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리 너머의 종수가 손끝으로 창을 톡톡 건드렸다. “저기.” 규는 노트패드에서 눈길을 들었다. 종수의 무기물처럼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한다. 종수와 그를 가로막고 있는 십오 센티미터 두께의 유리를 창이라고 부르는 게 가당키는 한지 규는 의문이었다. 실험 공간을 연구대상이 사는 테라리움과 연구자가 그를 관찰하는 사무실로 양분하는 유리는 창보다는 벽이라고 부
이을 예정은 없지만 백업은 해둠… 규는 말하자면 종이책 파였다. 독서란 적당히 거친 종이에 눌러 쓰인 글자를 음미하며, 오른손으로는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며 살며시 건드리는 동시에 왼손으로는 이미 읽은 페이지를 추억하며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는 게 맛이다. 촉감을 통해 비로소 이야기는 온도를 갖고 살아난다. 번거롭게 편집하고 인쇄하는 전통이 아직도 그럭저럭 인
히트체크 (2024.1.25) 최종수가 경기에 나가지 못한 것은 고등학교 삼 년을 통틀어 두 번이다. 1학년 때는 도진고와 연습경기를 하다 공중에서 저쪽 센터와 부딪혀 어깨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입학한 지 두 달이 채 안 지났을 때였다. 2주간 쉬는 중에 치러진 무준고와의 연습경기에서 종수는 벤치를 지켰다. 또 한 번은 2학년 때다. 쌍용기 대회, 무
* [대괄호] 안의 대사는 영어입니다. 종수는 눈을 번쩍 떴다. 오늘은 악몽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너무 설레서 잠이 안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렇게 깬 게 지금이 처음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정신이 너무 또렷했다. 종수가 다시 잠들기를 포기하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세 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어제 열한 시쯤 침대에
종수는 그 후 욕조에서도 이규를 졸랐다. 익히 있는 일이었기에 이규도 당연하게 응했다. 종수는 뽀득한 내벽에 꽉 들어차는 그을 한 번 더 느끼고 난 후에야 만족한 듯이 제 몸을 맡겨줬다. 물론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마음에 찰 만큼 이리저리 손장난을 치는 건 덤이었다. 덕분에 욕조의 물이 식고 나서야 섹스 전에 했던 것들이 모조리 똑같은 순서로 반
시기상 베트남의 우기는 완벽하게 지났지만, 그 말이 비가 완전히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바다와 인접한 곳이 다 그렇듯 이곳의 날씨 역시 변화무쌍했다. 시시때때로 여우비가 내리는가 하면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희뿌연 안개가 자세를 낮추고 온통 축축한 녹림을 유영했다. 녹림. 그것은 나흘 내내 그들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사이공 최남단에 위
가로등 몇 대가 새벽녘을 어스름하게 밝힌다. 강변을 따라 가지런하게 심어진 초목은 북반구에 있는 나라 대다수가 지금 어떤 계절을 보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냥 푸릇푸릇하다. 땀으로 잔뜩 절은 머리카락에 열대야가 송골 맺혔다. 종수가 축축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가 정수리 부근에서 털었다. 땀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기후 위기를 맞은 11월 중순 서
이규랑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된다니까.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수업 시간에 자리를 자주 비우게 되어 발표 수업이 있을 때마다 큰 역할을 맡지 못하지만, 발표 주제를 ‘사다리 타기’ 따위로 결정할 때만큼은 반드시 일선으로 나서서 조원들이 바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일도 거의 없었으며 시험 시간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