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나마도] 새벽의 불빛
채워진 술잔을 흔든다. 투명한 액체가 넘칠 듯이 찰랑인다. 아, 위험해. 진짜 넘칠 뻔했어. 물론 애초부터 흔들지 않으면 되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웃는다. 별로 유쾌하진 않은데 웃음이 나다니. 히나나 취한 걸까나. 스스로 생각하고 혼자 납득했다. 취했네.
하지만 별로 기분 좋게 취하진 않았다. 전부 이름은 알까 싶을 정도로 여럿이서 시끄럽게 떠드는 술자리는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자리에 나왔더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져서 다시 술잔을 흔들었다. 찰랑찰랑. 위험해라.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히나나 쨩은 귀엽게 생겼네~."
"그런가요~."
아까부터 말 걸어오는 이 사람, 짜증 나. 그래서 더 술잔이나 흔들며 딴청 부리고 싶어진다. 빨리 어딘가로 가버리지 않으려나.
"응, 귀여워, 히나나 쨩. 솔직히 히나나 쨩도 자기가 귀엽다고 생각하지?"
"네~, 당연하죠. 히나나는 귀여우니까."
"와, 자기가 귀엽다고 당당하게 말하네. 웃겨."
먼저 히나나를 귀엽다고 해놓고 나도 내가 귀여워요~하면 꼭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지만, 지금은 기분이 나쁘다.
왜 히나나가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지. 이유를 따지면 마도카 선배가 나쁘다. 이 사람이 기분 나쁜 건 이 사람이 나쁜 거지만, 마도카 선배가 아니었다면 히나나도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전부 마도카 선배의 탓이다. 턱을 괴고 다시 술잔을 흔든다. 찰랑.
작년 토오루 선배와 마도카 선배는 졸업했다. 졸업하면 어떻게 할 거야? 겨울, 어느 날의 하굣길에 코이토 쨩이 물었다. 응? 유학. 토오루 선배의 대답에 코이토 쨩의 걸음이 멈추었다. 유, 유학? 어디로? 파리, 프랑스.
토오루 선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마도카 선배를 봤다. 마도카 선배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도카 선배가 토오루 선배의 유학을 처음 알았을 때는, 별로 상상하지 않았다.
엄청 멀리 가네…! 당황과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코이토 쨩이 말했다. 응, 그래도 이어져 있으니까, 인터넷이라던가로. 담담하게 말하는 토오루 선배를 바라봤다. 어딘가 토오루 선배에게서 멀어진 기분이 들었지만, 축축해지는 감정을 보이는 건 그다지 하고 싶지 않으니까, 밝게 말했다. 프랑스인가~, 히나나도 가고 싶어! 토오루 선배에게 안겨들자, 선배가 웃었다. 따라와, 히나나. 와아~, 슝~! 비행기를 흉내 냈더니 토오루 선배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갑자기 가능할 리가 없잖아. 마도카 선배가 그런 우리에게 핀잔을 놓았다.
그래도…, 방학 땐 올 거지? 코이토 쨩이 애타게 물었다. 토오루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러 올게. 히나나도 메일 자주 보낼게. 그렇게 말했다. 코이토가 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영, 영상 통화! 다 같이 모여서 걸 테니까. 토오루 선배가 미소 지었다. 응, 기다릴게.
그리고 토오루 선배는 떠났다.
졸업식에는 마도카 선배밖에 없었다. 3학년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마도카 선배에게 다가가 꽃을 달아주었다. 마도카 쨩은 대학 어디 붙었어? 코이토 쨩이 물었다. A대. 마도카 선배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대, 대단해! 성적 높은 대학교잖아!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니야. 마도카 선배는 아무런 물기도 느껴지지 않고 건조하게 말했다. 졸업식 내내, 평소처럼.
마도카 선배.
이제 더 이상 선배가 아니야.
마도카 선배가 말했다.
흐응.
그런 마도카 선배에게 콧소리를 냈다.
새 학기 초, 진로 조사서가 나왔다. 지망 대학은? 지난 2년간 자주 보았던 질문이었다. 그 아래, 또박또박 적었다. A대.
히나나, A대 붙었어. 올해 초, 졸업식에 마도카 선배에게 말했다. 히나나 쨩, 대단하지? 코이토 쨩이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했다. 나보다 신나 보였다. 그래서? 마도카 선배가 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았겠지만, 마도카 선배가 먼저 물었으니까 대답해 주었다. 마도카 선배의 자취방에서 같이 살래. 마도카 선배는 시선을 내리고 잠자코 있었다. 잠깐 뜸을 들이고 마도카 선배가 대답했다. 집세, 반반으로 할 거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사 온 첫날부터 싸웠다. 생각보다 많았던 이삿짐을 다시 집으로 보내느니 마느니 하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한참을 싸우다가 서로 양보해서 반만 되돌려 보냈다.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상자들 사이에 마도카 선배와 나란히 누워서 말했다. 히나나, 왠지 이렇게 될 거, 알고 있었어. 마도카 선배가 대답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렇게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불렀다.
마도카 선배.
마도카 선배가 잠시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왜.
그 소리를 듣고 웃었다. 히나나는 즐겁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니까.
첫날부터 싸웠던 것처럼 새 학기가 시작한 몇 달 사이에 마도카 선배와 수도 없이 싸웠다. 청소, 설거지, 요리, 슬리퍼 두는 방향까지도 싸웠다. 알고 있었다. 마도카 선배와 살면 이렇게 되겠지, 하고. 그러면 마도카 선배가 자기도 알고 있었다고 답하는 거야.
그래도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같은 상에 앉아서 저녁을 먹고, 같은 천장을 보고 누웠다.
토오루 선배와는, 유학하러 갔어도 연락할 수단은 많았다. 요즘에는 인터넷 화상 통화도 쉽게 할 수 있고, 이메일이나 메신저로 연락할 수 있었다. 좀만 알아보면 스마트폰으로도 바로 연락할 수도 있어. 방학 때가 되면 토오루 선배도 돌아왔다. 토오루 선배가 돌아오면 우리도 모여서 토오루 선배를 만나러 갔다.
토오루 선배는 파리에 갔다 오고 나서 좀 더 멋있어졌다. 토오루 선배는 원래 멋있었지만. 토오루 쨩, 뭔가 멋있어졌네. 코이토 쨩이 선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예이. 토오루 선배가 브이 했다.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은데. 마도카 선배가 트집을 잡았다. 분위기가 바뀌어서 더 좋아진 토오루 선배를 내가 끌어안았다. 토오루 선배, 지금도 좋아~. 토오루 선배는 웃으면서 마주 안아 주었다. 포옹을 풀고 돌아보면 마도카 선배는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토오루 선배, 파리 가서 더 멋있어진 것 같아~. 토오루 선배와 만나고 돌아오던 오후, 운전하는 마도카 선배에게 말했다. 별로.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마도카 선배가 대답했다. 외국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조금 변한 것뿐이지, 똑같아. 마도카 선배의 손가락이 톡톡톡 핸들을 친다. 그 움직임을 보며 처음 파리에 유학 하러 간다고 말했던 날의 마도카 선배가 생각났다.
마도카 선배는 토오루 선배가 유학간 게 싫어?
내가 싫고 말고 할 일이 아니잖아.
마도카 선배는 계속해서 핸들을 두드린다. 히나나는 마도카 선배에 대해서는 몰라. 히나나는 히나나에 대해서밖에에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어째선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말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치만 마도카 선배는 토오루 선배를 좋아하잖아.
…아니야.
맞잖아.
아니야.
그래? 히나나가 보기에는 아닌데~.
마도카 선배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길가에 차를 멈춘 마도카 선배가 말했다.
내려.
하?
당장 내 차에서 내려.
그게 오늘 오후.
마도카 선배 탓에 중간에 내려지고, 마도카 선배의 얼굴도 보기 싫어져서 과방에 있었더니 사람들이 와서 같이 술 마시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그리고 이 지겨운 술자리에서 현재.
그러니까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짜증 나는 건 옆사람이 잘못한 거지만, 이 사람을 상대하게 된 것은 역시 마도카 선배의 탓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래.
또 한 바퀴 술잔을 돌린다. 원래라면 마도카 선배의 방에서 저녁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선배와 싸우거나 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혼자 방에 있을 마도카 선배에게 다시 화가 난다.
그래, 전부 마도카 선배가 잘못한 거니까, 마도카 선배한테 화풀이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가방을 드니까 옆자리의 남자가 묻는다. 가는 거야, 히나나 쨩? 아직 즐거운 일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히나나는 달리 즐거운 일이 있어서요~. 그럼 안녕! 그리고 술자리를 나왔다.
시계를 보면 벌써 새벽 1시. 아직 밝은 밤거리가 눈부시다. 네온사인과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가 서로 오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히나나의 즐거운 일은 따로 있어.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별로 하지 않고, 정해진 과제를 제 시각에 끝내는 마도카 선배라면 지금쯤 자고 있을 테다. 대학생에겐 아직 이른 시각이지만, 마도카 선배는 고등학생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자고 있는 마도카 선배를 괴롭혀주자. 마도카 선배 때문에 지겨웠던 술자리의 몫까지 더해서 실컷 괴롭혀야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콧노래가 나온다. 팟팟두왓파. 사이다처럼 톡톡 기대감이 터진다. 역시 즐겁지 않은 일은 히나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총총히 불빛이 번지는 아스팔트를 걷는다.
이제 도착. 출입문으로 걸어가며 자취방이 있는 빌라를 올려다본다. 새벽이지만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이 몇 있다. 1층, 2층, 무심코 층수를 세다가 걸음을 멈춘다.
마도카 선배의 베란다에 불빛이 보인다.
두근두근, 심장에서 거품이 톡톡 튀었다. 서둘러서 출입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자취방 앞에 도착해서 열쇠를 넣는다. 조급한 마음에 열쇠가 미끄러진다.
겨우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자, 마루의 불빛이 환하게 쏟아진다.
방 안에는 탁자 위에 마른안주도 없이 맥주캔만을 늘어놓고 앉아있는 마도카 선배가 있다.
마도카 선배의 시선이 느리게 올라온다. 신발도 벗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바라본다. 마도카 선배의 손에는 맥주캔이 흔들흔들거린다. 취했구나, 마도카 선배. 탁자 위에서 구르는 캔 수를 보면 알 것 같다. 마도카 선배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하다. 그대로 쓰러져서 잠들 것 같은 상태로.
기다렸어?
마도카 선배의 시선이 가라앉는다. 다시 느리게 고개를 돌리고 마도카 선배가 대답한다.
아니.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다가가 마도카 선배를 끌어안았다.
숨 막혀. 이거 놔.
마도카 선배가 내뱉는다. 마도카 선배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어쩌면 히나나의 냄새일지도 몰라.
싫어.
어느 쪽이든 놓지 않을 거야. 오늘은 마도카 선배가 잘못했으니까. 그래서 마도카 선배를 괴롭혀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게 히나나의 즐거운 일이니까.
새벽의 불빛이 베란다를 밝혔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부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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