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내일을 써내려가

그래서 너 누군데…….

네임리스 X

TAKE OFF-ER by 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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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시선이 엇갈렸다. 시켜 둔 음료 세 잔의 높이만 빠르게 줄어 갔다. 컵에 물기가 흘러내렸다. 아무도 말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결국 누군가는 말을 꺼내야만 했다. 정적 끝에 총대를 맨 건 아이카와 시오였다.

“…그러니까… 어… 내가 테… 쿠로랑 사귄다고?”

“그랬… 습니다만…….”

시오가 쿠로오 테츠로를 한 번, 코즈메 켄마를 한 번 쳐다보았다. 켄마는 시선을 내려 아예 시오를 외면했다. 몰라, 이 대화에 별로 끼고 싶지 않으니 둘 다 나한테 말 걸지 마. 켄마의 일갈에 쿠로오는 그저 난처하게 제 목덜미를 주물렀을 뿐이다. 시오는 한결같은 제 소꿉친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쿠로오는 문득, 그걸 보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우리 아이 쨩은 단 거 좋아했는데. 이런 데서 취향이 드러나나? 하지만 그걸 쿠로오가 알 리 없었다. 시오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애매했다. 아이 쨩이라고 불러도 되나? 쿠로오는 가벼운 생각을 이어가며 시오에게 물었다.

“있지, 혹시 뭐라고 불러주는 쪽이 좋아?”

시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쿠로는 날 뭐라고 불렀는데?” 쿠로오가 슬쩍 웃었다. “아이 쨩.” 시오가 눈을 깜빡였다. 말뜻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이(愛) 쨩. 물론 그게 제 이름은 맞지만—아이카와는 愛川이라는 한자를 썼으므로— 그걸 직접, 타인에게, 그것도 평생을 소꿉친구로 살아온 이에게 듣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떡해, 테츠로 진짜 미쳤나 봐. 나는 평생을 네가 날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아마 쿠로오가 들었다면 미치고 팔짝 뛸 생각이었으나, 입 밖으로 나가지 않기에 생각이 아닌가? 시오가 내뱉지 않은 그 말은 쿠로오를 화병의 늪에서 구해냈다. “역시 그냥 시오 쨩 쪽이 좋겠어……. 케이지도 날 그렇게 불러 본 적 없다고. 어색하단 말이야.”

…케이지?

이번엔 못 참았다. 쿠로오는 결국 “뭐?” 하고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켄마도 고개를 돌려 시오를 바라봤으니 말 다했다. 정작 당사자인 아이카와 시오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낯으로 둘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뭔가… 문제 있어? 시오의 질문에 쿠로오와 켄마가 서로를 마주봤다. 음. 이거 말해주는 게 낫겠지? 아무래도. 시오가 불안하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왜…? 뭔데. 그냥 말해주면 안 돼? 켄마가 다시금 시선을 휴대전화로 돌렸다. 쿠로가 말해. 쿠로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늘 이런 건 나 시킨다니까…….

“너희 사촌이야.”

이번엔 시오가 되물을 차례였다.

“…엥?”

“시오랑 아카아시. 사촌이라니까.”

켄마가 옆에서 툭, 한 마디 보태줬다.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켄마의 한 마디가 천군만마라도 되는 것마냥. 시오가 아메리카노를 아예 컵째로 들이켰다. 쿠로오는 그 와중에도 ‘뜨거운 게 아니라 다행이네.’ 같은 생각이나 했다. 이 시오가 제가 사랑하던 시오가 아니라고 해서 ‘시오’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쿠로오의 시오 걱정은 이른바 불가항력이었다.

기어코 원샷을 해 내고 얼음 하나를 와그작 씹어 문 시오가 입을 열었다.

“정리하자면.”

차가운 걸 들이켜서인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쿠로오는 습관처럼 손을 뻗으려다 멈추었다. 시오는 신경 쓰지 않고 문장을 이어 나갔다. 여기선 내가 케이지랑 사촌이고, 쿠로랑 사귄다는 거지. 자, 또 내가 알아야 할 거 알려줘. 켄마는 여전히 켄마라고 부르지? 난 쿠로 뭐라고 불렀어? 테츠로? 내가 평소에 테츠로를 그렇게 불렀거든. 테츠로, 하고. 아, 진짜 중증이다……. 쿠로오는 손을 책상 위에 올려 턱을 괴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평소에 ‘테츠’라는 애칭으로 불리다 보니 정직하게 이름 세 글자로 불리는 제 이름은 또 다른 감정을 들게 했다. 켄마가 눈동자만 굴려 쿠로오를 보더니 짜증스런 낯을 했다. 쿠로 웃는 거 진짜 짜증 나……. 시오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긴, 본래 이런 쪽으로는 그다지 눈치가 없긴 했다. ‘쿠로오의 시오’도 고백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같이 등하교하지 말자’는 좀 심하긴 했어.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테츠.”

이 애칭을 내 입으로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가 말하면서도 어색했다. 쿠로오 테츠로를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시오만 불러주던 애칭이다. 그러니까, ‘쿠로오의 시오’만이. 이제는 한 명 더 늘어났지만. …테츠. 테츠, 테츠…. 시오가 애칭을 몇 번 입안으로 굴려 보았다. 역시 어색했다. 제가 살던 곳에서의 쿠로오 테츠로는 아이카와 시오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 가족과도 같은 사이. 아니, 가족이라 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을 사이였다. 쿠로오는 언제나 시오의 선택을 응원해 주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시오의 편을 들어 주었다. 피겨 스케이팅을 그만두고, 아이스 쇼에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도 누구보다 축하했다. …누구보다는 아닌가? 케이지가 있으니까. 뭐, 아무튼. 시오에게 있어 쿠로오 테츠로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쿠로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지금껏 ‘시오가 알아 온 쿠로오’는 그랬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쿠로오는 그게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에서 애정이 뚝, 뚝 떨어지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게 더 문제 아닌가? 제가 ‘자신의 시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쿠로오는 이 아이카와 시오도 결국 ‘아이카와 시오’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다. 시오는 이곳의 쿠로오가 살짝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곳의 나는 이런 눈을 보면서도 몇 년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거지…….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있잖아, 테…츠.”

애칭을 부를 때 미묘하게 불편해하는 걸 눈치챈 쿠로오가 시오에게 면죄부를 건넸다.

“그럼 그냥 테츠로라고 해도 돼. 네가 날 뭐라 부르든 아무도 신경 안 쓸걸.”

그 말에 켄마가 고개를 들어 쿠로오를 한 번, 시오를 한 번 쳐다보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마 모든 사람이 엄청나게 신경 쓰겠지만, 뭐. 켄마의 알 바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켄마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음, 그러면 역시 테츠로가 좋아. 네, 네. 쿠로오 씨는 아무래도 상관없답니다. 고맙다고 덧붙이곤, 시오가 물었다. 돌직구였다.

“테츠로는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쿨럭, 컥, 뭐라고?”

헛숨을 잘못 들이켰다. 쿠로오는 기침하다 기침을 잠재워 보겠답시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고, 그대로 사레가 들려 두 배로 기침을 해 댔다. 시오가 물을 가지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켄마는 시오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다 쿠로오의 등을 두어 번 쳐 주었다. 음, 이 질문은 좀 힘들 만했어. 놀랐어도 이해해, 쿠로. 전, 혀 위로가 안, 쿨럭, 되거든, 켄마? 쿠로오는 시오가 가져온 물을 마시고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정말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쿠로오는 ‘시오’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벌써 세 번째로 허공을 응시했다. 쿠로오는 시오에게선 도저히 도망칠 수가 없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시오가 ‘제’ 시오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명명백백히 알면서도, ‘시오’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쿠로오는 언제나 시오에게 약했다.

“…솔직하게?”

“솔직하게.”

“…….”

쿠로오의 침묵이 길어졌다. 시오가 끈질기게 쿠로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쿠로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시오의 시선은 집요해졌다. 켄마는 모르겠고 이 상황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었다. 쿠로는 날 여기 왜 데려온 거야? 집에 가고 싶어……. 켄마가 침묵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려고 자세를 바로 한 순간, 쿠로오가 입을 열었다.

“아, 시오 쨩, 정말 미안. 기억이 안 나.”

“…어?”

“대답을 피한 게 아니라, 나도 생각이 잘 안 나서 언제부터 널 좋아했는지 되짚어 봤는데 말이지…….”

쿠로오가 난처하게 웃으며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미안, 정말로 기억이 잘 안 나. 기억의 시작부터 네가 있어서 그런가 봐. 아마 그때부터 좋아했던 게 아닐까? 쿠로오가 곰곰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중학생이 되기 이전부터 널 좋아했던 것 같으니까…, 짝사랑만 6년을 넘게 했나. 아, 네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도 1년을 더 기다렸지, 아마. 시오의 머리가 멍해졌다. 최소, 6년 이상? 나를 어떻게 그렇게 오래 좋아한 거지? 그 정도의… 음? 엥? 나를? 내가? 그 정도의? 가치가? 음?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기간이라 그런가—사실, 시오는 기껏해야 2, 3년일 줄 알았다— 사고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시오를 본 쿠로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손뼉을 쳤다.

짝, 소리가 났다. 시오 쨩, 이상한 생각 그만. …어떻게 알았어? 널 몇 년을 봤는데 모르겠어? 하긴.

…뭘 하긴이야? 쟤넨 지금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나? 이 대화의 위화감은 켄마만 알았다. 생각을 포기한 켄마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켄마. 어디 가?”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런 모습은 또 평소랑 같아서, 켄마는 조금 웃었다. 평소와 달라진 게 그리 많지도 않네. “집에. 두 사람은 어떻게 할 거야? 계획 없으면 가서 같이 저녁이나 먹어.” 쿠로오와 시오는 잠깐 눈을 마주했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켄마!

시오가 바뀌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셋이었으니까. 셋은 처음 카페에 도착했던 모습 그대로,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꽤나 풀어진 채로 카페를 나섰다.


…그런데 말이지, 시오.

응? 왜, 켄마?

네가 여기 왔다는 건, ‘우리’ 시오는 너랑 바뀌어 있다는 말일까?

…어? 음? 그… 그렇게 되나?

하…….

그러네. 우리 아이 쨩은 그쪽의 시오 쨩이 아카아시랑 사귄다는 거, 모를 거 아냐. 시오 쨩도 아카아시랑 시오 쨩 사촌인 거 몰랐던 것처럼.

…시오. 너희 얼마나 오래됐어?

어……. …몇 년, 켄마, 나 몇 살이지?

스물둘.

그럼 7년… 쯤… 됐지…?

…큰일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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