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말소]

MUMMY(上)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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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추출은 비정기적으로 행해졌고 아침 시간이 부산스럽고 베르길리우스가 본사로 갈 준비를 한다면 그것이 신호였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아 떨어져서 이상이 묻기도 전에 베르길리우스는 오늘은 휴일이라며 버스 안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쉬라는 안내를 했다. 그리고 잠겨있는 안쪽 방으로 가서, 이제 막 깬 듯 부스스한 차림의 ■■를 데리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야 며칠 정도가 걸렸지만 이젠 소요 시간이 줄었는지 하루 안에도 돌아왔고, 돌아올 적엔 언제나 기절한 채 베르길리우스의 팔 안에 안겨 돌아왔다. 딱히 이상만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열 두 명 분의 인격을 추출 당했고 한 번에 여러 명의 인격을 추출할 때도 있었다. 처음 인격을 받았을 때의 기억은 매우 끔찍했다. 그때의 이상은 명백한 살의를 가지고 ■■를 죽이려 들었었다. 하지만 꼭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세계에서의 이상은 ■■과 퍽 가까워서 사이 좋은 친구로 지냈고, 때론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된 적도 있었다. 따스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렸던 그런 시간들도 없진 않았다. 그 결말마저 좋았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지만⋯⋯

   인격 추출이 꽤 많이 진행된 후에 이상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수감자들은 인격을 받을 수록 거울 세계의 기억이 늘어나지만 반대로 ■■의 기억은 점점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는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상이 거울 세계에서의 일을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자 그대로 추출해냈기 때문에 그에게선 그 기억이 사라진 것일까. 처음엔 그것이 제법 기껍게 느껴지기도 했다. 잊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잔인한 기억들은 제가 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기억들 역시 ■■를 이루는 중요한 조각들이어서. 그 조각들이 하나 둘 빠질수록 ■■는 어딘가 공허한 듯 보였다. 항상 반짝였던 눈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고 멍하니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보며 흔들거리는 일이 늘어났다. 가끔은 곧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일 때가 있어서, 이상은 억지로 이미 잊었을 기억들을 꺼내 이야기 해주곤 했다. 그는 항상 웃으며 이상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해주진 않았다.

   그런 식으로 기억은 덧씌워졌다. 기억이 하나씩 더 생길 때마다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는 어떤 세계선에서도 이상과 함께였고 항상 그에게 따스했으나 그 반대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상은 때로는 ■■를 적대하고, 경계했으며 상처주거나 해치는 일도 있었다. 제 손으로 ■■를 베거나 고통스럽게 했던 기억들은 끔찍했다. 악몽을 꾼 것처럼 허덕이며 일어나는 밤이 늘었다. 꿈 속에는 항상 ■■과 이상이 나왔고, 그는 꿈 속에서 그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꿈 속의 이상은 때론 칼을 목에 대고 때론 어깨를 찔렀으며 팔을 긋거나 허리를 꿰뚫기도 했다. 고통에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의 곁에 앉아 잔인한 말을 흘리며 어떤 대답이나 행동을 요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의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꿰뚫고 허리를 베어냈다. 마지막에 들린 비명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사랑하는 누군가를 어떤 세계선에선 고문하고 죽이려 들었다는 사실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따라왔다. 그런 밤이 오면 이상은 늦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조금 안쪽에 있는 ■■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인격 추출 후 회복 중인 ■■가 대답해주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얄팍한 기대가 역시나 무참히 깨지면 그저 그 방문에 이마를 가만 맞대고 없는 온기를 찾았다. 다정한 말 한 마디가 필요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거짓이어도 좋으니 이상은 이 견디기 힘든 죄의 무게를 누군가 덜어내주길 바랐다. 참으로 비겁하고 나약하구료. 그 말은 오로지 달조차 뜨지 않는 늦은 새벽의 복도에 홀로 있는 그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그것이 차가운 자조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할까.


   다음 날 ■■가 깨어난 듯 했다. 이상은 일을 마친 초저녁이 되자마자 ■■의 방으로 찾아갔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가 전신에 두른 붕대는 무엇을 가리기 위함일까. 만약 이 기억들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가 붕대를 두른 이유는 다름 아닌 제 자신이었다.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랐다. 그저 악몽같은 기억의 파편일 뿐이라고, 잘못 이식된 어떤 왜곡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초조해서인지 문을 여는 소리가 꽤 거셌다. 문 여는 소리가 크게 울렸으나 ■■는 깬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인지 천장의 백열등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는 그가 들어왔는데도 문 쪽을 돌아보지 않고 앉아서 죽은 사람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의 팔을 붙잡았다. ■■는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순간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이상을 쳐다봤다.

 

   "이, 이상?"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소."

   "어, 으⋯ 응. 뭔데?"

 

   제법 당황스러울 법한 상황에도 ■■는 선뜻 웃으며 대답했다. 이상은 평소처럼 어려운 말을 섞지도, 돌려 말하지도 않고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요구했다.

 

   "이 붕대 안을 보여주시오."

 

  일순 ■■의 표정이 굳었다. 표정이 굳었음을, 이상 역시 느꼈다. 표정의 변화에서부터 싫은 예감이 들었다. ■■는 처음으로 말을 얼버무리며 팔을 뒤로 빼려 들었다. 상대방은 어떻게 해서든 그 아래를 볼 작정인지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부러질 듯 거세게 그 손목을 쥐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가 거짓말에 서투르다는 것을.

 

   "아무것도 아니면 왜 말을 못하는거요."

   "그건⋯ 잠깐만, 하지 마⋯ 이상!"

   "⋯잠깐 보기만 할 뿐이오."

 

   그는 기어코 억지로 손목을 감은 붕대 끝을 잡고 풀러내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기어이 그 안을 보고 말았다.

   아주 조금 난 틈새로 시커먼 손목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도 앙상할 정도로 얇은 손목은 다 타버린 것처럼 새카맸고 그 위로도 보기 흉한 상처가 가득했다. 얼굴처럼 새하얗고 보드라운 살점은 그곳에 없었다. 저것은 뼈인가? 혹은 영원히 상처가 아물지 않아 드러난 근육일까. 이상은 그만 넋을 빼앗겼다. 그는 어느 세계선에서나 훌륭한 검사였다. 그랬기에 그 많은 흉터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긴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자신이 낸 상처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시간을 몇 번이고 돌렸다고 하는데, 그 몸의 상처들은 낫지 않았던 걸까.

 

   처음엔 반창고 하나였다. 그 다음엔 좀 더 넓은 밴드를 썼고, 그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자 옷으로 가렸다. 그러나 점점 곤란한 일이 생겼다. 사람들은 아물지 않는 심한 상처를 끈덕지게 물어왔고 보일 때마다 해명하는 것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상이 그에게 직접 물어올 때면, 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무엇을 할까. 언젠가의 네가 내게 낸 상처라고. 한때는 정말로 말했던 적도 있었다. 보여주진 않았지만. 하지만 이상은 믿지 못했고, 어떻게든 그를 납득시키면 견딜 수 없이 슬퍼하며 자책했다. 너는 따듯한 사람이니까 분명 알게 되면 나보다도 고통스러워 하겠지. 그는 이상이 믿지 못할 것도 알았고 믿는다고 한들 구태여 몰라도 될 일을 알려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붕대로 전신을 감기 시작했고 실수로라도 그에게 그 아래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실수로라도.

   동시에 그 상처들은 스스로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흉들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거울 앞에 서지 않게 된 것은. 오랜만에 마주한 제 팔목은 빈말로라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이런 걸 보게 되면 기분 나쁘겠지. 그는 때론 애정을 담아 ■■의 손등에 입맞췄지만, 그 일이 기쁘면서도 한 켠으로 슬펐다. 단 한 번이라도 붕대 아래를 보게 되면 다시는 입맞추지 못하리라. 썩어 문드러진 죽은 손등에 입맞추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손에서 제 손을 슬쩍 뺏었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들키기 싫은 비밀을 들켰다. 그가 처음으로 보여 준 강압적인 모습은 공포스러웠다. 스스로를 솔직하게 내보일 수 없는 사실이 서글펐다. 수치스러움에 몸이 떨려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가 미웠다. 억지로 손목을 빼앗아서 치부를 들춰냈으면서 충격에 말을 잃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다른 곳도 그곳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한 곳은 없었다. 넌 날 경멸하겠지. 누가 봐도 기분 나쁠테니까. 순식간에 폭풍처럼 감정이 휘몰아쳐서, 그는 멍하니 선 이상의 뺨을 거세게 때렸다.

   그러나 동시에 ■■는 여전히 상냥했다. 홧김에 뺨을 후려 쳤어도 얻어맞은 이상이 제 손목을 놓치고 휘청거리자 한순간의 분노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창백한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나간 폭력에 주춤하는 사이, 이상이 먼저 말을 끝맺었다.

 

   "아, 그, 저기⋯⋯"

   "⋯⋯미안하오."

 

   그는 무엇을 사과하는지도 모르는 채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였다. 그리고 무어라 덧붙일 틈도 주지 않고 도망쳤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 왼쪽 손목은 거울 세계의 그가 만들어 낸 흔적들이었다. 평행 세계의 자신이 한 일이라고 모르는 척할 순 없었다. 이상은 몇 십 몇 백 년을 돌이켜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났지만 ■■의 상처는 단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곤 그 기억 마저 명확하게 남은 채 몇 세기를 건너 이곳으로 왔다. 그 얼마나 참담한 여행이었을까.

   그러나 칼로 베고 찌르는 것 보다도 최악인 것은 불안을 핑계 삼아 ■■에게 싫은 일을 억지로 들춰낸 자신이었다. 그는 분명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무시하고 힘으로 붕대를 잡아 뜯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말 붙일 틈도 주지 않고 도망쳤다. 그 모든 것이 더는 나쁠 수 없는 최악이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몰려왔다. 최소한, 제대로 미안하다고 말했다면. 그가 원망이나 분노를 쏟아낼 수 있게 했다면. 설명을 하고 부탁 했다면.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맞은 뺨은 오래도록 욱신거렸다. 힘이 세다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븐 협회에 있었던 그는 칼 하나 제대로 쥘 줄 모르는 소녀였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차라리 맞기라도 해서 잘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상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 제가 당한 심한 일보다도 누군가를 때렸다는 그 사실 하나만을 괴로워 할 것을. 당신은 그다지도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 뒤로 몇 번이고 그의 방 앞으로 찾아갔었다. 문을 두드리고 말을 건네기만 하면 될 일인데도 그것이 그렇게 어려워서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밤새 쓰고 찢어내고 구겨낸 종잇조각들이 쌓였고 마침내 봉투 안에 넣기까지 한 편지를 들고 문 앞을 서성거리기도 많이 했지만 결국 문 틈 아래로 넣진 못했다. 건넬 말도 마주할 용기도 찾지 못했는데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만 가서 날씨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간 버스에서 간식을 먹거나 작은 유흥거리를 즐길 적엔 항상 그의 몫을 챙겨 가져다주곤 했는데, 그렇지 않게 된 지도 꽤 지났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기민한 수감자들도 몇 있었지만 구태여 묻진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서인지 괜히 말을 건네 본다고 해도 날선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결국 이상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한 건 로쟈와 그레고르였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이상 대신 복도 너머에 있을 ■■을 챙겼다. 먹을 것을 좀 들고 그 문을 두드리기라도 하면, 안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 미라 씨? 괜찮아?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는데⋯⋯"

 

   먼저 말을 건네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 문틈으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고르?"

   "어, 난데⋯ 저기. 밖에서 도넛을 같이 먹었거든. 미라 씨도 같이 먹으면 어떨까 해서."

 

   딱히 묻진 않았지만, 그레고르는 눈치껏 덧붙였다.

 

   "아, 저⋯ 이상 씨는 지금 상태가 좀 안 좋아서."

   "⋯응."

   "여기 두고 갈게. 식사 거르지 말고, 응?"

 

   그들은 억지로 닫힌 문을 열진 않았다. 그저 문 앞에 잘 포장 된 도넛 박스를 두고 갈 뿐이었다. 그레고르나 로쟈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고 걷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서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면 그제서야 문을 아주 조금 열어서 문 앞에 있는 상자를 끌어 가져왔다. 박스 안엔 다양한 도넛이 담겨 있었다. 초콜릿으로 코팅하여 레인보우 가루를 뿌린 것도 있었고, 안에 잼이 들어 있거나 팥이 든 찹쌀 도넛도 있었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담은 것일까. 곽에 담긴 흰 우유도 함께였다. 조금도 입맛이 없어 도넛엔 손도 대지 않고 박스를 다시 닫았다. 타인의 어색한 친절이 아팠다. 묻지도 않은 이상 얘기를 왜 덧붙였을까. 상관 없는데. 왜, 왜.

   며칠이고 기다렸다. 맞은 뺨이 괜찮은지 신경 쓰였다. 놀라긴 했기로서니 세게 때려서 미안하다고도 하고 싶었다. 오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혹여나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누군가 온 것은 아닐까 문 앞까지 가서 문틈에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더는 기다리지 않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결심에 쐐기를 박듯 그레고르와 로쟈가 찾아왔다. 그것은 어떤 선고와도 같았다. 더 이상 그를 찾아가지 않겠다는. 앞으로는 로쟈나 그레고르처럼 그를 불쌍히 여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고, 이전에 있었던 즐거운 시간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 연이은 인격 추출에 쇠약해진 마음은 빠르게 소모됐다. 불안함에 미칠 듯이 몸이 떨리고 종이가 밟히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상자 위에 붙은 포스트잇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기운 내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불러!'

 

   로쟈의 글씨였다. 마음을 담아 눌러 썼을 글자들이 물에 젖어 번져갔다. 그러고 보면 울지 않은지도 참 오래 되었다. 한참을 울다보니 문득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 왜 그가 울지 않으면 안 되는가. 먼저 무례를 저지른 것은 이상이고, 상처 받은 것은 자신인데. 왜 그가 오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매달려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다 이 몸에 난 상처들 때문이었다. 이 상처들이 없었으면 불편하게 붕대를 두르고 다닐 일도 없었을 것이고, 괜한 곤란에 처할 일도 없었겠지. 거울 앞에 비치는 제 모습이 싫어 멀쩡한 거울을 괜시리 부수거나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굳이 긴 옷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고,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골라 입을 수 있었을 거야. 그리고 네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그래, 모든 게 다. 이 흉터들 때문에.

   울다 지친 ■■는 어딘가에서 커다란 가위를 가져왔다. 가위 뿐이었을까. 칼이나 온갖 날카로운 것들은 다 가지고 와서 붕대를 하나씩 뜯어내기 시작했다. 붕대는 간지 꽤 되어 누렇게 낡아 있었고 곧 뜯어질 것처럼 헤진 곳도 있어서 자르는대로 툭 툭 떨어졌다. 혹여나 여러 겹 덧대거나 꼬여서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살결이 같이 베이는 것도 아랑곳 않고 거대한 칼로 그어내렸다. 감정이 요동쳐서 힘 조절이 잘 안된 탓인지 있지도 않은 살결이 베이는 게 느껴졌다. 아픔에 신음하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옷까지 벗어 전신에 두른 붕대를 모조리 풀어냈다. 붕대를 완전히 벗어 내는 것은 몇 백 년 만이라, 이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는 새삼스럽게 제 몸이 끔찍하리만큼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하얗고 부드러웠을 살결은 전부 다 새카맣게 타버렸고, 썩어 문드러진 상처들이 가득했다. 베이고 찢겨진 흉터는 그대로 입을 벌린 채 근육을 드러냈고, 굳어버린 피딱지가 여기저기에 두드러기처럼 붙어 있었다. 뚫린 구멍이나 찔린 자국들, 시퍼런 멍이나 종이에 살짝 베인 상처들까지, 정말이지 무엇 하나 아물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것이 이 몸에 새겨진, 수 세기를 여행한 흔적이었다. 그 모든 것이 소름끼칠만큼 싫어져서, 그는 송곳 따위의 얇은 날로 상처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살점이 남지 않다고 해서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에 무뎌져서인지 더는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닿기만 해도 전신이 아려왔다. 울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다시 눈물이 났다. 아파서 앓았지만 손길을 멈추진 않았다. 눈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딱지가 잘 뜯어지지 않자 손톱으로 마구 긁기 시작했다. 비명 섞인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파, 너무 아파. 아파도 떼어내고 싶었다. 전부 다 모조리 뜯어내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우는 소리가 밖으로 들렸을까. 하기사, 정신없이 울었으니 누군가 듣고 왔을지도 몰랐다. 로쟈일까? 그레고르? 혹은 방이 가까운 홍루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가 오든 무슨 상관이랴. 그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문 틈새로 흘렸다. 눈앞처럼 머릿속도 흐릿해져 갈 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라 양?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는 잘 알았다. 하지만 환상이겠지. 네가 올 리가 없으니까. 아니면, 정말로 이 끔찍한 살덩이들을 뜯어내고 있어서. 그 덕분에 네가 찾아왔을까. 그렇다면 하나라도 더 뜯어내고 싶었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아예 반 정도 뜯어진 딱지를 붙잡고 힘주어 잡아당겼다. 고통은 배가 되어 전신을 꿰뚫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을 때, 동시에 문이 열렸다. 문가에 서 있는 것은 이상이었다. 그리고 방 안에 주저앉아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였다. 그가 언젠가 바랐던 대로 그 붕대 아래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타버린 것은 손목만이 아니었다. 전신 대부분이 화상자국으로 뒤덮였고, 꿰뚫리거나 찢어지고 베인 상처들이 가득 했다. 그러기만 했어도 충분히 끔찍했을텐데, 이상이 문을 연 것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오른쪽 팔을 지독하게 긁어대고 있었다. 살점을 뜯어내면서 반 쯤 벗은 원피스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사방 팔방에 피가 튀어서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도 벌겋게 젖어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날붙이들에도 공포스러운 혈흔이 갓 묻은 것처럼 걸쭉하게 늘어졌다. 이상은 편지를 한 통 든 채 서 있었으나 들고 있던 편지나 준비해 온 말 따윈 모두 잊을 정도로 눈앞의 장면이 가히 충격적이어서. 애써 쓴 편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체 뭘⋯⋯!"

 

   가까이서 본 모습은 더욱 끔찍했다. 손으로 억지로 뜯어냈는지 손톱 밑이 새빨갰다. 손톱자국도 선명하게 남아서, 뭘 하려고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명확했다. 그가 방 안에 들어와서 제 이름을 불렀다는 것도 알았지만, 붙잡기 직전까지도 자해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힘주어 제 손목을 붙잡은 순간에서야 모든 행위가 멈췄다.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지겹지도 않은지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눈물은 아무리 떨어트려도 바닥에 낭자한 혈흔 한 방울 조차 희석해내지 못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비명 소리에 놀라 달려 온 수감자들이 몇 있었지만, 이상은 ■■가 제 흉터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했음을 알았기에 별일 아니라며 억지로 문을 닫았다. 다행히 방 안에 제대로 된 의약품 상자가 있었고, 이상은 이제까지의 경험과 덧씌워진 기억들로 처치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흐르는 피를 먼저 지혈하고 피가 멈출 때까지 사방에 튄 혈흔을 정리했다. 엉망이 된 몸을 따듯한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낫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소독했다. 간혹 통증에 움찔 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애써 모르는 척 했다. 때론 울거나 짜증을 내고 매섭게 손을 쳐내거나 할 때도 있었지만 멋대로 하게 놔두었다. 치료하는 것만도 한참이 걸렸다. 반 정도는 나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이상은 일부러 등 뒤로 와 붕대를 다시 감아주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이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듯 아주 꼼꼼하게 붕대를 둘렀다. 아플 것이 염려되었는지 모든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내려는 것처럼 묵묵히 붕대를 감았다. 하기사, 물어서 무엇을 하랴. 모든 일은 그 때문이었다. 그가 그날 억지로 붕대를 뜯어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겠지. 죄책감이 무겁게 그를 짓눌러왔다. 하지만, 다시 도망칠 순 없었다. 그가 한 번 도망친 결과가 이것이었으니까.

 

  "아프진 않은거요."

   "⋯⋯."

 

   말없이 끄덕이는 것이 안쓰러웠다. 안 아플리가 없겠지. 차라리 아프다고 패악질을 부리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최대한 차분하게 일을 마치려고 했으나 소중함 때문에 자꾸만 손이 떨렸다. 상체가 미라mummy처럼 완전히 덮이자 이상은 피투성이인 원피스 대신 제 잠옷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침대에 그를 걸터 앉게 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아 발끝부터 감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평범했을 소녀의 발은, 지금은 멀쩡한 살점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구태여 보여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마 이런 끔찍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목이 메여도 차마 입 밖으로 슬픔을 뱉을 순 없었다. 가장 슬프고 아플 사람은 그가 아니었으니까.

 

   동이 틀 쯤에나 모든 일이 끝나갔다. 그때까진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시간이 계속됐다. 간혹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 무거운 한숨 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끝이 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상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새로운 기억이 들어설 때마다 지독한 악몽을 꾸었소. 그 꿈에선 항상 나와 그대가 나오는데, 내가⋯ 그대를 어떻게든 해하곤 했소."

   "⋯⋯."

   "그게 사실일까 두려워서, 날이 선 불안으로 그대를 더 심하게 상처 입히고 말았구료."

   "⋯⋯."

   "분에 넘치는 용서를 받고 싶어 찾아왔지만⋯⋯"

 

   그는 마지막 매듭을 짓자마자 손을 바로 뗐다.

 

   "아무래도, 내가 오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 모르겠어."

 

   그는 난리통에 바닥 어딘가에 떨어진, 며칠 내 전해주지 못했던 편지를 주웠다. 몇 날 밤을 새며 쓴 편지였다. 편지를 쓸 때까지만 해도 어쩌면, 다시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다정하고 상냥한 당신이라면 편지를 읽고 나의 무례를 용서해 줄지도 몰라. 하지만 함부로 타인의 치부를 들추고 도망친 대가는 컸다. 저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났다.

 

   "영영 용서치 않아도 좋으니,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지 말아 주시오."

 

   그는 아주 망설인 끝에 벌겋게 부은 눈가에 다시 맺힌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훔쳐냈다. 그리곤 곧바로 그 손을 떨어트렸다. 닿아선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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