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스

[이안] 시작

0.5기

귤차 by 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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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7.24 작성(추정)

이안 데코르의 최초의 좌절은 불이었다.

이안 데코르는 불을 사랑했다. 이안은 불을 다루는 데에 극성으로 굴었다. 이안은 불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네가 천재가 아니라면 누가 천재일 수 있지? 아버지는 차남이 보이는 성취에 들떠서 넘치는 말을 붙이곤 했다. 아버지의 황홀은 곧 사람들에게 착각으로 씌워졌고, 이안은 입을 꾹 다문 채 환상을 연장시켜갔다. 기만은 간단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마법사 일반의 평균을 훨씬 앞지르는 결과를 내보이는 걸 두고 대다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의 말은 단순하게 긍정되었다. 도련님은 천재시군요. 영주로부터 이안에 대한 제안이 들어온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데코르의 차남은 데코르의 가주가 영주와 친밀해지기에 알맞은 수단으로 놓였다. 너는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 아버지는 이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이안은 지나칠 정도로 고르게 정돈된 길을 두고 시시하게 웃었다.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버지. 이안은 아버지의 오만이 그러하듯 거짓을 왼다. 그의 아들 이안 데코르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

이안은 처음 불을 피워냈던 순간 당연한 것처럼 알아차렸다.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를. 교사가 궁극으로 이르던 메테오의 환영은 막상 손에 닿을 듯, 손안에 불꽃이 일었던 시작점에서 뿌옇게 깨트려졌다. 이안은 잔해를 헤집으며 재차 확인해보는 대신 담담히 예감에 순종했다. 그토록 압도적이었던 확신은 이안을 뒤흔들어 놓지는 못했다. 이안은 그때까지, 아버지의 말을 받들어 마법을 배워왔고 이내 두각을 드러냈다. 애매하게 위치해 있던 차남은 대번에 관심을 모았다.

아버지의 끼워 맞춘 데 지나지 않았던 배치는 이안에게서 훌륭하게 맞아떨어졌고, 아버지는 뛰어난 마법사를 자식으로 둘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러니까, 이안의 침묵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이안은 한계에 대한 고백 대신 아버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결과적으로 이안의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은 부자 서로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 이안 데코르는 아직은, 또는 앞으로도 아버지의 기대 속 마법사로 행세할 수 있다.

약관도 되지 않아 이루어낸 파이어볼의 성과는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옛 왕국 시절에는 파이어볼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들은 따로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었다더군. 왕족들 수발이나 들어야 하는 처지였더라면 너도 감추어야 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안, 네가 무얼 숨겨야 한다는 말이지? 네 힘은 내 권력이 될 거다. 제 주인이 아니라 아버지의? 라고, 이안은 되묻지 않는다. 이안은 본인을 구속하는 어떤 장치도 없음을 이해한다. 영주는 본인의 수하를 크게 신뢰하지는 않았는데, 도리어 그 사실이 양자의 관계를 견고하게 했다.

충성이라든지, 미덕으로 일러질 만한 어떤 것도 그들을 연결 짓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그러므로 공조는 온전히 유지되었다. 이안 데코르가 뛰어난, 필요한 마법사라는 굳은 전제 하에서. 이안은 부서지지 않을 명제를, 본인만이 짚어낼 수 있는 공백으로 홀로 부정해둔다. 이안이 해낼 모든 기록들은 결국 이안이 바랐던 것에서는 슬그머니 유리되어 있다. 영영 붙잡을 수 없도록. 이안은 가장 뜨거운 온도를 만들어내고 싶었지만, 이안이 움켜잡을 수 있는 결과들은 조금씩 앞당겨져 놓였을 뿐으로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절망만은 아니었음을.

이안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알아차린 순간에 짙게 뱄던 절망을 뜻밖으로 아꼈다. 절망은 단지 한계를 새삼 인지하게 되는 순간에만 떠올려졌고, 절망은 종종 마법에 대한 절박함으로 실감되었다. 마법만이, 결코 완전히 거머쥘 수 없는 환영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철저한 매혹. 이안은 자신을, 환희로 바라보는 시선들을 헤아린다. 마법사가 지니는 거대한 힘을 향한 열망, 질투, 분노. 이안은 어느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 끝에 놓인 것은 이안 데코르가 소망한 것의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진작 말라비틀어진 앙상한 흔적. 이안은 찌꺼기를 나란히 마주 바라보는 대신 천천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어디로든.

이안은 들여다볼 수 있는 광경을 원한다. 이안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물이거나 불이거나, 또는 어떤 무엇이든지 괜찮았다. 한때 영지에서는 낮은 웅성거림으로 방화에 대한 두려움이 일었는데, 그 모두가 이안이 소망한 것들의 모조였다. 진짜가 될 수는 없는. 이안은 민가에 불을 놓는 조용한 장난에서 예비해둔 파국을 겹쳐보고는 했다. 사소한 데 그치지 않고 전체로 번질 불, 이안의 손끝에서, 무너지게 될 성. 이안 데코르는 미리부터 결말을 안다. 거기까지는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내 불은 너무 약하니까. 이안은 아쉽게 생각하면서도 기껍게 마련해둔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타들어가는 모든 모습들에서 옅은 기쁨을 느끼며.

그래서, 던스트는 거절하던가?

 

영주의 수하는 영주가 고른 표현에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대답은 제때 나오지 않았고, 영주는 그새 화제를 바꾸었다. 던스트는 이번에도 잘해주었더군. 보상은 부족하지 않게 내어주길 바라네. 그들 부부는 옹색한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이안은 영주에게서 종종 불려지는, 던스트의 이름에 대해서 생각한다. 던스트 부부는 양쪽 모두 강력한 마법사로, 특정한 소속을 두지는 않았다. 듣자면, 그들의 내력에는 이렌 던스트의 도피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렌은 해안가 지역의 영주에게 마법사로서 항거한 일이 있었다.

남편 케니스와 함께 지금의 지역으로 몸을 숨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과 문제가 있었던 영주의 실각으로 일은 대강 수습이 되었지만, 지배자들 사이에서 던스트의 이름은 어쨌든 부자연스럽게 떠 있었다. 폭정에 맞선 일개 마법사라는 문장은 어느 정도는 우스웠고, 어느 정도는 긁어대듯이 거슬렸다. 양각으로 새긴 듯 도드라져 있던 이름은, 이 지역 영주의 비호 하에 엉성하게나마 희미해져질 수 있었다. 그들 부부가 영지에 들어온 것도 꼬박 십 수 년은 지난 일로, 이제는 정말 잊힌 이름이 되었지만, 그들의 지배자만큼은 쭉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습관처럼 예속을 권하는 말을 거절 당하기도 했지만. 이안 데코르는 처음, 던스트 부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연구나 여러 지시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들이 예속을 피하고 굳이 몸을 숨기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영주의 바람으로 던스트가 벌여온 일들은 이미 한도를 넘어서 있었다. 그들이 은밀히 행동하는 것으로 취하려는 윤리는 알량할 뿐이어서, 이안은 그들의 위선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줍지 않은 소꿉놀이. 그조차 본질적으로는 영주에게 완전히 복종하지는 않는 행동이었으므로 그들이 보장 받고자 하는 안위는 언제든 사그라질 수 있었다. 어차피 반골이라 증명된 자들을 그냥 두지는 않을 텐데, 하다가.

이안 데코르는 나단 던스트를 확인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확인이었다.

이안은 던스트 부부에게 자식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 차라리 환멸을 느끼곤 했다. 이안의 규범은 일반적인 데서 한참은 비켜서 있었고, 환멸은 책임의 문제보다는 부부의 욕구에 맞춰졌다. 이안은 그들의 결정을 소유에 의한 선택으로 이해했다. 불안한 기반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까지 생각이 미쳤던 것은 아니다. 감상은 짤막하게 그쳤다. 단 던스트 부부의 자식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던스트 부부가 무얼 두려워하는지를 알았다. 놀랄 만한 재능을 갖고 있는 던스트 부부의 아들. 종의 자식은 종의 삶 이외로는 묶일 수 없다. 더더욱 탐낼 만한다면. 이안은 도대체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불안에 대해서 생각한다. 던스트 부부의 불안, 또는 마침내는 실재하는 불안이 될 것. 이안은 싱겁게 관심을 거두려고, 했다가.

나단 던스트의 불을 발견한다. 우연히.

이안은, 얼핏 눈에 들어온 아이가 누구일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렌 던스트와 꼭 닮은 색들. 이안은 그들의 자식에게서 그들의 흔적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돌리려다, 어쩔 수도 없이 붙박인 듯 서고 말았다. 아이의 작은 손에서는 잠깐, 불이 피워내졌다. 이안은 그 초라한 불길에 시선을 빼앗긴 채 유령처럼 서 있었다. 아이는, 나단은 얼마간 영지 외곽에서 수그러진 듯이 살금살금 돌아다니며 종종 불을 손으로 잡아내곤 했다. 이안은 그 순간 치민 감정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열등감이라든지, 질투라든지 하는 단선적인 표현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안은 곧 돌아섰지만, 그 안쪽으로는 환희가 꿈틀거렸다. 다시.

이안 데코르가, 가질 수 없는 것. 이안 데코르는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을 찾아냈다.

 

“오늘 일은 어땠지?”

 

이렌 던스트는 눈을 크게 떴다. 던스트 부부는 양쪽 모두 둔한 데가 있었는데, 마법사들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기척을 내고도 기척 없이 다닌다는 소리만 종종 늘어놓으니.

 

“……오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기척도 없이 왔다는 대답이었다.

 

“그게 내 물음에 대한 답인가?”

“……마음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이렌은 해결이라는 표현을 썼다. 근처 영지의 소작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화에. 합당치 않은 표현이었으니 이안은 어떻게 수선할 수 있을지를 가늠했다.

 

“나단은 잘 지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이렌은 눈을 크게 뜬 채 숨이라도 멈출 듯이 바라보았으니까.

 

“올해로 열 살이던가? 벌써 불을 다루고 있을 줄이야.”

“어떻게…….”

“우연히. 너무 허술하게 두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여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게 신기한데.”

“…….”

“당신 아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미 많은 말이 돌고 있지만.”

 

이안은 어르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나는 그저 조금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든 거고.”

“왜, 그런…….”

“나는 당신들이 그런 걸 만들어내서 감사하고 있어.”

 

이안은 더 없는 호의로 말한다. 던스트 부부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결과물. 이안은 이렌이 떠올려내는 섬뜩한 가능성들을 짚어낸다. 대개는 실현될 것들이었지만, 이렌은 한 가지만은 간과했다. 이안 데코르는 나단 던스트가 침해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시점까지는. 이안 데코르는 가질 수 없는 것, 을 움켜쥐는 타인의 광경을 기다린다. 그것만은 이안에게 내어진 것이었으므로, 천진한 기쁨으로. 사실은 동의를 구하고 싶었겠지. 당신들도, 그런 걸 만들어내서 기쁘지 않아? 당신들의 소유물이 가진 가능성에 기꺼이 환희했을 텐데, 라고. 이안은 억지였거나 예리할 수도 있었을 말을 입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들이 서로에게 사랑하는 가족일 거라는 점 또한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었으므로.

 

“그건 그렇고.”

 

이안은 배려처럼 말을 돌렸다. 이렌은 얼른 정신을 차린 얼굴로 이안을 봤다.

 

“당신은 이전의 예언을 믿어?”

 

맥락 없이 던져진 말이었지만, 이렌은 알맞게 답을 잡아냈다. 그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잊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믿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

 

이안은 창틀로 기대듯 몸을 숙였다. 창틀에 얹은 팔 끝으로, 손가락 끝으로는 톡톡, 창틀이 두드려졌고, 이렌은 경계하는 눈길을 숨기지 못하고 이안을 봤다.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을 이어간다. 서로가 알고 있는, 이렌이 탄생시킨 불안의 결말은 바뀌지 않는다. 기다림만이 조금 길겠지. 이안은 웃어보였다.

 

“그러면 나도 믿어볼까, 해서.”

 

그것으로 믿음은, 불안 앞의 유예로써만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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