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 태풍이 오기까지

의사란 놈이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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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태풍 온대."

우현이 뉴스를 돌리다 흘러가듯 이야기했다. 커다란 티브이 화면에 거대한 태풍이 소용돌이치며 올라오는 것이 비춰졌다. 우현은 자못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눈가를 긁적였다. 나름 도시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마음과 동시에 비가 퍼부으면 아스팔트 때문에 물이 빠져나가기도 어려울 텐데 방비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걱정이 번갈아 들었다. 태풍이 오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할 텐데, 무사안일주의를 디폴트로 장착하는 한국인치고 심각한 태도였다. 혹시 전기라도 끊기면, 송신사에 문제라도 생기면 등등 별의별 고민이 파르륵 떠올랐다 사그라들었다.

점점 심각한 고민을 이어가는 우현의 걱정을 덜어주듯 때마침 포크가 내밀어졌다. 눈을 티브이에 고정하느라 무엇이 포크 끝에 걸려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우현이 상큼하게 터지는 달고 신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두였다.

"걱정이 그리 많아서야, 밤에 잠도 못 자겠어. 강우현, 느슨하게 생각해."

"느슨이고 자시고 이번 태풍이 얼마나 강한데! 너야말로 너무 태연한 거 아니냐?"

우현의 옆에 앉아 자두를 손질하고 있던 해운이 눈썹을 까딱거리며 웃었다. 자두 과즙이 손에 묻는 것을 싫어하는―정확히는 그로 인해 손을 씻으러 왔다갔다 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우현을 위해 늘 자두를 잘라온 손이 익숙하게 과일을 다듬었다. 예쁘게 토막난 자두가 새하얀 접시 위에 가지런히 진열되었고, 해운은 다음 자두를 집어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태연할 수밖에. 간만에 너와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지."

"이 미친놈이. 넌 재해라는 생각이 없냐?"

이런 인간 말종을 누가 데려갈까, 하고 쳐다보는 눈길이 따가워 해운이 픽 웃음을 흘렸다. 약지에 낀 반지를 좀처럼 떼놓지도 않으면서 우현은 종종 저런 눈으로 해운을 쳐다보곤 했다. 우스운 점은 그러다가도 이미 내가 데려갔으니 상관없지, 하듯 묘하게 뿌듯한 얼굴을 한다는 것인데 그 입가의 실룩거림을 보는 게 최근 들어 생긴 해운의 소소한 취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우현의 입가가 꼼질거리기에 해운은 흘끗 그것을 바라보다 조그맣게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따끔. 과도가 엄지를 스쳤다. 아픔에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린 해운이 과도를 내려놓자 다기에 남은 자두 하나를 콕 찍고 있던 우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다쳤어? 어디 보자."

"조금 베인거야."

"일단 피 나면 얄짤 없다. 의사란 놈이…."

우현이 눈빛을 뾰족하게 세워 해운을 흘겨보았다. 제가 다치면 얼굴을 굳힌 채 온세상의 명의란 명의는 다 데려올 것처럼 굴면서 정작 본인이 다친 것에는 둔감했다. 선천적인 건지, 후천적인 건지. 작게 중얼거리며 해운의 엄지손가락을 감싸쥔 우현이 심각하게 눈썹을 좁혔다. 생각보다 출혈량이 많았다. 다행히 꿰매야 하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그냥 '조금 베인 것'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이 꼬라지를 하고서도 대충 넘기려 했단 말이지? 툴툴거리는 소리를 뱉으며 우현이 구급상자를 가져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래서야 태풍 와도 휴식 못 취하겠네. 별 걸로 다 다치고."

"너무한데."

"너무는 무슨 너무. 휴식보다 요양이 먼저 되겠다."

새하얀 구급상자를 든 우현이 얼굴을 구기며 타박했다. 그에 해운이 시무룩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언제나 그랬듯 우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원래의 느긋한 얼굴로 돌아온 해운이 제 손을 붙잡는 우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처를 잘못 건드릴까 조심스럽게 붙잡고 걱정 어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얼굴이 퍽 심각했다.

이러니 태풍 따위가 걱정될 리 없지. 네가 곁에 있는데 뭐가 더 힘들고 지치겠어.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걸 느끼며 해운이 우현의 동그란 머리에 입맞추었다. 곧장 우현이 개수작 부리지 말라며 눈을 부라렸지만, 해운은 태연히 어깨만 으쓱였다. 건드리지 말라는 눈을 해도 제 손을 감싸쥔 우현의 손은 여즉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것처럼, 포근하면서도 단단했다. 그 세심한 체온에 때아닌 편안함을 느낀 해운이 며칠 뒤 북상한다는 태풍을 떠올렸다. 걱정 많은 강우현을 위해서라도 약간의 대비는 해야겠지. 그때 집에 나란히 콕 박혀 있을 것을 상상하며 해운이 배부르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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