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헤비 인터넷 유저로서 전두엽이 바싹 튀겨져 독서를 시직하기 조차 쉽지 않은 현재의 나에겐 활자 중독자였다는 미취학 아동~초등학생 시절에 한정되는 과거가 있다. 어딜가든 그곳에 책이 있으면 빠르게 꺼내들어 읽었고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있어도 샴푸나 바디워시의 뒷면 사용 설명서를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지금은 궁금하지도 않은 사용 설명서를 볼 시간에 핸드폰을 갖고 들어가 sns의 스크롤이나 죽죽 내리고 있지만 이런 사람에게도 영광의 시대는 존재하는 것이다.

나이가 한 자리 수였던 나는 여전히 활자 중독자였고 그날도 사촌오빠네 집에서 동화책을 찾아 읽고 있었다. 동화책 어느 페이지에는 무지개가 그려져 있었는데 제법 간소화 되어 일곱 가지가 아닌 서너 가지 색깔로만 표현이 되어있었다. 어렸던 나는 생략이라는 개념을 몰랐고 궁금한 걸 참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옆에 앉아계시던 아빠에게 질문을 했었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깔인데 왜 이건 색깔이 이거밖에 없냐면서.

아빠의 대답이 어땠더라, 객관적으로는 궁금증이 풀릴래야 풀릴 수가 없는 답변이었던 걸로 기억을 한다. 돌이켜보면 다섯 살 남짓한 어린 애한테 생략의 미학에 대해 일장연설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해는 간다. 근데 난 무지개가 저렇게 그려진 이유가 궁금했던 건데. 호기심이 풀리지 않았던 나는 흥분해서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화를 냈었다. 이게 나의 무지개에 대한 첫 기억이다.

나이가 두 자리수가 된 지 한참 지난 지금의 나는 여유가 없어서 의문이 생겨도 대충 넘기기나 하지 절대로 왜? 하며 따지려 들지 않는다. 얼굴을 바짝 처들고 시선이 항상 위에 가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어깨도 목도 굽어서 좀처럼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비온 뒤 하늘에는 무지개가 나온다. 이제와서 어릴 때와 같은 천진난만함을 되찾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왜 동화작가가 책에 일곱 빛깔 무지개를 제대로 안 그려넣었을지에 대한 이유를 아는 지금이 난 더 좋으니까. 그냥 가끔은 여유를 갖고 고개를 들어 화창하게 갠 날의 무지개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카테고리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