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밤
분명 난 씨피를 의도했던 게 아닐텐데 (발할라 벤담, 칸트)
NCP를 의도하고 썼으나 어찌 읽으면 세미 벤칸일수도 있겠습니다…
‘제레미 벤담’의 처소에서는 이른 오전 시간마다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제법 즐거웠다. 예쁘장한 외모를 단장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고,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논쟁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여기에선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로 올라온 것을 ‘태어남’이라고 친다면,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주장하며 통제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흡족한 것이었으니까.
그는 어릴 적 상당히 옥죄어진 상태로 살았다. 타고나길 조숙하긴 했으나, 법률가였던 조부와 부친의 철저하고 엄격한 교육은 자신이 일상적인 교우관계조차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옥스포드에 입학하였을 때 두 분은 자신을 풀어주시는 듯 했으나, 이번엔 자신의 나이 자체가 너무 어려 대학 사람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지지 못했었다. 그 때의 그는 내심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커서는 완벽히 그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여기에선 교우관계의 문제 따위 없이, 그저 자유롭게 교류하면 되는 것이었고. 그러니 그냥 지금 즐거우면 되는 거 아니겠어? 머리를 단정히 세팅한 후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던 벤담은 일어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아침의 햇살이 그의 눈에 들어와, 저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손등으로 햇빛을 살짝 가린 후에야 그는 방금 연 창문 틈 사이로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훅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살짝 몸을 떨었다.
철학 폴리스의 겨울은 건조했다. 그냥 건조한 정도도 아니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를 정도로 건조했다. 사시사철 다소 습했던 영국과는 천지차이의 습도. 입술과 손끝의 거스러미가 성가셨던 벤담은 고민하다 과학 폴리스로 찾아갔었다. 보통 사람들이 쓰는 돼지나 고래 기름을 굳이 쓰고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학하는 사람들이라면 뭔가 방법을 찾지 않겠어? 아직 방법이 없다면……. 만들어 달라고 하지 뭐.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그곳엔 방법이 있었다. Petroleumjelly라는 물질을, 과학 폴리스 사람들은 그에게 건넸다. 피부를 건조하게 만드는 요인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준다는 신물질이라나. 처음에 작은 팟에 담긴 형태로 준 것을 만족스럽게 다 쓰자, 이번엔 그쪽에서 벤담에게 먼저 찾아왔다. 지난번 그 물질을 ‘바세린’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사용 후기를 듣고 싶다고. 벤담은 이런저런 감상을 말하였고, 상대는 만족하며 작은 스틱 통을 내밀었다.
“오로지 입술만을 위해 바세린에 이것저것 다른 성분들을 혼합하여 립스틱 모양으로 굳힌 겁니다. 들고 다니시면서 간편히 바르시면 될 것 같아요. 전에 드린 것을 잘 쓰시길래 뭐라도 더 드리고 싶어 만들었습니다. 대충 립 밤, 이라고 부르려고요. 이것도 사용후기 좀 주시겠어요?”
“좋아요! 아주 편리해 보이는데요. 감사합니다!”말하며 그는 활짝 웃어보였다.
*
벤담은 그 립밤을 늘 들고 다니며 발랐다. 정말로 입술 각질이 말라붙어버리는 일이 적어져, 다음에 그 사람이 또 오면 꼭 좋았다 말해줘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도 습관적으로 립밤을 바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로 한 목소리가 들렸다.
“립스틱인가? 네가 꾸미는 것을 좋아한단 건 알고 있었다만.” 임마누엘 칸트였다.
“아~ 칸트 씨. 산책중이세요? 립스틱은 아니고요! 자, 보세요.” 그는 뒤로 휙 돌아 칸트를 마주보곤 쓰던 립밤을 끝까지 빼 보여주었다. “하얗죠? 뭐 같아요, 이게?”
“보기엔……. 그냥 굳은 동물 기름같아 보이는데. 버터라던가. 너는 동물 또한 도덕성의 주체라 하지 않았나? 별일이군.”
“어, 완전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얼굴을 찡그리며, 벤담이 말을 이었다. “이건 립밤이란 물건이라고요. 칸트 씨는 처음 보려나, 과학 폴리스 분에게서 받아왔어요. 여기 겨울이 보통 춥고 건조한 게 아니어서 말이에요.”
“그래, 하긴, 독일에서도 건조할 때 보습을 위해 여인들이 고래나 돼지 기름 종류를 바르긴 했다만.”
“아니, 동물기름이 아니라니까. 이거 석유에서 추출한 거예요. 바세린이라고 들어봤어요?”
“금시초문인데.”
“석유 증류는 아시죠? 석유를 증류하고 남은 잔여물을 정제해서 만든 거래요. 과폴 사람들이 이거 안전하다고, 자기가 먹었는데 안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팟에 담아 준 걸 시험삼아 써 봤는데 웬걸? 입술이 깔끔해지는거야~ 그래서 잘 썼다 했더니만 이런 형태로 만들어 주더라고요.”
“여기선 어차피 죽어도 그대로 다시 깨어나지 않나? 죽어서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는 것과 그들이 그저 자고 일어난 것을 어떻게 구분하지?”
“에이, 사람이 죽었다는 자각 정돈 있죠. 그리고 이 물질은 ‘현실’에서도 누군가 직접 먹은 모양이던데요. 안전성 증명을 위해 수시로 먹고서도 장수했대요.”
“그렇다면야… 믿을 수 있지.”
“그쵸? 효과도 제법 좋답니다. 여튼, 아까는 완전 오해하신 거예요. 살아있는 생물을 죽여 만든 적 없다고요! 그런 걸 쓸거면 제가 과학 폴리스까지 찾아갔겠어요?”
“그렇긴 하군.”
“어, 그러고보니 칸트 씨 입술도… 꽤 텄는데.”
정말이었다. 칸트가 워낙 단장에 관심이 없어서였긴 하지만, 그의 입술은 각질로 꽤 지저분한 상태였다. 이거 안 따갑나? 벤담은 생각하곤, 아까 말하던 중 넣어뒀던 립밤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거 발라 줄게요. 잠깐 가만히 있어 봐요.”
“어? 아니, 난 괜찮은,”
“아니 가만히 있어 봐요. 따가울 텐데 이걸 왜 그대로 두고 있어.”
벤담은 자연스럽게 한 쪽 손으로 칸트의 어깨를 잡고는 반대 손으로 공들여 입술에 립밤을 발라주었다. 한 겹으로 안 될 것 같아, 여러 번. 칸트는 당황스러워했지만, 이미 붙잡힌 거 어쩔 수 없으니 가만히 그 손길을 두고 있었다.
립밤이 입술 위를 몇 번 오간 후, 벤담은 칸트에게서 손을 떼고는 활짝 웃었다. 이제 됐다!
“거 참, 괜찮다니까….” 머쓱한지 칸트는 드물게 손으로 머리 뒤를 긁적였다. 입술에 얇은 막이 씌인 느낌이 생소했다.
“좀 뒀다가, 솜 같은 걸로 쓱 닦아내 봐요. 거스러미 싹 없어질 테니. 아니, 잠시만, 솜은 가지고 있어요? 화장솜이요.”
“… 딱히 없는데.”
“아이, 진짜. 글만 쓰지 말고! 안되겠다. 따라와 봐요. 솜 좀 챙겨줄게요. 립밤이 지금은 하나밖에 없어서 이걸로 발라줬는데, 여유분 있으니까 그것도 챙겨주고요.” 짐짓 짜증섞인 목소리로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한 벤담은, 먼저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칸트는 어어, 잠시만, 같이 가자고, 말하며 허둥지둥 뒤따랐다.
잠시 후 벤담을 따라가 립밤에 솜까지 잔뜩 챙김받은 칸트는 촉촉해진 입술이 낯설고도 편안하게 느껴져서, 연신 손을 입술에 가져갔다. 이 건조한 날씨에 입을 크게 벌려도 입술이 찢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편리한 것이니. 칸트는 손을 흔드는 벤담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곤, 도로 산책길에 나섰다. 여기 발할라에선 산책이 일정대로 정확히 흘러가는 일이 별로 없구만, 생각하면서.
그나저나 뭔가 아까 묘한 상황이었던 것 같긴 한데,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아주 잠시 스쳤지만, 그는 곧 잊어버렸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저도제가벤칸스러운걸쓰게될줄은몰랐어요…
물론 NCP를 쓰려고 했기 때문에 담백합니다만 약간의 여지는? 있는거같네요?
자유롭게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짧지만 즐겁게 읽어주셨다면 기쁘겠어요:D
+) 또다시 아무 설명 없이 넣은 맥락… 바세린 먹방은 실화입니다. 실제로 바세린의 발명가는 그 물질로 사업을 하며 안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 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바세린을 퍼먹었고, 61세까지 장수했습니다.
24.10.03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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