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ZE(2)
아지랑이
그것은 도쿄의 여름 거리에 서 있었다. 다만 나구모 요이치와 만나기 전의 긴 곱슬 머리를 하고 있었고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늘 가지고 다녔던 장도도 없었고 눈밑 짙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것은 그냥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여름날의 소녀였다. 얌전하고 차분한, 그리고 다정한. 코토다마 나기사가 만약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면 꼭 그런 모습이었을 것 같았다. 원래의 나기사와는 정말로 많은 것이 달랐지만 분명히 나기사였다. 그런 확신이 나구모에겐 있었다. 다만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든 가짜거나 환상, 둘 중 하나겠지.
누군지 모르는 초췌하고 음침한 남자에게 이름을 불린 소녀는 육교 위에서 멈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사글사글 웃고 몇 걸음 내려와 나구모 요이치의 앞에 섰다. 여전히 말은 하지 않는 것인지 소녀는 익숙한 수어로 나구모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코토다마 나기사와 함께 있던 긴 시간 동안 여러가지 수어와 사인을 배웠지만 마지막으로 본 것이 삼 년 전이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타인과 대화 다운 대화를 해 본 일도 매우 오래 됐기에 이럴 때 무어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랐고 목소리도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다만 그는 많은 게 불안하고 두려웠다. 머뭇거리고 어물거리는 동안 소녀가 떠날까봐, 실수하여 겁을 먹고 도망칠까봐, 눈 감은 사이 여름날 아지랑이처럼 사라질까봐. 그는 당황한 나머지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얼간이처럼 움직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떨어트렸다. 떨어트린 비닐봉지에서 싸구려 컵라면과 유통기한이 거의 다 된 단팥빵, 뭔지 모를 약병 따위가 튀어나왔다. 나구모 요이치는 결국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낫 쨩, 아, 아니…”
그는 익숙한 애칭으로 소녀를 불렀다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나기사는 그를 모르는 눈치였고 너무 갑작스럽게 성큼 다가가서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무쪼록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나기사 양… 혹시 글자로 말을 써주는 건 어려울까?”
나구모 요이치는 그것이 글을 잘 못 읽고 특히 한자라면 아는 글자가 거의 없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 컵라면 따위를 사러 나온 길에 수첩이니 볼펜이니 하는 게 있을 리가 없어서, 그는 급히 스마트폰이라도 꺼내 건넸다. 나기사는 잠시 내밀어진 핸드폰을 보더니 곧장 메모장 어플을 찾아 켜서 화면을 누르기 시작했다. 생전에 코토다마 나기사는 글자를 잘 몰랐을 뿐더러 구식 폴더폰을 들고 다녔으니 능숙하게 스마트폰을 다루고 글자까지 곧잘 쓰는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낯설었다. 그토록 그리던 사람이었던 건 틀림 없지만 바닥까지 끌리는 긴 곱슬머리도 밝은 낯도 입은 적 없던 옷도 모두. 어쨌든 핸드폰을 다시 돌려받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나를 알아?
나구모 요이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나기사에게 대부분의 사실들을 에둘러 속였다. 몇 마디 나눈 바로는 소녀는 킬러라든지 일본살인연맹이라든지 하는 것에는 전혀 아는 게 없는 듯 했다. 물론 나구모 요이치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창자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어쩌면 그게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증오와 미움으로 점철된 관계였다. 차라리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거야. 이번에는 정말로 그것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가. 나구모 요이치는 제 연락처를 알려주며 꼭 메일이나 라인을 남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처음 이야기 할 때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긴 했지만 결국 그날 밤에 라인을 받았다. 옛날 같으면 문자를 주고 받는다든지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꽤 기껍고 즐거웠다. 나구모 요이치는 오랜만에 쓰레기로 가득한 집을 치우고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밤 늦게까지 문자를 주고 받다가 나기사로부터 밤 인사가 왔을 때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누웠다. 내일도 어디선가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오늘은 꿈을 꾸지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일찍 눈을 떴다. 평소라면 한참을 누워 있다가 늦은 오후 쯤 되어서야 느릿느릿 일어나거나, 하루종일 자거나 했을텐데 몸이 가뿐하고 개운했다. 만나자고 하기는 했지만 그는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만난지 아주 오래 됐고 무엇보다 코토다마 나기사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아주 오래 알고 지냈으면서도 나기사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곳에 추억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 후회됐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지금이라면 상처 뿐이었던 시간들을 바꿀 수 있어. 그는 오랜만에 아침을 차려 먹고 깨끗하게 씻은 뒤 곧잘 입곤 했던 넉넉한 품의 하얀 셔츠를 입었다. 다른 옷은 죄다 구겨지거나 피 묻은 채로 몇 달을 세탁 하지 않고 처박아둬서 입을 게 못 되었다. 점심이 되기 전에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메세지가 왔다. 울면서 사죄하고 있는 귀여운 검은 고양이 스탬프도 함께였다. 나구모 요이치는 저도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웃는 것은 3년만이었다. 그는 나기사를 잃고 나서 웃은 일이 없었다.
약속 장소는 어제 만난 육교 아래였다. 늦을 것 같다고 했으니 조금 늦게 나왔어도 됐겠지만 그는 굳이 한참 일찍 도착해 육교 아래에서 기다렸다. 3년 전부터 지독하게 피웠던 담배도 집에 두고 나와서 할 게 없었기에 주변 식당이나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꽤 오래 서서 기다렸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써 몇 년이나 기다렸으니까. 소녀는 새로 약속한 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나구모 요이치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나구모 요이치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마주 인사했다. 뛰어오느라 벅찬 숨을 뱉으며 미안한 기색을 보이는 나기사에게 그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방금 왔어.”
그 말에 안심했는지 나기사는 헤프게 웃었다. 그것이 또 가슴이 저려서, 나구모는 먼저 앞장서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나기사가 살아있을 적에 곧잘 데리고 갔던 식당을 권유했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좋아!
무언가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가 알아 볼 수 있는 말은 좋다는 사인 뿐이었다. 나구모 요이치는 자리에 앉고 나기사가 뭘 고르는지 조용히 지켜봤다. 그것은 생전에 그 가게를 가면 반드시 바지락 등의 어패류로 국물을 낸 담백한 라멘과 만두를 시켰고 곁들여져 나오는 삶은 달걀은 남겼다. 처음으로 그 가게에 데려갔을 때 나구모 요이치가 추천했던 메뉴였고 나기사는 그 이외의 메뉴를 시키는 일이 없었다.
들어간 이후로 나기사가 메뉴판을 골똘히 쳐다봤다. 대신 써줄지 물어보려던 차에 주문서를 꺼내 메뉴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문서와 볼펜을 나구모에게 건넸다. 그는 떨떠름하게 주문서를 받았다. 쇼유라멘과 교자만두. 라멘은 가는 면, 매운맛, 차슈 추가, 계란 제외. 원래 음식을 주문할 때 이런저런 요청을 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는 대충 아무 메뉴나 적고 직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은 늘 그랬듯 빨리 나왔고 입맛에 맞는지 나기사는 제법 즐겁게 식사했다. 나구모가 실없는 농담이나 사소한 이야기들을 하면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주문서용 종이에 몇 가지 말을 적어서 보여주기도 했다. 계산하고 나가는 길에 나구모는 식사 하고 난 테이블을 돌아봤다. 남긴 것 하나 없이 깨끗했다.
식사 후에는 적당한 카페를 골라 들어갔다. 나구모 요이치는 마찬가지로 나기사 뒤에서 뭘 주문하는지 지켜봤다. 소녀는 별 고민 없이 레몬에이드를 담았다. 뒤에서 보고 있던 그는 함께 먹을 음식을 권했다.
“디저트 어때?”
고민 끝에 담은 건 자몽 타르트였다. 그리고 조그만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나구모 요이치에게 건넸다.
“내가 사도 되는데.”
사양하는 나구모에게 나기사는 굳이 카드를 쥐여주곤 먼저 자리에 앉았다. 체크카드였고 앞면은 보라색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이왕 카드를 받았으니 궁금한 게 있었다. 그는 카드를 뒤집었다. 카드 뒷면은 검은색이었는데 하얀색 글씨로 영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히카와 나기사.
성씨가 다른 게 의문스러웠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아무거나 하나 담았다. 온통 다른데 정신이 쏠려 있으니 제 자신이 뭘 시켰는지도 몰랐다. 그는 일부러 음료가 나올 때까지 카운터 근처에서 기다리다 자리에 앉았다. 기다란 잔에 가득 담긴 노란빛 레몬에이드, 귤과 자몽을 같이 곁들인 둥그런 타르트 조각, 따듯한 카푸치노. 나기사 앞으로 에이드를 밀어주자 늘 그랬듯 잔 위에 데코로 꽂힌 레몬 슬라이스를 먼저 집어 먹었다. 자몽 타르트는 포크로 조금씩 잘라 먹었고 맨 위에 꽂힌 초콜릿은 먹지 않았다. 나구모는 적당히 커피를 마시며 실없는 이야기들을 건네다가 능청스럽게 품 안에서 수첩 하나와 펜을 꺼내 나기사에게 한문 이름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나기사 양, 이름을 한자로 써줄 수 있어?”
소녀는 곧장 종이 위에 이름을 썼다.
氷川 凪紗.
그가 기억하는 이름은 코토다마 나기사言霊 凪咲였다. 마음 어딘가가 심히 아파왔다. 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 없는 걸 알면서도 내심 어떤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는 걸 실망하고 나서야 알았다. 이것은 그가 기억하는 나기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정말이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똑같은거지? 나기사라고 하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고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어느 쪽이든 비참하긴 매한가지였다. 진실이 어떻든 이것은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그리고 나구모 요이치만 없다면 앞으로도 별일 없이 평범한 생을 살다 평범한 죽음을 맞을 터였다. 알면서도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는 제 자신이 소녀에게 무엇을 투영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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