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말소]

ハレハレヤ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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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뜨지 않는 거리를 소녀가 걷는다. 발걸음은 잔뜩 비틀거렸고 걷는 길마다 붉은 발자국이 남았다. 천 년 만에, 아니면 만 년 만에 내린 눈은 거리에 지독히도 쏟아졌다. 하여, 발자취는 남는대로 곧장 사라졌다. 거리에 두텁게 쌓인 눈이 서둘러 걷는 소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정면으로 불어오는 칼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에고 긴 머리칼을 흩날려 눈을 가렸다. 앞은 커녕 옆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방향도 모른 채 그저 도망쳤다. 무엇에서 도망쳤을까. 소녀는 그저 멀거니 보이는 붉은 등 하나를 이정표 삼아 걸었다. 저기까지만 가면 왜인지 괜찮아질 것 같았다. 저 등이 걸린 곳에 몸을 피할 장소가 있길 기대라도 했을까? 느닷없는 겨울은 그런 희망을 밟아 없애려는 것처럼 무겁게 쌓여갔다. 어깨에, 머리에 잔뜩 쌓인 눈발은 마침내 소녀를 지워 없애려는 듯 시리게 녹아들었다. 소녀는 견딜 수 없는 추위에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몸이 단단히 얼어붙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소녀는 그리 바랐던 붉은 등의 바로 한 발자국 앞에 결국 쓰러졌다. 눈밭 위에 쓰러졌지만 이미 몸은 차가울 대로 차가워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멀거니 느껴졌다. 이 추위도, 고통도, 아픔도, 소망도, 희망도, 절망도⋯⋯ 모든 게 다 흐릿해서 소녀는 제게 말 거는 이가 있음을 몰랐다. 작은 등불을 들고 있던 남자는 추악한 소녀의 곁으로 다가와 불을 기울였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그 등불만이 유일한 온기여서. 소녀는 문득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간신히 그 불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굳어버린 손목은 멋대로 비틀리다 이내 길게 늘어진 남자의 옷 소매를 스치고 툭 떨어졌다. 남자는 눈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손이 아쉬운 듯 재빨리 잡아챘다. 손은 종이에 감싸인 불보다도 따스해서. 소녀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떴다.

 

   "그대는 어디서 온 것이오."

 

   그 다음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귀에 녹은 눈이라도 들어갔을까. 남자는 소녀의 몸을 부축하며 일으켰다. 그 짧은 사이에 그는 소녀의 발목이 망가졌음을 알아챘다. 상처는 심하지 않았지만 오랜 추위 때문에 전신이 새파랬다. 남자는 멀지 않은 곳에 거처가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했다. 소녀는 대답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 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살아있는 것에게 기대 몸을 끌 듯이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다시 정신이 꺼질 듯 몽롱했지만 그의 손에서 흔들거리는 등불을 보고 걸어갔다. 저 끝에 여명이 있으리라 믿고. 삼 백 번째 여행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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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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