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승화承花] We don’t talk anymore

21.11.27 작업 완료

※공백미포함 6,464자.

※2021.11.27 작업 완료

※승화데이(11.27) 기념 글이긴 하나, 밝은 분위기는 아닙니다.

※시점은 4승화에 가깝습니다만 25~26 정도의 나이라고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Charlie Pute의 We Don't Talk Anymore 가사에 영감을 받아 작성한 글로, 해당 곡의 가사에서 따온 문장이 많습니다. 감정선 역시 가사에 기반하여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We don't talk anymore

1.

 

“죠타로, 나 할 말이 있는데.”

“오늘도 늦을 거야.”

“…응.”

 

그게 끝이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든가, 조심히 잘 다녀오라든가, 그런 다정한 말은 하나도 없었다. 카쿄인이 하려던 말은 뭐였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죠타로가 집을 나섰고, 뒤이어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혼자 남은 카쿄인은 죠타로가 떠난 뒤에도 한참을 식사했다. 정리되지 않은 죠타로의 자리를 치우는 것도 카쿄인의 몫이었다. 카쿄인은 죠타로가 먹다 남긴 것들도 모두 모아 버렸고, 빈 그릇들도 개수대에 넣었고, 식탁도 닦았다. 그러고도 카쿄인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달그락거리며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 위잉거리며 청소기가 돌아가는 소리 등이 오간 후에야 여유가 생긴 카쿄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깔끔해진 집 안이 보기 좋았다. 이 정도면 일주일 정도는 청소를 못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출장 얘기를 못했는데… 상관없나.”

 

죠타로는 별로 관심도 없을 것 같고. 알든 모르든 크게 달라질 것도 없고. 죠타로는 방을 더럽게 쓰는 사람도 아니니까, 뭐. 큰 문제는 없겠지. 카쿄인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고, 한 시간쯤 뒤에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사람이 빠져나간 집 안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러나 평소와 크게 다른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정적이 감돌았으므로. 죠타로와 카쿄인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다.

 

2.

 

쿠죠 죠타로와 카쿄인 노리아키는 대학생 때부터 함께한 연인이었다. 50일, 수많은 위험을 이겨내며 동고동락한 그들은 어느새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혼자만의 마음일 거라 생각한 탓에 고백도 못하고, 각자의 짝사랑을 했더랬다. 한 학년 위인 죠타로가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 카쿄인까지 고등학교를 떠날 때까지, 2년이나 계속되었던 짝사랑은 카쿄인이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죠타로와 카쿄인이 같은 대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 긴말할 것도 없이 둘은 동거를 시작했다. 굳이 따로 자취할 이유가 없었다. 그쪽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같은 방에서 묵었던 적도 많은데 이제 와서 문제 될 게 있나. 하지만 함께 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루하루가 두근거렸다. 그렇게 설레면서도 아슬아슬한 생활을 이어가던 둘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고를 쳤다. 단순하다. 기말고사가 끝난 걸 자축하면서 술을 마시다가… 어쩐지 분위기에, 술에 취해 선을 넘어버렸다. 진짜 취했던 건지 핑계가 필요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뒤는 이하생략. 마침내 그들은 정식으로 연인이 되었다. 순서가 뒤바뀐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은 무시하도록 하자.

그들은 학년도, 학과도 달랐다. 들어야 하는 강의들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강의 사이의 빈 시간을 맞추기 위해 각자의 시간표를 조율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마저도 즐거웠다. 어쩌다 같은 교양 강의를 잡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수업이 없는 날을 위해 하루에 8시간씩 강의를 들어야 해도 좋았다. 그 날만 버티면 온종일 붙어있을 수 있는 날이 있으니까. 졸업논문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에도 서로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그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행복했다. 하루하루가 설렜고 기대됐다. 그의 얼굴만 봐도 두근거렸다. 딱히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함께 식사하고, 손을 잡고, 서로를 품에 안고, 서로에게 기대어 앉고, 같이 누워 잠들기만 해도 충분했다. 나는 이 사람을 평생 사랑하고 사랑할 거라고, 그리 생각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이 사회인이 되면서 얼굴조차 보지 못할 때가 많아진 탓이다. 대학원으로 직행한 죠타로는 연구로 바빴고, SPW재단의 프로그래머로 취직한 카쿄인은 본업으로도 바쁜데 스탠드사로서의 출장이 잦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둘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져 버리고 만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떨어지는 날에는 서로를 그리워했고, 문자로 안부를 묻고, 전화로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어느새 침대의 옆자리가 차가운 게 익숙해지고, 식사하며 마주 보던 얼굴이 없는 것에 담담해지고, 애정 담긴 대화가 줄어들고,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것에 무감각해지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누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크게 싸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연애 초반에나 엄청 싸웠지. 생활 습관의 사소한 차이로 인해 싸웠던 적도 많다. 그러나 결별 위기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감정이 나빠지는 건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니까.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사랑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차라리 싸운 거였으면 편했을 거다. 그럼 오해를 풀고 화해했겠지. 하지만 이건 어느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균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50일의 여행 때부터 변함없이 굳건했던 마음을 이제는 믿을 수 없다.

 

3.

 

아침에 예고했던 대로 죠타로는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다녀왔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피곤해서 집에 카쿄인이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카쿄인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딱히 문제 되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근래에는 혼자 지내다시피 한 날이 많았다. 자리를 비운 그가 크게 걱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돌아오겠거니 했다. 카쿄인이 단기출장 때문에 집을 비웠던 일주일 내내 죠타로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카쿄인도 그를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일정에 집중하기도 편했다. 자신 없이 일주일을 지내고 있을 죠타로가 걱정된다거나 궁금하다든가 그러지는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잘 지내고 있겠지. 서로가 하루라도 없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고, 살지 못할 것처럼 굴었던 것도 옛날 일이다.

 

“왔군.”

“…있었어? 연구소는?”

“며칠 정도는 여유롭다.”

“아…. 어디 갔었는지는 안 물어봐요?”

“일이 있었겠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카쿄인 쪽을 흘긋 바라봤을 뿐,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죠타로가 무심하게 답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연인의 대화가 이게 끝이라니. 카쿄인은 속으로 웃었다. 서로가 있으나 마나 한 생활이 너무나도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이자 동료지만, 이제는 연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이제는 이것을 끝내야 해. 카쿄인은 짐을 풀지도 않은 채 죠타로의 앞에 섰다. 죠타로는 카쿄인이 다가오는 것을 분명히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카쿄인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그만할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잖아, 우리. 그렇게 말하는 카쿄인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평온했다. 그제야 죠타로는 카쿄인을 올려다보았다. 죠타로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 방금 이별을 선고받았는데도. 하지만 카쿄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표정은 아니었다. 책을 덮은 죠타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래, 라고.

 

4.

 

죠타로의 집에서 카쿄인의 흔적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카쿄인은 연인 관계가 끝나자마자 바로 집을 나갈 준비를 했다. 함께 지낸 기간이 무척이나 긴 것에 비해 카쿄인의 짐은 매우 단출해서, 그의 물건들은 만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정리되었다. 죠타로는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 카쿄인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지낼 곳이 정해질 때까지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딱히 사이가 악화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카쿄인을 쫓아내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카쿄인은 죠타로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의 고집은 유구하게 죠타로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으므로, 죠타로는 결국 잘 가라며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카쿄인은 웃으면서 떠났다. 즐거웠다고, 고마웠다고, 잘 지내라고. 하지만 죠타로의 입에서도, 카쿄인의 입에서도 나중에 다시 만나자든가 종종 연락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집이 원래 이렇게 넓었던가? 죠타로는 제 뒷머리만 긁적였다. 4년은 넘게 같이 살았는데, 이제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허전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공간을 더 넓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 죠타로는 빈 곳에 새 책장이나 책상을 둘까, 그런 고민-공간이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으므로 그냥 해본 생각이다-을 했다.

 

5.

 

“실례합니다, 카쿄인 씨.”

“아. 무슨 일이신가요?”

“이걸 쿠죠 씨에게 전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 카쿄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직원이 건네준 것은 한 서류였다. 죠타로가 요청했던 자료인데 이제야 분석이 끝났다나. 평소였다면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죠타로는 최강의 스탠드사이며 죠스타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가 스탠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이다. SPW재단에서는 그에게 종종 협력을 요청했고, 죠타로가 SPW재단에 정보를 요청할 때도 많았다. 중간다리로 카쿄인을 통할 때도 왕왕 있었다. 그가 죠타로와 동거하고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카쿄인도 그것을 딱히 기분 나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물론 직원의 잘못은 아니다. 남들에게 사방팔방 알릴만한 일도 아니었고.

 

“죄송합니다. 이제는 따로 살아요.”

“…어머! 죄송해요. 그럼 헤어지신… 건가요?”

“그렇게 됐네요.”

 

카쿄인이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슬프거나 비참하지는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받고 헤어진 게 아니니까. 마음이 식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쿠죠 씨에게 그런 소문이….”

“죠타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 요즘 쿠죠 씨가 바람이 난 것… 같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카쿄인 씨가 아닌 다른 분과 데이트를 하는 것 같다고….”

“아…?”

 

데이트? 그 죠타로가 데이트. …우리의 마지막 데이트는 언제였더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직원이 안절부절못하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카쿄인은 서둘러 웃어 보였다. 괜찮다는 뜻이다. 직원이 눈에 띄게 안심한다.

 

“괜찮아요. 이제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고 계시는 건가요?”

“근처 모텔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방을 구하는 게 영 쉽지가 않네요.”

“동거하는 것도 괜찮으시다면… 동거인을 구하고 있는 제 친구를 소개해드려도 될까요?”

“정말입니까? 그래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6.

 

“오랜만이군, 카쿄인.”

“…너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데이터 표본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들이 몇 달 만에 재회한 건 한 실험에서였다. SPW재단은 스탠드파워를 계측할 수 있는 기기를 개발 중이었는데, 이것의 정확도를 측정하기 위한 샘플이 필요했다. 그 개발에 참여했던 카쿄인은 자신이 표본이 되겠다고 나섰다. 일단 스탠드사이니 다른 스탠드사에게 협력요청공문을 보낼 필요도 없고, 하이에로펀트에 대해서는 낱낱이 알고 있으니까 정확도를 보기도 쉽고. 그런데 죠타로가 그 실험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카쿄인은 정말 깜짝 놀랐더랬지. 서로를 피해 다닌 건 아니다. 둘에게는 SPW재단이라는 거대한 공통점이 있어서 만나고자 한다면 쉽게 만났을 거다. 그냥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같이 살 때에도 얼굴조차 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이번 경우에는 죠타로를 의식한 게 아니라, 자기가 있으니 다른 이의 협력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더 크다.

 

“간만에 만났는데 식사라도 한 번 같이 하지.”

“가당치도 않은 얘기네. 집중이나 해요, 죠타로.”

“어차피 금방 끝나잖아. 그래서 싫은 건가?”

“나보다는 애인이랑 같이 밥 먹는 게 더 낫지 않겠냐는 얘기죠.”

“애인?”

“데이트하는 상대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아.”

 

잠깐의 정적이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모두 끝났다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카쿄인이 후후 웃었다.

 

“그 쿠죠 죠타로가 데이트라니, 처음에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니까.”

“…별 걸로 다 놀라는군. 네 녀석은 요즘 어떻게 지내지?”

“모르는 척 하지 마. 너라면 다 알 거 아냐? 난 SPW재단 직원이니까.”

“알아보려고 한 적 없어. 이 기기의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모른다.”

“하긴, 너는 전 애인의 신상을 궁금해 할 사람은 아닐 것 같으니까.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괜찮은 동거인을 만나서요.”

“그런가.”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들은 기대 이상의 질 좋은 데이터를 얻었다. 죠타로 덕분이었다. 하이에로펀트만으로는 이 정도의 데이터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됐냐면, 기기의 정확도는 수준 이하였다. 결과를 본 카쿄인이 개발자의 비애가 느껴지는 얼굴로 웃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죠타로가 말했다. 카쿄인은 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제 엄청 바빠질 예정이라 답장은 못 할 거라고 했다.

 

7.

 

카쿄인은 새벽 4시를 훌쩍 넘은 시간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으허억,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카쿄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당장 이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쿄인은 잠깐 눈을 감는가 싶더니 이내 벌떡 일어났다. 잘 때 자더라도 씻고 자야 한다. 그리고… 문자도 어떻게 해야 한다. 실험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카쿄인은 문자를 한 통 받았다. 죠타로가 보낸 것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연락하라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카쿄인의 머릿속에 그 문자의 존재는 지워져있었다. 문자에 신경 쓸 정신도 없이 바빴던 것도 있지만… 언제까지고 피하기만은 할 수 없는 노릇. …답장을 해야 하나? 집이야, 그 짧은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수차례 반복한 끝에 카쿄인은 결국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어차피 죠타로도 자신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진 않을 거고, 자고 있을 사람 깨우기도 싫었다. 애초에 중요한 용건도 없으면서 옛 애인에게 이런 연락을 해도 괜찮은 건가? 지금 사귀는 사람도 따로 있으면서…. 카쿄인은 생각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저런 생각이나 할 시간에 얼른 씻고 자야 한다. 카쿄인은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죠타로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려 애썼다. 분명 피부에 떨어지는 물은 따뜻한데, 카쿄인은 어쩐지 차가운 것 같다고 느꼈다.

…지금의 네 애인은, 너와 잘 맞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너를 감히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적어도 네 옆자리를 욕심내지 않았겠지. …그거 알아요? 시간이 꽤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그 때에 멈춰있는 것 같아. 너는 쉽게 다시 새 사랑을 시작했고. 너에게는 가벼운 장난이었음을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사랑받는 게 익숙한 너에게는 나 역시 너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했을 뿐인데, 네게 눈이 멀어 미처 알지 못했어. 그런데 우습지. 아직도 너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네 목소리와 나를 끌어안던 너의 품이 자꾸만 떠올라요. 나는 아마도, 여전히 너를 사랑하나봐. 먼저 이별을 고한 건 나인 주제에 말이야. 그것이 너무나도 유감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8.

 

죠타로는 틈틈이 핸드폰의 알림을 확인했지만, 카쿄인의 답장은 일주일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내내 퇴근도 못하고 철야 중인 것은 아닐 거다. 그가 문자를 잊었을 리도 없다. 카쿄인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잘 기억하는 사람이니까. 설마 애인, 이라던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죠타로는 이마를 짚었다. 카쿄인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죠타로는 당시에 돌았던 소문을 안다. 바람이 난 것 같다든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한다든가.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연구차 자주 만나게 된 사람일 뿐이었고, 실제로 연구만 끝나면 만날 일이 없을 사람이다. 하물며 바람이라니? 하늘에 맹세코 그런 적은 전혀 없었다. 카쿄인과 연인일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죠타로는 억울했다. 당장이라도 카쿄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네가 뭘 생각하고 있든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죠타로는 확신이 없었다. 그걸 정정해야 할 만큼, 쿠죠 죠타로는 카쿄인 노리아키에게 여전히 중요한 사람인가? 죠타로는 카쿄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거인이 있다고 했던가. 괜찮게 지내고 있으려나. 우리도 초반에는 엄청 싸웠는데…. 그은 카쿄인에게 편한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죠타로는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오늘도 카쿄인의 답장은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네 곁에 있는 사람은 너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일수록 그를 다루는 방식 역시 특별해야 하니까. 다정하고 섬세하며 고귀하기까지 한 네가 바로 그렇다. 나는 네가 익숙하다며 자만한 나머지 너를 소홀히 대해버렸어. 네가 나를 떠난 건 바로 그것 때문일 테지. 나는 가끔씩 생각해. 내가 문 앞에 서있기를, 네가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이지. 그래서 두려워. 나 따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봐.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덜컥 겁이 난다.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와 눈을 맞추고 너를 안아주려나. 알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지고 만다. 빌어먹게도 네가 자꾸 생각나서, 나는 하릴없이 비참해지기만 해. 그가 나였으면 좋겠어, 카쿄인.

 

9.

 

있잖아,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이야기도 나누고, 웃을 수도 있겠지. 예전처럼.

 

10.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 때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