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오토시를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거절할 몸상태가 아니었다. 마요네즈 냄새를 맡자마자 젓가락을 들고 싶은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고 전단지를 보여주며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직원은 전단지의 뒷면에 도장을 찍고 돌아갔다. 가게 이름과 확인 완료 글씨가 선명한 빨간색으로 정가운데에 찍혀서 누가 봐도 이 종이가 무언가의 목적에 쓰였다고 말하는 듯 했다.
사람들은 대로변이나 골목 속에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다양한 음식 냄새가 짙어지자 텅 빈 위를 자극했고 다시 배고픔이 몰려왔다. 활기찬 소음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묻혔지만 허기짐은 가려지지 않았다. 이 이상 걸으면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느껴져서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인파를 탈출했다. 실례합니다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르겠다. 꼬르륵—. 단단한 벽에
그 남자가 준 음료수는 냉장고에 들어간 뒤로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를 할 때 잠깐 냉장고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뚜껑이 따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는 뜻이다. 그 남자에게 받은 것들은 전부 먼지만 쌓이다가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냉장고 위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플라스틱 해바라기도 깨끗하게 닦아내긴 했다. 본
“아, 그렇게까지 피곤해 보이지는 않고요… 조금 눈에 거슬리는 정도? 원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 얼굴이 반쯤 죽은채로 다니잖아요. 그거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에요,괜찮아요!” 막말을 퍼부은 눈 큰 남자가 비닐봉지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더니 멋대로 내 주머니에 넣었다. 길에서 한 번 마주친 것 뿐인데 은혜 갚은 두루미처럼 행동하는게 당황스러워서 가져
운이 좋게 그 날 이후로 그 남자와 마주치지 않았다. 이번달은 집에 일찍 갈 생각 말라는 사내공지를 받았기 때문에 밤 늦게 퇴근을 해서도 이상한 사람에게 시달릴거라는 두려움은 괜한 걱정이 된 셈이다. 걱정거리가 하나 줄어들자 점심시간에 먹는 밥이 맛있게 느껴졌다. 별 것 아닌 돈부리나 라멘을 텔레비전 프로그램 출연자처럼 완식하면 배가 너무 불러서 소화가 될
현대 사회는 각박하고 정이 없다고들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며 살았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술을 입에 댄 순간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게 되니까 저렇게 펑펑 울 수도 있겠지. 어떻게든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떠넘기듯이 남자의 손에 꽃을 꽂아두고 가려는데 손이 붙잡혔
“사랑을 믿으시나요?” 이상한 말을 하는 남자는 옷차림이 멀끔했지만 술냄새가 났다. 기분 나쁜 술냄새는 아니었지만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엄청난 바보짓이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옆으로 한 걸음 옮겼다. 그러자 취객이 잽싸게 앞을 가로막았다. 야근을 하면 좋은 일이 없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말로 꺼내진 않았다. 그것도 바보짓이기 때문이다. “…
1980년, 일본.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유난히 냉해 피해가 심각하던 해였다. 여름임에도 온도가 많이 올라가지 않아 농작물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 해의 의학적인 면을 살펴보자면, 천연두가 종말을 고한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후 이상으로 인해 새천년의 시대인 21세기를 맞이하기 전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며 수군대곤 했다. 후지와라 아키
그 글은 내 이모할머니의 집 다락에서 발견 된 수첩에 적혀있었다. 이모할머니라 해봤자 나는 사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모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할머니의 말로는, 아마 이모할머니 또한 내가 태어났다는 것조차 모를 수도 있을거라고 한다. 거기에 대해서 그 어떤 유감도 없지만, 가끔 주인 없는 1층짜리 단독주택에 청소를 하러 가는 엄마의 뒤를 따라 이모할
김시윤 씨는 오늘 수소문 끝에 최하나 씨를 찾았다. 그녀가 최하나 씨를 찾은 이유는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사기라도 당한 걸까? 헤어진 가족? 원수? 그 무엇도 아니다. 단지 그녀는 인터넷에 올라온 오래된 인류멸망프로젝트 구인 글을 보고 어째서 아직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는지를 묻기 위해서 최하나 씨를 찾았다. 생각해보면 아주 터무니없는 일이다.
6호선 봉화산행 열차의 두 번째 칸은 적막했다. 다른 붐비는 노선에 비하면 6호선은 사람이 적은 편이기도 했지만, 오늘 유독 그랬다. 김은 그 가운데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덜컹거리는 열차소리가 한쪽 귀로 들어왔다 반대쪽으로 나가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고서야 그는 간신히 생각의 끄트머리 를 잡았다. 오늘은 아주 힘든 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한다면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