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젬] 바다로
너는 이곳에 있어선 안 돼.
*인어 AU.
*직젬 6주년! 사랑한다 이 부부야!
그들을 칭하는 말은 아주 다양하다. 살아있는 바다의 보석, 바다와 땅의 매개자, 바다에 똬리 튼 현자, 그리고 행운을 물어주는 심해. 그들은 아름답고, 유능하며, 현명하기까지 해 모든 인간의 간원을 샀다. 그들의 흐드러지는 머리카락은 한올 한올 빛을 머금은 듯 찬란했고, 영리한 손짓은 천 리 밖을 보듯 간결했다. 그들은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동시에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거대한 자연의 일부인 양 해류를 따라 헤엄치며 그들이 필요한 곳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혜를 건네주고자 했던 그들에게 인간은 추악한 욕심을 들이밀었다. 바다와 같은 생을 사는 그들에게 짧디짧은 인간의 삶을 종용하고, 그 무엇보다 넓은 자유를 지닌 그들을 잡아들여 좁기 짝이 없는 수조에 가두었다. 아름답고, 유능하고, 현명하기까지 한 그들이 인간들의 무대에 올려졌다. 인간이 원하는 수조에 담긴 채 인간이 원하는 가격이 매겨져 인간이 원하는 대로 구속되었다. 한평생 자유를 벗으로 두었던 그들 중 일부는 좁은 감옥을 버티지 못하고 수조에서 죽었다. 그런 시체는 부위별로 분해되어 또다시 진귀한 것이라 이름 붙여져 시장을 나돌았다. 오직 인간들을 위한, 인간만의 유희였다.
흉악하기 짝이 없는 수렵이 한참 열을 올리고 3개월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영리한 그들은 바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자 그들의 값은 더욱 매섭게 치솟았고 수렵꾼들의 손속이 거칠어졌다. 두어 달에 겨우 한 마리의 인어만이 육지에 올라오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인어 경매조차 비정기적인 형태로 바뀌고 그 드문 인어들에게 침을 줄줄 흘리는 인간들이 늘어났다.
그로부터 딱 1년, 아주 아름다운 것을 잡아들였다는 소문이 났다.
*
"공작님께서는 이번에도 안 가십니까? 여태 잡아들인 것 중 가장 아름답다는데요!"
옆에 있던 귀족이 침이 마를 것처럼 혀를 놀렸다. 그의 경박한 손동작이 잡은 인어를 묘사하며 추잡해지고 떠벌떠벌 말을 쏟아내는 입에서는 기분 나쁜 단내가 났다. 신나게 입을 털어대는 그를 힐끗거리며 공작이 경매에 참여하는지 하지 않는지 가늠하려는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나 같이 음침한 시선들이 익숙하면서도 오심이 치밀었다. 후우, 길게 숨을 뱉은 그가 차갑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로 여전히 입을 멈추지 않는 귀족을 응시했다. 섬뜩하게 날이 선 눈동자에 귀족의 입이 딱 닫혔다. 겨우 조용해진 사위를 인식하며 공작이 입가를 검지로 살살 문질렀다. 미동없이 침잠한 눈동자는 깔끔히 내려묶은 그의 머리카락처럼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지구 샤코레피아. 몸 담은 공작가는 현 제국에서 가장 큰 부를 움켜쥐었고, 그 본인은 제국이 가진 가장 거대한 검이라 불리며, 귀족 회의에서는 한 마디 말만으로 판도를 뒤바꾸는 권력을 가진 이. 지배자로 군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기에 황자라 할지라도 감히 그에게 말 붙이기 힘들었다. 황제보다 더 황제다워 만약 귀족파였더라면 반란의 중심점이 되었을 이였고 그와 동시에 황실의 파임에도 여전히 황가의 견제를 받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와 친분이라도 쌓인다면 든든한 뒷배가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지라, 눈치를 보면서도 은근히 말을 붙여오는 것들이 제법 있었다. 샤코레피아 공작은 한심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귀족을 흘긴 뒤 재차 걸음을 옮겼다. 주저 없이 성큼성큼 나아가는 그의 걸음에 귀족의 물길이 빠르게 갈라졌다. 그에게 맞춰 바짝 따라붙은 최측근이 은밀히 말을 건넸다.
"3시간 뒤 오데아 후작과의 만남이 예견되어 있습니다만, 사견으로는 안 가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래, 벌써부터 경매 얘기로 시끄러운 걸 보니 가 봤자 그리 유용한 대화는 못 하겠어."
"오데아 후작께서는, 추잡한 취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서신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정이 비는데, 어찌하시겠어요?"
막힘없이 나아가던 공작의 걸음이 멈추었다. 깨끗한 구두가 깔끔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디뎠다. 잠시간 멈추어있던 공작이 침묵하다 다시 발을 떼었다. 누구보다 제 주인을 신뢰하는 수족은 아무런 물음도 없이 그가 가는 길을 열었다. 철컥, 마차의 문이 열리고 가볍게 계단을 오른 공작이 서늘한 낯으로 지느아를 내려다보았다.
"경매장으로 간다."
지긋지긋한 인어 사냥을 끝내야겠어.
*
어둡고 푸르게 꾸며진 백 스테이지는 생각보다 멀끔했다. 자재들은 깨끗했고 물품 하나하나가 돈깨나 드는 것들이었다. 그 번질번질하고 깔끔한 모양새는 곧 귀족들의 돈을 알차게 뜯어먹었다는 뜻인지라, 샤코레피아 공작은 은은한 혐오가 깔린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마치 바다의 한 켠을 떼 온 것 같은 조명이 은은하게 그를 비추었다. 무거운 구두 소리가 넓은 공간을 울렸다. 공작의 한 발 앞에서 얍삽한 표정으로 히죽거리는 판매자가 후다닥 걸음을 옮기며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어휴, 공작님이 오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서비스해드리는 건데 말입니다. 매번 이쪽엔 관심도 안 기울이시니, 고객이 되실 줄은 아예 몰랐지 뭡니까?"
슬쩍 시선을 돌린 판매자가 묘한 눈으로 공작을 훑었다. 제 딴엔 티내지 않겠다고 은근히 군 것 같았으나 공작의 눈에는 고스란히 비쳐보였다. 절로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편 공작이 까딱 손짓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안내하라는 짧은 신호에 판매자가 곧장 입을 다물고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잰걸음이 빠르게 이어지고 얕은 숨을 빠르게 몰아쉰 판매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옆엔 벽 한쪽을 크게 차지하는 커튼이 있었다. 곧 판매자의 손에 의해 커튼이 걷히고, 일렁이는 물을 투과한 빛이 백 스테이지의 바닥을 물들였다.
아, 공작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늘 단단히 닫혀 있던 입매가 느슨해지고 한결같은 표정에 거대한 충격이 깃들었다. 그 일련의 변화를 지켜본 판매자는 거액을 손에 쥘 확신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아무리 잘난 척 굴어도 인어를 한 번이라도 보면 갖고 싶어지기 마련이지. 속으로 통렬하게 비웃은 판매자가 크게 외쳤다.
"예, 지금 보고 계신 저것이 오늘 경매에 올라가기로 했던 그 인어입니다!"
깨끗한 유리벽을 짚는 손이 새하얬다. 물속에서 요요히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 마냥 일렁이고, 바다 가장 깊은 곳의 어둠이 밀도 높게 자리한 검은 눈이 서늘한 분노를 담아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목에 돋아난 비늘이 차르르 서며 인어의 경계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거친 바다에서 살아남았음을 드러내듯 탄탄한 몸이 수려한 얼굴 아래로 이어졌다. 장골쯤부터 다시 돋아난 비늘이 꼬리를 따라 흐르고, 머리카락처럼 새카맣던 꼬리는 지느러미가 있는 말단 부분부터 눈과 같은 은은한 백색을 띠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꼬리 부분에 채워진 사슬만이 이 아름다운 인어의 유일한 흠이었다.
아름답고, 유능하며, 현명한 인어. 공작은 저도 모르게 수조에 한 발 다가갔다. 귀한 것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운 손이 수조 위에 얹히고 공작의 녹색 눈동자가 인어를 올려다보았다.
있는 줄도 몰랐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동시에 말할 것도 없는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그저 아름다웠다. 인외의 종이라는 배척감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저……. 공작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입술 새로 흘러나온 음성은 각오했던 것보다 곧았다. 공작의 눈이 인어의 눈과 마주쳤다.
"지구 샤코레피아, 내 이름이야."
두꺼운 수조는 음성을 전달하지 못한다. 지구 역시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구는 말하고 싶었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 지구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인어에게 작은 미소를 그렸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할 건지 알면 판매자는 내게 너를 건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얼마 안 가 직접 말해줄게. 지구가 사르르 눈을 휘었다. 심장이 속절없이 파도에 휩쓸리는 듯했다.
이로 인해 인어를 사들인다는 악명이 제게 달라붙을 것이다. 고고하고 흠없는 샤코레피아에 감히 흠집을 낼 기회를 놓치지 않을 이 역시 해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았다. 그러나 지구는 이 아름다운 이를 앞에 두고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었다, 그런 선택이었다. 지구는 기꺼이 제 이름에 흠집을 내기로 했다. 단지, 이 아름답고도 처연한 인어를 위하여.
*
공작이 경매장에 오르지도 않은 인어를 사들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어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려 공작성에 칩거해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 역시 함께였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샤코레피아의 이름이 온갖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귀족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몰아치는 이리떼와 같이 온갖 구설수들이 올라왔고 소문은 부푸는 솜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샤코레피아에서는 소문의 억제를 위해 힘을 썼으나 막는 것보다 새어나가는 것이 빨랐다. 기실, 공작이 제대로 막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물어뜯기는 행태임에도 공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시는 주인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고 그들의 주인 역시 단 한 번도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주인은 명실상부 정의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 어느 성인이 와도 그의 올곧음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올발랐다. 그런 공작이 인어를 사들였으니, 그것은 마땅한 이유가 있음이 분명할 터. 공작가의 시종들은 담담한 낯으로 평상시의 일을 해냈다. 그리고, 시끄러운 바깥과 든든한 공작가 내부에서 공작은 소문의 조각대로 인어를 대면하고 있었다.
"…해서, 네 의사를 물어보려고."
지구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발목을 까딱였다. 그런 지구의 앞에서 그 어느 곳보다 거대한 수조 안에 있던 인어는 첫만남과 달리 온기가 담긴 얼굴로 지구를 응시했다. 음성이 통과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든 수조가 지구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전달했다. 인어는 잠시 지구를 내려다보다 수조의 아래쪽으로 헤엄쳐 갔다. 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손가락이 수조 바닥에 몇 개 떨어진 펜을 집어들었다. 물에 섞이지 않도록 직접 개발한 잉크가 펜의 끝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투명한 수조 벽에 글을 쓴 인어가 펜 뚜껑을 닫았다. 지구는 인어의 글을 읽고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바다에 데려다 주겠다는데도 거절하는 인어는 네가 유일할 거야."
'거절이 아닌 걸 알잖아. 오히려 거절한 네 쪽이면서.'
"나는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네 제안을 받아들이면 공작가 사람들은 한순간에 터를 잃게 돼."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온갖 소문 사이에서 버티고 있는데. 작게 덧붙인 지구가 어깨를 으쓱였다. 인어는 다소 불만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는 다시 펜을 열었다. 두 줄 아래로 새로운 문장이 쓰였다. 인어의 손에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던 지구가 입을 꾹 닫았다. 썩 긍정적이지 못한 지구의 반응을 앞에 두고선 인어가 팔짱을 끼며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깨끗한 흑안이 얼핏 서운함을 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눈을 마주하며 지구는 벙긋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수 초 후, 지구가 이마를 문지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곧 제국의 모든 인어는 해방될거야. 한 명이라도 더 죽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지만 서둘러서 되는 일이 아니야. 또, 이 해방에 예외는 있어선 안 돼. 빠르든 늦든 난 반드시 널 바다로 돌려보낼거야."
텅! 인어의 꼬리가 수조를 후려쳤다. 지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인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인어가 입을 열었다. 하얀 거품이 인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구의 완고함에 저항하듯 소리친 인어가 한 손으로 일렁이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인어가 다시 펜을 쥔 손을 움직였다. '말 돌리지 마. 후계도 있다면서 왜 거절하는 거야? 후계가 어리지도 않다면서.' 분노를 꾹꾹 눌러담은 것치고 반듯한 글자가 유리 위에 자리했다. 지구는 잠시 글자들을 바라보다 한숨을 폭 내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조 앞에 선 지구가 인어를 올려다보았다.
인어가 화가 난 얼굴로 펜을 휘갈겼다.
'나랑 같이 바다에 가. 그게 싫으면 날 육지에 둬. 날 사랑한다면서 지금 뭐하자는 거야?'
"……."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 네가 직접 고른 후계도 네 사랑을 응원한다는데.'
변명의 길을 죄 틀어막는 문장이 지구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지구는 어쩔 도리 없이 인어의 문장만을 응시하다가 겨우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언젠가, 인어를 떠보듯 물었을 때 인어가 적어주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어가 사람을 바다로 데려가면, 그만큼 수명이 줄어든다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랑 가.
바다와 함께 하며 바다의 생을 사는 그들에게 바다와 함께 잠드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살아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거대한 자연의 일부인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중요한 자긍심을 고작 인간 하나를 위해 제쳐둔다니. 바다에 돌아가도 무리에서 겉돌 인어를 상상한 지구가 미간을 희미하게 일그러뜨렸다. 유리 너머로 그 표정을 읽었는지 인어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지구를 응시하다 삑삑 펜을 움직였다. 지구의 눈이 유리 위에 자리한 글자를 훑었다. '웃기지 마. 나 혼자만 남으면 상사병으로 일주일만에 말라죽을거야.' 농담 같은 문장이었으나 인어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구는 차마 웃지도 못하고 인어를 응시했다. 작게 코웃음 친 인어가 글을 더 이어붙였다.
'내 이름도 알면서 뭘 더 재고 있어? 나랑 같이 바다나 가. 네가 내 옆에 있어줄 거잖아.'
쐐기를 박는 문장이 지구의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지구는 말을 더 잇지 못하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
인어의 숨이 닿았다. 인간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 인어에게 몸을 내어주었다. 차가운 파도소리가 귀를 적시고 이어 길고 거대한 생명이 맞닿은 입술에 전해졌다. 인어는 인간의 팔을 잡아끌었다. 인간은 저항하지 않았다. 풍덩, 몸이 바다에 잠겨들고 인어에게 건네받은 숨이 그를 바닷속에서도 살아숨쉬게 해주었다. 인간은 인어의 이름을 불렀다. 인어 역시 인간의 이름을 불렀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물결을 따라 흔들렸다.
공작이 인어에게 납치 되었다는 소문만이 그 자리에 설화처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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