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널 찾아가고 있어
어둠이 밀려오면 / 선우은비
‘미래의 하선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웃던 얼굴을 하선우는 매일같이 그려왔다.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새하얀 얼굴, 공포와 걱정으로 뒤섞인 감정을 하선우는 어렵지 않게 읽어냈었다. 어렸다지만 그 표정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매일같이 거울 앞에 서서 보았던 얼굴이니까. 하선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여자의 낯에선 선명한 애정과 확신이 있었다는 점이다. 삶에 대한 희망, 목적, 다정함, 혹은…… 하선우를 향한 애정 같은 것.
그 애정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여자의 표정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선명했고 온유했으며 귀도의 어둠 속에서도 햇살처럼 반짝였다. 그런 표정을 마주본 지가 정말이지 오래 되었다. 아버지를 만난 뒤로는 조금쯤, 아주 조금쯤, 그런 애정을 다시 볼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이젠 아버지는 애정보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불안한 표정. 언제 아들이 잘못될지 모른다는 초조함.
그리고 이제는 그마저도 볼 수가 없다.
‘지금의 네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너를 좋아해. 네가 꼭, 너를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나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고은비는 하선우를 놓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린 하선우를 붙들고 다시 말했고, 그때 그 애의 표정은, 정말이지, 이상하리만치 빛나서 하선우는 그를 마주보는 대신 고개를 숙여 집중도 되지 않는 돌멩이나 뚱하게 발로 굴려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헤어졌다. 귀도 바깥에서 바람을 느끼며 하선우는 문득 힘겨운 얼굴로 웃던 고은비를 생각했다. 그리지 않던 미래를 불현듯 떠올린다. 미래.
내 미래에 네가 있을까.
*
고은비는 그의 미래가 행복할 거라고 했지만, 정말 절박하고 간절하게 진심처럼 그런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선우가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고은비도 믿으리라 생각하진 않은 것 같았다. 사실 그때까지 살아남은 건 호승심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 말이 맞는지. 영영 이 끔찍한 하루를 맞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 애를 원망할 수 있으니까.
누군가를 원망함으로써 그것만으로 삶의 숨통이 트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니 그것도 참 희한하지. 원망과 분노로 삶을 채운다면 어딘가 허망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이상하게 느끼진 않았다. 본래도 그의 삶은 어쩐지 허망했으니 그러리라 생각했다. 때때로 그 말이 떠오른다면 속이 간질해졌다.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하선우는 문득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고은비를 쳐다본다. 해가 진 교실에 앉아 집중해서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고은비는 하선우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고 진지하게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 하선우는 약간의 석양이 묻은 고은비의 얼굴을 창찬히 보다가 느릿하게 턱을 괴었다.
나는 아주 많이 불안했어.
너를 생각하면 화를 내고 싶을 때가 있었던 것도 같아. 원랜 늘 화를 내고 싶었다고, 왜 그런 말로 희망을 줬냐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사실 틀렸어. 너를 다시 만나기 전에, 네가 문득 불쑥 떠오를 때 불신했다는 말은 그 전의 모든 시간은 너로 인해 안심하고 희망을 가졌다는 뜻이야.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도 너를 생각했나 봐.
“왜?”
결국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은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선우는 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냥. 좋아서.”
“뭐야, 그게.”
약간 붉어진 얼굴로 고은비가 대꾸했다. 하선우는 그 얼굴을 마주하며 생각한다. 검은 머리카락, 순한 인상, 과거의 나를 가로질러 이제는 알 수 없는 오늘에서.
이 세상 어딘가에 그 사람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위안을 얻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 삶은 너로 인해 아름다웠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숨을 내쉰 그가 덧붙였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줘서 고마워.”
고은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소 뜬금없는 말이라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일까 긴장한 순간, 고은비가 끝이 처진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웃었다. 그리고 자그맣게 대답했다.
“나도 그래.”
선우 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하선우는 눈을 깜박이고 있다가 잠자코 웃었다. 웃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웃었고, 고은비는 그와 눈을 맞추고 함께 웃을 수가 있었다.
함께 온 길이었다.
“있잖아, 선우야, 내일 휴일이잖아. 어딜 갈까?”
“글쎄…… 어디든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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