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말소]

인공 태양(中)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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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엔 그것을 찾지 않았다. 어쨌든 억지로 다친 손목을 보려고 들었으니 마주쳐도 껄끄러울 수 밖에 없었고 찾아간다 한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몰랐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어쩌다 그렇게 되었냐고? 아프진 않냐고. 아무 짝에도 도움되지 않는 걱정을 몇 마디 건네면 될까. 그 안을 보진 못했으니 어떤 형식으로 그것이 인간임을 증명하려고 했는진 모르겠지만 잠깐 닿은 순간에도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으니 꽤 깊게 상처 낸 것이 틀림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결론은 뭐였을까. 밤이 깊으니 생각해선 안 될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래서 인간이 맞았을까? 이왕 이렇게 다 벌어진 일이 됐으니 물어보고라도 싶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냐고.

만나서 좋을 것도 없었는데 그날 밤에 돌아와보니 이미 그것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무릎을 끌어 안고 침대 벽에 기대 졸고 있었다. ■■였다면 문이 열리는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깼겠지만 그것은 바로 옆에 걸터앉을 때까지도 깨지 않았다. 손목은 원피스 소매로 덮여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구태여 그것을 깨우지 않고 켜져 있던 불을 껐다. 분명 나갈 때 끄고 나갔는데, 불은 왜 켜져 있었을까.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 가슴 한 켠이 아렸다.

그것은 피곤했는지 초저녁에 잠이 들어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갈수록 자세가 삐딱해지더니 마지막엔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 사선으로 누워 잠을 잤다. 깨어난 자리엔 그가 있어서, 그것은 일어나자마자 그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이상, 안녕! 언제 왔어⋯ 왔으면 깨우지."

 

밖에 다녀오느라 피곤했나봐, 그것은 일어난 직후인데도 쫑알거리며 말을 걸었다. 몇 마디 주고받는 그 짧은 새에 바닥에 앉아있는 이상의 곁으로 슥 내려와 나란히 앉았다. 불 꺼진 어두운 방에서도 웃는 얼굴이 왠지 훤했다. 이상은 문득 어제의 무례가 떠올라 표정을 구겼다. 어쨌든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멋대로 아픈 곳을 붙잡고 뜯어보려고 했으니 당당히 마주 볼 낯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려고 해선 안 되는 금기와도 같은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참 전에 크게 실수했었고, 그 일이 무슨 결과로 이어졌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그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곁에 앉아 사글사글 웃는 그것에게 실없는 말을 건네고 돌아온 대답에 잘 지어지지도 않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의미 없는 잡담을 늘여놓았다. 그리고 새벽이 늦어가자 이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다시 잠들었다.

 

돌보는 역할을 꺼렸던 것 치곤 이상은 그것에게 퍽 친절했다. 하나 뿐인 침대를 내어주고 아침에 방을 나서기 전 잠버릇이 나쁜 그것의 잠자리를 정돈하고, 혹여나 깰까 조용히 방을 비웠다. 먹을 게 있으면 먹을 수 있을지 말지도 모르는데 꼭 그것의 몫을 챙겼고 무언가 기념이 될 만한 걸 발견하면 굳이 챙겼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심심할까 책이나 소일거리를 쥐여주고 돌아오면 잠들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벗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잠에 들면 읽을 책이 남아 있고 잠이 오지 않음에도 불을 끄고 조용히 옆에 앉아 지켰다.

그것은 이제 자유롭게 버스 안을 돌아 다니고 때론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대체로 이상의 방 밖으론 나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이상의 방 밖으로 나갈 땐 그것을 부르는 이유가 있을 때나 혹은 이상이 다른 수감자의 방에 있을 때였다. 그것은 일을 하는 때엔 이상을 방해하지 않았지만 저녁 시간엔 그의 곁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좀처럼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처음엔 신경이 쓰였다가도 나중엔 그저 기뻐하기만 하는 자신이 있었다.

 

몇 주 정도 지났을 때 그는 그것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와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아주 먼 옛날, 이상이 그를 맨 처음 만났던 때의 모습과 닮았었다. 그것은 지식이 별로 없었고 문제가 생겨도 깊게 고민하려 들지 않았다. 잠이 매우 많았으며 일부러 깨운다고 해도 거의 일어나지 못했다. 모르는 게 많았고 그저 어릴 뿐인 소녀처럼 느껴졌다. 창이나 총은 커녕 작은 칼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날붙이를 두려워하고 혈흔이나 적나라한 흉터에 공포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전신이 새하얗고 깨끗했다. 넌지시 붕대는 왜 하고 있었냐고 물었지만 모른다고 대답했다. 본사에 다녀온 이후로 팔에 난 상처 외의 붕대는 전부 풀어버렸으니 이상은 종종 뜻하지 않게 그것의 살결에 닿을 때가 있었다. 보드란 살결이 도리어 낯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피부는 다 타버려서 쭈글쭈글하고 새카만, 온갖 상처들로 투둘한 피부였다. 이상의 손이 닿기만 하면 그것은 화들짝 놀라며 소란을 떨었다. 얼굴을 잔뜩 붉히고 부끄러워 했지만 막상 스스로는 서슴없이 다가가 손을 잡고, 품에 안기며 때론 뺨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것이 응당 당연한 것처럼 서투르지만 솔직하고 확실한 애정을 마구 쏟아부었다. 결코 만날 리 없었던,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존재를 감히 엿보는 듯 했다. 그 사실을 느낄 때마다 어딘가 속이 메스껍고 거북했다. 스스로의 존재가 저것을 또 다시 억겁의 세월로 밀어 떨어트리고 그 발자국을 핏빛으로 물들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상은 그것이 저에게 안겨들 때마다 어색한 손짓으로 그것을 밀어냈다. 그것은 조금 상처 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다시 밝게 웃었다. 놀랐지, 미안해. 라고. 또 분에 넘치는 상냥함을 건네면서.

 

만약 그것이 정말로 살아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이 버스에서 떠나게 해야하지 않을까. 그것은 생전의 ■■처럼  이상을 사랑했다. 그렇다면 또 다시 깊게 얽혀들 것이고 어쩌면 또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 할지도 몰랐다. 그것이 정말로 ■■와 똑같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이상은 그것이 또 다시 능력을 각성하기 전에 떠나보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어딘가 평범한 곳에서, 평범한 사람을 만나서, 평범한 사랑을 하고, 평범한 일생을 보내다가, 평범한 죽음을 맞길 바랐다. 아니, 정말로 바랐을까. 제가 기억하는 모든 시간대엔 그가 있었다. 제가 없는 곳에서의 그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면 상상하는 것조차 싫었던 걸까. 그가 다른 것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이 싫었다. 당신이 죽음을 맞는다면, 그 곁은 응당 제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돌아가는 건 어떻냐고, 말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밤 사이 정리했던 말들은 목전까지 차오르곤 다시 사라졌다. 전할 용기가 없는 것에 그는 매일 다른 핑계를 붙였다. 줄 것이 있어서. 당신이 말을 붙여서. 당신과 다른 일을 해야해서. 밤이 늦어서. 당신이 웃기 때문에. 정 붙일 핑계가 없는 날엔 일부러 늦게 돌아갔다. 그것은 밤잠을 참지 못해서 항상 잠들어 있었고 그렇다면 거기에 당신이 잠들었기 때문에, 라는 말을 붙일 수 있었다. 스스로가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야, 인정할 순 없었다. 그것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는 정말로 많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나선으로 꼬인 시간선의 매듭이 되어버린 시간여행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흔적이라도 잡고 싶어서 몇날 며칠을 깨진 거울 옆에서 지샜지만 목소리 한 절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딱 1천 년만큼의 기억은 그대로 그에게 남았고 모든 기억을 안은 채 주지 못한 것과 빼앗은 것만을 후회했다.

그런데 정말로 일어날 리가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최초의 ■■였다. 기나 긴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그였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너에게 행복을 약속하겠다고. 무심코 맺은 혼자만의 맹세가 끔찍했다. 그를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 넣은 것은 이상이었다. 한 번 밀어 넣은 것도 모자라서 몇 번이고 비극의 늪에서 홀로 분투하는 그 손을 떨어트렸다. 몰랐다는 말로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에게 가장 해가 되는 존재는 언제나 이상이었다. 그 인생을 송두리째 거대한 불행으로 만든 제 자신이 행복을 맹세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복잡하게 약속하지 않더라도 이상만 없었다면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평범한 삶을 영위하다가 어딘가에서 그 생을 맺었겠지. 그에게 투신이라는 영원한 주박을 씌우고 숱한 시간을 돌리게 하며 손에 온갖 날붙이를 쥐게 하고 그 손으로 어떤 죽음을 만들게 했다. 그는 작은 고통도 견디기 어려워했다. 제 손으로 누군가를 아프게 만든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항상 혼자 울곤 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를 뒤집어 쓰는 날엔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몇 번이고 씻어냈다. 어느샌가부터 매일 같은 악몽에 시달려 제대로 자지 못하게 됐다. 불에 타버리는 고통은 아주 오래 남아 그를 괴롭혔다. 시간은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 평범한 행복과는 멀어졌다. 그 모든 일의 가운데엔 항상 이상이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것이 떠나지 않길 바랐다. 더는 자신이 없었다. 찰나의 부재도 그리 끔찍한데 앞으로 끝날지 말지도 모르는 그의 삶에서 영원한 부재를 받아들일 순 없었다. 어쩌면 당신이 원하지 않을 지도 몰라. 당신은 나를 좋아하고 따랐으니까 버스에서 내리고 싶지 않을지도. 별달리 갈 곳 없는 그것을 무작정 내리게 하는 게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함께 있으면서 그 나름대로의 작은 행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작정 자신을 떠나라고 하는 게 오히려 당신에게 상처가 될지도⋯⋯. 영민한 두뇌는 그럴듯한 변명을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참으로 얄궂지.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손은 저도 모르는 사이 침대 아래로 떨어진 오리 인형을 주웠다. 어렵게 다시 구해서 주었을 때 그것은 매우 기뻐하며 하루종일 인형을 예뻐했다. 잠든 그것의 곁에 다시 인형을 두자 그것은 부드러운 솜인형을 찾아 품에 꼭 안곤 헤실거렸다. 흐트러진 이불을 들어 잠든 그것의 위에 덮고 자는데 걸리적 거리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걷어주었다. 거기까지만 해야 했을텐데 차가운 손이 못내 아쉬워 기어이 그 뺨을 한 번 쓰다듬고 말았다. 그것의 뺨은 부드럽고 또 따듯해서, 닿은 손이 차가웠는지 조금 움츠렸다. 아차 싶어 손을 떼내려 했지만, 그것은 이내 제 볼을 쓰다듬는 무언가에 부비적거리며 누가 곁에 서 있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 마냥 사랑스러운 애정을 보냈다. 그리고 눈을 뜨곤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같이 잘래?"

"아니, 이건⋯⋯."

뭐라 말 붙이기도 전에 그것은 그의 손을 붙잡고 침대 안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는 엉거주춤하게 버티고 서다가 결국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느덧 손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결국 마지 못해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최대한 그것이 불편하지 않게 끝으로 붙어 거리를 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것은 그의 품으로 폭 안겨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넓게 남아버린 반대편은 커다란 오리 인형이 독차지했다.

 

"⋯⋯좀 떨어지는 게 어떻소, 잠들기 불편할 것이오."

"하지만, 이렇게 안 하면 이상은 도망 갈 것 같으니까."

"⋯음. 떠나지 않을테니 편히 자시오."

"싫어! 불편해도 붙어서 잘래."

 

이상은 자신이 그것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결국 체념하고, 그것을 품 안에 안은 채 한 바퀴 굴러 침대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서 끌어 안고 가까이 붙는 당돌함은 어디로 갔는지, 잠깐의 찰나가 부끄러워 그것은 얼굴을 붉혔다.

 

"낯이 물들었군."

"가, 갑자기 끌어 안으니까 그렇지."

"아까는 실로 대담하게 본인의 품에 안겼던 것 같소만⋯⋯."

 

그것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시선은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어디론가 도망쳤다. 언젠가의 시간에선 이렇게 밤에 같이 잠을 청하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모든 일이 지난 지금은 이것도 저것도 전부 분에 넘쳤다. 마주 보고 있으면 또 다시 품으면 안 될 욕심이 들 것만 같아, 그는 몸을 돌려 그것을 등지고 누웠다. 돌아눕기 전에 그것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었던 것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저 자신이 없었다. 넘실 거리는 음울한 욕망을 참아낼 자신이.

그것은 한참 후에 다시 이상의 허리께에 손을 뻗어 끌어 안았다. 그리고 그 등에 얼굴을 기대고 그가 듣고 있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정말 좋아.

 

밤잠을 견디지 못하는 그것은 금방 다시 잠들었다. 조용한 숨소리가, 작게 오르내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마음이 넘실거려서, 결국 다시 뒤를 돌아 곤히 잠든 그것을 마주 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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