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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 로맨틱 타로 신혼 여행 / 3,735자

책갈피 by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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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났어?”

“아니.”

“그럼 삐쳤냐?”

“아니거든?”

그런 것치고는 행동이 어울리지 않게 영 뾰족했다. 귀찮아하며 길바닥에 엎어져 자는 건 어울려도 팔짱 낀 채 입 다물고 휘적휘적 걷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게 바로 이든 아닌가. 린다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그는 뚱해 보이는 낯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막 연애에 눈을 뜰 시점의 학생들이 몰려다니며 슬그머니 너 혹시 누구랑 사귀어? 너 혹시 누구 좋아해? 하고 속닥속닥 말을 꺼낸 것도 한참 예전의 일이었다. 이든과 함께 지나가던 린다를 누군가 불러세우고 고백했던 일도 기억에서 반쯤은 잊혔을 시기. 함께 졸업해 린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잡고, 이든 또한 적당한 곳에 연구원으로 적을 뒀을 만큼 꽤 시간이 지난 일.

린다는 그때 슬그머니 이든의 눈치를 살폈던 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건 데자뷰인가?

“진짜 거절하려고 했다니까?”

“누가 뭐랬어?”

“좀 천천히 걷든가, 그럼!”

하지만 린다라고, 쿠키 먹고 싶다고 이든을 보낸 딱 오 분 그 사이에 얼굴 빨개진 또래 남성이 슬금슬금 다가올 줄 알았겠는가? 린다는 억울했다. 정말 잠깐이었다. 귀찮아하면서도 린다가 먹고 싶다니 설렁설렁 움직이는 등을 보며 가방을 들고 제과점 앞에 서 있었을 뿐이다. 기다리던 약 나흘 차 된 법적 가족은 안 오고 웬 처음 보는 남자가 다가와 슬그머니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느냐, 쿠키 좋아하시면 혹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느냐 물어온 것이다.

여행객을 향한 적당한 호의와 사교라고 믿고 싶었지만 시뻘개진 얼굴이나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나 주체 못하고 린다의 얼굴을 힐금힐금 바라보는 시선이 모른 척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눈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린다는 곧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혀가 이미 ‘죄송한데’까지 발음하고 있었다.

“누구야?”

밥 먹는 것도 귀찮아하는 주제에 이럴 때만 잽싼 이든이 먼저 돌아왔을 뿐이다.

“아는 사람?”

녹색 포장지에 쿠키를 싸매고 돌아온 이든이 고개를 기울이며 퉁명스레 말했다. 파란 눈동자가 린다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대충 훑었다. 표면적으로는 누구냐고 묻고 있지만 아는 사람 아니면 저리 가고 아는 사람이어도 저리 가라는 시선 처리가 대단했다.

린다는 차분해졌고 그렇게 좋지 않은 눈치로도 상황을 짐작한 남자가 아, 아, 소리를 내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하더니 조금 슬픈 눈치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남은 린다는 난처해졌다.

“이든.”

“이 앞에 장미 광장이 있다며?”

일단 이름부터 부르고 봤지만 답 대신 그런 말이 돌아올 뿐이다. 오늘 외출 목적은 그것이긴 했다. 린다가 얼결에 어어, 대답하자 이든은 쿠키를 품에 안은 채 턱짓했다.

“그럼 가. 보러 가야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었다. 슬금슬금 눈치 보는 린다와 성큼성큼 걷는 이든과 주위에 만개한 장미와 쏟아지는 햇볕. 적당히 보이는 의자에 짐을 올려놓던 린다는 문득 억울해졌다. 사실 문득 아니고 아까부터 억울했지만 눈치 보느라 별말 안 했는데 이든이 하는 걸 보니 이제 슬슬 말로 뱉어도 될 것 같았다.

“뭐. 이게 내 잘못이야? 난 진짜 아무것도 안 했거든?”

“나도 아까부터 계속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그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문제라고, 뭐. 불만이야? 어?”

“불만 아니고 질투지. 이건.”

덤덤한 말이 던져지자마자 린다는 멈칫했다. 이든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린다의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렸다.

“신혼 여행인데 저런 소리 들으면 좋겠어?”

그야…….

싫겠지, 그래, 신혼 여행이니까. 나흘만큼 린다의 법적 가족이 된 이든과 마찬가지로, 나흘 정도 이든의 법적 가족이자 부인이 된 린다는 입을 다물었다.

십 년을 넘도록 함께 있었고 그 세월 동안 서로가 미래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당연히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한 열다섯 살 시절이었으면 몰라도, 이제 와 너 설마 질투하냐고 충격 받은 얼굴을 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때도 질투하냐고 웃은 게 아니라 일단 눈치부터 봤던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결혼식을 준비하면서도 투닥대고 결혼을 한 이후로도 투닥대고 하다못해 신혼 여행을 와서까지 여덟 살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대도, 어쩌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 지금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됐으니까 그거나 먹어.”

이든이 뚱한 태도로 초콜릿 칩이 잔뜩 박힌 쿠키를 쥐여 주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린다는 이든이 직접 쿠키를 입가까지 대주고 나서야 한 입 베어물었다.

그러고서야 기분이 약간 풀렸다. 여기 진짜 맛있네. 린다의 표정이 나아진 걸 귀신같이 눈치 챈 이든이 포장지 째로 린다에게 내밀었다. 린다는 순순히 포장지를 받아 들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좀 고민하다가 고맙다고 말하기 무섭게 이든이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몸을 늘어뜨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린다의 다리 위로 머리를 댔다. 기다란 의자에 다리를 쭉 뻗은 그가 무릎을 댄 채 눈을 감았다. 살랑거리는 햇살이 백색 머리칼 드리운 이마 위로 쏟아졌다.

“뭐야?”

“잠깐만 있을래. 피곤하단 말이야.”

“뭘 했다고 피곤하대, 피곤하길. 오늘은 걷는 것 말곤 정말 아무것도 안 했거든? 너는 운동을 좀 해야 해.”

투덜거림이 익숙하다. 그래, 그래, 애 다루듯 대답하는 말에 린다는 눈가를 덮은 앞머리를 턱턱 털어버리고 말았다. 이든은 짜증도 내지 않고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손을 올려 앞머리를 마구 헤집는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허공에서 멈칫했던 손끝이 곧 얌전해진다. 손끝을 약간 꼼지락대다가 결국 옆에 얌전히 놓았다. 하지만 이든은 붙잡은 손을 풀지 않고 계속 그대로 있었다. 린다도 그냥 한 손이 붙잡힌 채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반 박자 뒤에야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 지금 자면 내가 초콜릿 쿠키 먹는 동안 부스러기 다 얼굴 위로 떨어질걸?”

“내 얼굴을 까끌까끌하게 만들 셈이야? 잘 좀 먹어 봐.”

“이러면 한 손으로밖에 못 먹는데 어떻게 잘 먹어?”

“어떻게든 잘 먹어 봐.”

“그냥 얼굴을 포기하든가.”

“내 손해야? 네 손해지.”

“어이없어!”

이든이 자신에게 그랬듯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백색 앞머리 끝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린다가 쿠키를 든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장미 꽃잎이 허공에 하나 흩날리다가 시야 바깥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그래, 이걸 보러 온 거였지. 과연 이 관광지에 유명하게 떠돌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젖히며 숨을 뱉어냈다. 어디선가 왁자지껄하게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가족이라도 놀러왔나 싶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다소 평평한 언덕 위에서 시끄럽게 대화하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처음엔 남매인 줄 알았지만 이리저리 투닥거리며 나누는 말들이 단순히 친구 같았다.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은 여자아이 쪽이 뭐라고 말하자 남자아이가 손을 휘저었다. 여자아이는 열을 내다가, 또 무슨 소리를 들은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가 돌렸다가 바쁘게도 돌아다니더니 마지막에 가선 웃었다. 그 옆에서 남자아이도 웃고 있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나 싶은 애들이었다.

“기운 차네.”

무릎을 벤 남자에게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긋 시선을 내리니 그는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린다는 어쩐지 많이 들어본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아직도 붙잡혀 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 나이대 애들은 그렇지 뭐.”

“난 안 그랬는데.”

“네가 이상했던 거야.”

딱 그 나이대만큼 활기찼던 린다가 입술을 삐죽이며 들고 있던 쿠키를 이든의 입가에 갖다 댔다. 눈을 깜박인 이든이 한 입 베어물었다. 맛있지, 하고 묻자 머리가 약간 끄덕였다. 린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듯 웃었다.

그래, 여전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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