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말소]

인공 태양(上)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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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잠시 정차한 메피스토텔레스의 앞을 가로막고 쏟아지는 장맛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낸 것은 운전석의 카론이었다. 카론은 베르길리우스를 부르더니 앞에 서 있는 것을 손가락질 했다. 메피가 배고파해. 베르길리우스가 조금만 더 무신경 했다면 분명 저것은 곧장 공복에 허덕이는 버스의 아가리로 들어가 산산조각 났을테지. 하지만 베르길리우스는 둘러 싼 청록색 로브 속에서 반짝이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금색을 찾아냈다. 베르길리우스는 카론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버스 밖으로 뛰쳐 나갔다. 손엔 우산도 전등도 들리지 않았기에 쏟아지는 비는 순식간에 베르길리우스를 축축하게 적셨다. 조금도 아랑곳 않고 베르길리우스는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서 있는 그것의 어깨를 붙잡고, 손가락으로 살짝 그 모자를 걷어냈다. 그것은 약간 놀란 듯 느릿하게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텅 빈 눈 안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금빛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나 멍했지 버스 안에 들어오자 곧장 태도를 바꿨다. 그것은 환하게 웃으면서 버스에 있는 수감자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것은 수감자들을 거의 모르는 듯 했지만 붙임성 있는 성격 때문인지 어색하게 굴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그들의 소개를 요구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얼떨떨하게 굴다가 이내 정말로 돌아온 거냐며 그것을 반갑게 맞이했다. 눈물을 글썽이던 돈키호테는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가 그것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로지온과 그레고르 역시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그것을 반겼고 히스클리프, 료슈 조차 은근한 환영을 내비쳤다.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가운데 이상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라 인사를 건네지도, 뭔가를 묻지도, 하다못해 비를 맞았냐는 걱정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소름끼칠만큼 정교했지만 이상은 그것이 가짜임을 첫눈에 알았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었단 말인가. 영영 아물지 못할 상처를 잔뜩 벌려 쑤시는 듯 아파왔다. 그럼에도 그것에게 가짜가 아니냐며 화내지도 어떤 원리로 누가 만들었는지 뜯어보지도 밖으로 나가라며 내치지도 못했다. 그저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소란을 지켜만 보다가, 모두의 시선이 이상을 향할 때 어색하게 다가가 제 겉옷을 그것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비를 얼마나 맞은 것인지 잠깐 서 있을 뿐이었는데도 바닥이 흥건했다.

 

   "⋯어서 오시오."

 

   안하느니만 못한 환영 인사였다. 그는 제 표정이 지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지 못했다. 온갖 물감을 한번에 씻어 낸 탁한 물 같은 표정이었다. 분위기는 이상을 중심으로 흘러서 다들 삽시간에 어색한 기류를 흘렸다. 아주 잠깐의 정적을 깬 것은 역시, 그것이었다. 그것은 ■■가 그랬듯이 이상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자마자 그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젖은 몸도 아랑곳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이상!

 

   목소리 만큼은 깜빡 속을 정도로 진짜 같아서 넋을 빼앗겼다. 그리도 그렸던 목소리였다. 꿈에라도 나와주지 않았던 그 목소리. 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순간이 너무나 서글퍼서, 밀쳐내려던 손은 결국 아래로 떨어졌다. 결국 그의 옷 마저 몽땅 다 젖고 말았다.

 

   그것은 버스 안 사람들을 알지 못했지만, 이상 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밖의 나머지 기억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본인 자신에 대한 기억도 없어서 제 결말이 어땠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이 도시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만이 남아 있던 것 같았다. 그것은 묻는 말에도 곧잘 대답했고 이제까지의 함께 했던 시간들이 텅 비어있음에도 버스 안 사람들에게 제법 붙임성 있게 굴었다. 그리고 꼭 ■■처럼 이상의 곁에 붙어 떠나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돌아 온 그것을 돌보는 일은 이상의 몫이 됐다. 그것만은 하기 싫다고 그는 드물게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억지로 당번을 떠맡듯 결국 그것을 데리고 제 방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것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맞지도 않는 그의 옷을 입었다며 좋아했다. 소매가 지나치게 길어 직접 걷어주자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그의 방엔 처음 들어와 본다며 볼 것도 없는 방안을 뛰어다니고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이제는 손목도 발목도 구속하는 것이 없어 그런지 그것은 퍽 자유로워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방방 뛰다가 저녁이 되자 제 풀에 지쳤는지 허락도 없이 침대 위에 폭 쓰러졌다. 쉬이 잠들 수 없는 이상이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것만도 가만히 두지 못해 꼼질 거리며 방해하다가 새벽이 채 되기도 전에 잠들었다. 그것이 마침내 등 뒤에서 성가시게 굴기를 그만두고 조용한 숨소리를 낼 때 쯤에나 뒤를 돌아 그것을 보았다. 곁에 있는 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것은 세상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자면 정말로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긴 것은 정말이지 ■■과 똑같아서. 착각에서 깨기 위한 현실감이 필요해진 이상은 검지 손가락을 뻗어 그 볼을 콕 질렀다. 뺨은 부드럽고 또 말랑해서, 누르면 누르는대로 들어갔다. 처음이었다. 맨살갗에 닿은 것은. 그것은 볼을 힘주어 눌러도 조금 인상을 구길 뿐 잠에서 깨진 않았다. 아주 조금의 기척에도 깨고 말았던 생전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것은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했고 그저 그 먼 옛날 처음 만났던 시절과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그것은 날붙이를 두려워했다. 철없는 아이처럼 굴었고, 침대 모서리에 조금 부딪혔을 뿐인데도 엄살을 부렸다. 애정을 표현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고 항상 솔직한 말로 이상을 대했다. 어쩌면 저 안에 숨겨진 팔 역시 지금 이 볼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운 살일지도 몰랐다. 문득 시선은 그것의 손목을 향했다. 항상 입고 있던 하얀 원피스 대신 빨간색 줄무늬의 파자마를 입은 모습이 어색했다. 끝이 타버린 잠옷 아래로 드러난 팔다리는 여전히 붕대를 감은 채였다. ⋯역시 똑같은가. 그러나 무엇을 기대했을까.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만이 신경이 쓰여서, 결국 오른쪽 손목의 붕대를 조금 뜯어내고 말았다.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손목을 보면서도 그것이 깨진 않았는지 예의주시했다. 그는 다가올 진실이 두려워서 차라리 그것이 깨길 바랐으나 그것은 손목을 매만지고 붕대를 걷어내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안이 보일 만큼 붕대를 풀어냈을 때 그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맨살을 마주했다.

   그것에겐 아픈 과거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이상은 한때 ■■의 전신에 난 고통의 흔적들이 사라지길 간절히 바랐으나 지금 이상이 원했던 진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붕대 아래 감춰진 살이 상처 하나 없는 보드라운 살결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가짜라는 명확한 증거였다. 그것은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니라,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의 가짜였다. 다 알면서도 그것이 아려왔다. 산산조각이 나서야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기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살아 돌아오길 바라기라도 했을까. 이상은 조용히 풀었던 붕대를 다시 감았다. 그것은 여전히 곤히 잠든 채 숨을 뱉고 있었다. 영락없는 살아 있는 자의 숨소리. 더 견딜 수가 없어진 그는 결국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그것이 이 버스의 새로운 일상이 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원래 있었던 사람인 만큼 수감자들은 그것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젠 방에 갇혀 있을 필요도 없었기에 그것은 자유롭게 버스를 돌아다녔다. 돈키호테의 개인실에 가서 해결사 기념품들을 구경하거나 홍루와 다도를 즐기기도 했다. 로쟈의 방에 다같이 모여 게임을 할 때도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는 근무 시간에 좌석에 앉아 밖으로 지나가는 경치를 구경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저녁 쯤이 되면 이상의 방으로 돌아왔다. 묻지도 않은 그날 일과를 떠들곤 때론 피투성이로, 때론 상처 투성이로 돌아오는 그를 걱정했다. 그는 반겨주는 이가 있는 것을 매우 어색해 했으나 그럼에도 싫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찌 싫을 수 있겠는가. 그는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다정이 기껍게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그것에게 대답하곤 했다. 그러다가도 우스운 착각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것과 함께 했던 며칠은 잠깐 보인 환상에 젖었다가 스스로를 깨워내기에 벅찬 시간들이었다.

   며칠 후엔 베르길리우스의 면담이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모두가 자는 새벽 그를 조용히 불러서 그것에 대해 물었다. 그것은 어떻지, 라고 물어온 말에 그는 신경질적인 대답을 참아냈다. 뭐가 어떻단 말인가. 그것은 그냥 가짜일 뿐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진 모르지만 잘 꾸며 낸 환상과 다름이 없었다. 사실 누구보다 그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베르길리우스 역시 알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되돌릴 방법을 밤낮없이 모색했으니까. 죽은 사람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많은 슬픔과 애도는 다 쓸모 없어졌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어떤 기적을 바랐다. 하지만⋯ 그래.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상은 그것이 가짜라고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확실히 조금 예민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베르길리우스의 바람까지 뭉갤 정도로 잔인하지도 못했다. 대답이 없는 그에게 베르길리우스는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내일 잠시 본사에 수송될 예정이 있어서."

 

   그것을?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버스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더 이상 그녀가 본사에 갈 이유는 없어보이네만⋯⋯"

 

   마지막 강제 소환 때 보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좁은 독방 안에서 고통에 소리치는 비명이 여전히 선명했다. 끔직한 비명이 한 번 일고 난 뒤엔 전신을 포박한 사슬에 대롱대롱 매달려 기절했다. 그리곤 며칠 내 앓다가 사나흘 쯤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더랬다. 회사의 임원들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건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모든 기억을 다 추출해내면 어떤 이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그 자체로 특이점이 된다는 것 자체는 몰랐던 것 같지만. 그 사실이 치가 떨려 베르길리우스에게 따졌지만 그 역시 그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분노에 이를 부득 가는 그 모습에 덩달아 심한 염증을 느껴서, 그 뒤로 그 이야기는 화젯거리로 올리지 않았다. 어쨌든, 결말이 어떻게 되었든 그의 말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모든 수송이 그런 식이었다고 했다. 비명까지 지르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라고 했던 것 같지만⋯⋯ 또 다시 그 비슷한 일이 반복 될 것이 뻔해서, 이상은 드물게 확실한 말로 거부 의사를 전했다.

 

   "미라 양이 본사에 갈 때마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가장 잘 알지 않소. 가게 되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오. 또 심하게 아플지도⋯"

   "그것을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지."

 

   너는 더더욱 아니고. 베르길리우스 역시 표정이 썩 좋진 않았지만 의견을 굽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가 가장 열심히 반대했으리라는 것 쯤은. 그렇기에 이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리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사실이 한심하고 침통했지만 결국 한숨 한 번에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베르길리우스는 이상에게 이전에 ■■가 썼던 것과 같은 족쇄를 전달했다.

 

   "⋯이것도 해야하는거요? 그녀에겐 더 이상 이렇다 할 전투 능력이 없소. 설령 도주한다고 해도 그대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방침이니까. 베르길리우스 역시 날 선 모습을 보였다. 조금만 더 언쟁을 했다 간 피바람이 불 것이 뻔해서, 이상은 결국 족쇄를 받아들고 말았다. 그것은 아침 8시가 되도록 깨지 못하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강제 소환은 9시였고 그 일 때문에 베르길리우스가 자리를 비우는 탓인지, 금일 수감자들은 휴일이었다. 버스에 갇혀 개인 시간을 보내는 것도 휴일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잠든 때에 몰래 채우는 것이 나을까. 어쩐지 비열한 짓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결국 그것이 깰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르고 잠에 젖은 그것은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연신 헤실거렸다. 그 모습이 또 사랑스러워서, 그는 침대에 걸터 앉은 채 아무도 보지 못할 웃음을 흘렸다.

   깨우기 시작한 것은 8시 반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깨우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것은 아침잠이 매우 많았고, 언제 잠들든 점심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한 번도 억지로 깨운 적은 없었기에 아침에 일어난 모습은 본 일이 없었다. 이상은 처음엔 그것을 부르며 말을 건넸다가, 반응이 없자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태양이 이미 중천이오."

 

   그것에게 8시 반은 이른지 잠에서 깨길 몹시 어려워했다. 어쩔 수 없이 이상은 이불을 걷고 그것의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우는 소리를 내며 오만상을 쓰던 그것은 그대로 이상에게 몸을 맡기듯 앞으로 푹 쓰러졌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쓰러지는 그것을 받아 품에 안았다.

 

   "조금만 더 자자⋯ 응?"

   "⋯오늘은 갈 곳이 있어서, 힘들겠지만 일어나야 하오."

   "갈 곳?"

 

   그것은 여전히 비몽사몽한 채로 이상의 품 안에서 중얼거렸다.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이상은 그저 말을 삼켰다. 이제부터 그것에게 족쇄를 채워야한다는 사실이 몹시 어렵게 느껴졌다.

 

   "⋯⋯본사에서 그대를 만나고 싶다는 모양이오."

   "나를?"

   어렵게 말문을 뗐으나, 의외로 그것은 반가운 기색을 조금 비쳤다. 솔깃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는지 고개를 들고 여전히 몽롱하지만 밝아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스카우트 같은 거야? 그럼, 나도 이상이랑 같이 일할 수 있는거야?"

 

   기뻐하는 것이 도리어 아팠다. 무엇보다 그는 그것이 그와 똑같은 처지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매일매일 악몽 같은 고통에 무참히 찢기고 다시 되살아 나길 반복하며 온갖 기괴한 장면과 참상을 같이 보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그는 문득 정말로 림버스 컴퍼니가 그것에게 수감자로서의 길을 제안하진 않을까 걱정되어, 그것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마시오. 무슨 제안이 되었든, 일단 거절하고 나에게 상담해주길 바라오."

   "응? 응⋯ 그래."

   "⋯약속이오."

 

   그것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약속이라는 한 마디에 배시시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일순 무거워졌던 분위기는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는 한 마디에 풀렸다. 그는 아릿하게 웃으며 제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족쇄를 채울 때 그것은 이유를 묻긴 했으나 이상이 설명하지 않고 시선을 피하자 더 캐묻진 않았다.

 

   "그래도 이런 건 처음 차 봐! 신선한 느낌이겠다, 그치?"

 

   그것은 부러 밝게 말하며 웃긴 했지만 퍽 유쾌하진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내색하지 않고 저를 데리러 온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나와 있던 수감자들 역시 손목에 채운 족쇄를 보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또 무슨 일을 당할지 걱정되는 양 버스 문까지 배웅해주는 이들이 몇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버스에서 완전히 내릴 때까지도 환하게 웃으며 자유롭지도 않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일부러인 것처럼 크게 움직이는 바람에 사슬이 길게 늘어져 베르길리우스의 손 마저 잡아 당겼지만 그는 싫은 기색 없이 그것을 데려갔다.


 

   그것은 꼬박 3일 후에나 돌아왔다. 베르길리우스가 그토록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 역시 흔친 않은 일이었다. 이상은 그들이 돌아오진 않았나 초조하여 휴일에도 버스에 계속 앉아 있었다. 책 한 권을 들고 앉아 있긴 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지나다니던 수감자들이 걱정에 몇 마디 건네도 새벽까지 그 자리에 앉아 선잠을 잤다. 어쨌든 그것이 돌아온다면 가장 먼저 맞이하고 싶었다. 무슨 일을 당해서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니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떠난지 딱 3일이 되는 늦은 새벽에, 버스 문이 드디어 열렸다. 창문에 기댄 채 옅은 잠에 들었던 이상은 약간의 진동에 깨어났다. 눈앞에는 약간 어두운 낯빛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것이 있었다. 손목은 여전히 구속된 채였고 어디서 났는지 새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창가에 앉은 이상을 보자마자 놀란 표정으로 계단을 올랐다. 베르길리우스는 그것이 완전히 버스에 타자 손목에 채운 족쇄를 풀어주었다.

 

   "이상? 왜 여기 앉아서⋯"

 

   이상은 길게 늘어진 소매 안쪽으로 선명한 붉은색이 보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 손목을 매섭게 잡아챘다. 통증을 느꼈는지 그것은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신음했다. 그는 말없이 빠르게 원피스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날 선 눈빛이 매서웠는지, 그것은 아무 말 없이 가만 서 있었다. 온 팔에 감겨 있었던 붕대는 손목의 약간 위쪽 팔에만 남아있었다. 피로 붉게 물든 채로. 며칠 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인지, 아니면 걱정에 이성을 잃은 것인지 그는 망설임 없이 감긴 붕대 끝을 찾아 잡았다. 잠깐 잡은 새에도 손가락이 젖는 듯 했다. 겨우 지혈해 낸 것을 뭣하러 풀어내냐며, 베르길리우스는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는 그것 대신 이상을 떨어트렸다.

 

   "오늘은 돈키호테의 방에라도 가서 자는 게 좋겠습니다."

   "어? 어⋯ 난 괜찮⋯"

   "⋯파우스트 씨 옆방입니다."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는지, 그것은 말을 끝맺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복도로 들어갔다.

   둘만 남자, 이상은 베르길리우스에게 따지듯 물었다.

 

   "지혈이라니, 무슨 얘기요."

   "살아 있는 사람이 맞는지 궁금했다더군."

 

   이상의 표정이 기어코 무너졌다.

 

   "그래서 일부러 상처를 냈다는 말씀이시오?"

   "미리 말하지만 내가 한 게 아니다. 내게 따져 물어도 어쩔 수 없어."

   "그게 고문과 무엇이 다르오!"

 

   그는 참지 못하고 고함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베르길리우스가 한 게 아닌 것도 알았지만 막아주지 못한 것이 못내 속상했다.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은 같이 간 그 뿐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침대에 잠깐 잘못 부딪힌 것도 아파하는 그것이 도대체 살을 갈라 낸 상처를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비틀거리며 어느 샌가 바닥에 떨어졌던 책을 주워 일어났다. 모처럼 그것이 돌아왔는데도 쉽사리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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