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夜行)
FF14 아이메리크 HL 드림
* 김승옥 작가님의 「야행」(1969년, 『월간중앙』발간)으로부터 모티프를 얻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매일같이 자신을 보고 인사하던 것들이지만, 오늘따라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간밤의 일 때문이리라. 아이메리크는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할듯 말듯 고민하는 사람들의 옆을 서슴없이 지나갔다. 그러다 자신을 붙잡고 "잠시만"이라고 말을 걸면, 그제야 멈춰서서 이야기를 듣는 체 했다. 잘 듣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상대의 어깨 너머에, 상대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에 관심이 있어서였다. 상대가 걸어온 길이 마음에 들면 다음 것을 고민하느라 '듣기'라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상대가 앞으로 자신을 붙들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짐작하기에 바빴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언뜻 보아도 이슈가르드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모험가였다. 새내기보다는 풋내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정도였다. 그는 풋내기 모험가의 발자취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이미 더 크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 사람들은 영웅의 업적을 어느 순간부터 위대하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 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풋내기 모험가는 손을 내밀며, "앞으로 이슈가르드에 머물테니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단발 머리인 게, 처음 그 영웅 - 빛의 전사라고 불리는 여자 - 을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메리크는 손을 가볍게 마주 잡았다.
"앞으로 바쁘거나 용건이 있으면 기사단으로 오게. 나는 바빠서 말이야."
미적지근한 단발머리의 풋내기 모험가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아이메리크는 그저 단발머리라는 기시감에서 온 잠깐의 호기심에 눈을 뜰까 싶었던 자신을 향한 조소를 감추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그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옆에서 정교의 문제로 잠깐 들렀던 아르투아렐이 아이메리크에게 "무슨 일이 있냐"라고 물었지만, 아이메리크는 "그저 영웅이 잠시 생각나서."라고만 말했다. 아르투아렐은 "그렇지? 단발 머리가 꼭 닮았어."라고 대답했다. 한때 했던 그녀의 단발 머리가 새삼스러운 이슈가 된 날이었다.
간밤의 일은 아이메리크에게 황당했지만, 그의 어딘가를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이슈가르드에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이성이나 동성을 가리지 않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을 꼬여낸다는 이야기가 어느 순간부터 들렸다. 정교라는 신성 문제를 해결하느라 민생을 돌보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였다. 늦은 밤까지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애초에 이슈가르드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하층의 거리라고 하기에는 상층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기도 했다. 아직 한창 복구 중인 공간에서 '그런 행위'들이 오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이 봐주어야 거주지 정도였다. 지고천에서 작정하고 그런 일을 벌였다가는, 같은 거주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이슈가르드의 거주지는, 특히나 그것을 열망하는 사람들이나 있던 곳이었으니까.
그때 삐걱거리는 단번의 소리와 함께, 문 아래가 카페트 위를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끝까지 문이 열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 보고를 하러 오는 이는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등을 지고 앉아있다가 몸을 돌렸다. 일어나는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 앞에 서 있는 '영웅'은 웬일인지 빈 손으로 와 있었다.
"앉게."
아이메리크는 빈 손으로 온 영웅을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느닷없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오더니 서 있는 앞을 가로막았다.
"갈래?"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앞에 서서, 아래에서 위로, 아이메리크를 그저 바라보며 한 번 더 물었다.
"안 갈래?"
어디로 가자는 건지, 왜 가자는 건지, 이 밤에 집무실로 왜 왔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이메리크는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한참 뒤에나, 자신이 영웅이 얼굴에 짙은 한숨을 내뱉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가지 않을 거야?"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지 않을 거냐는 영웅의 말에, 아이메리크는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긴장감이 새삼스러웠다. 평소 늘 앞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 받던 이에게서 느껴지는 새로운 긴장감에 그는 이것이 최근 이슈가르드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메리크에게 언제든 손을 내밀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낯섦이 느껴질 무렵,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감이 폐부로 가득 찼다. 달큰한 술 냄새가 느껴진 것도 이때였다.
"취한 것 같은데, 어디에서 마신 거지? 여관?"
평소 그녀는 여관에서 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집 밖에서는 술을 잘 하지 않았지만, 이슈가르드에 오면 여관에서 술을 마시며 그를 기다리는 게 일상인 사람이었다. 아이메리크는 여관에 가서 당장이라도 따져야 하나 싶었지만,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녀를 두고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다른 사람의 앞에 서서, 그에게 했던 말을 그래도 할 지도 몰랐다. 누가 참을 수 있을까. 아무도 참지 않을 것이다. 못하기보다는, 안 하는 것일테니까.
아이메리크는 긴장한 만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어느새 어깨 너머 다시 긴 머리가 된 영웅의 머리 중, 앞머리가 흔들리는 게 눈에 보였다. 영웅의 눈이 아니라 미간 언저리의, 자신의 날숨에 흔들리는 앞머리에 시선이 고정 될 무렵, 그녀는 아이메리크의 손목을 잡았다. 군데군데 화상으로 굳은 살이 박힌, 생각보다는 작지 않은 그 손 - 이미 알고 있는 그것 - 이 손목을 그러쥐었다. 꽉 쥐지는 않았다.
"갈래?"
그녀의 말에,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이슈가르드를 지배하고 있는 그것이구나, 아이메리크는 그때야 알았다. 그녀가 중심에 있지는 않을테지만 그래도 일부인 것은 분명했다. 밤이 지나고, 새로 해가 뜨고 나면 이 문제는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뜨고 시계를 봤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이른 아침이었지만, 옆자리는 비어있다. 아이메리크는 그녀가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갔다고 단정지을 수 있었다. 집으로 갈 때면 늘 두고 갔던 머리끈이 베개맡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그녀가 마신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점성원을 지나 하층으로 내려가는데 군데군데 사람들이 보인다. 여자든 남자든 할 것 없이 다른 상대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는, 상대에게 묻고 있다. 어제의 그녀처럼 상냥하게 손목을 살짝 그러쥐기보다는 어깨를 붙잡는다거나, 억지로 부딪히는 등 과격한 행위로 상대를 저지하고 있다. 그간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으리라. 아이메리크는 자신이 아직도 모르는 것이 새삼스레 많다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손목에 걸어둔 머리끈을 가져다 줄 때면, 영웅의 경험치만큼은 아니더라도 한 발은 더 다가가있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죄스러운 반가움이 올라왔다. 저들의 경험을 아주 잠시, 모른척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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