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유료

[승화承花] 시간의 그림자 너머

23.02.11 유료발행

※23년 1디페(28일 토요일) 승화쁘띠존 '플라티나 스플래쉬2'에서 발간했던 승화 신간입니다.

※4부가 끝난 직후의 이야기로, 갈치님의 글(지금은 삭제되었습니다.)을 허락 받고 가져와 이었습니다.

※표지 역시 갈치님께서 지원해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시간의 그림자 너머

 

 

 

 

 

 

 

 

 

 

 

 

 

 

 

1.

 

“너는 항상 빛나는 사람이었어. 눈이 부실 정도로 말이에요. 그래서였나 봐. …좋아해요, 죠타로.”

…말해버렸다. 좋아한다고 말해버렸어. 아까까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어쩌다 고백하게 된 건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터질 듯이 두근대는 심장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좀 더 멋진 곳, 멋진 분위기에서 멋진 말로 고백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 나중에야 들었다. 카쿄인은 죠타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에 두 사람의 관계는 결정이 날 것이다. 친구였던 연인, 혹은 타인으로. 마침내 죠타로의 입이 열린다….

 

2.

 

“곧 기차가 출발합니다. 승차하실 분께서는….”

 

…깜빡 잠들었나. 카쿄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미간을 구겼다. 기가 막힐 정도로 불쾌한 꿈이었다. 모든 점이 카쿄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사랑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던 기억의 꿈이라는 것도, 지금 그와 관련 있는 인물을 만나러 가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카쿄인은 저절로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털어내려는 것처럼 머리를 얕게 흔들었다.

카쿄인이 지금 만나러 가고 있는 사람은 히가시카타 죠스케, 죠타로의 어린 삼촌-무려 16살이다. 죠타로와 자신은 29살인데!-이었다. 사실 카쿄인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난 적도 없는 죠스케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죠타로와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떻게 요리조리 잘 피해갔었는데…. 이번 일은 재단이 워낙 간곡하게 요청해오는 탓에 카쿄인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뭐 이런저런 명목상의 이유는 많았지만, 재단이 그토록 카쿄인을 보내고자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카쿄인은 십여 년이 넘도록 지긋지긋한 부상과 함께 하고 있고, 히가시카타 죠스케의 스탠드가 그걸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볼 일만 재빨리 보고 돌아와야지.’

 

카쿄인은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죠타로는, 16살 조카에 대해 알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능력을 보고 나를 떠올렸을까? 그는, 왜…. 카쿄인은 이내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왜 내게서 도망쳤을까’로 이어졌으므로. 그와 관련된 생각으로 속이 어지러워지는 건… 싫었다.

 

3.

 

공중전화 부스 밖으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이 보였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분수 근처의 역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참 활발한 마을이라고 생각하며 카쿄인은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수신인은 당연히 SPW재단이었다.

 

“네, 카쿄인 노리아키입니다. 모리오초에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아, 카쿄인 씨.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늘 고생이 많으십니다.

 

수화기 너머 속 직원의 목소리가 상냥했다. 카쿄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장 호텔로 이동할까 하는데, 중간에 일정이 있을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잠깐 대기하시면 금방 사람이 올 거예요.

 

저기, 죄송한데 제가 급히 전화할 일이 있어서요. 빨리 끊어주시면 안 될까요? 카쿄인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초조하게 말했다. 재단 직원이 무어라 더 말하는 것 같았는데, 카쿄인은 기다리던 사람에게 수화기를 넘겨주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뒤에서 다가온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카쿄인이 순서를 넘겨주고 뒤를 돌아본 순간, 아,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어버린다는 옛 신화가 왜 생각이 나던지. 카쿄인은 신화 속의 인물이 된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돌이 된 사람이.

 

“카쿄인.”

 

신화 속 메두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듣고 싶었으면서도 듣기 싫었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예상하진 못했지만 나름 기대했던 사람. 그리워하면서도 보고 싶지 않았던 그의 메두사가. 신뢰해 마지않았던 동료, 내 목숨을 바침에 후회가 없었던 사람, 그의… 첫사랑. 그가 눈앞에 있었다.

 

-쿠죠 씨가 역으로 마중을 나간다고 하셨거든요. 곧 도착하실 겁니다.

 

4.

 

모리오초는 여전히 명랑했다. 모리오초‘는’ 그랬다. 카쿄인은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 같은 공간에 있는 죠타로도 그럴 것이다. 차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죠타로는 침묵했고, 카쿄인의 심기는 불편했다. 죠타로는 운전하느라 앞만 보고 있었고, 카쿄인은 그에게 시선을 주고 싶지 않아 창밖만 보고 있었다. 분명 숨도 못 쉴 정도로 고요한데, 카쿄인의 속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잔잔했던 마음-나름 평온했다-에 쿠죠 죠타로라는 폭탄이 떨어진 탓이다. 죠타로가 왜 여기에 있지? 미국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왜 아직도 일본에 있는 거야? 재단은 이걸 알고 나를 보냈나? 죠스케의 일 때문인가? 아니면 혹시…. …그럴 리 없지.

카쿄인 노리아키는 쿠죠 죠타로가 불편했다. 고백 후 차인 것이 수치스러운 것도 있겠지만,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배신감이 더 컸다. 카쿄인은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비록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더라도, 죠타로와는 쭉 우정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카쿄인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죠타로는 일언반구도 없이 미국으로 떠나 지금까지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카쿄인이 할 수도 없었다. 죠타로는, 바뀐 연락처조차도 알려주지 않고 사라져버렸으니까.

보편적으로 봐도 죠타로와의 관계는 끊어진 관계였고, 이미 끝난 사이와의 재회는 누구에게나 불편할 것이다. 적어도 카쿄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몸은 좀, 괜찮나.”

 

침묵을 먼저 깨트린 이는 죠타로였다. 카쿄인은 아무 말 없이 죠타로를 바라봤다. 몸은 괜찮냐고? 겨우 한다는 말이 십여 년 전에 입었던 부상에 대한 것이다. 서로 교류가 없었다는 걸 여실히 증명한다. 카쿄인은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집트에서의 부상은 지금까지도 카쿄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약을 복용 중임에도 통증이 일어 배를 부여잡은 게 바로 어제 일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다 고칠 수 있다는 히가시카타 죠스케를 찾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것까지 터놓을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 새삼스럽게. 카쿄인은 괜찮다는 것처럼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응, 괜찮아요.”

 

카쿄인은 자신의 약점을 노출할 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카쿄인과 죠타로는 이제 완벽한 타인이었다. 카쿄인이 죠타로를, 죠타로가 카쿄인을 어떻게 생각하든 말이다. 죠타로는 카쿄인이 무의식적으로 배에 올린 손을 흘끗 바라봤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이번엔 카쿄인이 죠타로의 안부를 물었다.

 

“넌 어때?”

“…이제야 막 여유로워진 참이다. 스탠드사 사건도, 논문도 겨우 마무리되나 싶었더니 이혼하게 돼서.”

 

못 본 사이에 말이 많아졌네, 싶은 순간 마지막 말이 카쿄인을 기습했다. 뭐? 무슨 혼? 결혼도 아니고 이혼?

 

“…이혼?”

“몰랐었나? 영감이 말해줬을 줄 알았는데. 몇 해 전에 결혼했었다. …석 달 전에 이혼했지만."

 

일이라는 건 왜 이렇게 연달아 오는지 모르겠더군. 죠타로는 덤덤하게 덧붙였고, 카쿄인은 자신이 운전대를 잡고 있지 않음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분명 저 미친 발언에 놀라 급정지든 급발진이든 뭐든 해버려서 필히 사고를 냈을 테니까. 정신이 혼미했다. 10년 전에 사라진 첫사랑이 이혼남이 되어서 지금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다. 삼류 로맨스 소설도 이것보단 현실감 있겠다. 카쿄인은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그렇구나. 힘내.”

“…음.”

 

죠타로가 카쿄인을 바라봤다. 그때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으로, 그리고… 어쩐지 좀 더….

“그래도 네가 와줘서 다행이야.”

 

카쿄인은 멍하니 죠타로를 바라봤다. 이상하게 죠타로의 눈을 보는 순간,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내가 와서 다행이라니, 뭐가? 내가 스탠드사 사건들을 도울 거라서?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카쿄인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미 끝난 일에 당치도 않는 기대를 품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두 번이나 실패할 수는 없다. 죠타로는 그런 카쿄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액셀을 밟았다. 신호등은 파란불이었다.

 

5.

 

“만나서 반가워요. 카쿄인 노리아키입니다.”

 

카쿄인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세 명의 고등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들에게 존대로 인사하는 어른이 낯선 것도 있겠지만… 그의 동행인이 쿠죠 죠타로라는 것에 놀란 것이 분명했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카쿄인을 향했다가 죠타로를 향했다가 요리조리 움직인다. 뭐가 궁금한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대답한 건 거의 동시였다.

 

“그냥 아는 사이에요.”

“오랜 동료다.”

 

오랜 동료기는 개뿔. 연락이 끊어진 지 십여 년이 지났는데. 카쿄인은 날 선 말을 꾹 삼켰다. 불필요한 말로 괜한 언쟁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궁금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어린 아이들 앞에서 꼴사나운 면모도 보이기 싫었고. 대신, 말을 좀 더 그럴싸하게 고치는 쪽을 택했다.

 

“알고 지낸 건 오래됐는데, 데면데면한 사이입니다.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고요.”

 

말끔하게 웃는 카쿄인의 표정과 대조적으로 죠타로가 이의 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카쿄인은 그런 죠타로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대신에 눈앞의 소년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잔뜩 멋을 부린 리젠트 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네가 죠스케지? 잘 부탁해요.”

“네? 아, 옙. 히가시카타 죠스케임다.”

 

그 나이 또래의 격식 없는 말투였다. 저 개구쟁이 같은 분위기는 꼭 죠스타 씨 생각이 나는 걸…. 바다색 눈이나 짙은 눈썹, 유난히 도톰한 입술이 죠타로와도 닮은 걸 보니 피는 못 속이는구나. 카쿄인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죠스케와 어색하게 악수했다. 죠스케가 우물거리며 질문했다.

 

“저, 근데 잘 부탁드린다는 건 대체 뭘….”

“아…. 그건,”

 

카쿄인은 부상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말을 멈췄다. 죠타로가 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상에 대한 건 죠타로에게 비밀로 하고 싶었다. 타인에 대한 경계인지, 아니면 죠타로에 대한 자존심 때문인지…. 어쨌든 죠타로가 들어올 여지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카쿄인은 죠타로를 흘끗 보곤 다시 죠스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잠깐 마주쳤던 죠타로의 눈동자가 카쿄인을 끈질기게 따라왔지만 그는 애써 모른 척했다.

 

“개인적인 일이라 지금은 조금.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네에…. 뭐. 그, 언제쯤…?”

“죠스케 군과 제 시간이 맞을 때면 언제든지요.”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당분간은 여기에 있을 거거든요. 카쿄인이 명함을 건넸다. 받은 명함을 찬찬히 훑어보는 죠스케의 어깨 너머로 옹기종기 친구들의 머리가 모였다. SPW재단 스탠드 추적 및 연구팀 주임 카쿄인 노리아키…. 코이치가 중얼중얼 명함을 읽자 뒤에서 오쿠야스가 호오, 하고 탄성을 흘렸다. 셋이 조르륵 모여 명함을 구경하는 모습이 꼭 참새 같다고, 카쿄인은 생각했다.

 

“피곤할 텐데 이만 돌아가지, 카쿄인.”

“…그래, 그러자. 만나서 반가웠어요, 모두.”

 

가볍게 목례한 카쿄인과 죠타로가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세 친구가 각자 다른 박자로 안녕히 가세요오, 하고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6.

 

차 안의 공기가 또 무겁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 모두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데다, 카쿄인의 대화 의지가 적었던 탓이다. 카쿄인이 주도하지 않으면 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이런 점은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지금처럼 죠타로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스탠드 관련한 일을 처리하러 온 줄 알았는데.”

“맞아. 니지무라 케이쵸와 오토이시 아키라가 화살로 쏜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 파악해야 하고….”

“죠스케에게도 용건이 있나?”

 

카쿄인과 죠타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둘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들의 얼굴을 마주했고, 죠타로는 무언가 눈치를 챈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카쿄인은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 거 없어.”

 

카쿄인은 고개를 돌렸으나, 유감스럽게도 차창 너머로 비친 죠타로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죠타로는 서운-정확하게는 감정 상한 쪽에 가까워 보였다-해 보였고, 무어라고 따지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죠타로는 카쿄인의 용건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7.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모리오 그랜드 호텔은 크고 화려했다. 아마 이 근방에서는 가장 좋은 호텔이겠지. 재단은 몇 없는 아군 스탠드사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니, 카쿄인이 모리오초에 머무르는 몇 달간의 숙소를 기꺼이 이런 곳으로 잡아준 것이리라. 여기 있는 동안은 불편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쿄인이 호텔 로비로 발걸음을 옮긴 순간 죠타로가 카쿄인을 불러 세웠다.

 

“카쿄인. 내가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게 있다.”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도 모자라서 결혼 소식에 이혼 소식까지. 이제 와서 내가 모르는 게 더 있다고?”

너한테 애가 있기라도 한가 봐? 카쿄인은 농담조로 말했지만 죠타로는 부정하지 않았다. 뭐야, 진짜 아이가 있어? 잔뜩 긴장한 죠타로의 얼굴에 카쿄인도 덩달아 긴장했다. 얼마나 심각한 얘기를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는 거지?

 

“네가 머무를 호실 말인데… 나와 같은 객실이다.”

“…뭐?”

 

죠타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죠타로가 어떤 미친 발언을 하든 놀라지 말자. 그리 다짐했는데, 그 결심은 죠타로가 입을 열자마자 무너졌다. 내가? 너랑? 대체 왜? 그럼 재단이 예약했다는 건 뭔데? 카쿄인이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생각만 하려고 했던 말이 얼마나 튀어나왔는지는 본인도 모를 정도였다. 이 미친 재단은 대체 어디까지 이런 정신 나간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거지?!

 

“…상관없지 않나? 여행했을 때는 늘 같은 방을 썼으면서. 내가 쓰고 있는 객실은 스위트룸이니 네 녀석 쓸 공간 정도는 충분해.”

 

왜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군. 죠타로가 무슨 문제냐는 어투로 말했다.

 

“그때는 다인실을 쓸 수밖에 없었잖아요. 나는 가능하다면 1인실을 쓰고 싶다고.”

 

물론 거짓말이다. 그때는 죠타로를 너무나도 ‘좋아한’ 카쿄인이 어떻게든 이런저런 핑계-학생은 학생끼리라던가-를 대며 죠타로와 같은 방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아무리 고급 스위트룸이라도, 죠타로와, 한 방을? 5성급 호텔이어도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빈방 하나 정도는 있겠지. 다른 호텔에 가도 상관없으니 나는 따로 묵겠어.”

“…영감이 널 보고 싶어 한다.”

 

호텔 프런트로 몸을 돌리던 카쿄인이 그대로 멈춰 섰다.

 

“…미국으로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

“네가 모리오초에 온다고 했더니.”

 

기어코 와야겠다고 하더군. 죠타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반칙이야, 쿠죠 죠타로. 카쿄인은 고등학생일 때나 어른일 때나 자신을 친할아버지처럼 챙겨주는 죠셉 죠스타에게 약했다. 그리고 죠타로는 카쿄인의 흔들림-그게 찰나일 지라도-을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죠타로가 곧바로 후속타를 날렸다.

 

“영감까지 오는 바람에 재단에서 실수를 한 것 같군. 추가 성과금도 지급할 수 있도록 내가 힘을 쓰지.”

 

깔끔한 결정타. 게임은 끝났다. 쿠죠 죠타로의 승리였다. 너무 완벽하게 마무리돼서 이거 설마 재단의 실수가 아니라 죠타로의 입김이 닿은 건 아닌지, 그런 미친 생각도 들었다.

 

8.

 

쿠죠 죠타로가 묵고 있는 호실 내부는 호텔의 외부만큼 화려했으며 넓고 깨끗했다. 아무렴 스위트룸이니까. 넓은 방에 때가 되면 다른 사람이 정리해 주는 공간이라니 호화롭기가 짝이 없다.

 

“저쪽 방을 쓰면 될 거다.”

 

죠타로가 겉옷을 벗어두며 말했다. 카쿄인은 천천히 객실을 둘러봤다. 깔끔한 방과 대조적으로 어지럽게 서류들이 어질러져 있는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가 죠타로의 자리군. 카쿄인의 시선이 닿는 곳을 알아차린 죠타로가 다급하게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민망하기라도 한 건가? 한참을 뒤적거리던 죠타로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건 스페어키다. 그 외에 다른 건… 안내 책자가 있으니 참고하고.”

 

카쿄인은 말없이 스페어키를 받아들고 자신의 방이 될 곳의 문을 열었다. 방 크기는 혼자 쓰기에 딱 적당했다. 카쿄인은 들고 있던 트렁크를 안으로 던져두었다. 묵직한 것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리도 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인 일이 있었다. 카쿄인이 죠타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자리를 정리하던 죠타로가 몸을 일으켰다. 마저 말하라는 것처럼, 가만히 카쿄인을 바라보았다.

 

“내 방에는 절대 들어오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탁,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카쿄인은 한숨을 쉬었다. 같은 공간에 머무르게 된 두 사람. 상황은 10년 전과 같았으나 마음은, 감정은. 모든 것이 그때와 같지 않았다. 죠타로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는데도 카쿄인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설레지 않았다.

9.

 

방 안으로 들어온 카쿄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트렁크 안에 들어있던 약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는 일이었다. 겨우 그것만 꺼냈는데도 지쳐버린 카쿄인은 다른 짐들은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한 하루였다. 열차를 타고 먼 거리를 달려와서,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고,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달았으며, 원하지 않는 상황에 던져졌다. 카쿄인은 욱신거리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별로 좋지 않은 신호다. 카쿄인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루 복용 횟수가 정해져 있는 진통제는 신중하게 먹어야 했다….

카쿄인은 방의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 모든 게 우연일 리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역시 죠타로가 의도한 것들이다. …왜 이제 와서? 대체 왜? 십여 년 동안이나 내 인생에서 사라졌으면서. 나를 피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비참해져야 만족할 거야…. …흉터가 아파왔다.

 

10.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시절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들 하지. 그것은 카쿄인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그래서 여행이 끝나고 몇 개월을 병원에 갇혀있었을 때의 기억이 흐릿한 것은 납득했다. 흐릿할 기억이고 뭐고 혼수상태였던 적이 많아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납득했다. 하지만 어쩐지 가장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그를 괴롭혔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귓가에 울리는 기계들 소리. 그리고 얼떨결에 뱉어버린 말, 당황한 소년의 표정, 짓눌릴 것만 같았던 침묵….

누군가 그에게 첫사랑에게 차이는 것쯤은 흔한 일이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카쿄인은 대꾸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들은 카쿄인 노리아키를, 또 그에게 쿠죠 죠타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 채 떠드는, 의미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시절의 쿠죠 죠타로는 카쿄인의… 가장 신뢰하는 사람, 동경의 대상, 구원자, 흘러넘쳐 벅찬 마음이 향하는 곳, 그리고 온전한 목적되는 존재였다. 죠타로가 카쿄인의 사랑을 그저 거절했을 뿐이라면 그는 끝까지 친구로, 동료로만 남았을 것이다. 죠타로가 그걸 원하니까.

하지만 쿠죠 죠타로는 말 그대로 ‘도망’쳤다. 카쿄인의 사랑, 나아가 신뢰, 동경, 각오, 그 모든 것들로부터. 엉망으로 끊어버리곤 사라졌다. 어설픈 솜씨로 도려진 자리는 죽도록 아팠으나, 카쿄인은 상실을 극복하고 홀로 서는 법을 익혔다. 익히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이제는 죠타로 없이 괜찮았다. …괜찮고 싶었다.

강제로 잘려버린 자리는 주기적으로 카쿄인을 아프게 했다. 어쩌다 죠타로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그의 이름이 언급된 자리에서, 과거의 추억을 되짚다가, 어떤 때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내다가 그냥 갑자기. 그게 꼭, 카쿄인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복부의 부상과 비슷했다. 그 위에 새살이 돋고 다 나은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그를 아프게 한단 점에서. …그것 역시도 열여덟에서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변함없는 그의 상처이자 매번 새로 덧씌워지는, 카쿄인의 흉터였다.

 

11.

 

“카쿄인.”

“오랜만이에요, 죠스타 씨.”

 

죠셉 죠스타가 반갑게 웃으며 카쿄인의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은사에게서 옛적의 쾌활함은 희미하게 느껴졌으나, 노인 특유의 온화함은 그대로였다. 카쿄인은 그런 근황까지 퍽 반가워 솔직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역시 좀 더 반듯한 모습으로 인사를 드렸으면 좋았을걸. 방금까지 깜빡 잠들어 있던 탓에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싶었지만 죠셉이 손을 꼭 잡고 있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차가운 의수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투박한 손을 카쿄인은 유독 뿌리치지 못했다. 그만큼 죠셉 죠스타는 카쿄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의 손자와는 조금 껄끄러워졌대도 말이다.

마침 뒤쪽에서 그 본인이 카쿄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으나 카쿄인은 가볍게 무시했다. 어슴푸레하니 해가 진 저녁에 한 방에 모인 세 사람. 카쿄인은 그것만으로도 과거의 즐거운 여행 속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 곳에 모인 이 중 예전과 같은 자는 한 명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카쿄인. 저녁 먹으러 가지.”

 

생각에 잠기려 하는 카쿄인을 죠타로가 끌어올렸다.

 

“영감은 먹고 왔다고 하니 우리 둘만 다녀오면 돼.”

“밖에서? 난 룸서비스도 괜찮은데.”

 

죠타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맛이 별론가 보네. 카쿄인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겉옷을 챙겼다. 평소 같았다면 죠타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이미 옛 추억에 젖어 붕 뜬 그는 죠타로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12.

 

카쿄인은 기분이 제법 좋았다. 식당은 깔끔하니 분위기도 좋았고, 과연 죠타로가 선택한 곳인 만큼 맛도 훌륭했다. 만족스러운 식사, 약간의 술, 잠시 과거로 돌아간 기분에 카쿄인의 닫힌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열렸다. 눈치 못 챌 만큼 아주 작은 틈이었으나 그 덕에 카쿄인은 껄끄러운 현재의 감정을 뒤로하고 즐거운 추억에 젖었다. 옛날에는 그런 일도 있었지, 하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웃어넘기는 그 순간만큼은 죠타로를 나쁘게 끝난 옛 인연이 아니라 오랜 친구로 바라볼 수 있었다.

분명 좋은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와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 카쿄인이 자연스레 담배를 권했을 때 죠타로가 그걸 거절하고,

 

“…딸이랑 약속해서, 끊은 지 오래다.”

 

라고 하기 전까지는. 카쿄인은 순식간에 차가운 현실로 곤두박질쳤다. 아, 그렇지. 이게 현실이지. 풋내기 고등학생 둘이 아니라 아이를 두고 이혼한 남자 하나, 그런 그를 애매하게 미워하고 애매하게 사랑하는 남자 하나. 그제야 걷고 있던 밤공기가 제법 싸늘했음을 알았다. 카쿄인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라이터의 부싯돌에 불꽃이 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그걸 내려다보는 카쿄인의 마음 안쪽에서도 뭔가 타올랐다가 꺼졌다가 했다. 달싹이던 그의 입술이 결국 열리고 말았다.

 

“왜 이혼했어?”

 

…이따위 꼴사나운 말을 기어이 한 꼴을 보니 아직 취기가 식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쿄인은 고개를 들어 죠타로를 마주했다. 턱 끝이 조금 떨려왔으나 분명 추위 탓은 아니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내뱉어버린 말이 수치스러운 탓이었다. 그와 대조되게 죠타로의 얼굴은 딱 초여름의 밤공기만큼 차가웠다. 새삼스럽게 어른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죠타로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들이 과거를 더듬을 때 으레 그러는 것처럼.

 

“그러지 못했다.”

 

팍, 카쿄인의 라이터에서 불꽃이 튀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듣고 있기가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내려다본 시선 끝에는 자신의 발과 죠타로의 발이 나란히 걷고 있는 게 보였으나 그마저도 점점 뜨겁게 흐려졌다. 책임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카쿄인은 그 말이 어쩐지 열일곱의 죠타로가 열일곱의 카쿄인에게 둘러대는 변명처럼 들렸다. 카쿄인은 죠타로의 대답을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나는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았어? 아니면, 책임질 가치도 없을 것 같았어? 그래서 그렇게 도망가 버렸어? …아까처럼 평소라면 삼켰을 속내가 다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 자리를, 죠타로를 피해야만 했다.

 

“…나는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

 

목소리가 떨렸을까? 불을 붙이지도 못한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카쿄인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거리로 걸어 나갔다. 큰 보폭으로 다급하게 걷는 모습은 당당하기 보다는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죠타로는 가로등 아래에 우두커니 선 채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카쿄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제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데도 밤은 여전히 추웠다. 그 날 밤, 카쿄인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지독히도 어둡고 긴 밤이었다.

 

13.

 

“엇.”

“아.”

 

다음날 오후, 우연히 카페에서 마주친 죠스케와 카쿄인은 서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여기서 만날 줄 몰랐다는 뜻이 명백히 담긴 소리였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두 사람이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죠스케가 용기를 냈다.

 

“그, 카쿄인씨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아, 죠스타 씨가 부탁해서 커피를 좀 사러 나왔어요.”

“아, 그게 아니라.”

 

죠스케는 입술을 잠깐 삐죽이며 커피잔을 매만졌다. 어색할 때 나오는 버릇인 것 같았다.

 

“모리오초에 무슨 일로 오셨나 해서요.”

 

말을 끝낸 죠스케는 카쿄인을 흘겨봤다. 사춘기 소년의 경계심 반, 호기심에 의한 관찰이 반. 카쿄인은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죠스케에게 ‘오토이시 아키라가 발생시켰을지도 모르는 화살에 의한 스탠드사 파악’ 같은 사무적인, 다시 말해 표면적인 이유를 말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카쿄인은 죠스케에게 ‘개인적인’ 용건이 있었고, 그걸 죠타로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꺼낼 기회는 지금 말고 없을지도 모른다. 카쿄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주변을 살폈다.

 

“잠시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란 뜻이다. 죠스케는 맞은편 의자를 빼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카쿄인은 느리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난 열일곱 살 때, 죠타로와 함께 DIO를 쓰러뜨리기 위해 이집트로 긴 여행을 떠났어요. 그것까지는 알고 있죠?”

 

죠스케가 눈을 둥글게 떴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죠타로 씨의 오랜 동료라는 게….”

“네, 맞아요.”

 

쿠죠 죠타로가 DIO라는 남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이집트까지 50일간 여행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죠스케가 두 사람의 사이를 열심히 추리하고 있는 동안 카쿄인은 애매하게 웃고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DIO와의 싸움에서 저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었습니다. 거의 죽을 뻔 했어요.”

 

반년 가까이 의식 불명 상태였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덧붙여진 카쿄인의 말에 죠스케는 속으로 경악했다. 카쿄인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할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마, 모두가 카쿄인은 살아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의 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재단에서 지원을 해준 덕에 지금은 보시다시피 의식도 멀쩡하고, 이제는 괜찮습니다.”

“아, 다행….”

“…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고.”

 

카쿄인의 손끝이 테이블을 느리게 두드린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비밀이에요. 물론 죠타로에게도.”

 

‘그’ 죠타로에게도 비밀인 사실. 듣고 있는 죠스케에게도 말하는 카쿄인에게도 그 무게가 무거웠다. 죠스케가 침을 삼켰다. 카쿄인은 진지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괜찮지 않아요. 말씀드렸다시피 워낙 심각한 부상이었거든요. 재활은 악화 속도를 늦추는 게 목적이고… 지속적으로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

“그, 그래도 꾸준히 챙기시면 괜찮으신 거 아님까…?”

 

카쿄인은 옅게 미소 띤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악화 속도를 늦추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서요. 약도 문제가 있는데…. 자꾸 내성이 생겨서요. 계속 더 독한 약으로 바꾸고는 있는데 그만큼 부작용도 심해서."

 

이쯤 되니 죠스케는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아니 갑자기 이런 무거운 얘기를 왜 구구절절 나한테 뱉는 거지? 차라리 몸이 안 좋으니 크레이지 다이아몬드로 고쳐달라고, 그냥 용건만 바로 말하면 될 걸!

 

“그럼 저에게 몸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하러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결론만 말하자면… 그런 목적도 있죠. 물론 충분한 보상은 드릴 겁니다.”

 

아싸! 그 정도면 아주 누워서 떡먹기요, 눈 감고도 손쉬운 일이었다. 손만 남은 오쿠야스를 완전히 되돌린 적도 있으니, 옛 부상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죠스케는 자신만만하게 크레이지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혹시 해서 하는 말이지만, 죠스케 군.”

“네, 죠타로 씨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겠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뇨, 그게 아니라.”

 

카쿄인이 죠스케를 마주보고 웃었다. …긍정적인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너무 오래된 부상이라… 제가 고쳐지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죠스케는 콧방귀를 꼈다. 살아있는 사람의 살아있는 몸. 그럼 더 볼 것도 없다. 일단 조건만 충족했으면 그 다음 단계는 망할래야 망할 수도 없을걸. 크레이지 다이아몬드가 카쿄인의 손을 잡았다.

 

14.

 

평화로웠던 맑은 오후의 카페는 갑작스런 소란으로 어수선해졌다. 테이블이 무너지고 컵이 깨지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카페의 손님들이 곁눈질로 갑자기 테이블을 붙잡고 쓰러질 뻔 한 붉은 머리의 남자와, 안절부절 못 하는 소년을 흘끗거렸다. 다가온 직원이 깨진 컵과 엎질러진 커피를 치우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끔했다. 깨진 것도, 흘린 것도 없었다. 직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괘, 괜찮으심까, 카쿄인 씨? 이상하다, 이게 왜 안 되는 거지….”

 

죠스케가 카쿄인의 안색을 살폈다. 카쿄인은 고통을 참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꾹 닫은 채 주먹을 하얗게 쥐었다. 히가시카타 죠스케는 크레이지 다이아몬드를 발동해 카쿄인 노리아키의 몸을 고치려 했다. 발동시킨 순간, 죠스케도 카쿄인도 몸이 나아진 것을 느꼈다. 나아진 신체에 안도하려던 찰나였다.

 

“…제가 말했잖아요, 실패해도 실망하지 말라고.”

 

설마 했, 는데 역시, 네요. 크레이지 다이아몬드는 실패했다. 카쿄인의 몸은 아주 잠깐 건강한 상태가 되었을 뿐이고, 금방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 덕에 엄청난 통증을 수반한 후유증이 한 번에 들이닥친 것이다. 카쿄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자리에 앉아 어른스러운 태도를 되찾았다. 그는 당황해하는 죠스케를 붙잡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괜히 죠스케 군을 좌절하게 한 것만 같네요. 너무 오래된 부상이라, 복구시키기엔 이미 늦은 게 아닐까 했거든요….”

“아니, 아니…. …괜찮습니다. 옙.”

 

말은 그렇게 해도 죠스케의 표정에는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써져 있었다. 카쿄인은 다정하게 죠스케를 도닥였다.

 

“어쨌든 힘 써줘서 고마워요, 죠스케 군. 나중에 꼭 사례할 테니까…”

“뭘 사례한다는 거지?”

 

갑자기 끼어든 저음의 목소리에 죠스케와 카쿄인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나, 미간을 잔뜩 찌푸린 쿠죠 죠타로였다. 지나가던 길이었던 죠타로는 카페에 소란이 벌어진 것을 보고, 그 중심에 카쿄인이 있는 것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죠스케는 너무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카쿄인, 다친 데는?”

“죠타로 씨, 저도 여기, 있는데요.”

 

저도 걱, 정 좀…. 죠스케가 딸꾹질하며 꿍얼거렸다. 카쿄인이 난처한 듯 웃었다.

 

“별 일 없었어. 피곤해서 컵을 놓친 것뿐이니까.”

“….”

 

죠타로의 시선이 카쿄인을 향한다. 맑은 에메랄드 색이 카쿄인을, 그 너머를 뚫어 보듯 응시한다. 카쿄인은 그에 지지 않고 맞서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웃었다.

 

“이만 가야겠네. 가자, 죠타로. 죠스타 씨가 기다리시겠다. 죠스케 군, 나중에 꼭 연락해줘요."

“예에…. 안녕히 가십쇼.”

 

카쿄인과 죠타로는 카페를 떠났다. 카쿄인의 발걸음이 다급해보이는 것이, 꼭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죠스케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역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15.

 

바깥은 바람도 볕도 따스해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라, 죠타로와 카쿄인은 걸어서 호텔까지 가기로 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대화가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카쿄인이 말없이 해안가를 따라 호텔 방향으로 걸었고, 죠타로도 그 뒤를 따랐으므로 암묵적으로 그렇게 정해졌다. 어디로 어떻게 갈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은 침묵하고 있다가, 죠타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죠스케에게 사례한다는 건 무슨 얘기지?”

 

앞서가던 카쿄인이 돌아보았다. 카쿄인은 잠시 생각하듯 눈꺼풀을 깜빡이다 웃었다.

 

“별 거 아니야. 크레이지 다이아몬드에게 신세질 일이 있어서.”

 

이번에는 죠타로가 잠시 생각할 차례였다. 에메랄드색 시선과 자수정색 시선 사이에 더운 바람이 불었다. 죠타로가 입을 열었다.

 

“신세질 일이라는 건, 12년 전 네 부상에 관한 이야기인가?”

 

어젯밤처럼 카쿄인의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카쿄인은 죠타로의 바다색 눈동자를 좋아했다. 상대를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그 눈을 말이다. 그 앞에 서면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눈빛을 피하고 싶었다. 모든 게 들킬 것만 같았다. 내가 너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음을. 가슴 한편에서 불안하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를. 하지만 카쿄인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태연히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면 무슨 용건으로?”

 

죠타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순간, 카쿄인은 이 모든 게 우습게 여겨졌다. 습한 바닷바람, 따뜻한 볕. 너와 나.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 모든 것이 예전과 너무 비슷했다. 그래서 어쩌면 죠셉도, 죠타로도 카쿄인 스스로도 자꾸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곳은 이집트로 향하던 그 여행이 아니고, 이 바람과 햇살도 사막의 것이 아니며, 너와 나 역시 그 때의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긴장감 또한 마찬가지다. 그 때의 그 간지럽고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숨이 막힐 정도의 불안이다. 카쿄인이 웃었다.

 

“네가 알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지금의 죠타로는 알 거 없는 일이다. 이유가 뭐든 도망은 도망이고 그는 그렇게 과거의 우리에게서 사라졌으니까, 그걸로 끝인 거니까. …이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는데도 속이 후련하지 않았다.

 

“너랑은 관계없는 일인데.”

 

내가 지금 어떻게 웃고 있을까. 죠타로의 표정을 보면 대충 알 것 같기도 했다. 죠타로는 벙 찐 표정으로 실연당한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제법 태연한 척을 잘 한 모양이지. 이번에도 카쿄인은 죠타로를 두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죠타로 역시도 카쿄인을 붙잡지 않았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카쿄인의 길어진 그림자만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16.

 

“크레이지 다이아몬드가 안 먹혔다고?”

“진짜냐? 왜?”

 

코이치와 오쿠야스가 요란하게 물었다. 백짓장도 맞들어야 낫다지만 죠스케는 심란하기만 했다.

 

“나도 몰라! 그리고 말했잖아, 안 먹힌 게 아니라, 됐다 말았다고!”

“그게 그거지. 어쨌든 안 먹혔다는 거잖아.”

 

우씽! 죠스케가 입을 비죽 내밀고 손에 들고 있던 과자봉지를 입속에 탈탈 털었다. 부스러기 한 줌을 야무지게 삼킨 죠스케의 볼이 연신 우물거렸다.

 

“암튼. 좀 이상했어. 카쿄인 씨의 몸.”

 

스탠드와 스탠드사는 모든 감각을 공유한다. 그래서 죠스케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카쿄인의 몸이 크레이지 다이아몬드에 의해 복구되었다가… 한순간에 다시 망가지는 감각을.

 

“그 때 말이야. 뭐랄까. 좀… 줄자 잡아당기는 느낌? 그런 느낌이었어.”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아니, 그러니까.”

 

죠스케가 줄자를 잡아당기는 흉내를 냈다. 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손을 반대쪽으로 쭈욱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내가 이렇게…. 그러니까 크레이지 다이아몬드가 줄자를 쭉 당기고 있는 동안은 유지가 되는데.”

 

죠스케가 반대편으로 길게 당긴 손으로 탁, 무언가를 놓는 체 했다.

 

“내가 이렇게 손을 놓으면, 줄자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슈루룩 순식간에.”

 

죠스케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오쿠야스와 코이치도 이해한 듯했다. 세 사람은 흠,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꼭 뭐가 붙잡아 놓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어떻게든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그리고 계속 그걸 유지할 수 있도록.

 

17.

 

다음 날 아침, 방 밖으로 나온 카쿄인이 본 것은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죠타로였다. 잠을 설치기라도 한 건가? 어쩐지 눈가 밑이 거뭇한 거 같기도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로 카쿄인이 방 밖으로 나왔음을 눈치 챈 죠타로가 물었다.

 

“커피, 마실 텐가?”

“아니. 빈속에 마시면 속이 쓰려서요.”

“…그렇군.”

 

죠타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런 죠타로를 뒤로 하고 카쿄인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오늘 아침자 신문이었고, 이상한 일이라든가 기이한 일이라든가 그런 소식이 없던 걸로 봐서 밤새 특별한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스탠드가 연루된 일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사는 진행해야 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건이 있을 지도 모르고, 이곳에 스탠드사가 이렇게 많다면 위험한 인물도 숨어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혹시 모르지, DIO의 잔당-카쿄인은 몸서리를 쳤다-이라든가.

죠타로와 카쿄인은 아침 식사로 룸서비스가 올 때까지 일절 대화하지 않았다. 그냥,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특히 카쿄인 쪽에서. 죠타로가 말을 걸었다면 답해주었겠지만, 그도 딱히 할 말은 없어보였다. 식사하는 카쿄인을 미묘한 표정으로 보긴 했지만 말이다. 이거야 원, 하며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맛있기만 한데 뭘. 카쿄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우물거렸다.

식사를 마친 카쿄인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외출을 위한 준비를 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세팅했다. 그 다음 코트를 걸쳐 입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보았다. 앞머리의 웨이브가 뽕실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방 밖으로 나왔는데, 죠타로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 역시 이미 외출 준비를 다 끝낸 채로 말이다. 카쿄인이 눈을 깜빡였다.

 

“…왜?”

“조사하러 갈 것이 아닌가.”

“그…렇긴 한데.”

“나도 동행한다.”

“뭐?”

 

같이 지내는 것도 모자라서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자신이 죠타로와 같은 호실을 쓰게 된 것 정도는 백번 양보해서 그쪽이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라고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자신의 일에까지 개입하려 한단 말인가? 죠스타 씨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마당에?

 

“…너 이제 할 일 없다며?”

“어제 막 생긴 참이다.”

“뭐?”

“어제자로 주임 카쿄인 노리아키의 보조를 맡게 된 쿠죠 죠타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카쿄인은 황당했다. 보조를 요청한 적도, 보조가 붙는다는 보고를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이건 죠타로가 멋대로 만들어낸 것임이 분명했다. 눈앞의 남자는 그저 미소 띤 얼굴로 카쿄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장난기 머금은 미소였다. 잘생긴 얼굴은 여전하구나.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던 것이 무색하게 설레었고…,

…그래서 카쿄인은 죠타로와 같이 있는 것이 싫었다. 그 앞에서는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어쩐지 쉽게 짜증을 낼 것 같았고,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질 것 같았고, 별 것도 아닌 것에 날카로워질 것 같았고, …그럼에도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가 밉다. 그를 외면하고 그에게서 눈을 떼는 것, 카쿄인에게는 불가항력인 일이니까. 그의 눈을,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러나 카쿄인은 공사구분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적인 문제로 그의 임무를 망칠 수는 없었다. 카쿄인은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책임을 안다. 죠타로는 아마 나와 협력을 하고 싶은 걸 거다. 인력은 하나라도 많을수록 좋다. 카쿄인은 기꺼이 죠타로의 말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닌데. 모리오초를 둘러보려는 거라서.”

“모리오초를?”

“난 여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지리라든가 기본적인 건 알아야 조사든 뭐든 할 수 있지 않겠어? 카쿄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내해주지.”

“네가?”

 

죠타로의 말에 카쿄인이 눈을 깜빡였다. 가이드가 있으면 자기야 편하긴 하지만… 죠타로는 피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죠스케 군에게 부탁하자니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무엇보다 학교에 있을 시간이고….

 

“보조도 할 일이 있어야지. 겸사겸사 활과 화살에 대한 재단의 조사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도 듣고 싶군.”

 

죠타로가 호실의 문을 열고 카쿄인을 보았다. 먼저 나가라는 것처럼. 따로 움직이는 건 못하겠군. 카쿄인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잘 부탁해.”

“맡겨둬라.”

 

죠타로가 옅게 웃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차례로 울린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18.

 

“안젤로 바위다.”

 

조금 기괴하게 생긴 바위 앞에서 카쿄인은 고민했다. 카쿄인의 손에는 막 산 것 같은 커피가 들려있었다.

 

“영감의 염사에 찍혔던 녀석이지. 지금은 이런 꼴이지만.”

 

카쿄인은 빨대로 커피를 쪽 빨아마셨다. 물론, 죠타로가 사준 것이었다. 카쿄인은 죠타로를 힐끔 보았다. …이거…,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는 명소로 유명해졌다더군.”

 

…데이트… 같은 건가…?

 

“그리고 이 근처에는 죠스케와 오쿠야스가 살고 있다. 나중에 안내해주지.”

 

…그러니까 그런 걸 먼저 말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죠타로의 안내는 어딘가 이상했다. 카쿄인은 이런 안내를 예상했다. 예를 들자면 이곳은 이런 스탠드사와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며, 그 스탠드는 이러한 능력이었다는 설명-역시 죠스케가 더 잘 알 테지만-들.

그런데 죠타로는 이 카페의 이 디저트가 맛있으니 먹어보라고 사준다-카쿄인은 커피면 충분하다고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든가, 여기는 야경 전망이 좋으니 밤에 다시 와보자-대체 왜?-든가. 천하의 죠타로가 설마 그런 시시껄렁한 정보들만을 알고 있는 건 아닐 터였다. 게다가 그렇게 안내를 해주는 죠타로가 어쩐지 다정해보이고, 또 즐거워보여서. 처음에나 착각인 줄 알았지, 카쿄인은 이게 데이트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십여 년 전의 카쿄인이었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맞기를 바라면서, 설레어 두근거리고 발개진 얼굴로 죠타로와 함께 디저트를 먹고 밤에 다시 와보자며 수줍게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카쿄인은 그 때의 카쿄인이 아니다. 좋아할 수… 없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아까까지만 해도 맛있었던 커피는 달기는커녕 쓰기만 했다. 카쿄인이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죠타로가 그를 불렀다.

 

“카쿄인.”

“…응?”

“피곤한가.”

 

죠타로가 카쿄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죠스케에게 사례한다던 카쿄인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얼른 화제를 돌려야했다.

 

“아냐. 전혀 힘들지 않아. 단지….”

“단지?”

“우린 여기 일하러 온 거잖아.”

 

이건 꼭 놀러온 것 같아서. 카쿄인이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그런가. 수긍하는 죠타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지 않나.”

“응?”

“네 녀석, 분명 모리오초에 오기 직전까지도 바쁘게 뛰어다녔겠지?”

“그게 왜요? 재단 소속 스탠드사가 부족하니 어쩔 수 없잖아.”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죠타로가 웃었다. 십여 년 전과 변함없는 미소. 내가 그 사이에 변했으면 어쩌려고 저런 말을 당당히 하는지. 카쿄인은 그 미소가 좋았다. …좋아했었다. 지금은….

 

“이런 때 아니면 네가 언제 여유를 부려보겠나. 조금이라도 즐기도록 해.”

“우리에겐 막중한 임무가 있다는 걸 알 텐데요, 쿠죠 박사님.”

“지금은 네 보조다. 그리고 아직 재단에서 자료도 도착 안 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막중한 임무니 쉴 수 있을 때 쉬어두라는 거다. 네가 무리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왜? 왜 보고 싶지 않은 건데. 내가 너한테 뭐라고? 카쿄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죠타로가 대답했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카쿄인은 죠타로의 그 발언에 웃지도 울지도,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행복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다.

 

19.

 

…아아, 나는 절대로….

 

20.

 

외출은 흐지부지 끝났다. 카쿄인의 안색이 갑자기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죠타로는 카쿄인을 둘러업고서라도 당장 호텔로 돌아갈 기세였고, 덕분에 괜찮다고 버티려던 카쿄인은 얌전히 호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호실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간 카쿄인은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한계였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복부의 격통을 유발한 탓이다. 어떻게든 오기로라도 버틸 생각이었지만 컨디션이 안 좋다는 걸 들키기까지 했고, 얼마 못 가 죠타로 앞에서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죠타로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카쿄인은 입술을 깨물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를 짚고 겨우 섰다. 탁자 위 약통의 뚜껑을 열어 진통제를 꺼내먹은 그는 그대로 침대 위로 털썩 드러누웠다. 충격 탓에 시트가 울렁였으나 이제 눈가까지 뜨거워져 욱신거려오는 탓에 카쿄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한 팔을 들어 제 눈가를 덮고서는 눈을 감았다. 약효가 돌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잠드는 것밖에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쿄인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켜보니 약간 찌뿌둥하여 무겁긴 해도 이곳저곳의 통증은 가셔있었다. 창밖으로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설마 동이 트려는 건 아니겠지. 호텔로 돌아온 게 점심이 지난 오후였으니 하루를 내리 자진 않았을 것이다.

 

“카쿄인. 혹시 자고 있나?”

“…아니, 왜?”

 

카쿄인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가라앉아있어 놀랐다. 어딘가 아픈 사람인 것 같잖아. 카쿄인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물론, 그 소리는 죠타로도 들었을 거다.

 

“…괜찮다면 같이 식사하러 가지.”

“난 안 먹어도 되니까 혼자 먹고 와요.”

“나가는 게 무리라면 룸서비스라도 부르겠다.”

“그냥 피곤한 거뿐이니까.”

“나는 네 녀석이 뭐라도 먹는 걸 봐야겠다.”

“아니…. …알았어, 금방 나갈게.”

 

카쿄인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번엔 죠타로의 부름에 순순히 응했다. 뭐라도 먹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거절했다가는 자신이 방 밖으로 나올 때까지 버티고 서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카쿄인은 부스스해진 머리를 빗었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어느 정도 단정해진 모습으로 방문을 열자 문 앞에 떡하니 서있던 죠타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스타 플라티나까지 꺼내고서는 카쿄인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카쿄인이 뭐 하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 없던 그는 잠시 후에야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몸은 괜찮아진 것 같군.”

 

그제야 죠타로는 카쿄인의 앞을 비켜주었다. 그를 잠깐 흘겨본 카쿄인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푹신했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발끝을 까닥이며 물었다.

 

“그래서, 뭐 먹을 건데?”

“룸서비스를 부르지.”

“맛없어서 싫다며.”

“네가 피곤하다는데 그런 게 중요한가.”

 

카쿄인은 대꾸를 포기했다. 죠타로가 호텔 프론트로 전화를 하는 동안 카쿄인은 죠타로를 바라보았다. 키나 체격은 십여 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의 뒷모습은 많은 게 달라져있었다. 두려운 게 없었던 그 시절의 혈기왕성한 패기는 가라앉고, 무거운 책임과 진중함이 보이는 등. …내가 알던 그 등은 아니다.

 

“…죠타로.”

“왜 그러지?”

“힘들었어?”

 

카쿄인이 다소 뜬금없이 물었다.

 

“무슨 말이지?”

“그냥. 난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잖아요.”

 

너도 나를 모르겠지만. 카쿄인이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못 본 사이에 꽤 어른이 되었구나… 싶어서.”

“…힘들었다.”

 

죠타로가 천천히 다가와 카쿄인의 옆에 앉았다. 카쿄인이 그를 따라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럴 때마다… 네가 생각나더군.”

 

자수정이 에메랄드를, 에메랄드가 자수정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카쿄인이었다.

 

“난 안 힘들었어. 그러려고 노력했어. 그래야만 했으니까.”

 

죠타로가 입을 수차례 벙긋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나오지 않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럴수록 죠타로의 표정은 점점 미묘하게 일그러져갔다.

 

“…카쿄인, 나는….”

 

겨우 죠타로가 입을 열었을 때, 벨소리가 들렸다. 룸서비스가 도착한 것이다. 카쿄인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죠타로는 카쿄인의 뒷모습을 앉은자리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카쿄인은 어떤 음식이 도착했는지, 맛이 어땠는지, 그게 코로 갔는지 입으로 갔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식사했는지, 하나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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