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承花] 평수상봉
23.02.11 유료발행
※23년 1디페(28일 토요일) 승화쁘띠존 '플라티나 스플래쉬2'에서 발간했던 승화 신간입니다.
※동양풍AU로, 흑호 신수 죠타로와 제물로 바쳐진 카쿄인의 이야기입니다.
※사망소재가 등장합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구매를 재고해주세요.
萍水相逢
평수상봉萍水相逢:
부평초와 물이 서로 만난다는 뜻으로,
여행 중에 우연히 벗을 만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一.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밤에게 잡아먹히고 있었고, 산에는 이미 어둠이 지척만큼 깔려있었다. 습기를 머금어 눅눅하고 스산한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끼리 스치는 소리가 불길했다. 산짐승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아니, 멀리에서 들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르릉, 낮게 울리는 포식자의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바닥에 깔린 나뭇잎들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거대한 네발짐승의 발소리가 코앞에서 멈췄다.
산 속 깊은 곳, 잘 꾸며진 제단 위에 한 사내가 무릎 꿇은 채 묶여있었다. 그는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고, 그의 머리를 덮어 시야를 가린 천에는 섬세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에 보이지 않는 시야까지. 한껏 예민해진 청각은 자신이 아닌 존재의 숨소리까지 잡아냈다. 그들이 말하던 ‘천지신명’이, 산을 타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호랑이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사내는 태연히 생각했다. …죽는구나. 다만 자신의 최후가 아프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남자는 눈을 감았고, 찾아올 어둠을 기다렸다.
“…이건… 뭐야?”
허나 살점이 뜯겨나가는 소리 대신에 들린 것은 사람의 목소리였고, 날카로운 발톱과 강한 힘을 가진 앞발 대신에 나타난 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천 자락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머리 위가 가벼워졌다. 시야를 가리던 얇은 천이 사라지자 남자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이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二.
“천지신명께서 노하신 게 틀림이 없소. 제물을 바쳐 노여움을 풀어야 할 것이외다!”
라고, 마을의 용한 점쟁이가 말했었지. 마을은 악재에 악재가 겹친 상태였다. 연이은 흉년에 역병까지 돌아 사람들이 픽픽 죽어나가 장례식이 없는 날이 없었다. 거리에 나뒹구는 흙먼지들이 괜히 불길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죽기는 싫다고, 방법을 찾아보자며 살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머리를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곧 결론을 내렸다. 이건 인간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분명히 천지신명께서 화가 나신 거다. 그런 와중에 그리 외치는 점쟁이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제물! 제물을 바쳐야 한다! 천지신명의 노여움을 달랠 제물을!
그럼 제일 중요한 제물은 누가 될 것이냐, 그것은 의외로 결정하기 가장 쉬운 일이었다. 만장일치로 한 청년이 선택되었다. 카쿄인 노리아키, 마을의 눈엣가시 같은 사내였다.
三.
카쿄인 노리아키, 십칠 세. 몇 해 전에 역병으로 부모님을 잃었다. 가까운 친척이 그를 거두어 보살폈으나 그 역시 몇 주 전에 역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야말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셈이다.
카쿄인의 평판은 예전부터 좋지 못했다. 시종일관 음울한 표정에 만사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 그가 바로 카쿄인이었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도 이해해주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니 그 상심이 얼마나 크겠는가. 허나 그들은 곧 카쿄인을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부모가 모두 죽었는데 어떻게 자기만 아픈 곳 없이 멀쩡히 살아남았지? 저 자가 웃는 걸 본 적이 있어? 어른이 말하는데 저 차가운 목소리 보라지. 분명, 불효막심한 녀석이었을 거야! 카쿄인도 자신에 대한 그런 소문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그는 언제나 무반응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그런 이야기들에 불을 지필 뿐이었다. 그를 길러주던 친척까지 역병으로 세상을 뜨자 마을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카쿄인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저것 봐, 또 자기만 살았잖아. 혹시 부모도, 이모님도 저 녀석이 죽인 것 아닐까? 개중에는 마을의 불행이 저 녀석 때문이라고 주장하던 이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놈만 이 시국에 멀쩡히 돌아다닐 리가 없소이다!
…그러니 카쿄인이 제물로 선택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다 같이 힘든 이런 상황에 저런 불길한 이야기가 도는 자를 선뜻 맡아주고 보듬어줄 이는 없다.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카쿄인이 가장 적합했다. 모두가 싫어하고, 감싸줄 이 하나 없는 사람. 모든 게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점쟁이와 마을 이장이 카쿄인의 집에 들이닥쳤고, 상복을 입고 있던 사내는 순식간에 마을에서 가장 값비싼 옷을 입게 되었다.
“천지신명께 바쳐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라고, 이장이 말했다. 자신이 죽으러 가는 길인데도 카쿄인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천지신명께 바칠 패물들을 내려놓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제단 위에 묶이던 때에도.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사람들이 모두 하산하고 나서야 카쿄인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四.
“그러니까… 잡아먹히려고 왔다고? 호랑이한테?”
“…네.”
이런 미친…. 호랑이 대신 나타난 사내가 험한 말을 내뱉으며 제 이마를 짚었다. 카쿄인은 그 모습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 있던 기척은 분명, 호랑이였는데….
“천지신명에게 바친다고 하기엔, 너무 속물적이라고 생각 안 하나?”
사내가 주변의 패물들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확실히, 비싸 보이는 장신구에 비단들. 예쁘게 꾸며진 제물. 같은 인간이라면 몰라도 ‘천지신명’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뭐, 유용하긴 하겠네. 잘 쓰지.”
사내는 패물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걸 또 말없이 지켜보던 카쿄인이 덤덤하게 뱉었다.
“당신, 도둑입니까?”
“…하?”
“당신 가지라고 준비해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너는 이대로 죽어도 좋고?”
“….”
카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가 카쿄인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손과 팔, 발과 다리가 욱신욱신했다. 손목을 매만지던 카쿄인을 위아래로 훑어본 사내가 피식 웃었다.
“뭐, 남들이 보면 네 녀석이 나와 혼인하러 온 줄 알겠지만 말이다. 제물이니 뭐니, 난 그런 거 딱 질색이거든.
“…당신이 호랑이군요.”
“맞아. 알겠으면 돌아가라. 네 놈들 사정은 천지신명이 알 바 아니라고 전해.”
“돌아갈 수, 없습니다.”
호랑이였던 사내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허나 카쿄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호랑이가 어떻게 사람이 되었는지도 궁금하지만, 진짜 천지신명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너, 내가 진짜 호랑이였으면 잡아먹혔어.”
“압니다.”
“그런데도 못 돌아간다고?”
“이대로 돌아가면, 제가 무슨 꼴을 당할 것 같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호랑이는 빠르게 수긍했다.
“죽는 게 두려워서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닌 것 같다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너, 이름이 뭐지?”
“…카쿄인. 카쿄인 노리아키.”
“좋아, 카쿄인. 내 기꺼이 너를 데려가주마. 이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도 데려다 줄 수 있어. 다만 어디에 정착하고 싶은지는 네가 정하도록.”
“정착하고 싶은 곳이 없으면요?”
“평생 나랑 같이 여행이나 하든가. 그건 싫을 거 아니냐.”
인간에겐 그런 게 중요하잖아. 정착하여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 사내의 모습을 한 호랑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에 카쿄인이 절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급하게 말했다.
“아뇨,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아요.”
“이것 참 별난 녀석이군. 네 마음대로 해. 말리지 않겠다.”
“…왜 제게 이렇게까지 아량을 베풀어주시는 겁니까?”
“아량? 아량이라, 글쎄. 인간은 언제나 흥미로우니까…라고 해두지.”
“호랑이님은 제가 흥미로우신 건가요?”
어느새 사내는 호랑이가 되어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털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인 것 같았다. 흑호黑虎가 질색하며 말했다.
“…그 낯간지러운 호칭은 뭐냐?”
카쿄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호랑이를 호랑이라고 부르지, 그럼 무어라고 부르나. 사내였던 호랑이가 부르르 몸을 털었다. 움직이는 털의 흐름이 마치 흐르는 비단 같았다. 낮게 울리는 짐승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죠타로. 쿠죠 죠타로다.”
五.
죠타로님, 오늘 밤은 어디로 가십니까?
…‘님’ 떼. 존댓말도 하지 마. 난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야.
아…. 그, 그럼 죠타로…?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군.
六.
“카쿄인.”
“아, 죠타로. …볼 일은 다 끝났나요?”
“아마도. 뭘 보고 있었지?”
“그냥. 저 산의 능선을.”
“시시하기는.”
사람 모습의 죠타로가 고개를 까딱였고, 카쿄인이 작게 웃었다. 죠타로와 만나고 이레가 지난 후였다. 그들은 그동안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 마침내 마을이 있던 곳을 완전히 지났다. 카쿄인은 마을이 있던 쪽을 보았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죠타로와 지내면서, 카쿄인은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 죠타로는 천지신명이 아니다. 따지자면 신수神獸에 가깝다. 둘, 죠타로는 오랜 시간을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세상물정에도 밝았다. 패물? 나한테야 쓸모없지만 인간들한테는 잘 먹히거든.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어. 셋, 죠타로는 호기심이 많다. 인간이 흥미롭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눈 한 번 깜빡하면 흩어질 삶을 살면서 어찌 그리 시시각각 변하며 반짝이는지. 죠타로는 그렇게 말했었다. 넷, 쿠죠 죠타로는 인간들과 어울리기 위해 지어낸 이름인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아무개로 불리며 지내긴 어려웠을 테지. 죠죠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다섯, 죠타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래 현현하지 못한다. 보름이 한계고, 본 모습인 호랑이로 돌아가 하루 정도는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카쿄인과 마주쳤을 때가 그 시기였던 모양이었다. 여섯, 죠타로는 호랑이의 모습일 때나 사람의 모습일 때나 그 풍채가 대단히 훌륭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밤이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호랑이일 때도 집채만 한 몸집이더니 사람의 모습일 때에도 9척은 되어보였다. 그의 앞에 서면 작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낯설기까지 했다. 카쿄인도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겉모습은 자신의 또래 같은데도! 일곱, 죠타로는 호랑이면서 육식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무언가를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따로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자연에게서, 사람에게서 섭취할 수 있는 정기면 충분하다고. 주기적으로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도 정기를 보충하기 위함이란다.
그리고 마지막, 죠타로의 몸은 무척이나 따뜻하다. 사람의 모습일 때에도 따끈하게 온기를 품고 있어서, 그의 품에 들어가 있는 것에 꼭 중독될 것만 같았다. 거대한 호랑이와 함께 자는 것도 흔한 경험은 아니다만, 등에 기댄,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뜨거운 온기 덕에, 카쿄인은 정말 곤히 잠들 수 있었다. 해가 뜨고 아침이 되고도 한참이나 일어나질 않아 죠타로가 잡고 흔들어 깨웠더랬지.
“이제 가요, 죠타로.”
“아아.”
카쿄인이 산을 향해있던 몸을 돌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서둘러 주막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길바닥에서 노숙해야 할지도 몰랐다.
카쿄인이 죠타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있는 것처럼, 죠타로도 알아낸 것이 있었다. 하나, 이놈의 눈은 어여쁜 자색인 주제에 생기 하나 없이 죽어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힘든 일을 겪은 자들의 눈이 으레 그런 건 봐왔지만 이 녀석의 눈은 그보다 더 깊었다. 둘, 그러면서 카쿄인은 기운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내 눈은 못 속이지. 바람에 실리고 물에 흐르는 기운, 살아있는 것에 있고 죽은 것에게는 없는 것, 죠타로가 음식 대신 먹는 정기. 그것 때문에 좋지 못한 취급을 받았나? 셋, 녀석은 광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쪽으로 주제가 흐르는 걸 피하는 것 같았다. 말하기 싫은가보지. 죠타로는 그렇게 넘겼다. 넷,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 같은데, 카쿄인은 외로움을 탄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잠결에 제게 달라붙는 것도 그렇고, 툭하면 기대오는 것도 그렇고. …그냥 내 체온이 좋은 건가? 아니면 추위를 많이 타는 건가. 다음 마을에 도착하게 되면 질 좋은 모포를 하나 사야겠다고, 죠타로는 생각했다.
불어오는 바람의 기운이 따스했다. 내일은 날이 좋을 것이었다. 카쿄인이 추워하진 않겠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카쿄인의 도포 자락과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그건 다행이라고 느꼈다.
七.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던 카쿄인의 말은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달이 한 차례 기울고, 두 번 기울어 다시 세 번째 기울었는데도 카쿄인은 여전히 죠타로의 곁에 있었다. 심지어는 그게 당연한 것인 냥 굴었다. 분명 초반에는 짜증이 날 정도로 슬슬 눈치를 보며 설설 기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이것저것 요구하는 꼴이 제법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카쿄인이 이번에 가리킨 것은 흔하디흔한 닭꼬치였다.
“죠타로, 나 이거 먹어보고 싶어요.”
“먹어본 적 없냐?”
“부모님께 사달라고 말씀드리기가 눈치 보이더라.”
“난 눈치 안 보이고?”
“넌 너잖아.”
“얼씨구.”
허나 죠타로도 그럭저럭 그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처음엔 다 죽은 놈 같던 얼굴이 이렇게 잘 웃게 되는 것도 싫지 않았다. 석 달이면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변하다니, 역시 인간이란 언제나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그가 이렇게 세상 곳곳을 여행하는 이유기도 했다. 한 번 지나왔던 곳이라도 한 해가 지나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혼자 맞춰보는 것도 그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이거야 원. …주인장, 그거 하나만 주시오.”
“넌 안 먹어?”
“네 녀석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니까 걱정 마라.”
값은 여기. 죠타로가 엽전 두 푼을 상인에게 내밀었다. 맛있게 드십쇼~ 상인이 넉살 좋게 웃으며 꼬치 하나를 건네주었다. 카쿄인이 야무지게도 꼬치를 한 입 물었다. 입을 쉴 새 없이 오물거리는 것이 꽤 괜찮은 모양이었다.
“─음! 맛있다. 너도 먹을래요?”
“아니. 그나저나, 자꾸 칠칠치 못하게 입에 뭘 묻히고 다니냐.”
“응? 아, 양념이 묻었나보네.”
카쿄인이 민망해하는 틈을 타 죠타로의 큰 손이 다가와 입가를 슥 훑었다. 손에 묻은 양념장을 핥아 맛을 본 죠타로가 말했다.
“괜찮군. 너무 맵지도, 짜지도, 그렇다고 달지도 않아.”
“그걸 꼭 그렇게 먹어야 아는 거냐고요.”
너도 하나 사먹으면 됐잖아. 카쿄인이 타박하며 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내 죠타로의 손을 닦아주었다. 죠타로는 가끔씩 이랬다. 분명 챙겨주는 것 같은데, 카쿄인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싶은 것들. 결국 호랑이라 그런가. 나를 무리의 일부라 여기나? 하지만 호랑이는 보통 단독 생활을 하는 동물 아닌가. 생각할수록 아리송하기만 했다. 카쿄인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죠타로, 돈은 어디서 가져오는 건가요?”
“다 방법이 있다.”
“뭐야, 그게.”
“…뭐, 산신께 바친답시고 패물을 올려두는 경우가 제일 흔하지.”
네 경우처럼. 죠타로가 카쿄인 쪽을 슬 바라봤다. 그 때의 기억이 생각났는지 카쿄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죠타로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산에서 귀한 약재를 캐 와서 팔 때도 있고, 사냥해온 고기를 팔 때도 있고.”
“생각보다 건실하네요.”
“어이…. 내가 인간처럼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맹랑한 녀석아.”
“네에, 네에.”
그들은 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죠타로가 호랑이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카쿄인은 그 시기가 좋았다. 솔직히 동굴은 습하고 어두워서 별로지만, 커다란 죠타로에게 기대어 잠드는 것이, 카쿄인은 무척 좋았다.
八.
“벗어.”
“네?”
카쿄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죠타로가 잔뜩 미간을 구겼다. 낮게 헐떡이며 숨을 고른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옷, 벗어.”
九.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에 도롱이 하나 준비하지 못한 그들은 그대로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카쿄인의 입술이 핏기 하나 없이 파리해진 걸 보고 틀림없이 고뿔에 들겠다고, 그리 생각은 했는데 카쿄인은 죠타로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하게 앓았다. 펄펄 끓는 고열에 시달렸고, 부축 없이는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으며, 기침하다 못해 헛구역질까지 했다. 누군가의 간호가 절실했다. 카쿄인은 죠타로의 간병을 받는 내내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지만, 죠타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인간의 몸이 약한 거야 당연한 사실이니까.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또 인간의 수발을 들어주나 싶기도 했고.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며칠이 지체되는 바람에 그들의 일정이 꼬였다는 것이다. 하필 죠타로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기였고, 본래의 모습으로 지낼 곳을 찾기엔 그들이 있는 곳은 꽤 발달한 시내였다. 시내 한복판에서 호랑이가 있을 수 있는 마땅한 곳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다. 어떻게든 정기를 보충해야 했다.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론 모자랐다. 죠타로가 선택한 것은 카쿄인이었다.
“정기를 먹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 것 아냐.”
“….”
카쿄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의 정기를 섭취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무리가 없다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태연한 척 제 옷고름을 푸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무서웠다. 제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를 수가 없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죠타로를 따라가겠다고 했던 순간부터 각오했어야 하는 일이었나.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하는 탓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공포감에 숨이 가빠왔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눈치 챈 죠타로가 다가왔다. 그의 접근에 카쿄인이 허둥대며 웃옷을 벗었다. 마른 탓에 가늘고 얇은, 허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카쿄인은 이제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그만.”
“…?”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희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그를 올려다보는 카쿄인을 본 죠타로가 혀를 찼다.
“미안하군. 겁먹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ㅈ, 저를, 범하실 건가요?”
“그래야 한다고 하면, 응해줄 거냐?”
“…감내, 감내를, 감내를….”
카쿄인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감내하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카쿄인과 마찬가지로 웃통을 벗어던진 죠타로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름답다고, 신비하다고 느꼈던 그의 녹색 눈동자가 지금은 두려웠다. 잘도 그러겠군. 죠타로가 픽 웃었다. 그가 다가왔다. 카쿄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거친 손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하여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죠타로가 말했다.
“걱정 마라. 정기가 필요한 건 맞지만, 이 정도면 된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죠타로가 그를 냅다 끌어안고 쓰러지듯 바닥에 누웠다. 이대로 잠이나 자자고.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쿄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죠타로가 나지막하게 답해주었다.
“네가 생각한 방법이 제일 좋기는 한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지금의 접촉이면 충분해.”
네 기운 좀 가져가마. 그리 말하는 죠타로의 목소리는 나른했고, 그는 정말 자기라도 하려는 건지 눈을 감은 채였다. …정말 자기만 하는 거야? 이대로? 카쿄인이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조금은 위태롭기까지 했던 죠타로의 숨소리는 이내 안정적으로 가라앉았고, 곧 색색이는 소리로 바뀌었다. …진짜 잠든 건가? 카쿄인은 꼼질꼼질 손을 들어 죠타로의 미간 사이를 꾹 눌렀다. 죠타로는 살짝 움찔거리고 말았을 뿐,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카쿄인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맞닿은 피부 사이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우람하고 판판한, 넓디넓은 가슴이 눈앞에서 느린 속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가슴 위에 손을 올리니 죠타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느껴졌다.
카쿄인은 숨을 길게 내쉬며 긴장했던 몸을 이완시켰다. 며칠 전 쏟아진 소나기로 날이 쌀쌀하더니, 방에 불을 뗀 것 같았다. 누운 자리가 따뜻했고, 자신을 안은 자의 온기는 더 따뜻했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딱 좋을 정도로 따뜻하고, 평온하고…. 죠타로에게서는, 항상 어떤 냄새가 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하고 단단한 자의 냄새. 맡고 있으면 세상의 근심걱정 모두 던져버리고 기대고 싶게 만드는 향. 조금 저급하게 말하자면, 감히 대적할 자 없는 강한 수컷의 내음. 죠타로는 호랑이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겁탈당하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런 거라면 언제든지 해줄 수 있다. 네가 나를 그 속에서 꺼내주었으니까, 나도 네게 도움이 되고 싶어…. 카쿄인은 가물가물한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는 결국 몰려오는 잠의 수마를 이기지 못했다. 카쿄인은 꿈을 꾸었다. 언제나 혼자였던 아이에게 커다란 흑호랑이가 나타나 멀리, 아주 멀리 데리고 가는 꿈이었다.
다음 날 죠타로는 눈을 떴다. 호랑이로 돌아가 쉴 때만큼의 정기가 채워져 있었다. 품 안에서 아직 잠들어있는 카쿄인이 뒤척였다.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죠타로가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사라지는 감각에 카쿄인도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고,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었다.
“잘 잤나?”
“응. 죠타로는?”
“덕분에 아주 개운하군. 몸은 좀 어때.”
“졸리다는 것 말고는 멀쩡해요.”
더 자는 건? 죠타로가 물었다. 네가 안아주면 더 잘래. 카쿄인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헛소리. 마찬가지로 죠타로도 가볍게 말하며 웃었다.
十.
둘은 종종 웃옷을 벗은 채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카쿄인은 죠타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죠타로는 양질의 정기를 채울 수 있다는 점이 꽤 만족스러웠다. 정기가 목적이 아닌 날도 분명 있었다. 허나 그렇게 껴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스치는 피부 아래로 맥동하는 심장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十一.
죠타로는 문득, 그를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힘껏 끌어안고 그 부드러운 살갗을 더 만끽하고 싶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런 건 수백 년 전에 졸업했던 건데. 사람에게서 직접 정기를 얻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싶기도 하고. …그는 그렇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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