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KAMOTO DAYZ

녹빛 여름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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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우습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게 시덥잖은 질투라는 것도. 하지만 알았을 땐 모든 게 너무 늦어 있었다. 나구모 요이치는 자신이 지독한 늪에 빠져 있음을 몰랐다. 코토다마 나기사라고 하는 그 불쾌한 늪지대 심핵에는 오래 전 그의 이름에 새겨진 죄가 있었고 죄책감이 여지껏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언제든지 나가려고 하면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늘 그랬듯이 코토다마 나기사의 목을 베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지 못하고 망설이는 동안 수렁은 나구모 요이치의 몸을 깊게 삼켰다.

그는 코토다마 나기사를 살연에 데리고 갔다. 그 뒤의 일은 몰랐다. 듣기로는 여러가지 실험을 한 모양이지만 그는 일부러 모르는 척 했다. 가끔 사카모토 타로나 시시바가 소식을 알려주어도 그런 걸 왜 알려주냐며 도리어 짜증을 냈다. 시시바는 그가 짜증내는 이유를 알았기에 더는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짜증을 내든 화를 내든 사카모토 타로는 주기적으로 코토다마 나기사에 대한 소식을 들고왔다. 그것이 네가 져야하는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한 번은 충동적으로 코토다마 나기사를 보러 간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잠긴 방에 웅크려 앉아 얼굴을 무릎에 처박고 있었다.

“잠든건가?”

잠이 든 것인가 싶어 투명한 창에 눈을 가까이 댔을 때 그것은 어떻게 기척을 잡아챘는지 눈을 번뜩 뜨곤 나구모 요이치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검은 눈동자에 하얀색 세로 동공이 졌다. 한밤 중의 검은 짐승과도 같이 빛나는 눈을 마주쳤을 때 나구모는 드물게 놀라 벽에서 물러났다. 한순간 빛난 눈은 곧 꺼졌다. 그것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한쪽 발목엔 족쇄가 있었고 그 족쇄는 벽 구석에 있는 기둥과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코토다마 나기사는 천천히 걸어오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어로 말을 걸었다. 당연히 그는 일본 수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것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 수어는 전혀 모르는데.”

“…….”

코토다마 나기사는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다시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잠깐 드러난 손목과 맨발에 있는 새파란 멍을 모르는 척하곤 지나갔다. 오래 전 8월의 일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언젠가 JCC에 편입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전문 플로터로 편입했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수업도 듣고 학교 환경 미화업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쯤 해서 나구모 요이치는 은밀한 호출을 받았다.

“코토다마 나기사를 맡아주면 좋겠는데.”

“아? 그게 무슨 소리일까나.”

“그 아이는 기술이 뛰어나. ORDER에 소속시켜도 모자람이 없겠지.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누군가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거든.”

그는 말을 듣다 말고 인상을 구겼다.

“그것이라니, 완전히 물건 취급인데.”

“상관 없잖아? 사실이 그러니까. 자신도 그걸 바라고 있고. 실력은 확실하다. 방해는 되지 않을거야.”

“미안하지만 난 이미 도구가 6개나 있잖아? 나기사 양…”

이름을 부르는 것이 힘겨워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에 대한 거라면 사카모토 군이 좀 더 흥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언령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 너 뿐이니까. 아무래도 통제 가능한 사람이 좋다고 판단해서 이미 얘기해뒀어.”

“하? 잠깐… 난 별로 동의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그 애에게서 주인을 빼앗은 건 나야. 날 따를 리가……”

“글쎄. 그건 별로 상관 없는 눈치였는데. 그렇지, 나기사?”

언제 왔는지 발소리가 들려오는 뒤쪽에 코토다마 나기사가 서있었다. 그것은 영혼 없는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좀처럼 잘 마주치지 못하는 눈만 구석으로 굴리고 있는 채로.

나구모 요이치는 필사적으로 코토다마 나기사를 무시했다. 그는 친하게 지냈던 동기를 죽이고 아무 관련 없는 그 아이를 자유롭게 해달라는 마지막 소원마저 저버렸다. 그는 명령대로 코토다마 나기사를 확보하여 살연에 넘겼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가지 수모를 겪고 살인자의 길에 떠밀려졌다. 주인의 원수를 섬기고 그가 뜻하는 대로 행동하는 굴욕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아무런 저항도 반항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제발로 그것이 떠나길 바랐다. 상처주는 언행을 잔뜩 했지만 그것은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나타났다. 질릴 쯤에 그는 모든 걸 포기하고 그것을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소유하고 있는 주인의 태도가 냉랭하니 주변 사람들도 그것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모르는 사이에 사카모토 타로나 시시바가 종종 챙겨줬을 뿐 그것은 완전히 소외당하는 채로 ORDER에 합류했다. JCC에도 달리 제대로 적응하는 건 아니었다. 그것에겐 친구가 없었고 학창 생활이라고 추억할 만한 일도 거의 없었다. 그것은 성적이 꽤 좋았지만 그 뿐이었고 수업을 하는 중에도 호출이 있으면 곧바로 임무에 나가야 했다. 실력이 퍽 괜찮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는지 현장에서 코토다마 나기사는 놀라울 정도로 실적이 좋았다. 탄탄한 체술, 거침없고 과감한 검, 그리고 절대복종의 언령. 까다로운 임무일 수록 그것은 빛이 났다. 나구모 요이치와의 합도 좋아서 나기사는 나구모가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사각지대를 배제하고 잔가지들을 쳐냈다. 연계 공격도 발군이어서 나기사가 한 번 베어낸 것을 나구모 요이치가 마무리하는 그림이 매번 그려졌다. 모든 일이 끝나면 달리 플로터를 부를 필요 없이 그것이 나서서 현장 정리를 전부 하고 떠났다.

“읏차. 일도 끝났고 라멘 먹으러 가자~”

“플로터들 불러야 하니 잠시 기다려.”

“에~ 왜? 나기사 양이 있잖아.”

“너…”

사카모토 타로는 당연하다는 듯 비죽 웃는 나구모 요이치를 노려봤다.

“그럼 얘는 여기 두고 가자는…”

“나기사 양~ 괜찮지?”

그럼 나기사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전투 중이 아니라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고 수어를 쓰긴 하지만 종일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 말고는 의사표현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떠나는 발걸음이 편치 않아서 사카모토 타로는 결국 도와줄 플로터들을 몇 명 불렀다.

“네 입장을 알고는 있는데… 나구모 녀석이 심하게 굴면 싫다고 해도 돼.”

대답이 없는 그것이 답답했는지 사카모토는 한숨을 픽 쉬었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후에 플로터들이 오면 대충 맡기고 오라며 라멘집 위치를 알려주고 떠나는 차에 탔다. 조수석에 앉은 나구모 요이치는 일부러 창문을 등지고 고개를 운전석으로 돌린 채였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운전대를 잡은 시시바에게 몇 마디 떠들었지만 토할 것 같이 기분이 불쾌했다. 그는 차가 출발하고 현장이 보이지 않게 될 때 쯤 창문을 봤다. 창문에 비친 얼굴은 썩어 들어갈 것처럼 어두웠다. 그날따라 사카모토 타로의 식사가 유독 길었지만 그것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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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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