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28
#28. 수집가
대런은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부축한 남자의 키가 제법 큰 탓에,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으나 대런은 팔을 고쳐 들고 복도 끝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침대가 보였고 그 옆엔 1인용 붉은 소파가 놓였다. 어젯밤 작업 후, 제대로 환기하지 않은 바람에 포르말린 냄새가 아직도 방에 짙게 깔려있었다. 남자가 옆에서 욱, 하고 구역질을 해댔다.
"미안. 냄새는 금방 빠질 거야."
대런이 스위치를 눌러 환풍기를 가동하고 남자를 침대 위에 앉혔다. 남자가 맥없이 옆으로 쓰러지며 고동색 머리칼이 시트 위로 흩어졌다. 대런이 재킷과 넥타이를 벗어 소파에 던져놓을 동안 남자는 반쯤 감긴 눈으로 대런의 하는 행동을 가만히 구경했다. 무릎을 굽힌 대런이 게슴츠레하게 뜬 은회색 눈을 마주 보며 남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는 미동 없이 대런의 손길을 느꼈다.
대런은 곧 일어나 남자의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려 바로 눕히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이 어때?"
감정 없는 나른한 눈동자가 대런을 마주보았고,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잔뜩 흐려진 홍채가 가려졌다가 드러났다. 대런이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리자 남자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감각은 금방 돌아올 거야. 조금만 참아. 아주 기분 좋은 경험을 시켜줄테니."
남자가 다시금 눈을 깜빡였다. 천장의 조명이 눈동자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대런은 아랫배가 뻐근하게 조여드는 감각을 느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남자의 목을 가만히 움켜쥐었지만, 차마 힘을 주진 못하고 손을 내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대런은 정말 간만에 드는 흥분감에 몸을 떨었다. 남자의 귓불을 매만진 그가 재차 물었다.
"지금쯤이면 약효가 슬슬 돌 시간인데, 기분은 어때? 좋지 않아?"
남자가 혼몽한 눈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런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름이 뭐야?"
남자의 입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먼…."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네 눈처럼 예쁜 이름이야."
그 말을 들은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가 느릿하지만 조금 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래요…?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
"정말? 네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들어본 적이 없어?"
노먼은 눈알을 도륵도륵 굴리다가 아, 하고 생각났다는 듯 대답했다.
"한 명이 그런 얘길 하긴 했었죠."
"누구? 전 애인?"
"애인은 아니고… 형이요."
"그래? 형제끼리 아주 우애가 좋았나 보네."
"맞아요. 감방에 들어가기 전까진 정말 좋았죠."
"뭐?"
노먼은 말없이 헤실댔다. 그 꼴이 영락없이 약에 취한 모습이라, 대런은 헛웃음을 흘렸다.
"네 집에도 부모 속 깨나 썩이는 골칫거리가 있나 보네. 하긴, 모든 가정엔 검은 양 한 마리씩은 있으니까."
노먼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대런을 바라봤다.
"당신 집의 검은 양은 누구죠?"
대런은 침묵했으나 노먼은 알만하다는 듯 삐뚜름하게 웃었다.
"말할 것도 없죠. …이런 클럽을 운영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할 부모는 많지 않을 테니."
대런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노먼은 그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미안해요…. 취하면 말이 좀 거침없이 나가는 편이라."
대런은 침착하게 탁자에 놓인 구속구를 집어 들었다.
"뭐, 괜찮아. 앞으로 말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얘긴 전부 해도 돼."
대런이 노먼의 손목에 가죽띠를 두르며 말했다. 노먼은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대런에게 손을 내맡겼다. 두꺼운 구속구를 양 손목에 각각 채운 대런은 노먼의 팔을 위로 교차시켜 침대 프레임에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잠갔다. 노먼이 팔을 움직이자, 가죽띠와 연결된 사슬이 부딪혀 차륵대는 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노먼이 약간 투덜댔다.
"이게 전부예요? 흥미로운 물건이 많다면서요."
대런이 웃으며 탁자 서랍을 열어 작은 의료용 겸자를 꺼내 들었다. 철제 표면 위로, 조명에서 흘러나온 빛이 반사되며 노먼의 동공에 맺혔다. 대런이 그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구경하며 옆에 앉아 조곤조곤 설명했다.
"블랙 젬을 먹으면, 죽은 뒤에도 홍채가 고유의 예쁜 색으로 보이지. 분리하고 나서도 흐려지거나 탁해지지 않고 그대로야. 신기하지? 뭐, 후처리는 해야 겠지만, 너 정도로 맑은 눈알은 그냥 담가놓기만 해도 될 것 같긴 하네."
노먼은 콧등을 찡그렸다.
"눈알은 담가서 뭐 하려고요?"
"이 순간을 추억해야지. 걱정하지 마. 그건 마지막 순위니까. 일단 네게 충분한 즐거움을 알려주는 게 먼저야."
남은 상의 마저 벗어 던진 대런이 맨 상체로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가 팔을 내려 노먼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노먼이 몸을 비틀자 철제 프레임에서 철컹이는 소리가 들렸다.
대런이 쉬, 하는 소리로 노먼을 달랬다.
"무서워하지 마…. 다 끝나면, 그래. 너에게 내 멋진 컬렉션을 구경시켜 줄게."
노먼은 대런의 말에 눈을 빛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정말요? 신난다. 저도 수집품 구경하는 거 좋아하는데."
대런이 조용히 웃으며 이번엔 본인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는 최대한 느긋하게 이 순간을 즐길 생각이었고, 상대는 그가 바란 대로 매우 고분고분하고 협조적이었다. 대런이 노먼의 상체를 두툼한 손으로 쓸어올리며 물었다.
"그래? 주로 어떤 수집품에 관심이 있지? 동전? 우표? 야구공? 말만 해. 웬만한 건 다 보여줄 수 있으니."
노먼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냈다.
"그건 너무 시시해요. 좀 더 큰 거 없어요? 음, 한 농구공 정도는 되는 거로…."
"농구공? 아쉽지만 그건 없어.”
"그래요? 비슷한 건 있을 텐데?"
노먼의 말에 대런은 왠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좀 전까진 잔뜩 풀어져 있던 초점이, 지금은 자신의 눈동자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했다. 노먼이 짙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구경하고 싶은 건, 안드로이드의 머리야."
"…뭐?"
대런이 주춤대자, 노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흥미가 식어버린 얼굴로 입을 비죽였다. 그는 또다시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수집품은 재미없어요. 그거 말고 딴 거 하고 놀아요."
대런은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노먼이 나른한 얼굴로 속삭였다.
"경찰과 도둑 놀이, 어때요?"
대런이 대답하지 않자 노먼이 고개를 젓고는 정정했다.
"아니, 아니지. FBI와 연쇄살인마 놀이.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대런은 천천히 남자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노먼이 그를 보며 빙글댔다.
"당신이 FBI 할래요? 아무래도 변태 같은 살인마보단 그게 훨씬 멋있겠죠?"
노먼은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분명 손을 묶어놓았는데, 침대 프레임엔 활짝 열린 자물쇠만 달랑거리는 중이었다. 노먼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어 툭 던졌고 대런은 얼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싸구려 성인 장난감이 아닌, 무게감이 느껴지는 진짜 수갑이 대런의 눈에 비쳤다.
노먼이 그에게 양손을 내밀며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체포해 주세요, 요원님."
대런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가 노먼을 밀쳐 넘어뜨리고 위에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먼은 그의 팔을 떨쳐내는 대신, 오히려 강하게 틀어쥔 후 허리에 반동을 줘서 순식간에 다리를 높게 끌어올렸다. 팔이 잡힌 대런은 피할새도 없이 허벅지 사이에 양팔과 머리가 끼여버렸다. 노먼이 다리를 교차시켜 역으로 대런의 숨통을 졸랐다. 대런이 막혀오는 숨에 마구 버둥댔지만 노먼은 그 자세 그대로 다리를 끌어당김과 동시에, 주먹으로 대런의 안면을 가격했다.
“억!”
대런이 짧은 비명을 질렀고 노먼은 다리를 풀고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대런은 그 충격에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벗다만 바지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대런은 바지춤을 추켜올릴 정신도 없이 절뚝이며 문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이번엔 뒤에서 머리칼을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다시 한번 침대 위로 나자빠졌다.
대런의 위에 올라탄 노먼이 손목 위로 수갑을 가져다 대었다. 대런은 마구 몸부림치며 팔을 휘둘렀고 노먼의 손에서 튕겨 나간 수갑은 찰그랑 소리를 내며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대런에겐 천만다행으로, 노먼은 아직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런에겐 무척이나 불행히도, 노먼은 이미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수갑을 놓쳐버린 대신 양손이 자유로워진 노먼이 대런의 얼굴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무식한 속도로 머리를 거세게 박아버렸다. 두개골 안에서 거대한 종이 울린 듯한 소리가 들리고, 대런은 코뼈가 작살 나는 끔찍한 통증와 함께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끄으으…."
노먼은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노먼이 골을 울리는 띵한 통증을 느끼고 있을 동안 대런은 코피가 기도로 역류하는 바람에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노먼은 비틀대며 침대 아래에 떨어진 수갑을 주워 들어 대런의 손목에 채우고, 침대 프레임에 연결해 다른 쪽 손목마저 단단히 결박했다.
"이런 플레이 좋아하지? 네가 죽기 전까지 실컷 즐길 수 있을 거다, 개자식아…."
대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목구멍에서 끄륵, 하는 소리만 흘렸다. 노먼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한 대 더 갈겼고, 덕분에 대런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가며 입안에 고인 피가 사방으로 튀어 침대 위에 흩어졌다. 대런은 웩웩대는 역겨운 소리와 함께 피를 왕창 토해냈다. 그 꼴을 바라보던 노먼은 욱신거리는 이마를 재차 문질렀다. 시야가 너무 밝았고, 귀에선 이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네 수집품은 어딨어?"
노먼이 대런의 턱을 움켜쥐고 물었지만 대런은 콜록대며 기침하기 바빴다. 그가 토해낸 피가 노먼의 얼굴에도 튀었고, 노먼은 욕설을 내뱉으며 눈가를 닦았다. 그가 재촉했다.
"네가 살해한 피해자들의 머리랑 안구, 어디에 뒀냐고."
대런은 어느 정도 의식이 돌아온 듯했으나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노먼은 끊임없이 지끈거리는 머리와, 울렁이는 속에 인상을 구겼다.
"넌 이미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쓸데없이 대가리 굴리지 말고 빨리 불어!"
하지만 범인은 자기 입으로 증거를 나불댈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대런이 완전히 입을 다물었고 노먼은 다시금 머리를 움켜쥐었다. 양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은 탓인지, 아니면 약기운 때문인지, 한동안 사라졌던 발작 증세가 나타나고 있었다. 노먼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굽혔다.
대런은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의 배 위에 웅크리고 앉은 남자를 내려다봤다. 그가 잔뜩 터진 입가를 간신히 벌렸고, 그 사이로 코 막힌 맹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무, 무식하게 처박았으니…. 많이 아픈가봐. 약, 을 줄까?"
노먼은 그저 씩씩대는 숨만 내쉬었다. 대런이 계속해서 떠벌렸다.
"블랙 젬은 진통 효과도 있어. 날, 풀어주면 가져다 줄...."
대런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노먼이 또다시 그의 머리를 잡고 이마를 쾅 박았고, 대런은 안면의 골절이 가져오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의식을 놓아버렸다. 듣기 싫은 인간의 목소리가 끊기니 노먼은 그제야 정신이 조금 맑아진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대런의 바지는 이미 훌렁 벗겨져 침대 아래에 나뒹굴고, 진즉에 벗어놓은 벨트 역시 그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노먼은 시체처럼 잠잠해진 남자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다시 한 번 대런의 손목 수갑을 확인하고, 다리마저 벨트로 묶어 단단히 결박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상태로 몸싸움을 벌인 직후인지라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오르고 힘이 쭉 빠졌다. 노먼은 침대 옆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았고 대런이 올려놓은 비싼 정장 재킷이 아래에 깔려 형편없이 구겨졌다. 숨을 훅, 내쉰 그가 소파에 등을 파묻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퍼킨스와 코너를 불러 이 자식을 얼른 잡아 처넣고 심문해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노먼은 대런이 끙끙대는 소리를 배경 삼아 눈을 감았다.
"움직이지 마! 당장 손들고 바닥에 엎드…."
퍼킨스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한 발짝 늦게 들어온 코너도 퍼킨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멈칫했다. 하얀 시트 위로,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남자가 손발이 묶인 채 나신으로 누워있었다.
코너는 고개를 돌려 소파에 늘어지게 앉은 다른 인간을 바라봤다. 소란에 깨어난 건지, 노먼이 피로한 눈으로 고개를 바로 세우고 둘을 바라봤다. 양손목에는 가죽으로 된 구속구가 채워져있었고 셔츠는 완전히 풀어 헤쳐져 곳곳에 시뻘건 얼룩이 묻었다. 노먼은 얼굴부터 몸, 양손까지 피에 흥건히 젖은 상태로 태연스레 말했다.
"왜 이리 늦게 왔어? 깜빡 잠들 뻔했잖아."
퍼킨스는 침대에 누운 남성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남자의 얼굴은 처참했다. 팅팅 부은 눈은 시퍼런 멍이 들었고 코뼈가 부러진 듯 이상한 모양으로 휘어있었다. 앞니 두 개가 비었고 입술은 찢어져 너덜거렸다. 퍼킨스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들어 남자의 경동맥에 가져다 대었다. 꽤 심하게 얻어터졌지만, 일단 죽지는 않았다.
퍼킨스가 대런의 생사를 확인할 동안 코너는 허리를 굽혀 노먼을 살폈다. 피범벅인 것과 달리, 눈에 띠는 큰 부상은 없어보였다. 노먼의 이마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낸 코너가 작게 부푼 혹을 발견했다. 상처를 만지는 손길에 노먼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지만 입은 계속해서 비실비실 웃음을 흘려댔다.
코너의 눈에 붉게 달아오른 입술과 열 오른 뺨이 비쳤다. 그가 조심스레 팔을 들어 노먼의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인간의 체온은 뜨거웠으며, 가까이 느껴지는 숨결에선 달큰한 냄새가 났다. 서늘한 기계의 손에 뺨을 비빈 노먼이 흐트러진 눈동자로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좇았다.
옆으로 다가온 퍼킨스가 노먼의 확장된 동공을 바라보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뭘 처먹은 거야?”
노먼은 빙긋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블랙 젬. 맛있어.”
코너가 손을 내리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까 제게는 아무거나 먹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노먼은 왜 마신 거죠?”
노먼이 코너의 눈앞에 검지를 치켜들고 좌에서 우로 팔을 크게 휘저었다.
“땡! 틀렸어요. 전 남이 사주는 걸 먹지 말라 했지, 제 돈주고 제가 사 먹는 건 괜찮다 했죠…. 어라, 근데 난 내가 사 먹었는데. 아닌가? 기억이 안 나네…. 얘가 사줬나?”
노먼이 다시금 입맛을 쩝 다셨고, 사람 열받게 하는 그 꼬락서니에 긴장이 풀린 퍼킨스가 눈알을 굴렸다.
“완전 맛이 갔네.”
그가 총을 허리춤에 꽂고 노먼을 일으켜 세웠다. 노먼이 앓는 소리를 내며 비틀댔고, 퍼킨스도 덩달아 휘청거렸다.
”아, 똑바로 서라고 좀!”
“아직 나가면 안돼…. 증거를 찾은 다음에 가야지, 리처드 이 멍청아….”
노먼이 칭얼댔다. 퍼킨스는 일단 이 자식부터 병원에 처넣고 와야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안드로이드를 불렀다.
“이봐, 코너! 노먼 좀 데리고….”
하지만 노먼이 괜찮은 걸 본 코너는 이제 인간의 안위는 관심 밖이었다. 그가 눈을 돌려 방 안을 샅샅이 살폈다. 수집품은 분명 근처에 있을 터였다. 코너의 시각 처리장치로 방 곳곳의 정보가 들어오고, 그는 곧바로 벽 한 편에 얼룩덜룩 증발한 티리움 자국을 발견했다.
코너가 가까이 다가가 벽 틈새로 미세하게 난 홈을 찾아냈다. 홈을 누르자,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벽이 뒤로 밀려났다. 새까만 어둠이 깔린 또 다른 밀실이 보였고 안쪽에서부터 역한 향이 퍼져 나왔다. 코너가 벽에 박힌 스위치를 누름과 동시에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노먼은 그리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재차 비틀거렸고, 퍼킨스가 인상을 한껏 쓰며 노먼을 부축해 코너가 찾아낸 방으로 향했다. 벽 너머로 보이는 공간은 구역별로 나뉘어 정갈하게 정리된 박물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박제된 동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나비와 새 수십 종, 크기가 제각각인 포유류과 동물이 여럿 보였다. 새빨간 벽은 온통 사슴뿔로 뒤덮여, 단풍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해져버린 늦가을의 정원 같은 스산함을 풍겼다.
코너는 한 나무 선반 앞에 서 있었다. 표정없는 그의 옆얼굴에는, 관자놀이에 박힌 LED만 샛노란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퍼킨스는 그것과 정확히 똑같이 생긴 회색고리들을 바라봤다. 안드로이드의 둥근 머리통이 줄을 지어 나열되었고 그들은 모두 눈을 부릅뜬 채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모양새로 배치되어 있었다. 퍼킨스는 할 말을 잃었다. 안드로이드 모델이 매우 많다는 건 알았으나 이건 그 다양성을 깨닫는 데 최악의 방법이었다. 대번에 속이 메스꺼워진 퍼킨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눈에 비치는 광경에 아주 약간 후회했다.
옆 선반에는 똑같은 크기의 유리병이 열을 맞춰 진열되었다. 투명한 액체로 가득찬 병 안에, 제각기 다른 색의 안구가 바닥에 가라앉아 퍼킨스를 바라봤다. 표면에 붙은 작은 분류표 위로 안구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이름과 나이가 적혔고, 사망 시일처럼 보이는 날짜도 쓰여있었다. 코를 톡 쏘는 포르말린 냄새를 참지 못한 노먼이 웁,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막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진 퍼킨스가 반사적으로 노먼을 밀쳤다.
노먼은 비척대면서 겨우겨우 밀실 밖을 나서서 침대 프레임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대런의 얼굴 위로 게워 냈다. 불운하게도 범인은 중간에 깨어나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생쇼를 해댔다.
퍼킨스는 역겨운 오바이트 소리와 대런의 비명을 귓등으로 들으며 휴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바로 연결이 되었고, 귀찮게 올라가서 부를 필요 없이 휴즈는 곧장 동료 요원들과 아래로 내려왔다. 범인은 그 사이 또다시 정신을 잃은 건지 조용해져 있었다.
“대런 갬빗. 너희 팀이 찾던 범인이야. 증거는 저 안에 있고.”
퍼킨스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휴즈는 다소 충격받은 눈으로 밀실 안에 널린 피해자의 흔적을 바라봤다. 하지만 코너는, 인간들이 감정에 압도되도록 내버려두는 법이 없었다. 그가 다른 요원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가져와서 퍼킨스에게 내밀었다.
“안드로이드와 인간 피해자의 목록, 그리고 신원미상자를 찾아봐야 합니다. 접근 권한을 열어주십시오.”
범인을 잡았건만 이 기계에겐 모든 게 마무리 될 때까지 끝난게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도 숨 돌릴 틈이 없다며 구시렁댄 퍼킨스가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곧이어 수사지원팀과 응급구조대도 차례로 도착했다. 구조대원들은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범인부터 살펴보았다. 그 와중에 노먼은 또다시 소파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토하고 나서 한층 정신이 멀쩡해졌지만 그 때문인가 오히려 통증은 심해진 모양이었다.
“으으….”
아까에 비해 체온이 급격히 낮아진 탓에, 구급대원이 건네준 담요를 덮어쓴 노먼이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붉어진 얼굴은 이제 간데없이 창백하게 질렸고, 입술은 새파랬다. 퍼킨스가 담담하게 물었다.
“괜찮아?”
“아니…. 얼어 죽겠어.”
퍼킨스는 태블릿에 눈을 떼지 않고 한 손으로 코트를 벗어서 소파 위로 툭 집어던졌다. 노먼이 그걸 주섬주섬 주워 들어 담요 위에 덮었다.
“약효가 떨어져서 그래. 블랙 젬은 후유증이 없으니까, 한숨 자면 내일쯤 나을 거다.”
“네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마.”
노먼이 투덜댔으나 퍼킨스는 무시하며 태블릿을 톡톡 두드리고 코너에게 다시 넘겼다. 코너는 이를 받아 들고 목록을 빠르게 정리해서 필요한 문서만 취합해 지원팀 요원에게 넘겨주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피해자 목록입니다. 인간 8명, 안드로이드 10대. 보다시피 저기 있는 것과 개수가 맞지 않습니다. 알려진 피해자와 대조해 보고, 신원미상자의 시신도 살펴봐야 합니다. 선반에 붙은 날짜를 보고 그 시기에 신고된 실종자가 있다면 찾아보세요. 범인의 상태가 안정되면 알려주십시오. 저희가 심문을 진행하겠습니다.”
요원은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또 다른 요원이 와서 코너에게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고, 퍼킨스 역시 휴즈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며 방 안은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지원팀이 흩어져 실내 곳곳에 조사 도구와 증거 표식을 설치했고 사진을 찍어댔다. 노먼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금세 중심을 잃고 휘청댔고, 옆에 있던 구급대원이 재빨리 부축해 주었다.
“들것을 가져올까요?”
노먼은 대런의 몸이 미라처럼 칭칭 감겨서 들것에 실려 문밖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복도는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위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에 대원 한 명이 발을 헛디뎌 우당탕 미끄러졌다. 아직 많이 올라가지 않았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아래 있던 대원도 다칠 뻔했다. 반면, 대런은 어딘가 잘못 부딪힌건지 고통스런 비명이 복도에 가득 울려퍼졌다.
“어이! 여기 손이 부족해!”
동료가 부르는 목소리에 대원은 문밖을 쳐다보고 다시 노먼을 바라봤다. 노먼이 그에게 손짓했다.
“…전 됐어요. 혼자 갈 수 있습니다.”
노먼이 팔을 떼고 간신히 균형을 잡아 두 다리로 섰다. 대원은 결국 그를 두고 허둥지둥 동료에게 달려갔다. 노먼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애써 정신을 차리곤 비척비척 문으로 향했다. 여전히 방안에는 포르말린 특유의 지독한 비린내가 가득했고, 노먼은 잠시도 이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몇 발짝 내딛기도 전에 다리가 꼬여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담요로 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터라 손이 묶인 노먼은, 얼굴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지는 바닥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얼굴은 전혀 아프지 않았고 대신 가슴에 작은 충격이 느껴졌다. 노먼은 일순 막힌 숨을 들이켰다. 다른 손으로 노먼의 어깨를 잡아당겨 일으켜 세운 코너가 고개를 기울여 인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동공 반응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호흡도 안정적이네요. 블랙 젬의 약효는 최장 24시간이니, 몸에 힘이 없고 나른한 증상은 그보다 좀 더 지속될 겁니다. 졸리진 않으십니까?”
노먼은 말없이 눈을 껌뻑였다. 그 멍한 표정에 코너는 결국 몸을 굽혀 인간의 오금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노먼은 딱딱한 어깨에 배가 부딪쳐 다시금 웁, 하는 소리를 냈다.
“야야! 야!”
퍼킨스의 다급한 부름에 코너가 몸을 빙글 돌렸다. 덩달아 노먼의 상체가 크게 흔들리며 옆에 있던 벽에 머리가 쿵 부딪쳤다. 노먼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퍼킨스 요원?”
“그러다 애 잡겠어! 아니, 내 코트도! 다 끌리잖아!”
노먼을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멘 코너가, 한쪽 팔만 돌려 노먼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코트를 퍼킨스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여상한 얼굴로 말했다.
“제이든 요원을 위에 바래다주고 오겠습니다.”
“젠장, 바래다주긴 뭘 바래다줘! 애 얼굴에 피 쏠린 거 보라고! 일단 내려놔. 아니, 살살 내려놓으라고. 살살!”
인간의 산만한 요구에,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싶은 코너가 눈썹을 찌푸리며 노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노먼은 휘청거리며 또다시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퍼킨스는 코너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DPD에서 응급처치 요강도 안 배웠어?”
“심폐소생술이랑 기본적인 지혈 방법, 그리고 처치 요강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따위로 옮겨? 환자 대가리 깨트릴 일 있어? 그리고, 저놈 저거 아까 한바탕 토한 거 기억 안 나? 배에 충격이 안 가게 해야 할 거 아냐!”
그들 사이에 선 노먼은 퍼킨스의 쨍쨍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막았다. 그는 피곤했고 지금은 모든 자극이 성가셨다.
“리처드, 제발 볼륨 좀 낮춰….”
웅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퍼킨스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가 노먼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넌, 일단 올라가 있어. 여긴 나랑 휴즈가 정리할 테니.”
그러면서 퍼킨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료팀은 어디 있어?”
“전부 위로 올라갔습니다.”
“가서 들것 가지고 내려오라 전해. 한 명 더 실어 가야 한다고.”
노먼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내가 갈 수 있어…. 바로 위인데 뭐.”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만취한 취객처럼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사방으로 휘적이는 그 꼴에, 퍼킨스가 결국 코너에게 손짓했다.
“이러다 진짜 곯아떨어지면 옮기기도 힘드니, 그냥 네가 부축해서 올라가라. 아까처럼, 들쳐멜 생각하지 말고.”
퍼킨스가 특히 마지막 말에 강세를 넣어 강조했다. 코너는 입매를 일자로 굳히며 담요로 몸을 감싸맨 노먼의 어디를 어떻게 부축해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그는 한 손으론 노먼의 어깨를 감싸안고 다른 쪽 팔로 그의 다리를 끌어 올려 품에 안았다. 노먼은 뒤로 쏠리는 느낌에 아주 약간 버둥댔으나 코너의 미동 없이 단단한 팔이 조금은 안심됐는지, 이내 몸에 힘을 쭉 뺐다.
퍼킨스는 불안불안한 표정으로 복도를 나서는 코너를 지켜봤다. 하지만 코너는 남성 한 명을 들어 올린 것 치고는 꽤 안정적인 자세로 척척 발을 내디뎠고 어느새 계단 위로 사라졌다.
코너는 홀을 지나 로비로 들어섰다. 발 디딜 틈 없이 인간과 안드로이드로 가득 찼던 공간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이 급하게 나가느라 두고 간 옷가지와 함께 정리되지 않은 잔과 그릇이 여기저기 놓였다. 종업원마저 모두 떠난 자리엔 미처 끄지 못한 음악만이 넓은 실내에 반향을 만들었다.
코너가 팔을 고쳐 안자, 인간의 머리가 기우뚱, 옆으로 넘어가 어깨에 툭하고 떨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안드로이드의 목을 간질였고 코너는 시선을 내려 곧게 닫힌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회색 담요로 몸을 칭칭 감은 노먼은 애벌레처럼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있었다. 평소 조금 차갑던 노먼의 표정이 잔뜩 풀어졌고 약간 벌어진 입술 새로 색색대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사이 음악이 바뀌고, 시끄러운 전자기타 소리가 전주를 가득 채웠다. 노먼이 미간을 조금 찌푸리자 갈색 속눈썹이 약하게 떨렸다.
기계의 품에서 잠이 든 인간은 모든 경계를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잠시간 가만히 지켜보던 코너가, 이내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다리를 내디뎠다. 천천히 층계를 오르는 안드로이드의 발걸음이 유달리 조심스러웠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