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거 리 추 정

고죠우타

Dusk by 니아
72
1
0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오리지널 캐릭터가 비중있게 나옵니다.


“우타히메. 요새 외로워?”

보건실에서 나와 문을 닫자마자 들린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인사도 생략하고 걸어온 말의 내용이 무례하기 그지없는 것이라 우타히메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예상대로의 인물. 고죠 사토루다.

이런 것을 묻는 저의는 상당히 명백했으나 솔직히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우타히메한테도 볕들 날이 오겠다든가, 우타히메에게 접근하는 남자라니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하니 조심하라든가, 히스테리 부리는 걸 들켜 상대가 도망가지 않게 열심히 얌전한 척하라는 식으로 놀려올 줄 알았던 것이다. 늘 허를 찔러오는 눈앞의 남자에게, 우타히메는 한숨을 한 번 쉬고서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진심으로 기분 나쁜데.”

고죠는 별로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이 혀를 낼름 내밀었다. 질렸다는 기분을 숨길 생각도 없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우타히메는 돌아섰다. 그러나 곧 팔을 붙들렸다.

“방금 건 취소. 그래서 누구야? 소문의 그 사람.”

“너한테 그걸 말해야 할 이유가 있어?”

“당연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타히메한테 작업을 거는 사람인데 다른 속셈이 있을 가능성이 크잖아? 둔한 우타히메 대신 이 상냥한 후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주――”

“그딴 거 부탁한 적 없거든!!”

“어우, 무서워라. 그렇게 히스테리 부리는 거 상대도 알아? 만에 하나 진짜 좋은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본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

예상을 벗어나나 했더니, 방심하게 만들어놓고 결국 또 이런 식이다. 우타히메는 이 이상 화내는 걸 포기하고 이제껏 붙들려 있던 팔을 힘차게 뿌리친 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다행히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으나 특유의 얄미운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축하해! 우타히메한테도 볕들 날이 다 오네.”

정말, 최악이었다.

“혹시 무덤 파는 게 취미야?”

보건실에서 나오는 우타히메를 불러 세운 것이니 필연적으로 그곳은 보건실 앞이었다. 그리고 보건실에는 대체로 보건 교사가 있다. 바로 그 보건 교사의 질문에, 고죠는 새삼 무슨 말을 하느냐는 어조로 답했다.

“우타히메는 놀리는 맛이 있으니까 늘 이렇게 되어버린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치고는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데.”

쇼코의 지적에 고죠는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기울였지만, 당연하게도 상대는 그까짓 술수로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10년을 넘게 동기로, 동료로 함께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괜히 시간 버릴 일 없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놈이야?”

아까보다 한층 낮아진 고죠의 목소리에 쇼코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나른하게 대답했다.

“너한테 말해야 할 이유가 있어?”

방금 다른 사람한테 들었던 대답. 그러나 쇼코가 고죠에 대해서 아는 만큼, 고죠도 이에이리 쇼코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본가에 괜찮은 일본주가 하나 들어왔다는데, 마실 사람이 없네.”

“……뭐, 일단 들어와.”

아마 이것도 예상했다는 듯한 태도로 쇼코가 보건실의 문을 열었다. 탁자 위 비어있는 찻잔 하나가 우타히메가 다녀간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굳이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리를 꼬니 쇼코가 선수를 쳤다.

“일단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전혀 모르진 않을 거 아냐.”

“으음.”

눈치가 빨라서 대화가 편하다고 해야 할지, 이쪽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고죠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도쿄 고전의 복도에서 보조감독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을 때였다.

“그래서 그 사람이 요새 매일같이 교토 고전으로 온다니까요?”

“굳이 자기가 올 필요가 없는데도?”

“올 필요가 있다고 해도 매일 올 필요는 없잖아요. 올 때마다 커피랑 간식을 이만큼씩 사 들고 오니까, 이제는 남자들도 그 사람 언제 오냐고 기다리는 거 있죠.”

좁은 세계이다 보니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면 금방 소문이 퍼지게 된다. 고죠도 언뜻 들은 바가 있었다. 모 회사 건물에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나는데, 직원 하나가 ‘보이는’ 쪽이라 수소문해서 고전을 찾아왔다든가 하는 이야기였다. 일회성 잡담이라는 생각에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치려 했는데, 귀를 닫을 수 없기에 저절로 들리는 대화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라면 그냥 사귀고 볼 텐데.”

“선배도 참! 아아, 그치만… 솔직히 이번엔 선배한테 찬성이에요.”

“‘이번엔’은 무슨 뜻인데?”

이야기가 달아오른 것은 단순히 새로운 사람이 등장해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남의 연애 이야기가 고죠에게 의미가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이 문제였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아마 돈도 많은 것 같고. 그 정도면 여자가 줄을 설 텐데, 진짜 반했나 봐요.”

“이오리 씨는 미인에 상냥하니까.”

“그렇긴 하죠. 정작 본인은 좀 곤란해하는 것 같았지…… 저기, 고죠 씨……?”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당황하는 이들을 보며 고죠는 남몰래 숨을 들이마시고, 경박함을 가장하여 물었다.

“재밌는 얘기를 하는 것 같길래. 나한테도 자세히 알려줄 수 있어?”

나이는 서른넷. 회사에선 나이에 비해 꽤 중역을 맡은 모양이다. 보조감독들의 이야기를 들은 게 일주일쯤 전이고, 그 남자가 매일같이 고전에 들락거린 것이 그 시점에서 2주 가까이 된다고 했으니, 고죠가 쇼코와 마주 앉아 이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 우타히메가 그 남자와 대면한 지는 벌써 한 달쯤 되었다는 소리다.

“그 정도면 웬만한 건 다 아는 것 같은데. 이 이상 뭐가 궁금해?”

“그래서 지금 우타히메의 심정이 어떤지? 보조감독들은 곤란해하는 것 같다고 했지만, 우타히메가 솔직한 편은 아니잖아.”

“선배는 엄청 솔직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고죠.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쇼코의 표정은 어딘가 미묘했다. 말을 재촉하듯 고죠가 빤히 바라보자 답지 않게 망설이듯 하던 쇼코가 이윽고 말했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

의외로 말문이 막혔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런 이유도 없어서였다. 아니, 사실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로 여기까지 왔을 뿐.

우타히메에 대한 마음 정도는 자각하고 있다. 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은 ‘좋아한다’의 범주 안에 드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관계의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고는, 고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관계가 좋았다. 만나면 서로 별것도 아닌 것으로 말씨름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신뢰할 수 있고, 필요할 땐 약간의 어리광도 부릴 수 있고, 그러면서 서로를 크게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 마음 편한 딱 이 정도의 거리감을 고죠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서 온 기묘한 확신인지, 우타히메도 이대로 영영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우타히메의 심정을 알고 싶은 이유는, 지금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이 관계가 바뀔지 아닐지를 알고 싶다는 뜻이다. 바뀌지 않을 거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만약 바뀌게 된다면? 우타히메가 바뀌려 한다면? 그 이후를, 그런 가능성조차도 고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막을래.”

“선배를? 그 남자를?”

“어느 쪽이든.”

“무슨 자격으로?”

“쇼코.”

“월권이라는 거야. 아무리 좋은 술을 갖다 바쳐도 그런 거에 동참할 수는 없지.”

고죠의 목에서 낮게 앓는 소리가 울렸다. 불만을 숨기지도 않은 얼굴로 잠시 앉아 있던 그는 이내 커다란 손으로 제 머리를 헤집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소문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것 정도는 괜찮지?”

“……그 정도라면.”

그럼 술은 내일 가지고 올게. 평소보단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서 고죠는 손을 들어 인사하며 보건실을 나갔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쇼코도 알 수 없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서, 쇼코는 자신의 일과를 위해 아까의 대화를 털어버리고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교토로 돌아가는 신칸센에 올라타, 우타히메는 심각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메시지 하나가 떠 있었다.

[저녁에 돌아오신다고 들었는데, 괜찮으면 식사라도 어떠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타히메는 지금 이 연락 상대 때문에 근 한 달간 상당히 곤란한 마음이었다. 이 곤란함이 결코 나쁜 의미만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 심경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상대는, 볼 수 있기는 해도 비주술사다. 이 업계의 일을 완전히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완곡하게, 몇 번이나 그런 의지를 전했음에도 그는 변함없이 이런 식으로 우타히메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우타히메는 손가락으로 슬쩍 자신의 오른쪽 뺨을 쓸었다. 흉터가 남은 살갗은 다른 곳과 감촉이 다르다. 이것이 생긴 후로 초면의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받는 일은 없어졌다. 그게 편할 때도 있지만, 오로지 이것만으로 감당해야 하게 된 것들이 늘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니, 기분이 또 조금 달랐다.

정차해 있던 신칸센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식사 정도는 괜찮겠지. 어쩌면 그 이상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누군가 옆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 피곤하네.”

“……하?”

얼빠진 목소리가 새었다. 그도 그럴 게, 고죠 사토루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무슨 표정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급하게 교토에 갈 일이 있어서. 아, 배고픈데. 우타히메, 뭔가 좀 사줘.”

“알아서 사 먹어……. 난 저녁 약속 있어.”

“……그 남자랑?”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다들 이런 얘기 좋아하지 않나? 난 별로 흥미 없지만, 우타히메한테도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게 신기해서 좀 궁금해졌다고 할까.”

빙글빙글 웃는 얼굴에 짜증이 치밀었다. 지금 이렇게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남자이기도 하고.

이렇게 붙어오는 걸 보니 새로운 놀림거리가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우타히메는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역에 도착해도 곱게 보내줄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섰기에, 방금까지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죄송하지만 후배랑 같이 가게 되어서요.]

어쩐지 싫어서 변명하는 것만 같은 내용에 민망해지려는 찰나,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하니 왠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답장 역시 금방 도착했다. 예상외의 답이었다.

[그럼 후배분도 같이 먹어요.]

역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그의 놀란 모습을 보고서야 후배가 남자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 관계가 아니긴 했지만,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 앞에 이성을 데리고 나타난다는 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 질지 우타히메도 대강 예상이 갔다. 게다가 이렇게 눈에 띄는 남자다.

딱히 그럴 의도가 없었으므로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이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고죠 사토루를 생각대로 움직이게 할 방법을 알았다면 10년 전부터 썼을 것이다. 우타히메는 그런 심정을 표정으로 전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이쪽이 후배인 고…….”

“예에, 우타히메의 후배이자 동료인 고죠입니다~!”

“……고죠, 사토루?”

“오오, 그 반응! 주술계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아보긴 했나 봐?”

“고죠, 예의 좀!”

“네에네에.”

전혀 성실하지 않은 태도로 고죠는 한 손을 내밀었다. 상대는 금방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마주 잡고 살짝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스즈키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우타히메는 고죠의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눈치채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버릴 만큼 길게 안 사이였다. 사람 놀리겠다고 와놓고 왜 본인이 기분 나빠졌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그런 기분은 식사 시간에 드디어 태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죠는 그 출신답게 식사 예절만큼은 좋은 편이었는데, 도대체 그동안의 식사 예절은 어디로 보내버렸나 의아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좋은 교육도 결국 고치지 못한 나불거리는 입이 평소보다도 더 밉살맞게 굴었다. 덕분에 식사 내내 우타히메는 좌불안석이었다.

이런 녀석을 데려온 죄로 계산만큼은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지만 거기서 또 고죠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반성의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스친 것이 부끄러울 만큼 고죠의 얼굴은 의기양양했다. 뭘 으스대고 있는 거야.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지금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고죠가 또 무슨 소리를 지껄여댈지가 두려웠다.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전혀 즐겁지 않았을 텐데도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스즈키를 우타히메는 내심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이오리 씨, 이제 집으로 가시나요?”

“아, 확인할 게 있어서 일단 고전에 한 번 들를 예정인데요.”

“그러면 제가 바래다 드려도 될까요?”

“헤에. 별로 늦은 시간도 아니고, 우타히메가 아무리 약해도 일반인한테 당할 정도는 아닌데 따라갈 필요 없지 않아?”

또 고죠가 끼어들었다. 우타히메의 인내심이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타히메가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그렇긴 하겠죠. 그래도 그냥 이오리 씨랑 둘이서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약간의 정적은 고죠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탓에 생긴 것이었다. 그냥 얘기가 하고 싶다는데 어쩔 것인가. 게다가 방금 일반인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버린 탓에 자기도 따라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무덤 파는 게 취미야? 동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고죠. 넌 임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빨리 가.”

틈을 타 우타히메가 그렇게 쐐기를 박았다. 여기서 더 말해봤자 억지일 뿐이다. 게다가 임무가 있는 것도, 의외로 사실이었다. 지금쯤 보조감독이 역 근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지는 않았다. 다만 칫 하고 혀를 찬 것은, 완전히 무의식중의 일이었다.

“우타히메, 정말로 그 남자랑 만나게?”

“도대체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너랑 상관없잖아.”

“성이 스즈키라잖아. 결혼하면 우타히메, 스즈키가 되는 거야. 그런 흔해 빠진 성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세상 모든 스즈키 씨에게 사과해…….”

“애초에 저 성격 다 사기야. 우타히메는 둔해서 모르겠지만, 꼬셔보겠다고 수작 부리는 거라고. 서른이 넘도록 순진한 우타히메가 거기에 그대로 넘어가서는…….”

우타히메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졌던 그 저녁 식사 다음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하던 우타히메 옆에 나타난 고죠에게 어제의 태도에 대해 한소리를 했더니 대뜸 옆의 소파에 앉아 늘어놓는 소리가 이런 것이었다.

우타히메는 여전히 고죠가 왜 이렇게 삐딱하게 구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간혹 가족이 결혼하면 시원섭섭한 마음이 든다는 사람을 봤는데 그런 느낌인 걸까. 물론 고죠와는 가족도 아니고,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생각도 없지만. 아직은.

“적당히 좀 해. 내 앞길은 내가 알아서 챙겨.”

“우타히메가 뻔한 사기에 걸려들고 있으니까 걱정이 돼서 말해줬을 뿐인데.”

“……솔직히 말해서, 그게 뭐가 나빠?”

잘만 떠들던 고죠의 입이 드디어 멈췄다. 우타히메는 작게 한숨을 한 번 쉬고선, 필요한 서류를 갈무리하며 차분히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게 정말로 사기이고 내가 속아서 나중에 후회한다 해도 그건 내가 책임질 일이야.”

“…….”

“하긴, 너는 그런 성실함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우타히메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교무실을 나서며 고죠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요새 유독 자주 말문이 막히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자꾸만 정론을 들이미는 탓이다. 고죠 혼자만의 문제라면 그런 정론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에겐 정론을 무시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러니 이건 전부 우타히메 탓이었다.

시계를 보니 슬슬 도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신칸센에서 우타히메의 옆에 털썩 앉을 때의 고죠 사토루에게 계획이라곤 없었다. 그저 일단 우타히메를 마주하면 어느 쪽이로든 마음이 다잡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이었는데, 목적은 전혀 달성하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교무실을 나가려던 고죠는,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화제의 인물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우타히메 씨는 안 계신가요?”

상대가 먼저 미소와 함께 물어왔다. 어제까진 분명 성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우타히메는 잠깐 서류 내러. 아마 금방 올 거야.”

“그러면 기다려야겠네요. 고죠 씨는 어쩐 일로?”

“나도 일단은 여기 교직원이니까?”

“하하, 그랬죠.”

고죠가 흘낏 그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보조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커피와 간식거리가 잔뜩 들려있었다. 점심시간을 쪼개서 왔을 것이다. 교토 고전 역시 도쿄와 마찬가지로 산속에 처박혀 있으니 왕복 시간을 고려하면 우타히메를 만나더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을 텐데, 그런 것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정성을 고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없어야 했다. 저런 비효율적인 짓을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야 고죠는 자신이 그 우스운 일을 몇 년이나 적극적으로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장 오늘만 해도 아침 무렵에 끝난 임무 후 도쿄까지 태워다준다는 것을 마다하고 고전의 직원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다 여기에 와서는 흰소리를 늘어놓다 우타히메에게 한 방 먹지 않았는가.

“……우타히메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보기보다 그렇게 얌전한 성격 아니야.”

“그건 뭐, 알고 있습니다. 특히 어제 잘 알았어요.”

어제. 사사건건 말꼬투리를 잡는 고죠에게 우타히메가 울컥하여 반응하는 것을 그도 분명 보았다. 우타히메 나름으로는 참은 것일 테고, 본인은 잘 참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아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할 수 있겠다. 그걸 보고도 그는 우타히메와 둘이서 얘기가 하고 싶다고 말하고, 오늘 또 이렇게 찾아왔다.

“보기보다 얌전하지 않은 점이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칙을 지키는 올곧은 사람이지만, 원하는 것을 위해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점이요.”

그것은, 공감한다. 공감된다는 것에 기분이 나빠졌다. 몇 년 전엔가 쇼코가 넌지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고죠. 넌 우타히메 선배의 좋은 점을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때 어떻게 대답했더라.

‘우타히메의 좋은 점? 하하, 그런 건 쇼코밖에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갔던 것 같다. 기실 그때의 고죠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우타히메가 변하지 않았으므로.

“아, 저기 오시네요.”

복도를 바라보던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서는 가볍게 목례한 후 고죠 앞을 떠났다. 다소 급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다가가는 그를 발견한 우타히메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이미 단순한 인사치레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죠는 눈치채고야 말았다.


“성실하다는 게 뭐야?”

“적어도 수업 시간이 5분이 지나도록 보건실에 늘어져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교사한테 붙을 말은 아니겠지.”

쇼코는 차갑게 내뱉은 후 의자를 반 바퀴 돌려 고죠 쪽을 향하며 물었다.

“성실해질 마음이라도 들었어?”

“……우타히메는 그 녀석이 좋은 걸까?”

고죠는 슬쩍 말을 돌렸다. 확신이 없는 모양이군. 쇼코는 팔짱을 끼며 대답해주었다.

“사람은 원래 자기 좋다는 사람이 좋은 법이지.”

“난 그런 적 없는데.”

“네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건 10년 전에 배운 줄 알았는데.”

안대로 가려진 표정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도 드디어 조바심이란 게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쇼코는 그런 그와는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이 이상 귀찮은 일을 늘리는 것은 사양이었던 쇼코는 수업이나 하러 가라며 고죠를 쫓아냈다.

솔직히 고죠는 자신이 이러다 말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길게 이어져 온 관계이니 관성처럼 유지하고 싶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정작 정말로 바뀌어버리면 자신의 성격상 쉽게 놔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사실 대단한 관계도 아니었으니, 우타히메가 특정 누군가와 특별한 사이가 된다 한들 그들에게는 별 영향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그러나 며칠 후 우타히메가 그 평범한 이름의 남자와 키스하는 것을 목도하는 꿈을 꾸고서 뜻 모를 배신감과 분노로 아침을 맞이했던 날, 고죠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게 가끔 치미는 ‘어떤 욕구들’은 참을 수 있어도 우타히메가 다른 녀석과 그런 짓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고죠는 제 안에 사실은 늘 존재했던 소유욕을 인정했고, 이제껏 그것을 인식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음을 깨달았다. 우연히 우타히메가 변하지 않았기에. 고작 그런 얄팍한 것으로 묶여있던 관계.

우연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는, 고죠 역시 변해야 했다. 그는 드디어 그것을 결심했고.

대차게 실패했다.


고죠는 분명 처음 하는 것도 금방 잘 해내 버리고 마는 인간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혀 모르는 것을 잘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결심했다고 해봤자 계획이라곤 ‘우타히메에게 성실함 보여주기’ 정도뿐인 주제에, 28년간 성실할 필요도 없었고 따라서 성실해 본 적도 그다지 없어 ‘성실함’의 정의조차 애매한 그가 이제 와서 우타히메에게 성실해지려 해봤자 잘 될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도 노력은 했다. 일단은 어디선가 본 대로 일단 커다란 꽃다발을 사서 우타히메에게 보냈다. 그대로 반품되어 집구석에 덩그러니 방치된 꽃다발은 금방 시들어 전부 버렸다.

좋은 술도 사서 보냈다. 이건 먹힐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쇼코의 책상 위에서 발견되었다. 고죠한테 받았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 못 받겠다 했다나. 며칠을 남자한테 속고 있니 어쩌니 주절거리다 돌연 징그러운 짓들을 벌이니 의심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술을 쇼코의 책상 위에 올려두며 우타히메가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받고 나면 분명, 조금만 잘해주면 다 받아주는 거냐고 놀려댈걸?’

야구 티켓도 두 장 사보았다. 사이타마 홈구장에서 열리는 경기였는데, 그 날은 관서 지방에서 임무가 있다고 거절당했다. 확인해보니 정말이었다. 그럼 임무가 없으면 되는 거잖아? 고죠는 서프라이즈로 우타히메가 출발하기 직전에 그 임무를 해치워버렸고, 보답으로 더없는 분노와 경멸을 샀다. 야구 티켓은 그대로 종이 쓰레기가 되었다.

한 번만 더 자신의 임무에 끼어들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후엔 아무리 고죠 사토루라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말이 무서워서는 아니고, 우타히메가 그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을 꽤 오랜만에 봐서 그랬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웠고, 애초에 할당된 일이 워낙 많아 우타히메의 꽁무니만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 날의 사건은 고죠가 대단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고죠의 임무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우타히메도 임무가 있었다. 고죠가 그 장소에 간 것은 정식으로 지원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함께 있던 술사는 고죠 덕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후방에 있던 우타히메는 팔을 조금 다쳤다.

고죠의 얼굴을 보자마자 우타히메는 분함과 약간의 수치가 섞인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그 입에서는 떨떠름한 감사 인사가 나왔다. 고죠는 이럴까 봐 전에도 임무에 대신 가준 것이라며 능청을 떨고 싶었으나, 이번만큼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우타히메의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당분간 붕대를 감고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고죠는 임무의 뒤처리 겸 잠깐 교토에 남아있기로 했고, 시간이 좀 남는다는 핑계로 우타히메의 병원에 따라가려고 했다.

"같이 갈 사람 있어."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하는 사이가 됐다 이거지? 심통이 나는 것을 참고, 평소의 경박을 가장하며 고죠는 우타히메에게 따라붙었다. 결국 그가 아는 방법은 이런 것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또 마주치게 된 스즈키의 눈빛은 예전보다 좀 더 노골적이었고, 그럼에도 고죠를 향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또 뵙네요."

"그러게."

둘은 우타히메를 사이에 두고 앉은 채로 그 이상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대신 둘 다 우타히메에게만 말을 건넸는데, 사이에 껴서 어색해 죽으려 하던 우타히메는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홀로 진료실에 쏙 들어가 버렸다. 둘만 남았을 때, 의외로 고죠가 입을 열었다.

"우타히메 말이야."

서두를 그렇게 시작하자 상대가 바로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천하의 고죠 사토루가 여자 하나 때문에 기 싸움이나 하고 있다니. 우스운 일이었지만 원래 이런 일은 우습다고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우스운 점 아니겠는가.

"저래 봬도 주술사고, 이 정도 다치는 일은 흔해. 물론 그 이상도. 그리고 그쪽은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못 할 텐데."

그런 걸 감당할 수 있겠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으나 명확한 그 물음에 스즈키는 웃었다. 고죠가 첫눈에 간파한 대로, 그도 그렇게 성격이 좋지는 않았다.

"제가 회사에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우타히메 씨가 아니라 회사 동료가 도와주겠죠. 이번에 우타히메 씨를 구해주셨다면서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스즈키는 일어섰다. 퍼뜩 고개를 드니 우타히메가 진료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선수를 뺏긴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미 한참 전부터 뺏겨 있었나.

"고죠 씨는 따로 돌아가신다고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대답도 듣지 않고 쌩하니 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며 고죠는 잠시 고민했다. 저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나, 그런 짓을 해봤자 우타히메에게는 단순히 훼방을 놓고 싶은 사람으로 비칠 뿐이란 것을 그도 지금은 알았다. 아니, 정확히 그런 의도가 맞긴 하지만, 그저 장난으로 여겨지면 곤란했다.

게다가 그는 곧 도쿄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었다. 이미 서로 시시콜콜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확실하니 오늘 하루 약간의 방해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오히려 새로운 대화 주제나 되겠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머리보다는 본능에 의거해 내린 결론과 함께, 고죠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교무실 우타히메의 자리에는 꽃병이 생겼다. 막 봉오리를 터뜨린 꽃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고죠는 우타히메에게 꽃을 주는 사람도 있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말에 야구 경기를 보러 간다는 소리도 들었다. 역시 누구와 함께냐고는 묻지 않았다.

대신 도쿄로 돌아가는 신칸센 안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뭘 해왔는지를 생각했다. 10년을 넘게 만나면서 꽃도 한 번 선물하지 않고 야구 한 번 같이 보러 가지 않은 탓에 지금은 뭘 해도 우타히메에게는 장난이나 비아냥으로밖에 느껴지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그 이유만은 아니려나? 어쨌든.

장난스러운 관계는 그가 어느 정도 의도하기도 했다. 그쪽이 우타히메도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타히메가 어땠을진 모르겠지만 고죠는 그것이 편했다. 편안함에 안주해 다른 방법을 모르게 되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그렇다면 제게 남은 게 있나? 그냥 이대로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가?

"남은 거……."

도착한 자신의 침실에 누워 중얼거리던 고죠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시도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처음 해야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우타히메가 바라는 방식의 성실함. 그런 것은 뻔하지 않은가. 우타히메는 제 손바닥 위라는 듯 굴어놓고 이것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것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답지 않은 짓을 하니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았기에 망설임도 사라졌다. 결과부터 걱정하며 꾸물거리는 것은 고죠 사토루의 방식이 아니었다. 고죠는 당장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역시 직접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일어섰다. 준비물은 필요 없었다.


스즈키는 설렘과 긴장을 함께 안고 이 자리에 있었다. 주말, 야구장, 좋아하는 여성. 모든 조건을 갖추었으나 그래도 아직 데이트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미묘한 이 외출을 완전히 데이트로 만들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마친 채였다.

문제는, 상대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만났을 때부터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까지 묘하게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정신을 차리겠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젓고선 응원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어느새 다시 보면 멍. 아까부터 그런 반복이었다.

나쁜 예감이 들었다.

평소 얌전하다가도 스포츠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돌변하는 상대가,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직접 보면서도 이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일단 불안한 채로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신변상 커다란 위험이 닥쳤다거나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신경을 갉아 먹는 일. 직감과 더불어, 스즈키가 그간 봐온 우타히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선수를 뺏겼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다시금 허공을 바라보는 우타히메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껏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그쪽이 먼저 행동에 나서진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타히메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전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작은 계기가 순식간에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분명 그에게도 기회는 아직 있을 터였다. 아쉽게 진 야구 경기를 뒤로하고, 여전히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 있는 우타히메에게 그가 말을 걸었다.

“오늘 져서 아쉽네요.”

“네? 아, 네, 그렇죠…….”

그리고 침묵. 평소 같았으면 벌써 선수와 감독에 대한 불평을 열 마디쯤은 쏟아냈을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그도 조금은 심술이 나기 시작했다.

“……고백이라도 받은 사람 같네요.”

“네…… 네?!?!”

역시나 멍하니 대답하던 우타히메가 질문의 뜻을 이해한 순간 스즈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발성이 좋아서인지 주위의 몇몇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덕분에 얼굴이 새빨개진 우타히메를 보며, 그는 큭큭 웃었다.

“오늘 제 얼굴 보는 거 처음 아니에요?”

“아, 그……! 죄, 죄송해요…….”

변명도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점이 귀엽고, 놀리고 싶어진다. 이제까지는 그런 욕망도 어느 정도 참고 있었지만, 내내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쳐 주지 않은 오늘 같은 날 약간의 복수쯤은 용서받지 않겠는가.

“역시 인기가 많으시네요.”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니에요?”

“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우타히메를 보며 그는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마냥 즐거울 것만 같았는데, 지금 그를 천천히 잠식하고 있는 이 기분은, 패배감이었다.

아마 ‘평소의’ 우타히메만 알고 있었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울컥한 우타히메가 다른 누군가에겐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만났다면 좋았을걸.’

그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10년이 넘는 시간의 무게를 이런 식으로 느끼게 될 줄은. 어쩐지 피식, 웃음이 새었다. 우타히메가 의아한 듯이 고개를 들어 스즈키를 바라보았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 주의였지만, 가끔은 질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하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살아온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입이 썼지만, 그럼에도 웃는 얼굴로, 그는 오늘을 위해 준비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왜 나는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걸까.

입가에 업무용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스즈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다소 씁쓸했던 주말을 뒤로한 채 맞이한 월요일,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마치고 겨우 점심을 먹으러 나왔을 때 그는 누군가에게 붙잡혀 카페로 끌려왔다. 그리고, 말해줄 필요도 없이 잘 아는 정보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정보를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집어넣는 꼴이 되었다. 잘 아는 정보란 스즈키 본인의 신상에 대한 것들이었고, 궁금하지 않은 정보란 고죠가의 영향력과 그 당주가 행할 수 있는 권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을 위해서라도 알아서 물러나 주면 서로 편할 거야.”

다리를 꼰 채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앉아 맞은 편의 남자, 고죠 사토루가 말했다. 스즈키는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았다. 얼굴의 미소도 다행히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좀 치사하지 않나요?”

“나도 이렇게 유치한 방법은 쓰기 싫은데, 우타히메는 밀면 밀리는 타입이니까~”

이쪽도 급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말투는 전혀 급해 보이지 않았지만 스즈키는 잘 알 것 같았다. 너무 급한 나머지, 이미 그의 회사에서 일어난 심령 사건은 지난 주말 드디어 완전히 해결되어 스즈키가 고전에 갈 일은 더 없으며, 시원하게 차이기까지 하여 우타히메와는 이제 연락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남의 뒷배경을 캐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 텐데, 이래서 아직까지.

“그리고 치사하다는 말도 좀 아니지 않아~? 가진 능력을 쓰는 건 정정당당한 일이지! 이래 봬도…….”

“아, 슬슬 일어나봐야겠어요.”

스즈키는 말을 자르고 일어섰다. 단번에 고죠의 표정이 나빠졌다.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아도 우타히메, 아니 이오리 씨는……. 그런 말을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만뒀다.

“정말로 자신 있다면, 말씀하신 대로, 정정당당하게. 괜찮죠?”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말한 후 그는 화사한 웃음을 한 번 지어준 후 자리를 떴다. 상태를 보아하니 두 사람의 거리가 바뀌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듯했다. 그다지 먼 미래는 아니겠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초조해 보라지. 유치한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보이지 않게 낼름 혀를 내민 것에는, 뭐, 앞으로의 축복을 바라는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마지막 순간. 망설이듯 떨리다가 이내 단호해지던, 그가 반했던 그 심지 굳은 눈빛을 떠올리며 스즈키는 아마 앞으로 다시 볼 일 없는 남자를 뒤로하고 그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 ‘거리추정’이라는 제목은 고전부 시리즈의 ‘두 사람의 거리 추정’에서 따왔습니다. 제목을 정할 때 이것이 떠오른 이후로는 도저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내용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아마도).

* 끝부분은 정말 많이 뒤엎었습니다. 사실 다른 부분들은 별 고민없이 한참 전에 다 써놨는데, 마지막 부분만 몇 달을 지웠다 썼다 했어요. 내용 자체는 뻔하고 상황과 대사도 다 정해놨는데 어떤 식으로 써야할지를 몰라서 이만큼 헤맨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ㅠㅠ 사실 아직 맞는 선택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 이상 끄는 것도 힘들어서… 어쨌든 끝을 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ㅎㅎ…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