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26
#26. 실종
퍼킨스는 무려 두 시간 동안 클럽 입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낮에 봤던 한산한 골목과 같은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리엔 사람이 가득했다. 깜깜했던 건물도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조명을 켜놨고 붉고 푸른색의 네온사인이 도로 곳곳을 얼룩덜룩 물들였다. 퍼킨스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도로 끝 한구석에 차를 대놓고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며 지루한 얼굴로 클럽 입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까부터 몇 번이고 클럽 입구서부터 치근대는 인간과, 그에 응하는 안드로이드의 행동을 본 퍼킨스가 콧등을 찌푸렸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인간과 닮아있는 그 꼬락서니는 퍼킨스로 하여금 사이버라이프 연구진의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의 감정을 따라 하는 존재를 만든 건지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령 연구진조차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결과가 바로 저런 불량품이라면, 그 작자들은 지금 이런 세상을 어떻게 여길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퍼킨스는 얼마 전 읽은 기사 하나를 기억했다. 사이버라이프 전 책임연구원이자 현재는 세인트 루시 병원의 원장 자리에 앉은 엘레나 킴몬스의 인터뷰였고, 퍼킨스는 읽다가 짜증이 치밀어 잡지를 끄고 옆으로 던져놨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표지에 박힌 킴몬스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그 뒤에 실린 기사 내용만큼은 생생했다.
[세인트 루시 병원은 안드로이드를 창조한 연구원이 모여 설립된 안드로이드 전문 수리센터예요.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료진 모두, 최소 3년 이상 사이버라이프 연구개발팀에서 일한 경력이 요구되죠.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낸 존재인 만큼 안드로이드가 인간처럼 아프고, 다쳤을 때 말끔하게 치료할 능력이 있답니다. 다른 사설 수리업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기술과 자원을 가졌죠. 아시다시피, 치유란 바로 창조자에게만 주어진 권능이잖아요?]
"…권능은, 지랄."
퍼킨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비아냥댔다. 그들이 만들어낸 멍청한 어린 양이 인간의 손에 놀아나다 갖은 방법으로 끔찍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킴몬스 같은 자들은 그걸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킴몬스는 인터뷰 전문에서 자신들이 안드로이드를 발명하거나 개발했다는 말 대신, 거듭해서 '창조'라는 단어를 써댔다. 마치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낸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듯이. 퍼킨스는 역겨워졌다. 이미 인간이 점령해 버린 세상 속에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피조물을 멋대로 풀어놓고는, 이에 대한 책임을 일절 지지 않은 채 그저 뒷짐 지고 바라보는 그 작자들은 스스로를 창조자라 부를 자격이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부상과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된 안드로이드에게 입바른 소리를 해대며 목숨의 연명을 대가로 거액의 치료비를 받아 갔다.
퍼킨스는 몇 주 전 코너가 그 대신 총을 맞고 세인트 루시 병원에서 수리받고 왔을 때 FBI에 청구된 진료비 명세서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 퍼킨스와 노먼은 그곳에 적힌 금액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사이버라이프가 망하기 직전 개발된 가장 최신식 기계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코너가 프로토타입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인간과 자릿수 자체가 다른 치료비용은 일개 안드로이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코너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안드로이드였다면 그는 길거리에 나다니는 노숙자 안드로이드처럼 망가진 팔을 불쏘시개로 대강 이어 붙이는 것 외엔 도리가 없을 터였다. 혹은, 그 수리공이란 수상한 단체에 자신의 처신을 맡기거나.
퍼킨스는 손가락으로 창틀을 딱딱 두들겼다. 힐끗 본 시간은 어느새 12시를 조금 남겨두고 있었다. 그 기계가 본인의 밑에 들어온 이상, 그리고 자신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이상 코너는 퍼킨스가 짊어진 짐이자 책임이었고 그딴 비싼 수리를 받게 할 생각도, 죽게 할 생각도 없었다. 퍼킨스는 아까 코너의 연락을 받은 후 수신이 끊겨 새까맣게 변해버린 태블릿 화면을 잠깐 노려봤다가 다시금 클럽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갈색 피부에 복슬복슬한 검은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가 가드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가드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남자는 답답한 듯 뭐라 뭐라 따졌다. 퍼킨스는 바로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즈음 남자는 뒷주머니에 꽂힌 신분증을 꺼내 들고 있었다.
곧장 그 옆으로 달려간 퍼킨스가 남자의 팔뚝을 잡아채며 아래로 내렸고, 남자가 퍼킨스를 보곤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퍼킨스 요워…."
퍼킨스가 손바닥으로 휴즈의 입을 턱, 가로막고 가드에게 사과했다.
"실례합니다. 이 자식이 취하면 자꾸 어딘가로 들어가려는 버릇이 있어서요."
그리고 가드가 뭐라 하기도 전에 휴즈의 팔을 잡아 옆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휴즈는 조금 버둥대면서도 순순히 잡혀 끌려갔다. 번잡한 클럽 입구에서 조금 떨어지자마자 퍼킨스는 신입의 어리버리한 얼굴에 대고 꾸짖었다.
"아무 데서나 신분증 꺼내 들지 말라고 얘기했을 텐데."
휴즈가 억울한 목소리로 토로했다.
"하지만 안 들여 보내주잖아요."
"저딴 곳에 들어가는데 FBI 신분증이 왜 필요해? 여긴 너 같은 놈은 갈 곳이 못 돼. 클럽 가려면 다른데 가."
휴즈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저를 뭐로 보시는 거예요? 놀려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는 거라고요."
"이 시간에 뭔 일?"
"제가 맡은 사건의 용의자가 저 안에 있어요."
"네가 맡은 사건? 안구 적출해가는 미친놈 말하는 거야?"
"네. 맞아요. 저 아래에 있을 거라고요."
퍼킨스는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확실해?"
휴즈는 퍼킨스의 날카로운 눈빛에 다시금 주눅이 들었다.
"그게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성이 있는……."
"지금 우리가 이 장소를 조사하고 있으니 나중에 해. 요원끼리 동선 꼬여서 수사를 망치는 것 만큼 멍청한 일이 없으니까."
퍼킨스의 말에 휴즈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요원님은 왜 여기 계신 건가요? 제이든 요원은요?"
"지금 아래에서 잠입중이야."
휴즈가 놀란 눈으로 클럽 입구와, 그곳에 선 가드를 바라봤다.
"어떻게 들어가신 거예요? 전 뭘 해도 안들여보내주던데…."
퍼킨스는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휴즈의 얼굴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너보다 적어도 열 살은 삭아 보이는 인간을 들여보냈어야지. 네 팀원은 어딨어?"
"근처 다른 클럽에서 조사중이에요. 여긴 제가 맡기로 했고요."
휴즈가 문득 퍼킨스를 간절히 바라봤다.
"차라리 요원님이 저랑 같이 들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또다시 범인이 활동할 시간이라고요. 일단 꼬리가 잡혔으니, 안에 들어가면 바로 잡을 수 있을 거예요."
퍼킨스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에선 전파가 터지지 않으니 한사람은 밖에서 감시하고 있어야 해. 차라리 네 팀원들을 불러와. 그리고, 여긴 우리 팀이 먼저 왔으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휴즈는 초조한 얼굴로 클럽을 돌아봤다.
"하지만 살해당한 인간이 벌써 여덟 명이나 된다고요. 요원님의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안드로이드보단 사람의 목숨이 더…."
퍼킨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경고했다.
"말조심해."
휴즈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여전히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퍼킨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물었다.
"그 범인이 정말 이곳에 있는 게 맞아?"
"제이든 요원이 프로파일 해준 대로 찾아낸 거예요. 피해자의 동선이 겹치는 곳과 사망 전 행선지를 추적해 본 결과, 그들 모두 어떤 클럽을 방문할 예정이었고 이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어요. 다만 위치가 정확히 파악되진 않아서 팀원들은 다른 곳을 찾고 있고요."
"클럽 이름이 뭔데?"
"갬빗 스윙어요."
퍼킨스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휴즈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까닥였다.
"사건 파일 줘 봐. 확인해 볼 테니."
휴즈는 냉큼 휴대폰을 꺼내 들어 퍼킨스에게 내밀었다.
"이것 보세요. 피해자 모두 오후 10시에서 자정 사이에 실종됐고, 납치된 지 1시간 안에 사망했어요. 범행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데다가, 어젯밤에도 시신이 나왔어요. 지금쯤이면 이미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시간이에요."
휴즈가 손가락으로 사건 파일을 넘기며 피해자의 사진과 함께 자신이 찾아낸 단서를 퍼킨스에게 보여주었다. 퍼킨스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노먼이 내린 프로파일 분석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제 오후 노먼이 책상 맞은편에서 휴즈가 건넨 태블릿을 들고 분석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전형적인 권력 통제 유형이네요. 남성 강간은 주로 힘과 지배력의 문제죠. 안구는 기념품으로 가져간 것 같고. 피해자들의 나이를 봤을 때 범인은 최소 40대, 많아도 50대 초반일 거예요.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사교성이 좋으며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남성일 가능성이 높아요. 다만 범행 주기가 너무 들쑥날쑥한 데다가 도중에 바뀐 방식은 조금 신경 쓰이네요…. 아직 발견되지 않은 피해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퍼킨스는 미간을 좁혔다. 몹시 익숙한 프로파일이었다. 범행방식이 변했고, 범행 주기도 일정치 않았다. 예상되는 더 많은 피해자의 가능성, 남성 강간이라는 특수성, 다양한 인종과 생김새. 퍼킨스는 바로 어제 발견되었다던 피해자 신상 파일을 열었고 그 순간, 귀에서 지직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킨스 요원. 요원님!]
퍼킨스는 곧바로 손을 들어 수신기를 눌렀다.
"드디어 나왔군. 뭔 신데렐라도 아니고 진짜 아무런 연락 없이 12시까지 기다리게 할 줄은 몰랐…."
[혹시 노먼이 거기 있습니까?]
"아니? 걔가 널 두고 나올 리가 없잖아."
코너의 침묵에 이상함을 느낀 퍼킨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노먼이 없어?"
[네. 바 쪽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질 않습니다.]
"안이랑 밖, 둘 다 찾아봤어?"
[일단 제가 있던 홀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로비로 나와서 찾아보려 합니다.]
퍼킨스가 클럽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휴즈랑 대화할 때도 간간이 보긴 했으나 그사이 놓친 인간들이 꽤 있을 터였다.
"언제부터 없었던 거야?"
[노먼이 사라진 걸 알고 찾기 시작한 건 22분 전입니다. 마지막으로 본 건, 37분 전입니다.]
“…37분이라고?"
퍼킨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쩌면 지미가 노먼의 얼굴을 알아볼 위험 때문에 그의 시선을 피해서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을지도 몰랐다. 반면, 코너가 자신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기계의 시야에서 몸을 숨길 이유 또한 없었다.
"지미는 어디 있지?"
[좀 전까지 저와 대화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는 우리가 찾는 범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안드로이드와 집에 간 적이 없고, 목표로 삼는 타깃도 뚜렷해요. 직원의 증언뿐이지만요.]
퍼킨스는 다시금 클럽 입구를 바라봤다. 지미가 혼자 계단 위로 올라와 두리번대다가, 가드에게 무언가를 묻는 모습이 보였다. 가드는 고개를 저었고 지미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아래로 내려갔다.
퍼킨스는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끼고 재빨리 휴대전화를 빼 들었다. 그 미세한 소리를 수신기 너머로 어떻게 잡아냈는지, 코너가 대뜸 물었다.
[노먼입니까?]
퍼킨스는 화면에 찍힌 번호와 이름을 보았다.
"아니. 다른 사람이야. 일단 넌, 나오지 말고 상황을 계속 주시해. 노먼이랑 만나면 바로 연락하고.“
그 말을 끝으로 수신을 끊은 퍼킨스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낮에 맡기신 혈흔에 대한 감식 결과가 나왔습니다. 신원이 확인되었어요.]
퍼킨스는 멈칫했다.
"범인의 DNA는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신원이라뇨?"
[범인은 모르겠고, 다른 피해자의 혈흔이에요. 데이빗 한스.]
"데이빗 한스? 그게 누구…."
퍼킨스가 읊조리는 말에 휴즈가 눈을 크게 떴다.
"데이빗 한스요? 한스가 왜요?"
퍼킨스는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으로 휴즈를 바라봤다. 휴즈가 높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스는 어젯밤 살해된 사람이에요. 제가 조사하던 연쇄살인 사건의 8번째 피해자라고요."
그러면서 그가 퍼킨스의 다른 쪽 손에 들린 자기 휴대전화의 화면을 빠르게 넘겼다. 안구가 적출 된 시신이 퍼킨스의 눈에 비쳤다. 퍼킨스가 다시금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혈액의 외부 노출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노출되었다기 보단, 토양에 오염된 시간이 20시간이에요. 예상되는 사망 시각은 25시간 전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퍼킨스는 통화를 끊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피해자의 간략한 신원과 발견 위치가 적혀있었다. 29세, 왓슨 가에서 발견. 마지막으로 발견된 안드로이드 시체가 있던 어스킨 가와 고작 1km 떨어진 위치였다. 죽은 지 5시간이나 넘은 자의 혈액이 왜 그곳에 떨어져 있던 걸까? 어쩌면 데이빗 한스를 죽인 범인이 시신 유기 장소를 찾다가 어스킨 가를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퍼킨스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이 안 됐다. 175cm가 넘는 성인 남성의 시신을 들고 다녔을 리도 무방하고, 차에 태운 시신의 피가 운전 중에 흔들려 새어 나온 것이라면 혈흔이 연석 위에 묻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차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다가 시신의 일부가 밖으로 튀어나왔다면? 그래서 시신에 고인 혈액이 밖으로 흘러 떨어진 것이라면…. 설령 이 가설이 틀렸다 할지라도 하필 안드로이드의 시체가 발견된 위치에 또 다른 연쇄살인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었단 사실은, 우연이라 보기 어려웠다.
퍼킨스는 화면을 옆으로 휙휙 넘겼다. 피해자들의 나이는 20대 중반에서 30대 후반 남성. 사인은 교살. 목에 남은 손자국은 범인이 왼손잡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유기된 시신은 깔끔했고, 방어흔은 없었으나 손과 발목에 결박되었다 풀린 흔적이 뚜렷하게 보였다. 한쪽 안구가 비어 있었고 무엇보다 피해자의 인종도, 생김새도, 기념품으로 가져간 안구의 색상 역시 전부 달랐다. 명백한 수집가 유형. 퍼킨스의 뱃속에 불안감이 엄습하고,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에 화면을 반대로 넘겼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피해자부터 과거로 갈수록 시신의 방어흔이 하나, 둘 늘어났고 미숙한 범행을 지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시신을 훼손한 흔적이 많아졌다. 퍼킨스는 계속해서 화면을 넘겼다. 모든 연쇄살인범에겐 첫 살인을 시작하게 만든 방아쇠가 존재했고, 계속되는 범행에 너무 익숙해져서 무감해질 때쯤엔 가장 처음에 저질렀던 살인의 떨림과 흥분을 재현하려는 특성이 있었다.
한참을 넘기자 드디어 처음으로 작성된 조사기록 파일이 나타났다. 퍼킨스는 가장 처참하게 훼손된 첫 번째 피해자의 사진을 보았다.
백인 남성. 32세. 고동색 머리카락, 그리고… 은회색 눈.
"…용의자에 대해 알아낸 걸 전부 말해봐."
"네?"
퍼킨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
그러면서 그는 휴즈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귀에 꽂은 수신기를 눌렀다.
"코너! 노먼은 찾았나?"
잠시 뒤 수신기에서 코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못 찾았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요.]
"아까 노먼 옆에 누가 있었어?"
[처음엔 안드로이드 네 대가 그에게 말을 걸었고, 후에는 두 명의 인간이 그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접근한 인간의 얼굴을 봤나? 신원 파악 가능해?"
아주 짧은 침묵 뒤, 코너가 말했다.
[대런 갬빗. 클럽의 소유주네요.]
"인상착의랑 신상을 전부 말해봐."
[48세. 이탈리아계 미국인. 키는 187cm, 몸무게는 92kg 추정. 남색 투 버튼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습니다.]
"둘이 무슨 얘길 했는지는 못 들었어?"
[전혀요. 거리가 너무 멀고, 소음이 컸어요.]
"혹시 노먼이 뭔갈 먹고 있었나?"
[네. 칵테일처럼 보이는 음료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퍼킨스는 피해자 부검 기록 맨 밑에 추가된 내용을 내려다보았다.
<2차 약물 검식 결과. 약물 반응: 양성.>
욕설을 지껄인 퍼킨스가 코너에게 말했다.
"작전 중단하고 당장 노먼부터 찾아."
그리곤 휴즈에게 휴대전화를 넘겼다.
"네가 찾는 용의자가 대런 갬빗이야?"
"네? 그걸 어떻게…."
"팀원들 전부 여기로 불러. 건물 봉쇄하고, 아무도 못 빠져나가게 막아."
휴즈는 앞서 퍼킨스가 한 통화 내용과, 좀 전의 질문으로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제이든 선배에게 문제가 생긴 건가요?"
"빨리 움직여! 질문할 시간 없으니까!"
퍼킨스가 클럽 입구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휴즈가 허겁지겁 휴대전화를 들어 팀장에게 전화를 거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문 앞에 선 가드가 퍼킨스를 막아 세웠다.
"어이, 기다려. 입장은 선불…."
가드는 자신을 향해 겨눈 총구를 보곤 숨을 멈췄다. 퍼킨스가 그의 얼굴 앞으로 신분증을 들어 올렸다.
"문 잠그고, 아무도 내보내지 마.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몰리기 싫으면."
잔뜩 얼어버린 가드가 머리를 빠르게 끄덕였다. 퍼킨스는 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고막을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이 들려오고 코너가 보내 온 영상 속, 검은 문을 찾아 들어가자 어둑한 내부엔 은은한 붉은 색의 조명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홀에 있는 사람을 비췄다. 인간들과 안드로이드가 소파에, 바닥에, 테라스에 널려있었고 그들은 각자에게 집중하느라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퍼킨스는 빠르게 눈을 돌렸으나 그중 노먼처럼 보이는 자는 없었다. 이윽고 퍼킨스는 바 앞에서 코너를 발견했다. 안드로이드는 안쪽으로 팔을 뻗어 바텐더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코너!"
코너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퍼킨스를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코너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칵테일을 향해 턱짓했다.
"노먼이 마시던 음료입니다. 안에서 노먼의 유전자와 함께, 약물이 검출됐어요."
바텐더가 손사레를 쳤다.
"나, 난 모른다니까! 다른 사람이 넣은 걸 수도 있잖아!"
코너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당신 외엔 여기에 손댄 사람이 없어."
"네가 봤어? 아니, 애초에 네가 뭔데 이러는 거야?"
그리곤 이 바텐더 역시 자신의 얼굴 앞에 들이밀어진 퍼킨스의 신분증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F, FBI?"
퍼킨스가 짓씹듯 내뱉었다.
"동의 없는 마약 투약은 최소 10년형이야. 약 때문에 2차 피해를 당하면 투약자의 형은 30년까지 늘어나지. 연방 요원에게 약을 먹일 생각을 하다니, 간도 크군."
바텐더가 턱을 떡하니 벌렸다.
"요원이라고? 나, 난 진짜 몰랐어!"
"그만 지껄이고 사실대로 말해!"
"난…, 아니 전 진짜 몰라요! 전 그냥 마스터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퍼킨스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마스터 같은 소리하네. 하여간 쓰레기들이 꼭 등신 같은 호칭을 쓴다니까."
퍼킨스가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노먼이 실종된 지 거의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작자는 어디 있지? 머리 굴리지 말고 당장 말하는 게 좋을 거야. 1분이 지날 때마다 네가 감방에 처박혀 있을 시간이 1년씩 늘어날 테니까."
"브, 블랙 룸이요!"
"블랙 룸?"
"마스터…. 아니 사장실이에요. 마스터는 주로 손님을 거기서 대접해요."
"거긴 어디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헛소리하면…."
"아래층에 있어요! 저쪽 계단으로 내려가서 복도 끝에 있는 방이에요. 지하 차고 바로 옆에 있어요. 지, 진짜예요."
"요원님! 입구랑 뒷문 봉쇄 완료했습니다. 제이든 요원은 아직 못 찾았나요?"
퍼킨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휴즈의 옆에 동료 요원 두 명이 서 있었다. 퍼킨스가 바텐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인간 구속하고, 일반인은 신원 확인해서 손님은 내보내고 종업원은 잡아 둬."
휴즈가 대답하기도 전에 퍼킨스는 등을 돌렸다. 코너가 그의 뒤를 따라 바 왼쪽에 위치한 작은 문으로 향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런 공간이 있는지도 모를 곳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고, 새빨간 간접조명이 층계마다 박혀서 벽을 빨갛게 물들였다.
“취향 한번 더럽게 확고하군.”
퍼킨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총을 꺼내 들었다. 그가 뒤에 선 코너를 바라봤다.
“소리 내지 말고, 신속하게 따라와.”
“네.”
그때, 누군가가 코너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어디 있던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얼굴을 보곤 곧은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손, 놓으십시오.”
차가운 기계의 목소리에 지미가 이를 갈았다.
“닥쳐! 이 깡통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인간을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지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안드로이드가 팔을 끌어당겼고 손을 놓지 않으려던 지미가 앞으로 기우뚱하는 순간, 코너가 무릎을 들어 그의 낭심을 세게 쳐올렸다. 퍼킨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고 휴즈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터, 터진 거 아니에요?"
지미는 바닥에 쓰러지며 웅크린 자세로 끙끙대는 신음을 흘렸다. 코너는 인간이 닿았던 옷소매를 툭툭 털며 여상한 얼굴로 퍼킨스에게 말했다.
"낮에 이 자가 했던 성희롱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할 생각인데, 증인을 서주실수있나요?"
"…그러지."
퍼킨스의 묵묵한 대답에 코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쓰러진 인간의 몸을 넘어 계단으로 향했다. 퍼킨스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휴즈에게 지시했다.
“이 사람도… 일단은 잡아놔. 구급 지원이 필요해 보이면 바로 부르고. 잘못하면 과잉 대응으로 저 기계 놈이 대신 끌려갈지도 모르니까.”
그리곤 코너를 따라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가뜩이나 어두컴컴한 이 공간을 더욱 짙은 어둠으로 물들이려 작정이라도 한 건지, 눈이 침침할 만큼 새까만 색으로 칠한 복도에 퍼킨스는 눈매를 좁혔다. 코너가 멋대로 성큼 걸어가려 하자 퍼킨스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끌어 자신의 뒤쪽에 세우고 얌전히 따라오기나 하라는 수신호를 내렸다. 안드로이드의 LED가 파랗게 빙글거리고, 퍼킨스는 총을 고쳐쥐고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저 끝에선 역시나 붉게 빛나는 조명이 복도를 어슴푸레하게 밝히는 중이었고,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그 빛이 유리 벽 너머에 위치한 차고 조명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정육점처럼 시뻘건 불빛 아래엔 검은색 SUV가 주차되어 있었다.
퍼킨스는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문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코너는 정말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아서 퍼킨스는 그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긴 한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뒤통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걸 보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젠장, 쏠 뻔했잖아!"
퍼킨스가 날 선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 문 너머로 무언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성의 목 졸린 듯한 신음이 들려왔다.
얼굴을 딱딱히 굳힌 퍼킨스가 곧바로 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다. 그가 방 안에 보이는 인영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당장 손들고 바닥에 엎드…."
퍼킨스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한 발짝 늦게 들어온 코너도 퍼킨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멈칫했다. 하얀 시트 위로,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남자가 손발이 묶인 채 나신으로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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