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스

[이안] 여백

0.5기

귤차 by 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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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11 작성(추정)

1.

이안은 죽지 말아요.

 

 

2.

리암 마르테스는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얼굴. 이안은 벌써 익숙해진 경멸을 짚어낸다. 열다섯의 이안 데코르는 리암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천진하게 웃었다. 이안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리암을 지나쳐 시신 앞으로 무릎을 굽혀 앉았다. 살피는 일이 정말 보는 일이 되지는 못해서, 이안의 시선은 가늠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향해졌다. 죽어 누워 있는 몸. 이안은 억지처럼 손을 뻗는다. 불은 소꿉놀이인 양 사소하게만 스몄다. 불로 일으켜지지는 못하고, 화상처럼. 이안은 시신을 태워낼 수 있을 만큼 거센 불을 손안에서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잘 안 되네요. 이안은 아쉬운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받을 수 없는 투정을 부린다.

이안은 잠자코 몸을 일으켰다. 이안의 불은 제단을 필요로 했다. 알맞은 장소. 이안은 목재로 된 벽을 찬찬히 쓸면서 좁은 집 안을 빙 돌았다. 손길이 지나간 대로, 사람이 포개어져 있는 중심부를 둘러싸는 모양으로 불길이 일어났고, 이안은 다시 리암의 앞으로 가 섰다. 먼저 나가요. 당신은 어설프네요. 리암은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그래서 뒤따라 걷고 있자면, 보폭이 너무 차이가 났으므로 곧잘 뒤로 처지곤 했다. 이안은 고용인이 보조를 맞춰줄 때까지 그냥, 느긋하게 뒤떨어져 있었고, 리암은 돌아볼 줄 알았다. 그리고 멈춰 선 자리. 이안은 리암에게 이르기까지 주변을 찬찬히 살피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가요.

 

나의 마르테스.

 

여기까지, 세 번째. 이안은 허름하게 박혀 있던 집이, 고약한 냄새로 타들어가는 과정을 뒤로 두고 걷는다. 리암은 시신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싫어했지만 아무래도 리암에게 생경한 것일 리는 없어서, 굳이 새로운 감상이 씌워졌을 대상을 찾자면 이안이었겠지. 혼자서도 해낼 수 있는 장난이었지만, 이안은 곁가지를 두는 쪽을 택했다. 리암 마르테스. 카스토드 시대의 영광을 뒤에 달고 있는 이름은, 사실은 오래 전에 영락했으므로 본래는 그 옹색한 자국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르테스의 이름이 별안간 반짝이며 두드러졌던 것은 리암의 부친 대에 있었던 일로, 리암 본인에게는 어떻게 남겨져 있을지 모를 자국은, 아무튼 리암을 찾아내게끔 했다. 이안은 시시한 충동으로 마르테스의 이름을 겨눈다.

 

이건 단지 내 장난일 뿐이에요. 당신은 내 거짓말을 명분인 양 받아들이고 편해질지 여부만 결정해요.

 

이안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용병 리암 마르테스에게 건네진 의뢰는, 불손세력에 대한 진압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금세 밝혀졌다. 이안 본인에 의해서. 나는 내 주인에 대한 어떤 충정으로 행동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리안의 외곽에 있는 민가를 몇 채 불태울 생각인데, 까지 말한 후 이안은 주체와 표현을 분명하게 했다. 우리가 죽일 대상은, 민간인이에요. 혹시 그 안에 역도가 섞여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리가 모르는 일이죠. 우리는 명백한 잔학으로 행동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수락하겠죠? 리암. 리암은 얼핏 무표정하게 이안을 봤고, 고개를 젓지는 않았다. 리암 마르테스의 경멸은 단선적으로만 향한다. 용병의 윤리에서, 스스로에게 파고드는 모멸감은 과한 것이었고 리암 마르테스는 그 점을 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떨어지는 목소리. 네, 이엔도 당신과 같은 결정을 했겠죠. 이안은 연상인 친구를 다정으로 언급한다. 그들 부부에 대한 축복이라도 될 수 있는 듯이. 물론 이엔이었다면, 당신처럼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겠지만.

리암은, 웃지 않았다.

리안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초라한 집들은 듬성듬성, 골라내진 듯이 성기게 반짝였다. 이안이 발 들이지 않고 넘어온 집에서는 얼핏 인영들이 보였다. 집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있던 사람들의 윤곽은, 환하게 타들어가는 불빛으로 검게 잡혀지곤 했다. 리암은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지 비명소리조차 비집고 들어서지 못하는 적막만이 두 사람 사이로 견고하게 들어찼다. 리암은 사람들이 거센 숨을 뱉어내기 전에 호흡을 멈추도록 만들곤 했고, 이안은 뒤로 물러서 마련된 장소로 향하곤 했다. 몇 걸음 걷다가, 이안은 한 바퀴 빙 돌며 웃었다.

 

평탄한 길로만 돌아다니고 있으니 편하죠?

이렇게 훤히 보이는 곳에 역도들의 거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네요. 역도들이 어린 애들도 끼고 있고.

리안은 민심이 사납군요.

산지로 가면 정말 불손한 세력들도 만날 수 있죠.

도련님께서 거기까지 행차하시기는 힘든가 봅니다?

나는 발이 작아요. 아직 어린 애잖아요? 어린 애는 그래도 돼요.

 

이안은 갸우뚱, 물었다.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요?

…….

리암은 현명해요. 그래서 내가 먼저 질문했어요.

 

리암은, 젊다기에 아직 어린 리암 마르테스는 묻는다.

 

이유가 있습니까?

 

이안은 해명될 수 있는 대답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그을음을 남겨보고 싶었죠. 예쁠 테니까.

그래서, 예쁘게 남겨진 것 같네요. 지금은. 이안은 음, 주저하는 양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다음에도 도와줄래요?

 

나의 마르테스. 리암은 기가 차다는 것처럼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듯이,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어렵지 않게 냉정을 유지해냈다.

 

……그럴 일은 없을걸, 도련님.

 

피로 흠뻑 적셔졌던 땅으로는 얼마간 그을음이 생겨났다. 이안 데코르는 웃어보였다.

 

 

 

3.

데코르의 마법사들은 간편한 독을 만들어냈다. 어리신 도련님, 우리의 도련님, 너무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나이 든 마법사는 다정으로 속삭였다. 열두 살의 아이는 또래보다 작았고, 허리를 굽히는 것만으로는 눈을 마주대할 수 없었다. 도련님, 주인님께서 도련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도련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주인님께서는 도련님을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시지요. 도련님 또한 주인님의 도움이 되고 싶으실 거라는 걸 압니다. 도련님이 선천으로 부여 받은 것은 결국 주인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주인님 당신께서는 마법에 있어 불모의 땅과 다르지 않으셨으나, 끝내 당신의 핏줄에서 해내시질 않았습니까.

도련님, 도련님은 얼마나 축복 받은 태생이신지요. 부인께서는 도련님께서 태어나신 이후 오웰님의 안위만을 걱정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오웰님이 데코르의 이름을 잇는 동안, 도련님께서 나머지 염원을 이루어주실 것이었으니까요. 부인께서는 부인의 마법이 도련님에게서 더 강대해졌다는 걸 큰 자랑으로 생각하십니다. 당신을 쏙 빼닮은 당신의 아들이, 가장 높은 지향에 이를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나이 든 마법사는 모든 것을 확신으로 말한다.

그러니 도련님, 저희는 도련님이 망령된 예속에 처하도록 두지 않습니다.

 

나이 든 마법사는 이안의 손을 잡아 포개었다. 애틋하리만치 따듯한 손길이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는 어떤 독을 알고 계십니까? 이안은 몸으로 받아들였던 약들을 생각한다. 통각을 무디게 하고 내성을 갖게 하는, 몸의 가장 내밀한 곳에 부드럽게 녹아 있거나 쌓여 있을 독들. 모두 알고 있지. 마법사는 이안의 말을 일종의 순진함으로 이해한다. 이건, 아주 특별한 독입니다. 도련님께서 영주에게 영영 종속되지 않으셔도 되도록 할, 해결책이지요.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마법사는 허리를 숙여 이안과 눈을 맞추고 있던 데서, 거의 울 것 같은 눈으로 다시 이안을 봤다. 감격스럽게.

이 독은, 도련님을 철저하게 데코르로서 살게 할 겁니다. 영주에게 고개를 숙이는 순간에도. 이 독은 도련님의 몸 안에서, 고통 없이 점점이 도련님의 몸을 태워갈 겁니다. 이 독을 해독할 방법은 오로지 데코르에만 존재하고, 따라서 도련님은 변절의 유혹을 느낄 때에도 데코르의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시겠지요. 이 독은 도련님의 마지막 선택을 영주를 위한 것이 아닌, 진정으로 속해 있는 이름을 위해 행하도록 만들어줄 겁니다. 이안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단순히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은데? 마법사는 차라리 결연하기까지 한 채 대답했다. 도련님, 사람의 일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까닭에, 때로 보장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필요로 합니다. 도련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습니까. 주인님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한 번 더, 물음. 그 독은, 내가 잔을 받아드는 순간부터 내 몸을 태워가나? 마법사는 고개를 젓는다. 이 독의 작용은 불을 사용하는 순간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야기일 수 있어? 독이 내 입술에 닿는 순간부터 나는 쭉 타들어가게 될 거라는 건 같은데. 그래서, 당신들의 해독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나는 완전히 치유되나? 타들어간 자국 없이, 그을음 없이? 마법사는 안도한 것처럼 웃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이 독은, 타들어가는 심지와 같습니다. 도련님은 이 독으로 단 한 순간도 아프지 않으시겠지만, 수명만은 착실하게 갉아지겠지요. 도련님이 불을 사용하시는 매순간마다, 이 독은 도련님의 숨을 삼켜둘 겁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도련님의 목 너머로는 더 숨이 내어지지 못하고, 도련님은 불 곁에서 숨을 꺼트리시게 되겠지요. 설사 해독을 하더라도, 그 줄어든 삶이 다시 회복될 수는 없습니다. 도련님도 잘 아실 겁니다. 잿더미가 무엇으로도 되돌려질 수 없다는 걸.

이안은 의아하게 물었다.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해? 나이 든 마법사는 의아한 얼굴로 이안을 봤다. 도련님은 보석처럼 귀하십니다. 도련님께서 오욕된 선택을 하실 가능성을 없애려는 겁니다. 저희는. 이안은 골치 아프게, 구별을 짚어낸다. 당신 말은, 우리는 아니라는 거네. 당신과 내가. 마법사는 이안의 지적을 듣지 못한 양, 아마 실제로도 듣지 않고 흘렸다. 도련님께서 기꺼이 삼켜주실 것을 압니다. 도련님께서는 주인님께서 보석처럼 귀애하시니까요. 이안 데코르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안다. 삼키지 않았을 때, 이안의 그들이 할 일들. 이 독은, 도련님에게 잘 스밀 겁니다. 도련님은 불에 알맞도록 태어난 분이시니까요. 이안은 시시한 농담이라는 생각을 한다. 불에 가장 잘 정제되어 있는 독, 불에 맞물리도록 태어났다는 몸. 이안은 고민하지는 않고 웃었다. 그래, 나는 배신하지 못해. 너무 오래 살지도 않겠지. 데코르의 주인을 위해서. 마법사는 마땅한 말이 내어진 데 기뻐했고, 이안도 쭉 마주 웃었다.

미치광이들.

 

 

4.

데코르의 주인, 클라인 데코르는 아들의 어깨를 뿌듯하게 감싸 안았다. 왔구나, 내 아들. 오웰 데코르는 이안의 이마에 입 맞추며 아낌없이 친애를 드러냈다. 마법사는 잘 통제되어야 해. 번듯한 도구일 수 있도록. 오웰은 본인의 부친과 같은 내용으로 말을 읊곤 한다.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끝조차 같게. 데코르의 마법사는 순종처럼 웃었다. 클라인은 자신의 보석을 귀하게 들여다보았다.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란다, 나의 보석. 너는 내가 만들어낸 최상의 것이란다. 네가 귀하지 않을 수 있겠니? 이안은 어지러운, 표현들에 대해서 떠올린다. 변주되는 말소리들. 귀한, 보석. 또는, 보석 같은. 이안은 겸연쩍은 양 웃었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 클라인은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래야지, 내 아들. 리안은 머잖아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하게 될 거다. 네 힘을 통해서도. 아버지는 결연으로 말한다. 왜 확신하시죠? 라고, 이안은 묻지 않는다. 구호와 다르지 않게 반복되었던 오만들. 나는 보석처럼 남겨지겠네요. 네 이름은

 

 

5.

레벤 리드가 거느리고 있는 데코르의 마법사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데코르로서 충분했으므로, 이름은 그 바깥의 것으로 분리되었다. 이름이, 환기되는 장면들도 있었지만 그도 짧게 그칠 뿐이었고,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리안의, 데코르의 마법사는 불을 사용했다. 그 주인 된 이를 위해 어김없이 검은 자국을 남기며. 본디 마법사의 존재는 이름으로만 드러내지곤 했고, 데코르는 그 불을 사용하는 마법사를 지칭하는 것으로써 부족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데코르로만 남겨진다.

 

 

 

6.

너는 검은 머리.

금색 눈.

환한 불.

검은 그을음.

 

데코르.

 

 

 

7.

나단 던스트는 던스트 부부 사후 영주에게 예속되었다. 나단 던스트는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영주에게 인지되었던 순간에, 잿더미만 남아 있던 그들의 집에서 호명된 순간에 나단 던스트는 더는 어디로도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그것은 나단에게 도리어 확고한 입지를 점하게 했다. 나단은 영주와 이안 두 사람의 비호 아래 새로운 공간으로 단단히 맞물려 들어갔다. 단 테오 던스트는 성 안에서 조금 떠 있는 위치였다. 테오는 나단과 마찬가지로 던스트 부부의 피를 받았지만, 형만큼 뛰어나지는 못했다. 혹은 마법사로서 무용했다. 테오 던스트는 오로지 나단 던스트를 통해서 모든 것을 누렸다. 테오는 나단이 멀리 떠나 있는 동안이면 그들 형제의 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테오에게 위해를 가했을 때, 나단이 보복하지 않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흔적쯤은 요령 있게들 남길 줄 알았다.

나단은 몇 번인가 동생에게 겨누어진 폭력을 잡아냈지만, 전부를 알지는 못했다. 이들 무리 안에는 성직자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기어코 던스트 형제가 머무는 방의 방문이 억지로 열리려는 장면을, 이안 데코르는 우연찮게 목격했다. 슬슬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안은 소란을 헛웃음으로 지켜봤다. 미리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도중이기는 해도, 직접 맞닥뜨리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안은 자신이 수하들에게 발각되지 않는 상황에 차라리 연민을 느꼈지만, 어쨌든 발견하는 일은 고스란히 이안의 몫으로 돌아갔다. 뭘 하고 있지? 수하들은 이안의 목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데, 데코르님, 계셨……. 이안은 곤혹으로 웃었다. 나는, 허락한 적이 없었을 텐데. 방문 너머에서, 방문에 기대어 듣고 있었을 작은 몸은, 그날의 술렁임이 어떻게 잦아들었는지를 분명하게 알았을 것이다.

우르르 몰려들었던 발소리가 잦아들었을 쯤, 여전히 열리지 않은 문으로 희박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데코르님……. 이안은 듣지 못한 것으로 해두고 지나갔다.

그, 연약하게 들려오던 숨.

 

 

 

8.

나단, 왜 늘어져 있어? 이안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나단을 불렀다. 나단은 당황하지도 않고 대번에 언짢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가 늦게야 무뚝뚝한 체 했다. 이안은 황당해서 웃었다. 너는 어설프지, 나단. 내가 싫어? 나단은 그래도, 대놓고 겨누어진 질문에 허둥대지는 않는다. 아닙니다. 허술한 대답으로는 심드렁함이 선연해서, 이안은 나단의 그 서툰 구석을 좋아했다. 요령 없는 고집들. 이안은 잠자코 나단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나단은 머리를 만지는 걸 싫어했지만……. 이안의 손을 아주 물리지만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이안도 안다.

 

기록은 다 끝나가나?

 

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대답도 없이. 이안은 나단이 작성하던 기록을 찬찬히 읽는다. 나무뿌리 아래에 있는 것. 이안은 잉크가 마르지 않은 문구를 보며 나단의 머리카락을 헤집듯 매만졌다. 너는 뭘 숨겨뒀지? 그 아래에. 나단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안은 나단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너는 역도를 매장했을 뿐이야, 나단. 리안을 위한 일이었지. 나단은 기만적인 정당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정당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고집스레 복기하며. 이안은 나단의 균열을 다정으로 헤아렸다. 그러나 너는 죽지도 미치지도 않았지. 이안 던스트는 알고 있다. 나단 던스트의 불은, 나단이 해하는 모든 대상들 앞에서, 나단이 그 당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더 우선시하는지 확인시킨다.

나단 던스트는 동생을 사라진 가족의 원형인 양 지킨다. 그리고 사실은, 불 자체였다. 그 모든 부정 앞에 서는 절대적인 가치는. 나단은 이안과 꼭 닮은 모습으로 불을 사랑한다. 어쩔 수도 없이. 이안은 나단이 마지막에 무엇을 선택할지를 안다. 이안 데코르는 조급하게 굴지 않는다. 이안 데코르는, 나단 던스트가 점하고 있는 우위를 이해했다. 절박함은 늘 이안에게서만 비롯되었음을. 그러나 채근하지 않아도 너는 나와 같은 것을 소망하겠지. 너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을.

……나무뿌리 아래에 묻어둔 시신, 네가 수없이 기록해둘 네 부정들, 너를 갉아먹을. 네가 기록해둔 기반이 너를 무너트렸을 때에도 네가 소망하고 있을 것, 내게 네가 확인시켜줄.

 

나는 네 불이 좋아, 나단.

 

이안은 달콤하게 속삭인다. 지극한 친애로.

 

 

 

9.

왜 물을 사용하고 있었지, 나단?

……봤어요?

못하던데.

음, 못해요. 그래서 연습해보고 있었죠.

왜 하려는 거야? 너는 불 마법사잖아.

한 가지 속성만 해야 한다는 법이 있나요.

너라면 그럴 텐데.

……그냥, 사실은, 물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에요. 잘하지도 못하고……. 그런데, 테오가 좋아해요. 테오가, 마법으로 만들어낸 물을 보고 싶어 해서.

그랬나.

나는 도무지 물은, 가지지 못할 것 같아서.

 

나단은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말한다. 겸연쩍은 웃음으로.

 

물을 가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10.

몸 안의, 그을린 자국들. 예쁘게 남겨진. 나는 심지가 다 타들어간 때에 어떻게 되지?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붉어졌다가, 이내 검어질 겁니다. 몸 안에 새겨진 결대로 견고하게 타들어가겠지요. 이안 데코르는 만족한다. 무너지는 일만이 예비되어 있는 삶. 어떻게 알지 못할 수 있었으려고요, 아버지. 내 독은 당신에 대한 내 반역을 단죄할 수단이기도 했음을.

그러나 내 허술한 불은, 나를 검게 태워낼 수도 없는데.

 

 

 

11.

레벤 리드는 던스트 가에 있던 책들을 이안 데코르에게 넘겼다. 단 책은 영주의 서재에 그대로 놓여 있었는데, 이안은 그러니까, 방 안에 무얼 들이는 걸 어색하게 느꼈다. 이안의 방은 간단치 않은 지위를 반영하듯 화려했지만 비어 있는 느낌이 났다. 이안 데코르를 증명할 어떤 것도 갖추고 있지 않은 방. 이안은 방을 그렇게 두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되었다, 는 쪽이 옳았는데, 그러므로 그 책들이 이안의 방 안으로 옮겨졌다고 해서 더 분명하게 이안 데코르의 소유물이 될 수는 없었다. 이안은 가끔, 생각이 날 때면 서재에 들려 그 책들을 읽었다. 카스토드 시대의 문자라든지, 내용은 엇비슷하게 어려웠지만 다 읽어내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한 권만이 오래도록 공백으로 머물렀다. 그 책은 물의 마법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는데, 이안은 무심히 읽다가 번번이 책을 덮곤 했다.

이안 데코르는 고대의 복잡한 수식들이 뜻밖으로 순조롭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모멸감이랄 것을 느끼곤 했다. 어떻게, 불에 맞물리지 않게 태어났는지 확인 받아야 했으니. 그래서 한동안 서먹하게 방치되어 있던 책이 이안의 손에 들린 채 복도에 노출되었던 건, 순전히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물은 경계하듯이……. 알아두려 하지 않았으므로 이따금, 이안 데코르는 가장 손쉽게 거머쥘 수 있는 감각 안에서 헤맸다. 바람의 수식에서 폭풍우에 이르는 과정으로는 이따금 물이 개입되기도 해서, 이안은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을 위해서만 책장을 넘겼다. 던스트 형제와 마주치게 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최근에 들인 물품일 뿐이라고 둘러대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정말 노골적으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테오와 마주쳤을 때에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저, 잠시만, 잠시만요…….

 

이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테오 던스트는 어쩐지, 열에 들뜬 것처럼 이안을 보고 있었다. 이안은 손에 들려 있는 책을 헤아린다. 데코르님, 이라고 익숙한 이름을 부르기에도 경황이 없나? 이안은 그냥, 무디게 이해했지만.

 

그 책.

 

이안은 더디게 진행되는 과정이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이안은 차분하게 재회의 순간을 기다려주었다. 테오가 단번에 알아본 그 책은, 다음 순간 생각지 않은 무모함의 대상이 되었다. 이안은 이안에게로 다가오던 테오의 손이, 기어이 책 위로 향했을 때 조금 웃었다. 테오의 무레는 너그러이 넘겨졌다. 테오 던스트는 나단 던스트의 동생이었으니까. 테오는 너무 오래지는 않게 책장을 넘기다가, 마지막 장가지 가서는 희미하게 흐느꼈다. 이안은 무감하게, 위로라도 하려다가.

테오 던스트는 별안간 벅찬 얼굴로, 단단한 음성으로 부른다. 이안.

 

당신은 물을 부여 받았군요.

 

 

 

12.

그 책은, 우리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어요. 형은 뛰어난 마법사지만……. 물은 잘 사용하지 못하잖아요. 저는 말할 것도 없고. 아, 말하는 순서가 어수선하죠. 죄송해요. 지금 너무, 들떠서……. 이 책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물을 다룰 수 있는 이들만이 열람할 수 있게끔 하는 성질의 것이죠. 물을 다루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서술들만이 나타나거나 공백으로 보여요. 아빠, 아니, 아버지는 물을 사용하셨으니까, 이 책에 대해서 먼저 알려주셨죠. 아버지께서 손으로 짚으실 때면 비어 있던 공간으로 활자가 새겨지는 식이었어요. 저는 그 책을 다 읽지는 못했어요. 아버지의……. 자질로는, 책을 끝까지 채워낼 수 없었어요. 테오는 순하게 웃었다.

이안을 만나서 기뻐요. 동생은, 형이 부르는 방식을 따라할 줄 알았다.

테오는 조금 아득한 눈으로, 꿈에 취한 듯이 말한다.

 

물을 가졌다는 건, 너무 멋진 일이에요. 이안.

 

테오는 안도로 중얼거렸다. 이안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형도, 나도. 다행이라고. 이안 데코르는 테오 던스트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형은요, 저 때문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있어요. 저도 모르지는 않아요. 짧은 숨. 테오는 잠잠히 말을 삼킨다. 그러니까, 이건 뻔뻔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형은 제가 있어야 해서, 어떻게든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없었다면 형은 죽었을지도 모르거든요. 형은, 성취해내려는 목표가 뚜렷하고, 분명히 해낼 수 있겠지만, 이대로는 미처 다다르기 전에 무너질지도 모르죠. 저는 그게 무서웠어요. 형은 제 사랑하는 가족이고, 제 지향이기도 해서, 제가 설사 잘못된 이후의 일이라도……. 형이 절망하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안, 알고 있어요? 이안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테오는 충분한 대답으로 받아들이고 말을 잇는다. 이안도, 형에게는 중요한 사람이에요. 이안은 조금 웃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테오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형도 이안과 같으니까요. 형도, 이안과 다르지 않게 불을 갈망해요. 불에 대한 지향을, 이안은 부정하지는 않았고, 그냥, 생각한다.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발견했지?

 

 

 

13.

그날 이후 테오 던스트는 가끔씩 이안을 찾아왔다. 나단의 안위에 대해서 호소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어설프게 기웃거리곤 해서, 먼저 부르는 건 이안의 몫이었다. 이리 와. 테오. 테오는 이안이 부를 때면 대번에 눈을 반짝이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테오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이안의 연구를 지켜보거나 그저 곁에 있을 뿐이었다. 너는 왜 오는 거지? 테오는 달리 말을 찾지 못하다가 고백하듯 일렀다. 제 지향을 찾았으니까요. 이안은 나단이 몇 번인가 들려주었던 말을 떠올린다. 너는 물을 사랑했지. 내가 네 지향이 될 수 있어? 테오는 황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안은, 오래도록 가라앉혀두었던 물을 끌어올린다. 물은 어느 날에는 온전히 아래로 흘렀고 다른 날에는 점점이 흩어졌다. 어떤 형태로든, 그 사소하게 빚어진 자국들에서 테오는 눈을 떼지 못했다. 테오는 종종 이안의 방문을 여는 행위를 꿈으로의 진입인 양 굴었다. 문을 닫고 나가면, 눈꺼풀이 열리고 다시 볕으로, 꿈에서 깨어나는 환상으로. 이안의 방안에는 차츰 물비린내가 스몄다. 사실은 배지 않았을 냄새. 이안 데코르의 방은 비로소 이안 데코르를 증명하는 것들로 채워진다. 어지러운, 물안개들.

테오는 속삭인다. 웃으며. 이안, 이안의 물은 바다를 본 딴 것 같아요. 그래, 어떤 바다? 호브의 바다요. 이안은 웃는다. 어떻게 알 수 있지? 알 수 있어요. 보지 않았어도, 볼 수 없더라도.

이안의 물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물이니까.

 

 

 

14.

이안, 용사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나단은 대뜸 묻는 소리를 한다. 이안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소문 정도만 알지. 너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가? 대대륙 탈환에. 나단은 음, 슬그머니 곤혹으로 웃었다. 용사의 여정이 성공하게 된다면, 이후의 일에 대해서 기록할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7년 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그것도 기록하기 위해서? 나단은 천진하게 웃었다. 네, 언젠가. 누군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겠죠. 나단은 영지 바깥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처럼 말한다. 이안은 이전에 내디뎠던 땅에 대해서 털어 놓는 대신 마주 웃어보였다. 그래, 누구든 알려줄 수 있겠지. 네가 채워야 할 여백을. 나단은 기쁘게 웃었다.

 

 

 

15.

그러므로, 다음은 내가 네게 채워야 했을 여백으로.

 

 

 

16.

……소란은 늦은 밤에 꿈틀거렸다. 흔히 있는 일들이었겠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내가 오늘 영지로 돌아온다는 건 알고 있었을 텐데. 이안은 조금 피로한 얼굴로 수하들을 본다. 수하들은 파리한 얼굴을 자꾸만 아래로 숙였다. 웅크리려는 듯이. 이안은 그들 곁으로, 창백하지 않고 붉게 수그러져 있는 몸을 본다. 그 몸은, 연약하게 한 번 흩어졌다가 천천히, 다정한 발음을 외었다. 이안. 이안은 피투성이의 테오 던스트를 본다. 왜 이렇게 만들었지? 책망하는 어조는 아니었겠지만 누구도 대답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이안은 흐린 시선을 본다. 익숙하게 이루어졌던 부름들. 데코르, 대신, 이안, 부르던 소리.

그건 네게 허락한 이름은 아니었는데.

이안은 찬찬히, 테오를 살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테오는 형과 마찬가지로 은발이었는데, 붉은 색은 제대로 붉게 헝클어지지도 못했다. 거의 검고 탁했지. 이안은 눈을 깜빡, 감았다 떴다. 무겁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안은 피로로 무거워진 몸을 돌렸다. 죽기라도 하면 회복시키지도 못해. 얼핏 당연하게 느껴지는 말은, 한정적으로 좁혀져 있었다. 흔적을 남기지 말 것. 이안은 테오를 피 흘리게 만든 자국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안 데코르가 내어준 단서가 폭력에 대한 허락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이해되었다. 수하들에게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는데, 아마 고개를 숙여보였을 것이다. 아무튼 뒤돌아선 채로는 볼 수 없어서, 이안은 사박거리는 소리만을 듣는다. 옷 천이 스치는 소리, 발끝이 끌리는 소리. 다시, 연약한 숨.

이안 데코르는 방에 들어선다. 물비린내가 번져 있는 곳. 이안은 바다의 꿈을 꾼다. 이안, 이안은 형에게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죠? 그건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나. 어설픈 환상.

다음 날 테오 던스트는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물에 잠겨 있던 몸은 바다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17.

그대로 옆에 붙어 있다간 시독이 옮을 거야. 이안은 나단을 달랜다. 장례 절차에 대해서 보장하는 말을 두고, 제가 할게요. 제가 해야만 해요. 나단은 엄격하게 여며진 존칭으로 답한다. 나단은 시체처럼 창백했지만, 아무래도 죽은 살처럼 흴 수는 없었다. 던스트는, 시신을 화장한 모양이던데. 무슨 수로? 불 마법사잖아. 자기 손으로 태운 거지. 아, 미친 놈. 돌았어도 단단히 돌았지. 지 동생 타는 냄새를 맡고 있나? 야, 그것보다는 불로만 태워낸 게 더 신기하지 않냐? 파이어볼 같은 것도 쓸 수 있는 거 아니야? 그 놈, 언제 그렇게까지 할 수 있게 됐대? 이야, 지 동생 송장 치운 얘기가 영주 귀에 들어가면 또 출세하시겠군. 귀하신 힘이랍시고. 예를 들어 그런 말소리들. 이안 데코르는 테오 던스트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린다. 테오, 라고 간신히 불릴 수 있었을 형상. 이안은 침묵한다.

……이안 데코르는 말한다. 그건 내가 한 짓은 아니야. 네게 결백해. 너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소행일 수도 있겠지? 너는 아직 어리고 뛰어나니까. 하지만, 내가 한 일이라고 해서 뭐가 달리지지? 너는 달라지지 않을 텐데.

너에게 뭐가 남았지? 나단.

이안 데코르는, 나단 던스트의 여백을 채우지 않는다.

 

 

 

18.

나단 던스트는 테오 던스트의 시신을 화장한 이후로도 맡겨진 일들을 충실하게 해냈다. 나단은 균일하게 짜여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건, 독하기도 하지.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를 해? 지 동생도 죽인 놈인데. 태워버렸잖아, 활활. 누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들려올 때면 나단은 더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무감하다기보다는 듣지 못했다. 나단은 텅 비어버린 것처럼 그냥, 거기 서 있었다. 테오 던스트의 곁이었어야 했던 자리에.

 

걸을 수 있겠어?

 

나단의 방에서는, 던스트 형제의 방에서는 마른 햇살 냄새가 났다. 이안은 나단 홀로 남겨진 방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묻는다. 나단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데서 한 번 물끄러미, 이안을 올려다봤을 뿐 일어서지는 않았다.

 

나는 걸어야 하나요.

결국은 걸어야 하겠지.

지금도 잘 걷고 있죠.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면 나는 곧 쓸모가 없어지겠군요.

내가 그렇게 두지 않겠지.

 

나단은 조금 웃었다.

 

이안, 나를 연민하나요?

그럴 리가.

나는 가끔 당신을 연민해요.

농담이야?

당신이 나쁜 사람인 걸 알아요. 나는 당신이 미워요.

 

당신은 나를 헤집어내고, 내게 정당함을 강제하죠. 당신이 원하는 불을 위해서. 그리고, 사실은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게 불을 바라죠. 당신이 우리를 정의한 말 그대로, 나도 미치광이니까. 이안,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설사 대대륙의 영광을 되찾는다고 해도, 내가 눈을 돌리고자 했던 모든 참혹들이 극단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 평화로운 세상에서, 한 가지만은 지금과 동일한 것을 욕망할 거라고. 부수고 파괴하고, 그뿐이며 다른 어떤 목적도 없더라도 내가 가지고 싶어 할 것. 내게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더라도 내가 최후에도 소망할 것.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불을. 당신 이야기대로예요. 나는, 지금도 불을 갈망해요. 테오를 잃은 지금조차도 변함없이. 내가, 내가 자책할 수밖에 없는 욕망을, 당신은 뻔히 들여다보고 있죠. 당신은 나를 아니까. 당신이 내게 씌웠던 그늘들보다도, 나는 사실은, 당신이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당신이 싫어요. 나단은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굽어진 등으로, 몸을 숙이고 있으므로 안쪽에 갇힌 채 들려온 말.

나단은 뜻밖으로 가지런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이안은 죽지 말아요.

 

당신만이, 내게 마지막으로 남겨졌어요.

 

 

 

19.

따라 와. 네 손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테니까.

 

이안 데코르는 영주의 서재에서, 영주가 던스트 가에서 찾아낸 책들을 나단 던스트에게 보여주었다. 테오는 출처조차 묻지 않았지만 나단에게는 설명이 필요했다. 얼마 전에 영주님께서 사들이신 거야. 아주 귀한 책들이라던데. 내 마법에도 도움이 될 거라시던가? 그거야 나는 모르겠지만. 나단은 정확히 나단을 겨누고 있는 의도에 대해서 묻는다. 이걸 어떻게. 이안은 낡은 채 살아 있는 책들을 본다. 테오가 그러했듯이, 나단에게 가족으로 맺혀 있을 흔적들. 무덤에서 파낸 것처럼 더는 따듯하지 않을. 이안은 웃는다.

 

너도, 불태울 만한 게 필요할 것 같아서.

 

 

 

20.

나는 영지에 가장 뜨거운 온도를 씌워보고 싶어.

 

나단 던스트에게 외어졌던 이안 데코르의 소망은,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안은 데코르 일가의 잘려 있는 머리들을 본다. 이안 데코르의 불길로 일어난 반란은, 사실은 데코르 가에서부터 오래도록 계획되어왔다. 이안 본인이 휘말렸다는 뜻은 아니다. 이안은 나단에게 순전한 진심을 고했었으니. 그 멍청이들은, 일이 정말 성사될 거라고 믿었나? 레벤 리드의 기사는 헛웃음을 쳤다. 이것 봐, 데코르. 이안은 포박되어 있는 처지로 고개를 들었다. 기사는 별 감정 없이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볼모로 있다고 해서, 데코르의 모든 움직임이 허용되었을 리는 없어. 그렇지? 데코르에서도 그런 셈은 대강 해두었을 거야. 이미 발각이 되었으리라고. 그럼에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겠지. 기사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당신은 이해할 수 있나? 데코르의 미치광이. 이안은 웃어만 보였다. 글쎄, 죽으려던 거겠지. 기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이안의 머리채를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프네. 기사는 농담에 반응하지 않고 이안을 어느 곳으로 인도해갔다.

 

마법사.

그렇지?

네 머리는 왜 바로 잘리지 않았을 것 같아?

내 머리는 높게 걸리는 편이 좋겠지.

네가 마법사라서?

나는 늘 내 주인을 위해서 치장되어야 하니까.

맞는 말이야.

 

이안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천천히 짚어낸다. 애매하게 그을린 자국, 가장 뜨거운 온도로 뒤덮이지 못한 영주의 방으로는, 그대로 무딘 레벤 리드가 앉아 있다. 이안 데코르. 레벤 리드가 말한다.

 

네게 무엇이 있었지?

 

이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게 무엇이 있었을 것 같습니까? 레벤 리드는 말을 고쳤다. 나의 데코르. 네 진실에 대한 치하다. 이제,

 

네게는, 무엇이 남았지?

 

 

21.

이안 데코르. 데코르, 로 남은 마법사는, 데코르의 미치광이는 검게 탄 머리로 내걸렸다. 원래, 검은 머리랬나, 붉은 눈이랬나. 무서운 불길을 일으켰었지. 초라했던 불길은 보상처럼 치장된다. 두려움의 언어로. 다행이지. 영주님께서 잘 다스려주셨으니.

그래서, 볼품없는 마법사는.

 

 

 

22.

나는 너를 죽이지 않아. 이안은 의아하게 레벤을 봤다. 역도에게 너그러운 분이셨던가요? 혹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까? 레벤은 웃는다. 말하지 않았나. 네 진실에 대한 치하라고. 레벤은 기사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기사는 이안의 곁에서 멀찍이 떨어진 것만이 느껴지다가, 이안의 눈을 천으로 가렸다. 제 눈이라도 멀게 하시려고요. 레벤은 좀처럼 웃는 일이 드물었지만, 포상처럼 낮은 웃음소리를 내어주었다. 시시한 말을 하는군. 네 독은 결국 네 눈을 앗아가지 않겠나. 내가 광대 노릇을 하지 않더라도. 그건, 너무 늦은 시기의 일이 될지도 모르죠. 그래, 네가 살고자 한다면. 데코르. 이안은 기사가 잡아끄는 대로 몸을 일으켰다. 네게 무엇이 남겨질 수 있을까, 데코르. 레벤은 고상한 취미로 말했다. 너는 여태 누린 것과 다르지 않게 영화를 누릴 거야. 너는 이제, 바다가 보이는 영지에서 살게 되겠지. 여전히 높고 고매한 마법사의 위치에서. 네 이름은 곧 잊힐 수 있고, 네 검게 탄 머리를 내세운다면 망각은 조금 더 빨라질 수 있을 거야. 나의 데코르, 너를 위해할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죽지 않을 수 있겠나?

 

이안 데코르는 닫힌 시야로 웃는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네게서 불을 앗아갈 거야. 이안은 조금 웃었다. 데코르의 독을 알지 못합니까? 물론, 그것도 알고 있지. 네가 네 독에도 불구하고 불을 사용했다는 것도. 이안은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내게서 불을 앗아가면, 나는 마법사가 아니게 됩니까? 레벤은 어쩌면, 순진하기까지 한 얼굴로 웃었을 것이다. 더는 불을 소망할 수 없을 뿐이겠지. 나의 물 마법사. 레벤의 말이 끝났을 쯤에는, 입가로 천이 대어졌다. 잠재우는 약. 내성이 있었으니 곧바로 잠들지는 못해서, 이안은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내 주인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군요. 작별은 간편하게 지나갔다. 나는 리안의 지배자니까. 내 마법사는 내 것이었고. 낮은 웃음소리.

그리고, 어둠.

 

 

 

23.

눈은 더디게 뜨여졌다. 마나를 회복하기에는 계속 끌려 다녀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래도, 몸 상태는 우스울 만큼 좋았다. 마차에서는 그대로 위정자의 자리가 내려져 있었다. 이안은 천 너머로 비춰진 세상을 헤아린다. 몸으로 감각되는 시간은 아직 이른 지점에 위치해 있었지만 날이 흐렸다. 볕이 보이지 않아서 가만 앉아 있자면 더듬더듬, 눈꺼풀 안쪽으로 불을 찾아 헤맸다. 감긴 눈으로는 더 이상 불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면 이안 데코르가, 이안이 서 있는 장소는 온전히 검게 칠해졌다. 천 너머로 무엇도 보이지 않도록. 이안은 생각한다. 그러니까, 불이 도려내진 곳으로는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아서, 이안은 그것으로 도리어 이제 더는 불이 머무르지 않는다고 실감할 수 있었다. 이안이 불을 실감하던 방식은 절망이었으니까. 이안은 더 늘어나지 않게 된, 몸 안의 그을음을 떠올리다가, 천이 젖어들고 있다는 걸 이해했다.

이안은 무심코 천을 풀어내려고, 손을 올렸다가 몸이 완전히 자유로 풀려나 있다는 걸 알았다. 이안은 헤매지 않고 천을 풀었다. 잠이 스몄던 입으로는 아직 꿈에 취한 숨이 나왔다. 이안은 흐린 눈으로, 번진 눈으로 뺨에 흘러내리는 미지근한 감촉을 느꼈다. 눈물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이안은 흐르도록 엉성하게 앉아 있었다. 나으리, 아, 어, 무슨 일이십니까? 마차의 문이 열렸을 때, 마부는 깜짝 놀라서 이안을 봤다. 마부는 이안의 해명 이전에 알맞은 이유를 들었다. 눈을 다치셨다고 하더니, 아직 불편하십니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눈은 아주 잘 보여. 눈을 깜빡이면, 속눈썹으로 눈물이 방울져서 시야가 우둘투둘해졌다. 이안은 마차 밖으로 나서며 달라진 공기를 가늠한다. 바다 냄새. 해변에서는 또, 멀리 덜어져 있었는데도. 이안은 천천히 마부의 안내를 받아 걷는다. 정말 정해진 계획이 있었다는 듯이.

아이고, 이게 뭔가. 수선으로 떨어지는 자국. 이안은 마부의 앞에 누워 있는 물고기를 본다. 날은 조금 흐렸고, 비가 내렸던 흔적은 공기에 짙게 배 있었다. 비가 얼마나 내렸지? 어, 많이는 퍼붓지 않았습죠. 이안은 지상에 이루어졌을지 모르는 바다를 걷는다. 비가 와서, 세상이 바다인 줄 알았을까. 물고기의 흰 눈에서, 이안은 테오를 떠올린다. 이안, 이안의 물은 바다를 본 딴 것 같아요. 내가 네게서 앗아간 것. 이안은 천천히, 바다에서의 호흡을 시작한다.

 

이안은 죽지 말아요,

 

내게는, 네가 남아 있었지. 나단.

 

 

 

24.

실패는 비참으로 박제되었다. 그러니까, 삶은 지속되었다. 찌꺼기나 잔해 따위로. 그러나 네게서 비롯된 이유만은 아니었음을. 실패자의 삶은 실패자의 삶대로.

그 실패만은, 이안 본인에게서 나왔으니.

생각한다. 내 실패는 네게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으로. 너를 다시 만나지는 않아, 나단.

 

 

 

25.

그 마법사는, 여느 마법사들이 그러하듯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불쑥 도드라졌어도 크게 의아한 일이 되지는 못했는데, 마법사들은 본래 감추어지는 법이었으므로 특별히 더 이질적인 일이 되지는 못했다. 마법사는, 이전에 리안에서 처형되었다던 마법사와 이름이 같았다. 같았지만, 리안의 마법사는 데코르로서 더 선명했으므로 의문은 간단히 사그라졌다. 더구나 리안의 데코르는 불로 이름을 떨쳤던 데 반해 이름이 같은 그 마법사는, 정반대로 불을 사용하지 못했다. 아예 사용하지 못해? 마법사는 조금 웃었다. 하여간, 마법사는 이후로 물을 만들어냈다. 정결한 물과 차가운 얼음 따위의 눈을 사로잡는 것들. 마법사는 바람도 전격도 다룰 줄 알았지만 역시 물에 미치지는 못했다. 에단의 영주는 마법사를 마음에 들어 했고 그것으로 모든 일은 수월하게 치러졌다. 마법사는 조용히, 그늘에 머무른다. 옅게 삼켜진 채.

 

 

 

26.

너는 검은 머리.

금색 눈.

가장 아름다운 물.

둘러싸고 있는 희미한 물안개.

 

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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