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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열대야/서안담하

2023 07 5천자

연습장 by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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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帶夜

열대야

[천하제일 검과 승천하지 못한 검은 이무기]

밤이면 밤마다 담벼락 끝에서, 그 그늘에서 누군가 노래를 불러요! 분명 뭔가 있다고요! 총각 귀신 아닐까요?

나인들이 재잘거리며 떠들었다. 소란스러운 소리는 몇 번이고 같은 주제를 통해 이어졌고, 작은 소란을 불러일으켰다.

어차피 사람의 말일 뿐이다. 하여 담하는 구태여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지만, 세간엔 ‘만약’이라는 게 있다. 혹여나 수상한 이가 숨어들었기에 나는 소문이라면 곤란했다. 말은, 소문은 무(無)에선 쉽게 생기지 않는다. 분명히 ‘무언가 있으므로’ 커지고 늘어난다.

“오늘은 제가 여길 순찰하겠습니다. 수상한 자에 관한 소문이 돌아….”

“뭐? 아서라, 소문일 뿐이다. 여긴 달빛이 훤해. 돌아다니거든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

“공주님께서 허가하신 일입니다.”

“…알겠네.”

호위 기사로서, 매사에 경계하지 않는다는 건 죄와 같았다. 그녀는 태만한 자들을 경멸했으며, 그들보다 무훈을 쌓아 이곳의 뿌리부터 뒤흔들고 싶었다. 그러니 기회였다. 마침 공주가 허가한 그녀의 순찰 경로는 소문의 ‘귀신 출몰 지역’과 제법 겹쳤으니까.

그런데, 공주께서도 소문을 신경 쓰시는 걸까.

담하는 무심코 공주, 민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처럼 냉랭한 시선이 뇌리를 스친다. 그녀는 제 주인의 지혜를 알았고, 그래서 이건 어떤 의도가 있다고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공주는 이 소문의 근원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으므로 담하의 순찰을 ‘허가’했다. 그곳엔 정말로 수상한 이가 있는 걸까? 아니라면….

“해가 저물면 달이 떠오르고….”

“….”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대궐에서 제일 밝은 곳의 가장 그늘진 곳, 어떤 이의 음성은 구슬프도록 절절한 노래를 부른다. 담하는 ‘소문의 귀신’에게 다가서기 전 마지막으로 제 상태를 점검했다. 몸-이상 없음. 주변 상황-이상 없음. 검-언제든 뽑을 수 있음. 마지막으로, 그녀의 마음가짐-흔들릴 이유가 없으므로 이상 없음.

그러니 가야 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소리를 죽이며 몸을 낮춘다. 빛 아래의 짙은 그림자 속에 숨어 전진한다. 담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의 지척에 다다랐을 때.

“달이 떠오르면…….”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뚝 끊기더니 빛을 담뿍 받아 똑똑히 보이던 사내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흰 낯이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나긋하게 보이는 검은 머리는 바람을 따라 사뿐하게 그 얼굴 위로 그림자를 기울인다. 두 눈이, 마주친다.

“더위가 기승이로군요.”

“….”

사내는 퍽 반가운 듯 밝게 웃었다.

“공주님의 호위꼐서도 잠이 오질 않으십니까?”

“문관은 퇴궐할 시간입니다만.”

담하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공 서안. 왕세자의 끄나풀. 그의 두뇌이자 침묵하는 혀. 유명인. 그녀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 유명인의 얼굴을 마주 보자니 아무리 억누르고자 해도 부드러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서안은 그런 그녀를 살피는 듯 시선을 기울인다. 초승달 같은 미소는 여전히 그 입매에 걸려있다.

“신하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남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일이 많아서 말이지요….”

“문관은 퇴궐할 시간입니다.”

똑같은 대답. 서안은 계속해서 말을 꺼낸다. 마치 담하의 새로운 반응을 이끌고자 하는 것처럼.

“호위라…분명 새로 오신 분이었죠. 저와 동년배였던 것 같은데. 대단하십니다. 저는 몸을 쓰는 일엔 서툴러서.”

“하지만 문관치곤 예리하십니다. 제 기척을 알아차리시다니.”

“기본뿐이죠. 기본.”

하여 담하는 원하는 바를 내주었다. 사내는 또 웃었다.

“그래도 칭찬을 듣다니 기쁘군요. 단련이 아예 헛은 아닌 모양입니다.”

먼저 굽히고 들어오는 것이 퍽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명령이 아니라면 엮이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담하 또한 그를 짧게 관찰해본다. 새카만 머리칼과 새카만 눈, 그리고 창백한 흰 피부가 어쩐지 산 자와는 다른 느낌이라 꺼림칙하다. 희고, 검다. 꼭 그가 다룰 종이와 먹처럼….

‘귀신이라…왜 소문이 그리 퍼졌는지 알겠군’

담하는 사람의 외모에 가치 판단을 두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눈길이 간다. 이래서야 웬만한 사람은 시선을 빼앗기고 말겠지. 그녀는 삐딱하게 생각하며 재차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비 내린 후의 밤은 눅눅하고 후덥지근하여 숨을 막히게 만드는 갑갑함이 있었다. 목전까지 올려 묶은 끈은 뻣뻣했고, 담하의 옷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호위께선 덥지 않으십니까…?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몹시 덥거든요.”

“수상한 자는 물리는 게 제 일입니다.”

“공주께서, 왕세자의 친우를 그리 대하라고 하셨습니까?”

“같은 신하의 입장이죠. 그러니 고하는 말입니다.”

서안은 담하의 말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끔뻑였다.

“의외로군요. 공주께서 당신 같은 자를 호위로 두시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버들을 엮을 것 같은 손으로 대쪽 같은 자를 기르시니 조금 흥미가 일었을 뿐입니다.”

“돌아가십시오. 마지막 ‘권고’입니다.”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은 담하가 또 같은 말을 꺼내자, 서안은 몸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음, 이리도 차가우시니 돌아가는 길은 서늘할 것 같습니다.”

달빛을 받던 남자가 비틀거리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자 발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기척이 옅어진다. 담하는 그가 완전히 물러났음을 확인하고 순찰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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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의도를 깨달은 건 얼마 뒤의 일이었다.

“간밤엔 잘 다녀왔니?”

“예.”

“네가 보기에 어땠느냐. 그 서안이란 자는.”

“…무어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초면이기에.”

“때론 그 첫인상으로 모든 게 결정되곤 하는 법이지. 그래서, 어땠느냐? 소문대로의 사람인가?”

그녀가 나풀거리는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언뜻 힘없고 약해 보였으나 공주-민희의 눈엔 달이나 해와도 같은 밝고 맑은 총기가 살기처럼 벼려진 채 바늘처럼 숨어있다. 담하는 공주의 총기와 지혜를 보았고, 그것이 바라지 않도록 지켜왔다.

‘역시 의도가 있으셨군.’

짐작한 대로다. 민희는 그녀와 서안을 접촉시킨 것이리라. 그런데, ‘소문’이란 무엇일까. 제가 아는 서안의 소문이라곤 짧은 이야기로서 기억한 것뿐이다. 가령, 어제의 귀신 소동이라던가…. 담하는 희고 검었던 사내를 떠올렸다. 떠올린 대로 말할 생각으로 그녀는 고갤 들었다.

“소문대로의 사람입니다. 희고 검은 것이 꼭 종이와 먹 같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수상하나, 총기가 있고 나쁜 일은 멀리할 사내입니다.”

“그런가.”

“예.”

민희는 무언갈 생각하는 듯 부채로 입을 가리고서, 시선을 굴렸다. 무언갈 휘갈겨 놓은 서책을 훑는 듯했다. 담하는 제 직감에 기반한 말을 올렸다.

“하지만 공주께는 맞지 않을 사람입니다.”

“왜지?”

“그는 공주와 같은 책사이며, 또한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니까요.”

“음…네 감은 언제나 좋았지. 허면, 벨 수 있겠니.”

“베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민희는 웃었다. 담하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부드러운 말이 내려앉는다.

“어쩌면 생길지도 모르지.”

“그래도 명하신다면, 벱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음에도 그 사내의 죽음을 공모한다. 공주-민희는 첫인상으로 모든 게 결정되기 마련이라고 말했으나 왜인지 담하는 서안을 벨 날이 오지 않길 바랐다. 그런 날이 온다면 무수한 피를 묻힐 순간이니까. 그녀는 무의미한 살생을 거리끼므로 차라리 정명한 명령이 영영 멀어지길 바랐다.

“…내가 뽑거든 벤다고 하는 거니?”

하지만 담하는 검이었다. 공주의 검이었다. 뽑히길 기다리는 검이었다. 민희는 손을 내저었다. 둥근 미소는 여전히 고운 낯을 떠나지 않는다.

“예.”

민희의 눈이 데룩 구른다. 그녀는 작게 한숨 쉬곤 담하에게 명했다.

“음, 네 말에서 많은 걸 느꼈구나. 마치 미래를 내다보고 온 것 같은 결연함까지…되었다. 담하. 이만 됐어.”

“물러나겠습니다.”

그렇게 담하는 다시 임무지로 복귀했다. 어느덧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귀신의 소문은 잦아들었으니 그 남자는 없겠지. 밤마다 벌벌 떠는 이들도 오늘은 조용하겠군. 담하는 짧게 생각했고, 오늘은 다른 경로를 배정받아 순찰했다. 바야흐로 ‘평안’의 시대. 호위들은 교대로 투입된 담하에게 대강 인사하며 입을 쩍쩍 벌려 하품하며 스쳐 지나간다. 담하는 몰래 검집을 되잡아 본다. 손짓 하나였다면 방금 스쳐간 무인들은 가슴이 패여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담하는 속으로 조소했다.

‘썩어빠진 정신머리로 잘도 살아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채로 진정되지 않았다. 오늘따라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저 호위들도, 공주를 두고 쑥덕거리는 말도, 불안한 작금의 사태를 제대로 꿰뚫지 못하는 나랏님이며, 언젠가 일어날 피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이 더위까지….

“…는 저문다. 달은 떠오르고….”

줄곧 생각하고 있던 생각의 중심. 그 사내의 목소리에, 담하는 생각을 멈췄다.

“쯧. 내일이면 또 시끄럽겠군.”

경고에도 물러나지 않는 사내는 성가시다. 그녀는 혀를 차고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또, 그때의 노랫소리였다. 가느다란 음성이 흐린 하늘을 따라 지나간다—….

“아, 호위님.”

보이지 않는 궤적을 따라 남하한 담하는 흐린 하늘 아래에서 선명한 색을 품은 사내를 보았다.

또, 공 서안이다.

달빛을 받은 사내는 마치 은방울꽃처럼 희었다. 청년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담고 밝게 빛난다. 미소 짓는 얼굴은 ‘반가움’을 담고 있었다. 담하는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던 말을 삼켰다. 웃는 낯엔 침 못 뱉는다더니, 지금이 딱 그랬다.

“…대번에 수상하게 보일 짓은 왜 하시는 겁니까?”

“반가워서 그럽니다. 열대야에 잠 못 드는 이는 저뿐만이 아닐 것을.”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궐에 총각 귀신이 있다고.”

“…그거, 접니까?”

“예.”

“….”

서안이 멍청히 입을 벌렸다. 담하는 그가 소문을 알고 있기에 훤히 즐기는 자라고 생각했지만, 새파랗게 질린 꼴이 아무래도 모르는 눈치라….

“설마, 모르셨습니까?”

“…부끄럽게도 소문엔 조금 둔합니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왜 돌아가라고 하셨는지 이제 아셨겠군요.”

“…예,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퇴궐해주십시오.”

“저기….”

“예.”

“데려다주시면 안 됩니까?”

“…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담하가 서슬 퍼렇게 눈을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서안은 몹시도 멋쩍은 눈치로 변명하듯 잽싸게 덧붙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조치가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몸이 좋지 않아서…어두운 곳은 잘 보이지 않는 바람에 돌아가기에도 힘듭니다.”

“시력이 약하십니까?”

“오늘 무리를 한 바람에….”

가장 경계해야 할 사내는 이상한 점에서 허술했다. 이래서야 맥이 빠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담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느덧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채다.

“무릇 신하라면 제 한 몸은 지켜야 합니다.”

“예….”

“한 번뿐입니다.”

서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왜 그렇게 웃는 겁니까?”

“아뇨, 의외였던지라…감사합니다.”

담하는 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어떤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

오래도록 이 광경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어떤 예감이….

외전- 그리고 당신은 인간이 된다. 

밤이면 밤마다 담벼락 끝에서, 그 그늘에서 누군가 노래를 불러요! 분명 뭔가 있다고요! 총각 귀신 아닐까요?

또, 노랫소리의 소문이 퍼진다. 담하는 검을 쥐고서 자리를 지켰다. 왕의 호위가 되거든 한시도 곁을 떠날 수 없는 것이 그 자리였다.

“노랫소리라….”

날은 덥다. 후덥지근하여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천하제일 검은 왕이 쥐었다. 쥔 채로 놓지 않으니 바람과 세월을 따라 서서히 녹이 슬고 있었다. 마냥 무(武)의 상징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존재할 일이 늘어났다. 그녀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서서히 해일처럼 밀려오는 그러한 변화를 느꼈다.

“서안, …아직도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담하는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날의 핏자국이 들러붙은 채 아직도 마르지 않고 그녀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담하.]

뒤를 돌아본다면, 그런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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