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말소]

MUMMY(下)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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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었다. ■■가 이상에게 화를 낸 것은. 스스로도 화를 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갔다. 가늠하지도 못 할 만큼의 시간 동안 이상은 한 번도 그의 분노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많은 기억이 후에 쌓였지만 그 시간들 속에서도 ■■가 남이 들으면 아플 감정을 폭발시킨 적은 없었다. 죽이려고 들 때 조차 웃으며 괜찮다고 했으니. 천성이 착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아마 단 한 번의 순간이라도 이상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을 만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왜 네가 그런 말을 하는거야?"

   "⋯⋯."

 

   각오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시 돋친 말이 사정없이 마음을 들쑤시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상은 가만히 서서, 그를 마주 보고 그 원망을 온전히 받아냈다. 가급적이면 눈을 마주치고 싶었지만 왜인지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마도 눈물을 참기 힘들어서겠지. 억지로 보지 않아도 어깨의 떨림이나 젖은 목소리, 흐릿한 말들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단순히 이상을 보기조차 싫어져서일 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나가는 게 나을까? 하지만 그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이 얼마나 비겁하고 무책임한 행동이었는지 이제는 알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으니.

   그는 각오하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 지는 몰랐다. 몇날 며칠 준비하고 연습까지 했던 말들은 잊은지 오래였다. 기만과도 같은 걱정을 건넬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사치다. 적어도 곁에 있게 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조차 분에 넘치는 욕심이다. 해야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찾지 못한 그는 그저 ■■가 무엇이라도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 역시 그 한 마디 뒤로 다 갈라진 입술을 잘근 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보살도 아니고 기계는 더더욱 아니었으니 분명 분노나 슬픔 따윌 느낄 것이다. 느끼지 못해서 말 않는 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다시금 참아내고 있는 것이겠지. 참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상처일까 거두었다. 어쩌면 여기서 그에게 참지 못하고 화를 쏟아내는 것이 나중엔 더 큰 아픔으로 남을지도 모르니까.

 

   한참을 침묵했다. 어딘가 핑, 하고. 세상이 빙글 도는 느낌이 들었다. 피를 한 번에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과거엔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튼실하고 건강했지만 버스에 유폐되고 여러 차례 수송 되는 과정에서 많이 쇠약해졌다. ■■는 파리해진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제 어깨 위로 덮인 이상의 잠옷을 끌어 몸을 감쌌다. 썩 부드럽고 좋은 재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따듯했다. 하긴, 늦은 시간이었고 그만한 소동이 있었으니 피로한 것도 당연하겠지. 이상은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그를 붙잡았다. 바닥으로 쓰러질까 걱정되는 마음에 잡은 것이었지만 그조차도 싫은지 그는 저를 붙잡는 이상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그리고 침대에 털썩 앉아 낮게 중얼였다. 여전히 잔뜩 잠기고 젖은 목소리였다.

 

   "혼자 있을래."

 

   나가라는 말로도 충분했을텐데 그새 말을 고른 모양이었다.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웠다. 혼자 두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수긍하고 발길을 돌렸다.

 

  "알겠소."

   "⋯⋯."

 

   문은 소리 내지 않고 닫혔다.


 

   눈을 뜨니 늦은 오후였다. 이상이 떠나자마자 슬그머니 침대에 누웠고 눕자마자 복잡한 마음을 헤아릴 새도 없이 잠들었다. 아주 오래 잤지만 개운하지도 않았고 피로가 가신 것도 아니었다. 잔 것보단 쓰러진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어쩌면 지독한 악몽은 아니었을까 생각했지만 여전히 전신이 아프고 정신이 멍했다. 눈을 뜬 그 자리에 꺼진 백열등이 보였다. 불을 끄고 잤던가. 일어나자마자 이상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젯밤 일이 하나씩 끝에서부터 떠올랐다. 다정한 손길을 닿기가 무섭게 쳐내고 날선 비난을 말하고 쫓아냈던 것까지. 내리 우느라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붕대를 쥔 손은 겉으로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고 건네는 목소리는 억지로 감정을 참아 눌러낸 듯 먹먹했다. 나가달라는 말에 그는 한참을 미련맞게 서 있다 돌아섰었다. 보진 못했지만 나가기 직전까지도 이쪽을 보고 있었을 것 같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 조차 거슬릴까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었다. 어쩌면 그에게 영원한 상처를 하나 남기고 싶은 마음에 그 모든 짓을 벌였던 건 아닐까. 한 순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싶은 마음에 가장 크게 상처가 될 방식을 선택한 것일지 몰랐다. 썩어 닳아버린 것은 몸 뿐은 아닌 듯 했다. ⋯⋯최악이야. 스스로가 끔찍하리만큼 싫어졌다.

 

   이상은 결국 밤을 설쳤다. 설칠만큼 긴 시간이 남지도 않았다. 늦은 새벽까지 있었던 일이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든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해야 했으므로, 이상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버스에 앉아 있었다. 수감자들이 한 명씩 버스로 들어왔고 버스로 들어오는 사람마다 족족 어제의 일을 물어댔다. 그는 적당히 핑계를 지어내 둘러댔다. ■■의 신체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을 다듬어서 전하는 게 피곤했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황금가지 회수를 하는 날은 아니었으나 메피스토텔레스의 연료 보충을 하는 날이었다. 질리도록 사람을 베어왔지만 그날 만큼은 날붙이를 들고 상처를 내서 피를 뒤집어 쓰는 일이 썩 달갑지 않았다. 상처를 하나 새길 때마다 비슷한 형태의 상처가 떠올랐다. 피가 튈 때마다 멈출 줄 모르고 제 손 위로 쏟아졌던 출혈이 생각났다. 옷에 남은 혈흔 조차도 어젯밤을 떠올리게 했다. 몹시 불쾌해진 그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잔인하게 굴었고 필요 이상으로 시체에 흠집을 내어 버스 아가리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 일이 마무리 되자 버스가 연료 보충으로 정차하는 동안 베르길리우스에게 허락을 구해 잠깐의 시간을 얻어냈다.

   그는 정차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옷 가게를 찾아 갔다. 늘상 입었던 원피스가 완전히 벌겋게 물들었으니 다신 입지 못할 것이 뻔했고, 무엇보다 계속 입는다면 싫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 같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긴 원피스를 사긴 했으나 이전과는 모양이 많이 달랐다. 마음에 들어 할지 말지, 받아줄지 말지 조차 몰랐지만 어쨌든 비슷한 옷을 사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약간의 간식을 사서 돌아갔다.

 

   찾아간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일이 끝났을 때가 일몰 쯤이었고 다녀오는 사이 저녁 시간은 훌쩍 지나서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식사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밥을 못 먹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사온 것을 들고 방문 앞에 멈췄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똑똑똑.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자고 있을까? 그는 잠시 귀를 문에 대고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말대로 여전히 자고 있을지도 몰랐고 아니면 그저 대답하기 싫었을 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되었든 마음대로 문을 열고 싶진 않았다. 그는 대답을 조금 기다렸다가 문가에 대고 너무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라 양, 이상이오. 어제 옷이 망가져서,"

 

   그는 말하다 말고 머뭇거렸다. 제가 사 온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파우스트 양이 옷을 한 벌 얻어다 주었소. 간단한 간식을 같이 전해 달라고 하여, 문앞에 두고 갈테니 끼니 거르지 말고 챙겨 드시오."

 

   말이 끝날 때까지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은 그에게 무엇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에, 박스를 문가에 두고 떠났다. 그는 원래 발소리를 내며 걷지 않았지만 일부러 걷는 소리를 냈다.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이윽고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 ■■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문을 열어 문 앞에 있는 박스를 집어 들었다. 박스 윗면에 짧게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그의 글씨로 적혔다. 상자를 열자 원피스가 한 벌 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과일이 포장되어 담겨 있었다. 잘린 오렌지, 자몽, 레몬 조각⋯⋯ 그가 거짓말을 했음을 첫눈에 알았다. 파우스트에게 신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레몬이라면 더더욱. 원피스는 이전에 입었던 것처럼 새하얗고 발목까지 덮을 정도로 길었지만 어딘가 모양이 많이 달랐다. 이것도 일부러일까. 과일은 찍어먹기 쉽게 손질이 된 상태였고 조그만 포크도 같이 들어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받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것이 도리어 서글퍼서, 또 다시 눈물 짓고 말았다.


 

   이상은 그 뒤로 매일 찾아왔다. 아침에 한 번, 그리고 저녁에 한 번. 별일이 없다면 ■■는 이른 오전에 일어났으니 이상이 매번 찾아오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한 번도 대답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가벼운 인사를 닫힌 문 사이로 건네고 식사를 두고 갔다. 식사는 항상 따듯했고 허약해진 몸에 먹기 편한 것들 뿐이었다. 저녁 식사엔 길지 않은 편지 한 통이 함께였다. 다 먹은 것을 바깥에 내두면 저녁에 와 치워두고 가는지 먹은 그릇이 바깥에 쌓이지도 않았다. 처음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바깥에 다시 두었지만 하루 이틀 정도 후엔 성의를 져버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 역시 며칠 사이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마음이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쇠약해진 몸이 걱정 됐으나 며칠 새 거의 다 먹게 된 것이 기뻤다. 그리고 식사를 남기든, 남기지 않든 항상 그가 그날 있었던 일을 간단히 적은 편지는 다음 날엔 없었다. 그것만이 다행이고 또 기꺼워서. 단 한 번의 저녁도 빠짐없이 편지를 남겼다.

 

   그렇게 하기를 하루 이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이상은 평소처럼 간단한 아침 식사를 챙겨 방 앞으로 갔다. 어제 두고 간 저녁식사가 접힌 종이와 함께 놓여 있었다. 설마 어제의 편지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펴진 종이엔 조금 비뚠 글씨로 고맙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상은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오. ⋯편지 잘 받았소."

 

   그날 이후로 저녁엔 이상의 편지가, 아침엔 ■■의 편지가 서로에게 전달됐다. 받는 답장들은 대부분이 아주 짧긴 했지만 답장이 돌아온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가 저녁에 쓰는 편지는 반대로 점점 길어졌다. 받는 이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몸 상태는 괜찮냐는 걱정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답장은 짧긴 했어도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꼬박꼬박 적혀 있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편지를 일곱 번 받았다.

 

   소란이 있던 밤으로부터 2주 뒤에 황금가지를 회수하는 임무가 있었다. 다른 둥지를 통해 구 L사의 지하로 깊게 들어갔다. 원래라면 적당히 밤 쯤엔 돌아왔겠으나 예상 외로 길이 험난하여 여행길이 며칠로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수감자들은 몇 번이고 죽어갔다. 단테의 존재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불멸이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이 몹시 고되고 피로했다. 다행히 가지는 꺾었고 누구 하나 낙오되는 일 없이 전원 버스로 돌아왔다. 일이 끝나고 나니 버스 안쪽에 혼자 있을 이가 걱정됐다. 누군가 식사를 챙겨주고 있을까? 버스엔 카론과 베르길리우스가 있고 그들 역시 안쪽에 ■■가 있음을 알기에 식사 정도는 챙겨줬을지 몰랐다. 하지만⋯⋯ 돌아가는 발걸음이 초조함에 빨라졌다. 이상은 제일 먼저 메피스토텔레스에 올라서 보고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누군가 식사를 대신 챙겨주고 있었는지 문 밖엔 평소처럼 식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것만이 다행이어서, 이상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두드렸다. 급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두드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이상이오. 요 며칠 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문 안에는 눈가가 벌겋게 부은 방주인이 서있었다. 그는 이상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품으로 와락 달려 들었다. 안부를 급하게 묻겠답시고 뒷정리도 하지 않은 채라 옷이며 얼굴이며 핏자국으로 더러워서, 이상은 덥석 안긴 그를 밀어냈다.

 

   "잠깐. 지금 옷이 엉망이오."

   "⋯⋯."

   "그대가 더러워질지도⋯⋯"

 

   힘은 왜 그렇게 또 센지, 그는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강하게 이상을 끌어안았다. 잠시 후에 품 속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 손으로 그를 더럽힐 순 없었기에 뻣뻣하게 굳은 채 그대로 복도에 서 있었다. 이상은 지금 이 상황을 용서받은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애를 썼다. 그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그가 또 다시 누군가를 향해 따듯한 걱정을 건네는 것이라고. 누구를 위해서든 뻗어지는 작은 손처럼, 이 눈물 역시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흘릴 수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조금 서글펐지만 그것이 바로 이상이 사랑했던 태양이었으니까.

   훌쩍이는 소리가 멎자 이상은 그를 조심스럽게 떨어트렸다. 그 잠깐 사이에 기어이 옷을 더럽히고 말았는지 하얀 원피스에 붉은 얼룩이 졌다. 2주 전 이상이 샀던 그 옷이었다.

 

   "⋯미안하오. 걱정이 되어 바로 돌아온다는 게 그만, 옷이⋯⋯."

   "괜찮아."

 

   어차피 네가 준 거잖아. 이상은 제가 한 거짓말이 들켰음을 알았지만 구태여 그 점을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알면서도 받아 입어준 것이 다행이었다. 많이 울었을까. 걱정 해 준 것이 기쁘다가도 울린 것이 못내 속상했다. 정말이지, 그만큼은 울리고 싶지 않은데도 어째서인지 그를 울리는 것은 이상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눈가로 손이 올라갔다가, 한 번 멈추고 이내 떨어졌다. 떨어지는 손을 잡은 것은 ■■였다. 그는 다 마르지 않은 피가 묻은 손을 잡고 작게 중얼였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상은 제가 받은 걱정이 제 것이 맞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는 단테가 있는 한 죽지도 않을 뿐 더러 ■■에게 걱정 받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에게 새겨진 가장 큰 상처들은 항상 이상의 것이었다. 질리지도 않고 시간을 반복할 때마다 심신을 난도질한 것은 이상이었다. 이제는 제 손으로 살점을 뜯어내고 이미 썩어 곪은 상처를 다시 쑤셔 파게 했다. 그런데, 왜. 어째서. 당신은 이다지도 다정한거지? 이상은 제가 태양이 비추는 가장 따듯한 볕에 서 있음을 몰랐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언제라도 항상 따스하게 빛나는 양지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과분한 마음을 깨닫지도 못한 사이, ■■는 이상의 얼굴에 묻어 있던 타인의 혈흔을 제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 손길이, 걱정을 건네는 말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한없이 사랑스러워서. 그는 또 다시 그 옷을 더럽히고 말았다. 이상은 한겨울의 태양을 품에 안은 채 속삭였다.

 

   "⋯⋯어째서 그리 다정한거요."

   "⋯⋯."

   "그대를 가장 깊게 상처 입히는 검은 항상 나였는데, 왜."

   "가장 상냥한 검도 항상 너였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햇빛은 여전히 그곳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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