에게서 맡은 바로 그 담배 냄새였다.

노먼은 고개를 뒤로 젖혀 대런의 얼굴과 체구를 제대로 살폈다. 다부진 몸과 체격, 부드러운 말투와 매력적인 외형, 그리고 절제된 태도. 하지만 그는 노먼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안드로이드 쪽으론 아예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기에, 노먼 역시 이 자에 대한 신경을 완전히 끄고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이곳의 오너치고 안드로이드에겐 너무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요."

노먼의 무심한 질문에 대런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 그제만 해도 귀여운 안드로이드 세 대와 재밌는 시간을 보냈지. 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좀 더 관심이 가는군."

노먼이 얇은 입술을 들어 올렸다. 그도 이제 테이블에서 몸을 떼고 남자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세 대나요? 꽤 하시나 보네요."

"오너라면 응당 자기 손님정돈 만족시킬 줄 알아야지. 내 가게에 찾아왔는데 지루해보이면, 주인도 마음이 좋지 않거든."

"지루해보이는 사람이라면 저기 다른 손님도 많잖아요?"

"글쎄. 지금은 너 외엔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노먼이 눈매를 접었다.

"이거 영광인데요. 그럼, 평소에는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에게 이렇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건가요?"

"뭐, 그런 편이지."

"어때요, 그들은? 이런 느끼한 대사에도 잘 넘어와요?"

"인간보다는, 훨씬. 보아하니 네 앞에선 말투를 좀 고쳐야겠군."

넉살 좋은 대답에 노먼이 낮게 웃었다. 대런도 싱긋 미소하며 노먼의 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노먼은 아주 약간 움찔했으나, 천연한 얼굴로 대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대런은 상대가 완전히 경계를 풀었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좀 더 아래로 내렸고 노먼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안드로이드를 낚으면, 어디로 데려가나요? 여기처럼 시끄러운 곳에서 놀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물론. 아주 조용하고 멋진 곳이 있지. 보여줄까?"

"글쎄요. 아직은 밖으로 나가고 싶진 않은데…."

"걱정하지 마. 바로 아래층이니까."

대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노먼이 고개를 빼 들었다. 바 좌측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작은 문이 나 있었다. 그걸 본 노먼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특실인가요?"

"비슷해. 내가 초대한 손님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흥미로운 물건이 아주 많아."

노먼의 눈이 빛나고,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조금 답답해 보이는데요. 전 여기서 놀고 싶어요."

대런의 눈이 잠깐 실망으로 물들었지만, 곧바로 태연자약한 얼굴로 돌아왔다.

"뭐, 좋아. 시간은 많으니,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얘기해."

그럴 일은 없었다. 위치를 알아냈으니 이제 코너와 퍼킨스를 불러 안으로 쳐들어가든, 영장을 받아오든 하면 될 일이었다. 노먼은 여태껏 자기 엉덩이를 주물럭대는 대런의 팔을 치우고 몸을 뒤로 물렀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딜 가려고?"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여기 있을 거죠?"

대런이 순순히 손을 떼며 대답했다.

"다녀와. 기다릴테니."

노먼은 옅게 미소 짓고는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으나 갑자기 풀리는 다리에 휘청였다. 그가 재빨리 테이블에 손을 얹고 몸을 지탱하자 대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괜찮아?"

너무 한자리에 오래 서 있어서 그런가, 발끝에 닿는 감각이 둔해졌다. 노먼은 잠시 테이블 옆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어색하게 웃었다.

"다리가 저려서요. 잠깐 앉아 있으면 돼요."

양 소매를 걷어올린 노먼은 축축이 젖어 드는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조금…, 덥지 않아요?"

"날이 추워져서 내부 온도를 올린 모양인가 보군. 더우면 셔츠를 풀지 그래?"

대런의 목소리가 음악 소리에 묻혀 약간 뭉개져서 들려왔다. 노먼은 한차례 머리를 저었다. 주변을 둘러싼 소음이 마치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듯 둔탁하게 울리고, 노먼은 어쩐지 조금 목이 말랐다. 그는 옆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다가 손가락에 힘이 풀려 놓쳐버렸다. 대런이 빠르게 컵을 낚아챘지만, 안에 든 내용물은 이미 왕창 쏟아져 바닥을 흥건히 적신 뒤였다. 대런이 물었다.

"어디 안 좋은가?"

노먼은 컵을 쥔 대런의 손을 보았다. 왼손잡이.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금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사교성이 좋으며,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40대에서 50대 초반 남성. 노먼은 휴즈의 태블릿에서 본 사건 파일 속 사진을 떠올렸다. 거기엔 한쪽 안구가 비어 있는 인간의 시신이 가득했다.

'…피해자의 키와 체격을 봐선 쉽게 제압할 수 없었을 텐데도, 반항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아마 검출되지 않을 약물을 썼을 가능성도 보이네요.'

노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입안에서 떫은 맛이 느껴졌고 목이 타는 듯했다. 그가 바텐더에게 손짓했다.

"물 한 잔 주시겠어요?"

"다 떨어졌습니다."

노먼이 눈을 들어 바텐더를 쳐다봤다. 그는 빙글대는 표정으로 셰이커에 위스키를 부은 후 위아래로 흔들었다. 얼음이 용기 내부에 부딪혀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먼은 천천히 팔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다른 잔을 잡았다. 손끝에 닿은 유리의 감촉이 다소 이상했다. 잔 안에서 찰랑대는 칵테일의 검은빛은, 붉은 조명을 받아 마치 시신에서 흘러나온 오래된 혈액처럼 변색되어 보였다. 노먼은 잔을 올려 입술 가까이 가져가 혀끝을 축였다. 왜 하필 이 순간 감식을 돌리는 코너가 생각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갑던 칵테일은 조금 미지근해졌으나, 여전히 혀를 아릴 정도로 달았다. 아까 먹은 체리의 알싸한 향을 맡은 노먼이 허탈하게 웃으며 잔을 내려놨다.

"돈을 있는 대로 받아먹고 이딴 술을 내오다니. 상도덕이 너무 없으시네……."

노먼의 몸이 기우뚱, 앞으로 고꾸라졌고 대런이 그의 허리를 움켜쥐며 부축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답답한 공기가 가슴을 가득채우는 듯해 노먼은 숨을 쉬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노먼이 대런의 몸을 밀치려 했으나 재차 헛손질을 했고, 결국 앞에 선 남자의 어깨에 풀썩 머리를 박았다. 대런이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저런. 아무래도 바래다줘야겠군. 난 먼저 퇴근할 테니 정리하고 들어가."

"네, 마스터. 좋은 시간 되세요."

바텐더가 다른 손님의 잔에 위스키를 쪼르륵 따르며 대답했다. 대런이 노먼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둘렀고, 갈색 머리통이 아래로 푹 꺾였다. 노먼은 겨우 목을 가누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 멀리,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안드로이드의 얼굴이 보였다. 노먼이 팔을 들려고 했지만 마치 손끝에 무거운 추를 단 듯 자꾸만 아래로 쳐졌다. 정신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했으나 몸이, 팔이, 입술이,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코, 너…….”

노먼이 몇 음절을 내뱉었지만, 주변에 깔린 소음은 인간이 쥐어짜 낸 목소리를 완전히 파묻어 버렸다. 그는 자신을 잡아끄는 손에 저항하지도 못한 채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아래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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