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힐] 편지

유언장을 썼다는 얘기를 했다.

선임들이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윤이 내용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아미를 생각해서 적어놓은 게 많았다. 대부분 취급 주의사항이나 물품의 사용설명서 같은 느낌으로 작성되었지만, 들키지 않았기에 욕먹지 않았다. 그래서 윤은 힐데를 어느정도 이해했다.

간결하고 깔끔하고. 좋네. 하지만 후임들이 싫어할 만 했다.

모든 과정을 이해한 윤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편지도 아니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네 유언장을 볼거니까, 편지나 다름없긴 하지.”

“그런겁니까?”

윤의 시큰둥한 말에 힐데는 가만히 고민에 빠졌다.

윤은 입가에 가 닿은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폐가 부풀고 한계까지 치달았을 때 후, 내뱉는 동안 힐데는 반응이 없었다. 연기에도 반응 하지 않는 힐데를 보며 마지막 남은 연기를 후, 내뱉자 힐데가 윤을 쳐다봤다.

“역시 편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어렸어서.”

“편지를 썼었나?”

“부모님께 감사인사를 해봅시다, 정도?”

“그건 고해성사지.”

“그땐 부모님께 보내주신다고 다 걷어갔죠. 가지 않을 줄 모르고 썼어요.”

“가 닿지 않아도 편지는 편지지.”

무심히 담배를 빨아들이는 홀쭉해지는 볼을 본 힐데가 머리를 기울였다. 긴 머리가 한쪽으로 쏠리며 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그래도 편지인건가요?”

"그래. 때론 보내지 않는 것 만으로 편지는 쓰임을 다하기도 해. 반드시 보내야만 편지가 아니지."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래.”

윤은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윤도 편지를 쓴 적 있나요?"

"있지."

"누구한테요?"

"글쎄."

“연애편지?”

“대답 안 해줄건데.”

“연애편지같은데.”

“계속 까불어봐.”

그가 대답을 회피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윤은 궁금하다는 감정을 한가득 담고 바라보는 후임의 얼굴을 외면하고 담배 필터를 짓씹었다.

그게 너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달라고 할 테니까.

윤은 다 핀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털고 구겨 넣었다. 힐데는 여전히 궁금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답해주지 않았다.

너에게 썼지만 그건 네 것이 아니다.

내 것이다.

네가 지금 나의 것이듯이, 그 편지 또한 내것이다. 네가 내 편지의 향방을 궁금해 하는 동안, 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한 채 헛발짓을 할 동안, 나의 것이다. 그것들은 부쳐질 일 없다. 이미 타서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네게 주지 않을 것이기에 네것이 될 수 없다.

한 글자, 한 문장, 한 줄, 한 문단이 될 동안 꾹꾹 눌러담은 내 모든것들이 네것이 될 일은 영원히 없을것이다. 너는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질색하며 나를 밀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내것이라, 내가 너를 보살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동안 너는 내 것이다. 다음엔 가벼운 편지를 써볼까 한다. 토라져 아쉬운 마음 한 자락 말 하지 못할 너를 위해, 아주 가볍고, 사랑스러울 편지를 쓰려 한다.

이 마음을 네가 이해하길 바라지 않는다. 몰이해는 내게 몹시도 익숙하다. 그러니 너는 나에 대한 몰이해에 익숙해지면 된다. 현실에서 내가 표현 한 것만을 기억하면 된다. 너는, 내가 준 것만을 기억하면 된다. 그리고 이 마음을 네가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사실,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게 교류를 원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편지 쓸 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써 봐. 그러면 좀 나아질거다.”

“안 보여드리기로 했어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참고는 될 것 같아요.”

꼬물거리는 손끝은 편지를 수놓듯 움직이고 있었다. 검을 쓰는 주제에 손은 예쁘게 생겨서 흑심이 생기는 손이다. 외양은 말해 무엇하는가. 메스컴의 꽃과 같은 외양이다. 인기몰이를 하고, SNS에도 불티처럼 팔리는 얼굴.

그러나 많은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머리.

아무것도 모른채로도 충분했던 그의 부사수는 기억을 되찾을수록 유능해지고 있었다.

편지 쓰는 방법 같은건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윤은 앞으로도 제 편지가 상대에게 전해질 일이 없을거라는 사실을 느꼈다.

만에 하나 좋은 관계로 -과연 힐데에게도 좋을지는 의문이지만-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줄 수 없을 편지다.

그 어느 기록에도 남지 않을만큼 철저하게 없앤 편지는 오로지 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걸 말로 전해줄 생각도 없었다.

“도와줘?”

“예? 윤 바쁘지 않습니까. …혼자 써보겠습니다. 종이를 좀 낭비할 것 같지만.”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버릇은 언제쯤 고쳐질는지.

제 사랑스러운 부사수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어줄까 잠시 고민한 윤은 담배냄새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은근히 귀여움이 없는 부사수의 등을 두어번 치고 앞장섰다.

“유언장 갱신하러 가라.”

“예엡.”

언제까지고 오롯하게 제것이길 바라는 상대가 생겼을 때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갈라본다 하더라도 제것이 되지 않을진대.

네 심장을 내가 쥐었을 때 네가 내것이 된다면 네 가슴을 수십번은 열었을텐데.

마침내 너덜너덜해진 너조차도 내것이라 여기며 아껴줄텐데.

유언장 갱신 하나 만으로 하얀 머리카락을 부여쥐고 잇새로 앓을 모습이 훤했다. 혹은 의외로 술술 써내려갈지도 모른다.

그는 근본적으로 상냥하고, 선했다. 타인에게 하고싶은 말이 많겠지. 남길 말이라고 한다면 정말 종이를 몇장이라도 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또 기꺼워 할 그의 선임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좋았다.

인기 많은 부사수의 일정한 걸음걸이가 뒤를 쫓아오는것을 느끼며, 윤은 가만히 고민에 빠졌다.

확 고백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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