𝐓𝐡𝐞 𝐉𝐮𝐝𝐠𝐦𝐞𝐧𝐭 : 가시왕좌

[예레미야] 약함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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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차 by 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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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평등하니까요~”

예레미야가 ‘마키나’의 문법을 듣는다. 엑스, 의 뿌리이자 엑스 자신이 장차 군집으로서 배제하지 않겠다던 이름 끝자락의 영락을. 강하며 대범하고 무위로써 앞장선 지반이라 선뜻 내는 말인가? 흔한 말이 ‘마키나’에 걸려 이채를 띤다. 저것은 엑스가 그 자신에게, 그리고 그들 일족에게 적용하는 세계의 규칙이었다. 그래, 네 세계가 그리 공고하구나. 한 가지 가장 굳건한 것으로. 그러나,

죽음이 실로 평등한가?

스스로에게 나약함을 둔 적 없다고 이른 자는 약함의 정의를 죽음으로 돌려받았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카일루스, 그는 이미 한 번 약함을 건너 온 자다. 기적으로 증거함으로써. 그러나, 그러나.

예레미야는 어떤 가림막도 경계도 없이 투과되듯 들어닥치는 차가운 시선, 냉정, ‘마키나’가 아는 종막을 그 순간 느낀다. 네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너 자신뿐이다. 그러나 죄다 아는 자는 기어이 보다 어리숙한 자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까닭에……

아래에 놓인 자가 생각한다.

죽음이 과연 평등하게 닥쳐오는 것이던가?

“나는 죽음마저 평등하지 않단다.”

먼저, 거스르는 말이 앞서야겠다.

***

카일루스家 내외는 서로 지극히 사랑하여 증거를 남기고자 했다. 어리석은 조부 슬하 똑같이 아둔한 아들이 대뜸 베르하임의 고매한 가문 여식을 데리고 들어온 날 세간에서는 꼴사납게 헝클어진 꼴 하고도 뜻밖의 시시한 연정이 있어 체면 차릴 수 있겠노라 빈정대는 소리가 잦았다. 똑 닮은 두 사람은 온통 사이 좋았으나 한 가지 차이가 있었는데, 카일루스의 남자는 신을 한결같이 읊조리며 간구하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이란, 남자에게 여자의 외연과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몰이해는 문제로 치닫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의 모든 것을 사랑했고, 애초 낱낱이 밝혀 헤아리려 하지 않은 신앙이라고는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자, 그리하여 어린 카일루스의 어머니, 아이를 넷 배태했던 여자, 일레르 클레멘스는 행복할 수 있을 터였다. 여자는 카일루스의 풍파를 알고도 가진 부귀 다 갖고 뛰어든 클레멘스의 장자, 베르하임에 오래도록 맺힌 고명한 핏줄의 총체였으니 오직 사랑하려는 연인이 있는 한 치른 값 모두 회수하고도 남았다. 애초 헤아릴 속셈으로 삶을 투신하지 않았으나, 뭇 사람들 이해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풀어 말하거든 여자는 행복했다. 그러나 셋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여자의 행복은 단번에 고꾸라졌다. 먼저, 둘째 아이가 죽었다. 첫째 아이는 바로 아래 동생이 죽었는데도 어려서 통곡을 잘 가늠하지 못했다. 또는, 모르는 척 아버지 뒤편으로 숨었다. 무엇이 생존에 가까운지, 덜 위험한지 알 정도로는 영악한 나이였다.

하지만 셋째 아이, 서너 살 된 아이는 도망칠 데가 없었다. 일레르 클레멘스, 베르하임의 모든 번영에 한 번씩 발 담갔던 이름을 끄트머리에 단 자는 본디 신실했던 까닭에 예레미야는 태어난 직후 첫 기억이 시작되었을 무렵부터 쭉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었지만 정말 되새겨 알게 된 건 누이가 죽은 이후부터였다. 어머니의 기도는 처음에는 예법대로 뚝뚝 정확하게 떨어지다가 누이의 죽음 이후로 엉망진창 휘청였다. 바예프이시여, 바예프이시여, 제가 감히 아룁니다. 저의 고난과 고통이 머무는 동안 어찌 저를 돌보지 않으셨습니까. 찾는 자의 손길 왜 다 모르는 척 두셨습니까. 저는 진정으로 내내 신실했습니다. 왜 침묵하시나이까.

그러나 다시, 일레르 클레멘스는 신실한 자다. 삶이며 세계에서 신을 배제한 적 없는 자는 자연히 원망의 대상을 찾을 뿐 신에게 읍소하여 더 나은 일을 바라는 짓 멈추지 못했다. 그러므로 또, 우스갯소리처럼 7살 된 아들이 병마에 처하자 어머니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왔다. 마침내 침묵이 깨지고 또 다른 율례가 정립됐다. 병상에서 앓는 아들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예레미야, 예레미야. 연이어 부르는 목소리는 꼭 신을 부를 때와 같으면서도 다음은 빠짐없이 날이 서 있었다. 너 때문에 내 딸이 죽은 건 아닌가? 네가 죽어 나를 다시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 아닌가? 아니라면 너는 왜 하필 같은 방식으로 죽음으로 향하나?

네가 곧 저주로다. 네가 나를 고통에 처하게끔 왔으나 고통받지 않으리다. 아이는 또 낳으리라. 저주 아닌 아이를. 광신자의 말인지 아이 잃은 어머니의 말인지 도통 분간할 수 없는 말소리가 쇄도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저주인지는 똑똑히 알지 못했으나 한 가지는 안다. 저것이 저주라고. 하지만, 저주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어머니의 소망대로, 저주대로, 차근히 죽어가고 있었다, 당시에.

7세, 예레미야. 앓는 아이는 말할 힘이 없다. 한차례 호된 열병이었으나 치료하면 그뿐. 그러나 어머니는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마침내 신께서 지난날의 고통을 징벌할 대상을 데려오셨다고 생각했다. 저택에서는 종종 웅성거림이 솟구쳤으나 병상에 있던 아이의 착각일지 모른다. 그야 그 무렵에는 아득히 열이 오르고 아프기를 반복해서 귀 밝은 예레미야도 그때는 온갖 소리를 다 듣지는 못했다. 의사며 치료사가 기어이 들여보내진 건,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여 어머니의 보전만을 좇던 아버지의 결과도, 일레르 클레멘스의 거룩하며 무거운 이름까지 떠안고자 각오한 카일루스 내부자들의 노력도 아니었다.

오빠, 아프지 마. 죽지 마……

예레미야, 어린 애가 생각한다. 맞잡아 온 손이 한참 부드럽고 뜨겁다. 옮는 병은 아니었나?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방, 어머니가 미처 문을 못 박아 막지 못한 방에 어린아이가 들어와 운다. 한참 운다. 거머잡거든 꼭 숨이 달아나지 않을 것처럼 절박하다. 넌 아주 어리고 작은데, 약한데, 무른데,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를 달래러 오나. 나를 죽음에서 도로 데랴오려고 드나. 예레미야는 얼핏 어머니가 자주 이르던 기도를 떠올린다. 내 손을 잡아주소서. 나를 잡아붙드시거든 순종으로 안기리다. 사랑하는 남자, 에게도 아니고 그저 피력하던 소리. 예레미야가 생각한다. 어머니, 잡아줄 손은…… 잡아주는 손은.

아니, 안 돼. 내가 저주이거나 죽어가고 있거나, 옮을 병이라면 네가 오면 안 되는데.

다시 아이가 우는 목소리. 안 돼애, 왜애, 엄마! 아빠, 오빠가요, 계속 아파요. 계속 아파요. 이어서, 아득한 김에 물을 목 너머로 흘려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사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것인가? 아무튼 이후로 보살피는 손길은 작은, 어린 애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병에서 벗어났다. 죽도록 내버려둔 처지에서 살아났으니 과연 기적이었으되 그 기적의 연원이 까마득히 멀지는 않았다. 지척에 있었다, 맞잡아주는 손이. 하지만 예레미야는 자신의 증거함 또한 덧씌우기로 한다. 카일루스의 아이를 신께서 살피셨나니. 그 어린 애의 어머니가 지상의 유일한 신자인 양 독실한 바, 마땅히 기적이로다. 신께서 행하셨다.

예레미야는 수긍한다. 내가 기적의 증거함이로다. 그리 살겠다.

에제, 나는 네 앞에 선 기적이야. 그러니 마땅히 신께서 너 역시 살피시리라. 예레미야가 사랑하는 동생의 이름을 왼다. 홀로 손 맞잡아주던 어린 애, 태어나 살며 처음 수긍한 애정. 혼자서 오롯이 실재한, 애정…… 너를 위해서라면 어떤 축복과 찬사도 다 끌어다 네게 가져오리라. 너를 사랑하니까.

에제, 에제. 나의 사랑하는 가족.

***

네가 있어서 되는 일이 없어.

그러나 또 죽음이 닥쳐온 날. 가장 어린 애의 보드라운 손이 엉망으로 너저분해진 채 저택으로, 시신으로 돌아왔을 때. 예레미야는 기적 끝편으로 줄곧 냉담하게 우습게 흘려듣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비로소 자신 안에서 또 한 번 뾰족한 첨단으로 도사려 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천에 덮인 저 손, 피투성이 손. 저택 밖으로 나갔던 아이는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기적을 증거하지 못했다. 오직 누렸을 뿐. 자식을 죽이는 것마저 성공하지 못한 이의 기적은 가볍다. 그러나 내 기적은 무거워야 했을 터다. 그런데, 왜, 네가 죽어 누워 있는가. 에제 카일루스, 어린 애. 예레미야 카일루스가 아는 유일한 사랑. 그 애가 죽어 누워 있다.

네가 있어서 되는 일이 없어. 예레미야는 무엇도 증명하지 못한 어머니의 말 중 아주 오랜만에 교리로 알고 받아들일 말을 기억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저주였구나, 진정으로. 오직 나만이 살게 하는 저주.

***

왜 신께서는 너에게만 공평하지 못하시니?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죽음은 평등한가? 자신에게도? 그것은 알 수 없다. 알지 못한다. 필시 평등할진대 입으로 부정하면서 거리낌이 없다. 예레미야 자신의 저주가 더 강한 까닭이다. 하지만 수없이 죽음에 부딪혀 죽고, 또 다시 죽어 하나로 이어지는 자를 앞둔 처지로는 견고한 저주에다 새로운 심상쯤 못 더할까. 그래, 평등한 것.

마키나, 내가 마키나로만 부르지 않을 자. 너 또한 증인이다. 엑스. 네가 모조리 빨아들여 성립된 너, 이상의 너는 몸 하나에 갇힌 증거 이외에 숱한 증언으로 비명을 그러모아 두려워할 테지. 네 약함을.

그렇다면 네게 걸자. 네 선고한 바에 의탁하여, 나 역시 빌자. 내 몫의 저주는 고작 알량한, 나의 것. 비명을 끌어안고 응집시킨 네 눈길 아래서 기껍게 받아들이자.

“그러나, 엑스. 마키나. 이제 네 말대로 하마.”

군집으로 뭉쳐 숨거나 하나로 환원되려는 이름을 끄집어내 앞에 세우고 이른다.

“내게 진정으로 약함이 있기를 바란다. 죽음은 빠짐없이 평등한 것이어야 하니. 내 약함을 공포로 삼아 피하겠다.”

네가 가르쳐주었군. 예레미야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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