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순기능

청녹 / 아오미도 / 청봉진태

Archive by 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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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의 농구 2차 연성

*농구선수 아오미네 다이키 X 피아니스트 미도리마 신타로

*미완성으로 영영 있을까봐 동기부여 겸 마이너컾 부흥 겸(ㅎ) 올리는 글입니다

*청봉진태... 뭔가 귀엽지 않나여 우리 청봉이랑 진태 사귄다고 소문났음 좋겟네

 

#1. 재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검은색을 띄고 있다. 그 위에는 글씨도 그림도 없어, 눈을 굳이 감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선 밖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은 지나치게 자유롭다. 머릿속에 통채로 들어 있는 악보를 보고 치는 것과 같으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청자는 오히려 그런 류의 연주를 선호했다. 그건 미도리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주가 끝나고 얼얼해진 손가락을 잠시 건반 위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보답하듯 미도리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는 이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천천히 무대를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맡았던 일은 잘 끝났지만 무대 뒤는 여전히 정신이 없어서, 미도리마는 대기실에서 몇 십 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답답했던 의상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한 스태프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담담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곳을 나왔다.

해외에서 같이 다니던 매니저는 같이 오지 않았다. 미도리마는 정말 온전한 휴가를 즐기고 싶었고, 매니저에게도 휴가가 필요했다. 덕분에 지금 그는 정말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집으로 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알아봤지만,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미도리마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향해 웃어줄 힘도 없었고, 팬 서비스라고 하는 것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으므로. 이럴 때 보면 새삼 연예인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건 입밖으로는 절대 내지 않을 생각이다. 특히나 그의 앞에서는.

이런저런 생각 끝에 도착한 집은 미처 풀지 못한 짐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팬이라고 하는 이들이 보내준 선물들은 거실 가운데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침실에는 여행 가방이 활짝 입을 벌린 채로 내용물을 뱉어 내고 있었다. 평소의 미도리마였다면 집 정리를 먼저 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지금 매우 지쳐 있는 상태였고, 당분간 스케줄은 없으므로 청소를 할 시간은 많았다. 그는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몸을 뉘었고 푹신한 이불이 몸을 감싸오는 걸 느끼며 잠이 들었다. 미도리마가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높게 떠오른 뒤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탁자 위에 벗어 두었던 안경을 쓰고 시간을 확인했다. 어제 저녁을 부실하게 먹고 오늘 아침까지 빼먹은 탓인지 허기진 배가 신호를 보내왔다. 집에 먹을 것이 있었던가. 잠에서 깨기 위해 세수를 하고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잠시 들린 편의점에서 사온 샌드위치가 다였는데, 그마저도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하나라도 있는 게 다행이지.

오늘은 뭐하지. 미도리마는 갑작스레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집에서 하염없이 뒹굴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멍하니 거실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고민을 하는 그를 찾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발신인은 키세 료타. 미도리마의 몇 안되는 친구였다.

 

제목: 긴급 속보!

미도리맛치도 아오미넷치 소식 못 들었죠? 나만 못 들은 거 아니죠? ( ˃̣̣̥᷄⌓˂̣̣̥᷅ )

전 너무 놀라서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림다…

아무튼 아오미넷치 지금 일본으로 오는 중이래여! ٩(๑>∀<๑)۶

 

평소처럼 시시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점심이 뭐였는데 맛이 너무 없었다는 둥, 그런 소소한 것들. 실제로 그와의 대화 목록을 보면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중들에게는 꽤나 좋은 이미지만 보여주고 있는 모델 키세 료타는 종종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해 왔다. 지금이야 익숙해져 답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중학생 때만 해도 친구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애매한 사이였다. 그건 미도리마 뿐만이 아니라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은 한가한 날이면 만날 약속을 잡고 친구라는 이름에 걸맞게 잘 놀게 되었지만.

그런 그에게서 온 연락이기에 방심하고 있었다. 아오미네 다이키. 강함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던 그는 키세나 미도리마와는 달리 성인이 된 후에도 농구를 그만두지 않았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대로, 그리고 본인이 당당하게 얘기했던 대로 그는 NBA에 진출했다. 티비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가 드디어 돌아왔다고. 키세의 문자를 다시 한 번 보아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의 사소한 일상에도 관심을 보이고 부풀려 내보내는 게 티비의 역할이 아니었던가. 아무런 조짐도없이 갑작스레 등장한 그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자신이 왜 이렇게 굳어버렸는지조차, 미도리마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이름이 손안에 들어온 순간, 그와의 추억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너와 함께 한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서 단번에 그 많은 기억들 중 너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 거지. 내 기억 속 너의 모습이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일까.

낯선 감정이 밀려들어와 혼란스러웠다. 잠시 멍하니 앉아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미도리마의 핸드폰이 또 한 번 경쾌하게 울렸다.

 

제목: 부탁해 미도링!

오늘 다이쨩이 와서 내가 마중 나가기로 했거든! 그런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

괜찮으면 미도링이 대신 마중 가줄래? 미도링 오늘 한가한 거 알아. 부탁할게~♡

ps. 키쨩은 촬영 중이래! 미도링밖에 없어! ( ˃̣̣̥᷄⌓˂̣̣̥᷅ )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라는 거다, 모모이. 그 와중에 키세와 같은 표정으로 울상을 짓는 그의 문자에 미도리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모이 사츠키, 그는 아오미네의 소꿉친구로, 중학교 때 처음 만났다. 키세와 마찬가지로 다른 성인이 된 후에는 말 섞을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중 한 명이었다. 미도리마가 일명 기적의 세대라 불렸던 중학생 시절에는 매일 마주치고 있기는 했다.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상 초유의 규칙 안에서 유일하게 남아 연습에 참여했던 미도리마와 키세-점점 스케줄을 핑계로 빼먹게 되긴 했지만 미도리마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 중 가장 많이 연습에 참여했다.- 그리고 매니저였던 모모이. 이렇듯 셋이 만나는 일은 많았지만, 구태여 대화를 나누거나 하진 않았었다.

그럴 성격이 아닌 이가 한 명, 소꿉친구의 부재가 걱정되는 이 한 명, 모든 게 귀찮아지기 시작한 이 한 명. 각각의 이유가 있어 친목을 쌓을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고등학교 때부터 부쩍 연락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점차 발전해 지금의 사이가 되었다. 지금 와서는 관계가 형성될 만한 계기나 그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미도리마는 아직도 이 셋의 조합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모모이나 키세는 원체 성격이 좋아 신경쓰지 않겠지만. 어쨌든 간에 셋이서 종종 만나서 놀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미도리마는 모모이의 문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껴입은 미도리마의 손에 차키가 쥐어 졌다.

*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오미네를 찾아내는 것은 쉬웠다.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오미네와 미도리마는 190cm가 족히 넘는다. 주변 사람들에 비하면 한참 시야가 높고, 또 넓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익숙한 파란색. 반가운 초록색. 점점 그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여, 오랜만이다.”

아오미네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정면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라 미도리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오랜만이라는 것이야.”

미적지근한 그의 반응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지, 아오미네는 끌고 온 짐을 가리키며 차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짐을 차에 싣고, 아오미네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뒷좌석에 앉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뭐라 했을 테지만-내가 네 기사냐? 라든지.- 지금 미도리마는 키세의 문자를 받고 난 뒤부터 침착하게 행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지만, 차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한참동안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던 아오미네의 시선이 미도리마에게 향했다. 미도리마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알아채지 못하다가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고 나서야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는 게 더 민망할 것 같았다. 금방 고개 돌리겠지. 별 의미 없이 쳐다보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운전에 집중하려 했으나, 그 시선이 꽤나 집요해서 결국 아오미네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너 바쁘지 않아?”

“휴식기인 것이야.”

흐음. 아오미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미도리마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아오미네가 그렇게 또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츠키랑 계속 연락하면서 지냈냐?”

아무래도 그는 모모이 대신 온 사람이 미도리마라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계속 연락할 거라고는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먼저 연락하는 건 대부분 모모이다. 가끔 시간 되면 만나기도 했고.”

“사츠키 애인 있잖아.”

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학생 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 아오미네는 늘 표정으로 기분을 드러내곤 했다.

“모모이가 연락하는 건 연애상담 목적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야. 애인의 생일 선물로 뭐가 좋을지, 라던가.”

“헤에. 그걸 너한테? 의외네.”

“대부분 키세가 해결해주지. 나는 그냥 얘기를 들어주는 것 뿐이라는 거다.”

“뭐야, 셋이 언제부터 친했어? 절친이구만.”

아오미네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도리마는 그런 아오미네를 흘끗 쳐다보고, 조용한 것이 어색하지는 않아서 운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실로 오랜만이라 어색한 분위기가 되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다행인 건가.
 어느새 아오미네가 살던 동네가 가까워졌다. 신호가 바뀌어 차를 세우고 보니 익숙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마지버거. 미도리마는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저곳에 가면 동창들을 만날 확률이 높았던 걸로 기억한다.

“농구 계속 하고 있지?”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에 예고 없이 들려오는 아오미네의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홀린 듯이 대답했다. 시선은 여전히 그 가게에 둔 채로.

“꾸준히는 아니지만, 틈틈이 하고 있다는 거다.”

“그럼 하자.”

“...뭐?”

미도리마가 당황한 얼굴로 아오미네를 쳐다보았다. 그 사이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을 보지 못해 뒷차가 클락션을 울렸고, 미도리마는 허겁지겁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여전히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보고 아오미네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너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시끄럽다는 거다. 갑자기 하자니, 내가 한가하다고 생각해?”

“사츠키 대신 나 데리러 올 정도면 한가한 거겠지!”

허. 사실이라 반박하지 못하겠다. 조금 분한 마음에 쯧 하고 혀를 차니 아오미네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권유해왔다.

“우리집에서 옷 갈아입고 1on1 한 판 하자. 좋지?”

미도리마는 차마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농구가 하고 싶었던 건지, 왠지 모르겠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으므로.

 

#2. 닿지 못한

 그 학교의 음악실은 두개였다. 5일 중 단 하루만 허용된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실은 꽤나 잘 되어 있었다. 학생이 많아서인지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미도리마에게는 학교에 음악실이 두 개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중 한 교실을 통째로 쓸 수 있던 것은 운이 좋았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언제였던가,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다음 수업 준비를 위해 누구보다 먼저 음악실에 간 적이 있다. 평범한 학생들이라면 점심시간을 꽉 채운 뒤에 수업 시작 전 아슬아슬하게 들어왔을테지만 미도리마는 그 누구보다 성실했다. 한적한 음악실, 수업 시작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 지정된 자리에 앉은 그는 앞에 선생님이 서있는 것도 아닌데 벌써 책을 펴고 꼿꼿한 자세로 앞을 응시했다. 교실 안은 물론 복도에도 사람 한 명 없는 침묵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그의 시선이 문득 창가에 배치되어 있는 피아노로 향했다. 조금씩 칠이 벗겨져 있는 검은색 피아노였다. 학교에 단 하나밖에 없는 피아노인지라-음악실은 두 개지만 피아노는 하나였다.- 학생들이 호기심에 만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른들만 칠 수 있다고 버릇처럼 말하던 음악 선생님이 떠올랐다. 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이곳, 햇빛은 강하지 않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음악실에서 미도리마는 난생 처음 일탈이란 것을 해보았다.

평소라면, 어제의 미도리마라면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규칙을 선도부보다 빠삭하게 알고 단 1점의 벌점도 허락하지 않는 그는 선생님의 사소한 말씀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어른들만 만질 수 있도록 허락된 피아노를 조심스럽게 치기 시작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일탈이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꾸욱 하얀 건반을 눌렀고, 교실 가득 울리는 소리에 흠칫 놀란 것도 잠시 미도리마는 기억을 되짚어 한 악보를 기억해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한 번 시작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미도리마는 피아노 앞에 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치기 시작한 첫날을 떠올리며 종종 그렇게 점심시간을 보냈다.

 2학년으로 올라가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음악 수업이 몇 교시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수업이 점심시간 전후로 있어야만 그의 유일한 일탈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멈출 수 없었다. 농구를 하는 것과는 또 달랐다. 미묘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매일매일 책만 붙들고 다른 것에 눈 돌리지 못하는 나날들 속에서 농구와 피아노는 숨구멍과도 같은 것이었다.

 새 학년이 되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농구부에서 알게 된 아오미네와 같은 반이 되었다는 것.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미도리마는 그가 자꾸 걸리적거렸다. 표현이 조금 셀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랬다.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창가 뒷자리가 지정석이 된 미도리마와 아오미네는 그 외에도 여러모로 세트처럼 여겨졌었다. 그리고 아오미네는 농구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의욕을 보이지 않아서 항상 미도리마가 그를 챙겨줘야 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시키는 일이니 불만없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성실한 그의 태도가 거슬리고 거슬려서 잦은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미도리마는 성실하게 그를 챙겼다. 어쩌면 농구에만 관심있는 그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이, 그의 눈동자 가득 자신이 비춰지는 것이 내심 기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트로 다니면서도 음악수업이 있는 날이면 미도리마는 그를 놓아주었다. 단 하루. 음악실에 가기 위해 그날만큼은 아오미네에게 잔소리하는 걸 멈추고, 재빨리 도시락을 비웠다. 매일 하는 농구와는 또 다른 숨구멍을 찾은 뒤로는 매주 빠지지 않았고 이는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미도리마가 음악 수업을 받는 교실은 작년과 같이 피아노가 있는 그 교실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조금 우울해질 뻔했다. 어떻게든 하려고 음악 선생님을 찾아가 고집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날도 그렇게 점심시간의 절반을 피아노를 치며 보낼 생각이었다. 첫 음을 잡으면 다음에는 쉬웠다. 머리 속에 새겨지다 싶이 한 악보 하나를 차근차근 끄집어내면서 음을 이어 나갔다. 시야에 들어오는 정보들은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기에, 소리에만 집중하려 서서히 눈을 감으면 그 다음은 더욱 쉬웠다. 보이지 않아도 팔이 움직여 자리를 찾고 손가락에 힘을 주면 소리가 울려 퍼졌고, 미도리마는 그 순간이 좋았다. 오직 한 명 뿐인 공간에서는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필요도 없었다. 그가 정적을 깨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쿵,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동시에 미도리마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느라 손바닥 전체로 건반을 눌러 괴상한 소리도 났다. 아오미네가 머리를 긁적이며 무릎을 부여잡느라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면서 눈이 마주쳤다.

“더 듣고 싶은데 계속 쳐주면 안돼?”

 해맑은 미소를 나에게 보이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날의 일을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 뒤로 음악수업이 있는 날이면 점심시간을 같이 보냈다. 같은 중학교, 같은 부활동을 다니면서 마주친 순간들 중 그 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겠지. 다음해가 되자 아오미네를 마주치는 일이 적어졌다. 여름 무렵부터는 인사는 커녕 눈도 마주칠 수 없었다. 그가 특별히 이상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기적의 세대라고도 불렸던 우리들 모두가 그랬으니까. 뿔뿔이 흩어져도 농구는 그만두지 않았다. 코트 위에 선 그는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강했고, 아름답기도 했다.

“시간 날 때만 하는 것 치고는 엄청나잖냐. 나랑 같이 해외리그 뛸래?”

“시끄러워. 헛소리 하지 말고 음료수나 내놓으라는 것이야.”

 오랜만에 땀 흘리며 뛴 결과는 뻔했다. 제 아무리 학창시절 진심을 다해 농구를 했어도, 몇 년이 흐른 지금 프로 농구 선수를 이길 수는 없었다. 머리는 납득을 하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나오는 건 타깃을 잘못 잡은 화풀이일 뿐이었다. 숨을 고르며 흐르는 땀을 닦고, 그가 내민 캔 음료수를 벌컥 들이켰다. 그 시절 모두와 농구를 했던 그곳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풍경도, 조금씩 녹이 슬어 부딪힐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골대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점차 지워져 실선이 아닌 점선이 되어버린 바닥에 흰 선도. 딱 하나. 그 시절의 모습과 다른 것은 아오미네와 미도리마 뿐이었다.

*

고등학교 2학년. 생애 첫 패배를 겪고 돌아온 아오미네는 벚꽃이 질 무렵 다른 학교에 재학 중인 미도리마를 찾아와 대뜸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학원이나 과외선생님이 훨씬 잘 가르친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미도리마는 그것이 내심 기뻤다.


*여기부터는 썰!

대학교 1학년, 엔비에이 스카웃제의받고 미국으로 떠난 아오미네.
고2 때부터 미도리마 붙잡고 엔비에이 갈 때 대비해서 영어 가르쳐 달라고 하던 아오미네. 카가미가 더 잘 한다고 해도 싫다고 너가 가르쳐줘야 한다고 고집 피우더니 결국 회화 연습은 카가미랑 하던 아오미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엔비에이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날 미도리마에게 제일 먼저 소식을 알려주려 집까지 땀을 흘리며 뛰어왔었지. 그리고 잔뜩 흥분해서는 미도리마를 꽉 껴안고 5번 정도 똑같은 얘기를 했어. 나 드디어 엔비에이 간다고. 드디어. 진짜, 나 미국 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너를 보며 심장이 아파온 건 왜였을까. 너를 붙잡고 싶다고 생각해버린 건,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 삼킨 걸 너는 알고 있을까.

  

아오미네가 엔비에이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대학교 졸업 무렵. 그 옆엔 카가미도 있었지. 그제서야 실감이 나.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며 득점하는 아오미네를 보면서 미도리마는 조금 울었어.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곳에 있는 것 같아서.

 

#3. 더 가까이

아오미네와는 미도리마가 시간 날 때마다 만났음. 만나서 특별히 뭐 한 건 없음. 같이 식사하고, 집에서 티비보고 이런 소소한 것들을 같이 함.

미도리마는 현재 애인 있음.(연상, 호칭은 선배/***씨)
바빠서 헤어지자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 거의 헤어진거나 다름 없음. 하지만 그 선배는 미도리마를 놓치기에는 아쉽고 갖고있자니 지루한 연하애인으로 생각할 뿐. 그걸 지나가다 들은 미도리마는 그 이후로 선배에게 정 뚝 떨어짐.
청봉이는 애인보다는 가벼운 만남을 반복했음. 연습땜에 바쁘기도 했음.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은 아마 진태가 처음일테지만 스스로 정확히 정의내리진 못한 듯.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볼 뿐인 대화였을텐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거칠어진 호흡이 미도리마의 귓가에 울려. 흥분한 아오미네가 미도리마에게 키스를 하며 물어.
너 괜찮은 거냐? 그 사람이랑 아직...
시끄러워, 아호미네.
미도리마가 아오미네의 뒷목을 끌어당겨 그의 입술을 삼켰어. 그 뒤로는 뭐.

다음 날 아침. 아오미네의 품 속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미도리마. 둘은 전날 밤의 일을 증명하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고, 침대 주변은 옷들이 무질서하게 떨어져 있었어. 체력이 넘쳐나는 아오미네 덕에 새벽까지 시달려야 했던 미도리마는 방 정리를 먼저 해야 할지, 씻는 걸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해.

간단히 아침을 먹던 중 갑자기 말을 꺼내는 미도리마. 어차피 그 사람과는 헤어진 거나 다름 없다고 하며 걱정할 필요 없다고. 주어는 없었지만 알아들은 아오미네가 고개를 끄덕이곤 미도리마에게 들려있던 컵을 뺏어서 마셔. 그리고 잠시 정적이 있다가, 아오미네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지않게 조심스럽게 말해.
...다음에도 할래?
흠? ...1on1을?
미도리마는 정말 눈치채지 못한 표정이었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갸웃하는 미도리마에, 아오미네가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대놓고 말해.
바보냐. 섹스하자고.
아.
그리고 다시 정적.
왜인지 아오미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미도리마가 그래. 할 때까지. 

 

#4. 반복

사귀고 있던 남친과 드디어 헤어진 미도리마. 둘 다 그러려니. 하고 깨끗하게 뒤돌아섰어. 근데 자꾸 술먹고 전화오는 선배. 은근 정이 많은 미도리마는 그 전화를 받아주고, 데리러 가서는 집까지 데려다 주고.

아오미네와는 가끔 만나 농구하고 섹스하고 연인들처럼 데이트도 하고는 했지. 서로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어. 근데 망할 선배 때문에 몇 번 아오미네와의 약속이 깨지곤 했지. 그럴 때마다 아오미네는 괜찮다며 미도리마를 보내주곤 했지만, 이게 한 두번도 아니고 열 번 정도 되니 화가 나지.

이번에도 역시 아오미네와 술 한 잔 하기로 한 날 전화가 왔어. 그러니까, 집에 아무도 없고 내일 일도 없고 해서 섹스하기로 한 날. 아오미네 앞에서 전화를 받고는 미안하다며 나가는 미도리마. 아오미네는 어이가 없어. 쟤 나랑 썸타는 거 아니였어?

선배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나오는 길. 아오미네한테 전화를 해. 미안하다고 이제 그쪽으로 갈 거라고.
근데 아오미네가 화난 목소리로 대답해. 너, 아직도 그 녀석 좋아해? ...뭐? 미도리마는 어이 없었어. 헤어졌다고 분명 말했고. 깊은 감정으로 사귄 것도 아니고 그 선배가 먼저 나한테 질려서 상처줬다고 까지 말했는데.

나랑 만나는 5번 중에 4번을 그 사람 전화받고 갔어 너.
아오미네.
나랑 안 만나는 날에도 전화 오는 거지? 그럼 그때마다 나가는 거야?
아니, 그건...
하. ...미안. 오늘은 안되겠다.

그러고 끊긴 전화. 미도리마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어.
확실히, 헤어지고 힘들어하는 것 같은 선배가 안쓰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해서 쉽게 무시할 수 없었어. 근데 그게 좋아해서는 아니야. 오히려 좋아하는 건, 그건...

난 뭐한 거지? 그냥 무시할 걸. 선배가 술 먹고 나만 찾고 울고 지랄한다고 해도, 그런 선배가 불쌍해 보였어도 그냥 내버려둘 걸. 어차피 다 자업자득인데, 뭐가 좋다고 그 선배를 챙겼을까. 감정이라고는 요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한테 잘 해줘봤자 시간낭비인데 왜 그랬을까. 차라리. 차라리 그 시간에...

너한테 집중할 걸.

또 다시 멀어졌다. 드디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다시 멀어졌다. 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5. 폼리스
아오미네와는 그 날이 마지막 전화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도 보고 미안하다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문자도 남겨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집에 찾아갈 수는 없었다. 화난 아오미네가 순순히 자신을 들여줄 거 같진 않아서.

그 날 이후, 선배가 제정신일 때 만나 똑똑히 의사를 표현했다.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이제 정말 끝이고, 당신이 나한테 한 짓을 행각하면 친구로도 못 지낼 것 같다고. 마주쳐도 인사 하지 말고, 몰랐던 사람처럼 지내자고.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아오미네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미도리마 역시 마지막으로 사과의 문자를 남긴 후에는 연락하지 않았다.

매달려서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긴 하지만, 무서웠다. 아오미네가 얼마나 화난 건지, 다시 만날 의향은 있는지 모르겠어서.

프로 선수로 활동하면서 겪은 시련들. 미도리마가 방황하던 시절 힘들어했던 날들. 그런 것들을 둘은 공유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보듬어주었다. 마음이 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도리마는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는 느껴보지 못 한 감정. 어렴풋이 아오미네도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안심했던 걸까. 그래서 아오미네라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후회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시 아오미네와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뿐. 오랜만에 눈물이 나왔다. 울 정도로 간절하면 붙잡으라고.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아오미네의 뒷모습이 너무도 멀리 있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았다 

 

 

#6. 버저비터
그렇게 며칠은 집에만 박혀 있었다. 밖에 나갈 만한 일도 없었고. 돌아다닐 힘도 없었다. 이불을 걷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반겼다. 의자 등받이에 가지런히 걸려있던 청녹색 담요를 온몸에 두른 채 방을 나갔다.

티비를 켰다. 오늘분의 오하아사 방송이 한창이었다. 방송을 보며 시리얼로 배를 채웠다. 그때 아오미네에게 전화가 왔다. 며칠만이지.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두려움이 앞섰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서. 결국 진동이 끊기고 말았다. 허탈함에 웃음이 삐져 나왔다.
바보같아. 굴러온 돌을 걷어차버리다니.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뭐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사과부터? 아니면 선배랑 깨끗하게 정리했다는 거?
고민하는 사이 오하아사가 끝나간다.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있었나. 문을 열었다. 아오미네가 서있었다.
전화 왜 안 받아?
아오미네는 대답할 틈도 없이 안으로 들어와 미도리마를 끌어 안았다.
오하아사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1위는 게자리! 럭키아이템은 청녹색 담요! 소중한 사람과 나눠 덮고, 따뜻한 하루를 보내세요!

미도리마의 청녹색 담요는 작은 편은 아니지만 평균 193.5cm의 건장한 성인 두 명이 같이 두르고 있기에는 부족했다. 현관에서 격렬하게 껴안은 건 뭐였는지, 아오미네는 소파에 앉아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미도리마도 그의 눈치를 보며 옆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미안해.
아오미네가 먼저 말했다.
그 뒤로 연락 안 한 거 미안해.
선수를 빼앗겼다고 해야하나. 미도리마는 당황스러웠다. 잘못한 건 나인데.
그래도 너 그건 진짜 눈치 없었던 거야. 알고는 있냐?
아..., 응.
그래서, 그 새끼는?
선배랑은 깨끗하게 정리했다는 거다. 이제 전화 올 일도 없어.
그럼 됐어.
아오미네가 다시 한 번 미도리마를 끌어안았다.
나 휴가 얼마 안남은 건 알아? 끝나면 또 미국 가야 돼. 시간도 별로 없는데 너는 눈치없이 진짜...
아오미네가 껴안는 바람에 흘러내려온 담요를 미도리마는 꽉 붙잡았다. 껴안아진 상태로는 멋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제대로 펴지 못한 담요를 아오미네와 자신의 다리 위에 덮었다. 다리라면 충분히 덮고도 남았다. 꼼지락거리는 미도리마를 아오미네는 한 번 더 힘주어 안았다. 미도리마도 조심스럽게 아오미네의 허릿춤을 붙잡았다.
좋아해. 미도리마.
아오미네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따뜻했다.
나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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