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평소와 다름없는 휴일

─또한 분주하였으나, 그렇기에 다행이었다.

조각 글 by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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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작은 파문이 일 듯, 흐트러진 머리 근처에서 아침을 알리는 바이올린 선율이 잔잔히 흘러나온다. 익숙한 멜로디는 ‘G선상의 아리아’였다. 너무 자극적이지도, 너무 속삭이지도 않은 부드러운 멜로디에 지저에 닿았던 정신이 조금씩 부유하기 시작한다. 오래간 잠겨 갈라진 음성이 절로 낮은 신음을 내며 입술 사이로 흘러 나온다. 눈꺼풀은 닫혀 있지만, 의식은 조금씩 현실에 맞닿아져 간다. 그러나, 조금만 더…. 이런 기상은 실로 오랜만이라. 딱 ‘5분만’을 고집하겠단 아이처럼 몸을 일으킬 생각은 않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뺨을 부비적 댈 뿐이었다. 기분 좋다. 푹신한 감촉, 포근한 냄새, 이불 면에 제 팔다리가 스쳐 빚는 소리 등이. 오늘은 늦은 오전까지 게으름을 피워도 되는 소중한 날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성실히 야근을 일삼았던 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피로 회복제도 없을테다. 창문에 걸어둔 하얀 블라인드의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이 제 눈꺼풀을 간질이나 그게 또 성가시진 않았다. 오히려 뜨뜻한 열감이 반가워 늘어졌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오늘의 날씨는 일기예보를 보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릴 만큼 맑구나. 그런 생각에 부스스 닫혔던 눈꺼풀을 떠올리면 하얗게 부서지는 빛이 망막으로 젖어 들어온다. 가늘게 좁혀진 눈으로 머리맡을 더듬거려 제 휴대폰을 찾는다. 5분 더 연장해 연주해준 악단은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단 듯 조용히 화면을 터치하여 흘러나오는 선율을 잠재웠다.

쭈욱, 두 팔을 위로 길게 뻗어 기지개를 한 번 켜낸다. 오랜 시간 한 자세를 유지하느라 굳었던 어깨에서 경쾌한 소리가 터져나오며 시원한 감이 번져간다. 블라인드를 완전히 거두면 새파랗게 물든 하늘이 높게 떠있다.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가을날이구나. 이런 때일수록 화재 발생에 유의해야 하는데…. 문득 떠올려버렸단 걸 깨달은 건 모닝 커피를 취하기 위해 주방으로 나와 멍하니 물을 끓이던 때였다.

‘쉬는 날엔 일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라고들 했지만….’

역시 직업병은 고질병이랄지. 허나, 냉정하게 따지면 이는 손해가 맞다. 일 년 중 취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오프날에까지 일 생각, 동료들 걱정으로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팔팔 끓는 포트를 가져와 거름망 위에 담긴 원두 가루 위로 살살 부어내며 마음을 다잡는다. 오늘은 정말 내 생각만 해야지. 나의 하루를 보내야지. 그렇게 몇 번이고 되내었지만, 다 우린 커피를 한 모금 담아내며 버릇처럼 또 스테이션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역시 화재진압팀은 바쁘겠지? 밥 먹을 시간도 없을 거야. 환절기가 되면 아무래도 빈번해지니까.’

‘그건 구조팀도 마찬가지일까. 이맘때쯤이면 등산을 하는 사람도 관광객도 불어날 시기니까.’

‘구급이야 늘 전쟁같고.’

커피를 맛으로 마시는 편은 아니라지만, 갖은 생각에 잠긴 이는 이것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습관처럼 홀짝였다. 그러다 또 자신의 결심따위 3초도 안 돼 무너졌단 것을 깨닫고 제 이마를 손 끝으로 슥슥 문질렀다. 안되겠다. 너무 신경쓰인다. 쉬는 날이 좋은 동시에 불편하다. 자신은 이렇다 할 취미가 없어 빈 시간 동안 잡념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올테고 그것들은 자연스레 머릿속을 점령해 결국 일어나지도 않을 사건사고들을 하나하나 걱정하며 심란한 하루를 보내고 말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남이 보면 얼마나 한심스러운 모습일까. 심히 개탄스러울 일이나 어쩌겠는가. 저는 이런 인간인 것을. 사람이 하루 만에 마음 먹은대로 달라질 수 있다면 참 삶이 간편하고 좋았겠지만, 비현실적인 바람을 맹목적으로 쫓는 편은 아니라서. 반 이상 남은 잔 안의 커피를 가만 내려보다 이내 쭉 들이키고 빈 잔은 싱크대에 내려두었다. 부엌으로부터 시작된 잰걸음은 망설임 없이 제 방으로 들어섰다.

‘기왕 들를 거 도넛이라도 사가야겠다.’

해야 할 목적이란게 생기니 느릿했던 손은 슬슬 분주감을 띠었다. 제일 처음 한 일은 옷장 문을 열어 젖히는 것이었다. 추분에 어울리는 긴 팔 상의와 바지를 꺼내 잘 정리된 침대 위로 던져놓고 입고 있는 잠옷의 단추를 하나씩 끌러 내렸다. 당신은 오프날이면서 왜 또 출근을 했냐며 마주친 동료들이 던질 한 두마디가 뻔히 예상이 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루종일 신경쓰이는 걸 내리 마음에 담아두는 것보다 그냥 한 소리 듣고 오는 편이 낫겠다고 여겼기에.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겸사겸사 제가 도울만한 일이 생기면 바로 대처할 수 있으니 나름 나쁘지만도 않잖은가. 그런 식으로 동료들에게 무어라 변명할 지 고민하며 나갈 채비를 마친 뒤, 휴일에조차 적막할 수밖에 없는 집을 뒤로 한 채 곧장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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