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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젬] 악인의 선의

히빌 AU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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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지구 빌런 제마.

공기를 가르는 언월도가 건물벽을 죄 베었다. 구그긍, 무너지는 건물이 한산한 도로를 엉망으로 막고 상황을 알리던 기자가 황급히 도망쳤다. 순식간에 엉망이 된 제한 구역의 중앙에서 제마가 여유로이 무기를 흔들며 사뿐사뿐 거리를 가로질렀다. 머리 위에서는 경찰 헬기가 사나운 소리를 내며 프로펠러를 돌리고 저 멀리 특수부대며 히어로들이 대기하고 있음에도 극히 느긋한 모습이었다. 흠집 하나 나지 않은 하얀 구두가 묵직하게 지표를 밟고 사뿐히 건물 잔해 위로 올라섰다. 등 뒤로 나부끼는 코트마저 우아하기 그지없어 다른 이가 보았다면 이곳이 하나의 파티장이라고 해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발 딛고 있는 곳은 사방이 무너져내린 건물의 파편이요, 이 나라의 지도부들의 사택이 즐비한 곳이었다. 이로 인한 막대한 손실을 셈한 제마가 배부른 맹수처럼 웃으며 언월도를 길게 휘둘렀다. 쿠쿵, 쿵! 그 한 번에 도로가 내려앉았다. 바쁘게 연료를 소모하는 헬기가 아직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아량으로 용서해주고 있는 것이니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말 것. 내려앉은 도로가 시사하는 바를 읽어낸 헬기 조종사가 제마로부터 조금 더 거리를 내었다. 귀를 울리던 소리가 좀 더 멀어진 것을 느낀 제마가 흡족스럽게 웃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검격이 발 딛고 선 자리를 파헤쳤다. 정확성, 힘, 그리고 주저없는 행동. 물러서는 게 늦었다면 발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저를 적대하는 자 중 이만한 실력자는 드물었기에 상대가 누구인지 금세 파악한 제마가 설렘을 담아 살며시 눈웃음을 그렸다. 깨끗한 하늘빛 머리카락이 검은 아스팔트 도로 가운데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오직 빌런을 상대로 할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검날이 오늘도 첨예하게 빛났다. 흔들림 없는 곧은 시선이 물러나는 제마를 정확히 응시했다.

히어로 지구가 빌런 제마를 상대한다. 오직 그 사실 하나가 의미하는 바가 컸기에 하늘에 자리하고 있던 헬기가 천천히 물러섰다. 둘의 대치를 방해했다가 반토막 난 헬기 수가 거진 열 개체를 넘어섰다. 마찬가지로 구역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자들도 물러날 것이다.

두두두두, 멀어져가는 헬기소리를 들으며 제마가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둘만의 무대인가. 지구, 전장은 마음에 들어?"

마치 은혜를 베풀듯 내밀어진 손이 햇빛에 하얗게 부서졌다. 그 비인간적인 자태에 어느 추종자들은 그의 발밑을 핥겠지만, 지구는 경계하듯 검을 들어올렸다. 긴 말 없이 싸워 너를 잡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제마가 노골적으로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가 고의적으로 꾸며낸 얼굴이라는 것을 아는 지구는 더더욱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제마를 응시했다.

"아예 말도 안 할 생각인가. 너를 위해 조금 덜 부쉈건만, 서운한걸."

제마가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낮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두드리는 게 다였으나 분위기는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날카로이 쏘아지는 위협을 느낀 지구가 검을 쥔 손목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위협을 느낀다고 해서 바로 달려들었다간 맥도 못 추린다. 영리하고 치명적일 만치 강력한 이 빌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재빨리 상황을 읽고 대처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첫 번째, 말. 용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한 그는 뱀 같은 혀로 사람을 홀렸다. 화려하고 매력적인 그의 언변은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그의 말이 정답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것에 넘어간 이가 한둘이 아니며, 실제로 그의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리 생겨났다. 그러니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그의 말에 답하지 말 것. 대체로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잘 지켜지지 않는 다짐이었으나 지구는 최대한 경각심을 가지려 애썼다.

그리고 두 번째, 인식을 넘어선 무력. 보고 나서는 늦는다. 생존 본능과 경험에 기대어 받아쳐야 한다. 살갗이 쭈뼛 긴장하고 목 뒤를 타고 소름이 흐르는 때. 지구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근육을 긴장시켰다.

온다.

텅!

맨몸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났다기엔 믿을 수 없는 폭음이 터졌다. 아까까지 있던 그가 서 있던 자리는 반동으로 파헤쳐졌다. 여태까지의 경험에 의지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른 지구가 제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언월도의 검대를 보았다. 검날로 한 공격이 아님에도 팔이 저릿할 만큼 무거웠다. 이런 대치 상황으로는 오래 못 버틴다. 밀리는 것을 체감한 지구가 절로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돌연 제마가 부드럽게 검대를 돌려 지구의 검을 쳐냈다. 손잡이를 꽉 쥐지 않았다면 그대로 놓쳐버릴 뻔한 힘이었다.

"억지로 버티면 손목 다쳐. 알면서."

무거운 언월도가 붕붕 소리를 내며 제마의 손 위를 노닐었다. 일부러 평소보다 강한 힘으로 부딪친 사람이 할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그가 왜 이런 심술을 부리는지 알고 있기에 지구는 치미는 한숨을 삼키며 제마와 눈을 마주쳤다. 형형한 검은 눈이 빛을 죄 빨아들이며 인외의 것처럼 빛났다. 원하는 것은 쟁취하고야 마는 눈이 지구를 정확히 응시했다. 하아, 지구가 한숨을 내뱉으며 검 끝을 살짝 내렸다. 받아치기엔 다소 지나치게 내려간 검 끝이 지구의 의사를 반영했다. 대 빌런 제마 대처법 첫 번째 계율이 어김없이 무너졌다. 지구는 약간의 경계와 또 감히 형용키 어려운 감정을 담은 눈으로 제마를 보았다.

"빌런 일에 지나치게 사심을 담는 거 아냐?"

"내가 히어로도 아니고 딱딱하게 규칙 지켜서 할 필요 있나? 그리고 내 기준은 충분히 지키고 있다고."

제마가 어깨를 으쓱이며 언월도의 날 끝을 크레바스가 생긴 도로 쪽으로 내렸다. 지구의 검끝이 지면에 가까워진 것과 같은 의사표현이었다. 그러나 지구는 경계심을 낮추긴 커녕 촉각으로 닿는 모든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제마는 저 느슨히 힘 빠진 손목으로도 제 몸을 두동강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제마는 지구가 대화에 협조적으로 나왔다는 것에 만족했는지 공격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되레 산뜻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이 퍽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아, 그건가. 지구가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었다. 다시금 보이는 경계 태세에 제마가 못내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물론, 작위적인 표정이었다.

"왜?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 표정의 네가 하는 말이야 뻔하지. 나라와 정의를 등질 생각은 없어, 빌런 제마. 포기하도록 해."

"웃기는 소리, 다 잡은 대어를 놓칠 것 같아?"

새까만 눈빛이 맹렬히 반짝였다.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눈빛이 지구에게 꽂히고, 그에 지구가 반사적으로 몸을 물림과 동시에 빳빳한 카드가 날아왔다. 지구의 손이 본능적인 방어로 카드를 움켜쥐었다. 초대장 같아보이는 편지 봉투 위엔 늘씬한 필기체로 지구의 이름이 그려져 있었다. Dear. 지구. 발신인은 비어져 있었으나 지구는 이와 같은 초대장을 이전에도 받아본 적 있었다. 지구의 미간이 경멸감으로 희미하게 일그러졌고 그걸 놓치지 않은 제마가 비밀스럽게 미소지었다.

"한 달만이지? 윗 분들은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즐거우신가 봐."

"……."

"이번에도 초대장은 넘길게. 완벽히 위조한 거니까 걱정 말고 갔다 와."

파티 선물로는 빌런 영입에의 긍정이면 좋겠네. 제마가 짓궂게 매혹적인 웃음을 머금더니 지구를 향해 가볍게 허공에 키스했다. 쮸, 하는 다소 귀여운 소리가 나고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양 제마의 신형이 사라졌다. …빌런 다운 퇴장인데. 지구가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Dear. 지구. 원래의 필기체를 그대로 베껴냈을 게 확실한 글자가 푸른빛 잉크대로 반짝였다. 지구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스스로가 한 생각을 깨닫고 고개를 파드득 가로저었다. 이렇게 초대장만 주고 떠나는 것은, 그래, 확실히 제마 답지 않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빌런 제마의 목적이 제 영입인 걸 잊었는가? 히어로가 되어서 빌런이 빨리 사라진 걸 아쉬워하면 어쩌자는 거야. 인명 피해는? ……물론 없지만. 하지만 재산 피해는 있잖아. ……물론 고여 썩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재산이지만. 아니, 아니지. 중요한 건 실질적인 피해가 있다는 거야. 지구가 푹 한숨을 내쉬며 눈 위를 손으로 덮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마. 지금은 눈 앞의 일만 보는 거다. 지구가 크게 심호흡하고 다시 눈을 떴다. 히어로 지구가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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