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일상
히구루마 히로미 드림
BL드림입니다
이름 있는 고정 드림주
드림주 공 x 히구루마 히로미 수
Dom/Sub 버스입니다
서브인 척 하는 돔 드림주/돔인 척 하는 서브 히구루마 히로미
한국어 명령어
히구루마와 드림주의 평온한 일상에 흠집이 생기는 이야기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히구루마는 플레이에 대해서는 지식밖에 없었지만, 방금 그게 플레이가 아니라는 것과 마유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게 아닌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플레이도 아닌 돔의 칭찬 한마디에 심신이 편안해졌다. 이제까지 내가 만전의 상태라고 생각했던 건 뭐였을까.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날 칭찬했는데 그건 전부 거짓말이었을까. 의심하게 될 정도의 감각이었다.
“히구루마 씨?”
잠시 멍해져 있던 히구루마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유가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를 알고 나니 그 얼굴이 처음 봤을 때보다 한참 더 어려 보였다.
“...돔인 것도 기재해 두면 좋겠습니다. 서브라면 중요하게 생각할 요소니까요.”
마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메모를 추가했다. 히구루마는 질문 하나하나를 메모하고, 이유를 고찰해 메모를 덧붙이는 마유의 손을 보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조건은 이 정도를 알려드리면 되겠고... 히구루마 씨, 혹시 지인 중에 방을 찾는 분이 계시면 소개해 주시겠어요?”
“어렵지 않죠. 비어있는 방이 몇 개나 됩니까?”
이런 조건이라면 누구라도 계약하려고 달려들 테니, 부동산에서 소개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방 수에 조금 모자라게 소개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페트병에 남아있던 물을 마신 히구루마는 마유의 대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히구루마 씨가 처음이예요. 그것도 계약을 해 주신다면 말이지만요... 그저께 도착해서 아직 사람을 찾아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생각해 보니 한명이라도 계약을 했다면 아까처럼 어떤 조건을 말해야 할지 몰라서 헤메지는 않았겠구나. 자신이 처음이란 말에 히구루마는 자꾸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멈추느라 애써야 했다.
“아까 방 갯수를 들었으니까, 믿을 수 있는 지인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조금 개인적인 질문인데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 대학입니까?”
하고 싶은 말을 은근슬쩍 뒤로 뺐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뻔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그 뻔한 수작에 마유는 또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히구루마는 더 참지 못하고 미소를 띄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이것도 좀, 잘난 척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실거죠.”
“일단 말씀해 보세요.”
나름대로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 같은데 저렇게 쑥스러워할 정도라면 어딜까. 마유는 한참 수첩에 의미 없는 모양을 끼적이다가 헛기침과 함께 대답했다.
“동경대 경영학부입니다.”
“그럼 제 후배로군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마유가 쥐고 있던 펜이 종이를 긁어,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까지 어쩔 줄 몰라하던 표정은 금새 선망 어린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말요? 히구루마 씨도 동경대-”
“학부는 다릅니다.”
히구루마는 마유의 말을 얼른 끊고 그가 하려는 말을 짐작해 내용을 정정했다. 스스로가 내뱉은 성급한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가 다르다는 말에 아쉬워하는 마유를 보고 기쁘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것도 승인욕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닐 것 같은데. 그럼 학부를 말하면 어떻게 될까.
“저는 법학부입니다.”
“-법학부.”
마유가 까만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쥐고 있던 펜도 놓아버린 채였다.
“와, 바로 합격하신 거예요? 대단해...”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니고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에 몸에 확 열이 올랐다. 조금 더, 조금 더 놀라고, 감탄하고, 칭찬해 주었으면 좋겠다.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3학년이 되어서 다른 캠퍼스에서 공부하는 김에 더 가까운 데 방을 얻으려고요.”
마유는 히구루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몇 번이고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계속해서 놀라기만 했다. 대학생활에 대해 물어보는 말에 대답해 주면서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었더니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처럼 눈을 빛내며 메모하고, 집중한 채 흥미롭게 듣는 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을 때 히구루마는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나른함과, 지금 잠들면 분명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정도의 행복감에 잠겨있었다.
“아, 이런. 벌써 이런 시간이네요. 야마시타 씨를 불러서 계약할까요?”
그 말에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에서 3시간 반이 넘게 지나있었다.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긴 했지만 계약과는 상관없는 수다를 떨면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 사실에 나른함과 행복감이 마치 욕조의 비누거품이 사라지듯 천천히 꺼져갔다. 히구루마가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걱정하는 동안 마유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걸었다.
“야마시타 씨? 이야기 끝났습니다. 계약하기로 했으니까 와서 계약서 작성해 주세요.”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말할때도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게 아니라 시간이 늦었다는 게 포인트였지. 환경을 보여주는 언행에 히구루마는 언제고 기회가 있으면 조언해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유가 전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문이 열렸다. 마유의 맞은편, 히구루마 옆자리에 앉은 중개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가방에서 계약서 양식을 꺼냈다.
“계약하기로 하셨다니 잘된 일이군요.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축하라니 말이 거창한 거 아니예요?”
마유는 낄낄거리면서도 중개사가 알려주는 대로 계약서의 빈칸을 채워나갔다. 계약당사자들의 이름, 금액, 기간 등을 적던 중 한 칸에서 마유의 손이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계약서를 들여다보니 상세주소를 적는 난이었다. 주소와 건물 이름을 적고 호실을 적을 차례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방을 안 봤군요.”
방을 보고 호수를 결정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서려던 히구루마는 마유가 그럴 필요 없다면서 호수를 적는 데 놀랐다.
“마유 씨?”
“자, 이대로 수속 밟아주세요, 야마시타 씨.”
“잠깐만요, 그렇게 마음대로 방을 정하면 안 됩니다.”
적힌 호수는 201호였다. 구조도 평수로 일률적이라고 했으니 아래에서부터 차례대로 방을 채우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만, 히구루마는 그래도 방을 직접 보고 결정하고 싶었다. 야마시타는 놀란 얼굴로 마유와 히구루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만큼 바로 이의제기는 못 하고 있지만, 히구루마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인 만큼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뻔히 보였다. 히구루마는 다소 빠르게 말을 이었다.
“방 구조가 일률적이라고 해도 좌우 반대일테니 어느 쪽을 선호한다던가, 제일 윗층은 냉난방 효율이 떨어진다던가, 층간 소음이라던가... 여러 조건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직접 보게 해 주시죠.”
“제가 그 방을 드린 덴 이유가 있는데...”
마유는 입 안에서 작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굴려 히구루마를 보고 야마시타와 계약서를 차례대로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야마시타 씨는 일단 계약서를 가지고 돌아가 주세요. 저는 히구루마 씨와 방을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수속은 평일에 해야 하죠? 히구루마 씨가 그 방을 쓰실지 아닐지는 의논 후에 알려드릴게요.”
카페에서 직접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가 없어, 마유는 히구루마와 야마시타와 함께 카페를 나와 야마시타를 배웅하고 중앙의 출입구로 건물에 들어갔다. 출입구를 마주 보고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문 왼쪽, 카페를 접하는 쪽에 계단이 있었다. 마유가 엘리베이터 3층을 눌렀다.
“3층에서부터 내려오죠. 아까 말씀드렸지만 한 층에 방이 3개고, 방이 대충 10평 내외라고 했죠.”
히구루마는 고개를 끄덕일 뿐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다. 마유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더니, 히구루마가 밖에서 실내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현관문을 잡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미리 설치된 에어컨과 냉장고가 보였고, 시야에 막힌 것 없는 창문도 볼 수 있었다.
“좋은 방이군요. 실제로 들은 것보다 넓어 보입니다.”
그 부분만 봐도 동선이나 가구 배치까지 고려해서 만들어진 방인 게 티가 났다. 이 방 하나만 봐도 바로 계약하려고 할 사람들은 많겠지.
“제가 히구루마 씨에게 드린 방은 좀 달라요.”
“네? 어디가 다르다는 겁니까.”
마유는 문을 닫더니 계단으로 한 층을 더 내려갔다. 2층으로 내려간 히구루마는 방 문이 두개밖에 없는 걸 보고 눈을 깜빡였다.
“아까 말씀 안 드렸는데, 2층은 입주 직원들 용으로 일부러 크게 만들었거든요. 카페에서 일 할 사람이랑 건물 청소,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방 3개가 있는 층에 2개밖에 없다. 단순계산으로 면적이 1.5배인데 필수 가구가 추가 배치될 필요는 없으니 그렇게 더해진 면적을 고려하면 체감되는 면적은 더 넓겠지. 마유는 201호 문을 열고 히구루마를 들여보냈다. 안은 확실히 넓었고, 입주 직원용이라고 한 만큼 에어컨도 냉장고도 좀 더 좋은 모델이었다. 히구루마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을 보고 한층 더 강해진 의문감을 마유에게 내던졌다.
“...왜 저한테 이 방을 주신 겁니까?”
“첫 계약자인 학교 선배에게 좀 잘 보이고 싶어서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마유의 말이나 표정에서는 어떤 속셈이나 비아냥을 느낄 수 없었다. 히구루마는 왼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서서 생각에 잠겼다. 왼쪽 팔꿈치를 받친 오른손에서 자꾸 땀이 나는 게 느껴졌다. 마유는 재촉하지 않고 방 안을 둘러보면서 기다렸다.
“...알겠습니다. 여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 남의 동의 없이 함부로 이러지 마십시오. 누군가에겐 부담입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마유는 웃으면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슬슬 해가 넘어갈 시간이었다.
“그럼 히구루마 씨,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시겠어요?”
“...최소한 밥은 각자 내죠.”
그 말에 허를 찔렸다는 듯 마유가 어색하게 웃었다. 밥값도 본인이 내려고 했다니. 물론 가진 게 있으니 이런 호의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방금 말했다시피 누군가에게는 부담일 수도 있다는 걸 알려 주려면, 혹은 히구루마가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마유는 큰길가로 제일 먼저 보인 라멘 체인점을 택했다. 돈코츠 라멘 곱빼기에 차슈와 삶은 계란을 추가하고 밥과 만두까지 더한 다음에 음료로는 콜라를 골랐다. 평범하게 미소라멘 한 그릇으로 주문을 끝낸 히구루마는 자기 몫의 라멘에 차슈와 계란이 더 올라가 있는 걸 보고 작게 신음했다. 마유는 그저 신이 나 웃고 있었고, 히구루마는 라면을 먹기 전에 호의를 베풀기 전에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라는 말을 다시 한번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사는 즐거웠다. 마유는 대학의 구조나 수업에 대해서 물어보고, 도쿄에서 가 보고 싶은 곳이라던가, 1층의 카페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카페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생들이 부담 없이 먹을 만한 식사 메뉴를 팔고 싶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도 충분히 오지 않을까. 영업이 끝난 이후엔 세입자들이 편하게 모여서 놀 수 있으면 좋겠다 등...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한 후에 또 얼굴을 물들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청춘 드라마를 너무 본 것 같죠. 그 말에 히구루마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냐고 웃을 뿐이었다.
건물의 빈방은 금방 채워졌다. 히구루마가 소개한 친구들 외에도 야마시타 씨도 기존 고객 중 몇 명을 소개했고, 조건을 들은 사람들은 차례를 빼앗길까 서둘러 계약을 마쳤다. 그리고 입학식이 끝나고 개강한 지 세 달, 마유가 라면집에서 떠들던 이야기는 현실이 되어있었다.
어디서 사람을 구했는지 카페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싼 가격에 꽤 퀄리티가 좋았다. 아침 메뉴는 항상 햄과 오이, 참치가 들어간 계란샐러드 샌드위치, 점심 이후의 식사 메뉴는 일주일 단위로 요일마다 바뀌었다. 월요일은 파스타, 화요일은 햄버그, 수요일은 카레나 하이라이스, 목요일은 오므라이스, 금요일에는 돈까스 혹은 생선까스였다. 강의가 없는 주말에는 카페가 쉬었다. 대신 입주자들이 모여 커피 메이커에서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시며 공부나 과제를 하고, 친구들을 불러 팀 프로젝트를 하거나 책을 읽는 등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되어있었다. 함께 산 지 3개월이 지난 지금은 다들 익숙해진 얼굴에 동년배니 마음을 놓고 잠옷 차림으로 내려오는 사람도 있었다.
히구루마도 주말에는 카페에 상주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소개한 친구들을 방에 부르기에는 크기가 다른 것도 설명하기 어려웠고, 크다고 해도 성인 남성이 몇씩 모여서 편히 지낼 만한 넓이가 아니었다. 히구루마의 지정석은 입구에서 오른쪽에 배치된 2인석 테이블의 두 번째로 가까운 자리였다. 가장 가까운 자리는 사람들이 들락거릴 때마다 바깥 공기가 들어와 더워지거나 추워졌다. 하지만 두 번째 자리라면 외풍의 영향도 적었고, 무엇보다도.
“선-배. 뭐 읽고 계세요?”
“머리에 턱 올리지 말라니까. 흐트러진다.”
마유는 히구루마가 카페에 앉아있을 때면 그에게 스킨십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서 끌어안거나, 어깨나 정수리에 턱을 올리고 말을 걸거나, 의자 등받이를 짚고 마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바짝 붙어 서거나 했다. 마유는 히구루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다들 마유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주민들을 학교 학부 상관 없이 선배라고 부르면서 따르니 거리감이 가까운 것도 동성간의 스킨십도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집주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것도 있겠지. 히구루마는 당하는 본인이 싫다고 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모르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한화휴제)
마유가 히구루마에게 달라붙으니 히구루마는 2인석에 혼자 앉기 시작했다. 입구 제일 가까운 자리와 카운터 쪽 자리는 마유가 곁에 서 있으면 통행에 방해가 되고, 넓은 테이블에 앉았다가 다른 사람들이 합석했을 때 마유가 오면 그것도 실례였다. 결국 히구루마는 2인용 테이블을 택했고, 혹시라도 합석하자는 사람이 생길까 싶어 테이블 위에 빈자리가 없도록 전공서적이며 노트를 펴 놓았다.
“뭐 읽고 계시냐구요.”
마유는 괜히 턱에 힘을 주어 정수리를 눌렀다. 히구루마가 비어있던 왼손을 머리 위로 드니 마유가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너는 개냐?”
“멍멍.”
겨우 석 달 동안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된 대화였다. 히구루마는 마유의 뺨을 몇 번 쓰다듬다 손을 내렸고 마유는 히구루마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배, 오늘 저녁때 약속 있으세요?”
“약속? 딱히 없어. 왜?”
저녁 일정을 물어보는 말에 히구루마는 그제야 읽고 있던 소설책에서 시선을 떼고 마유를 바라보았다.
“오늘 카페에서 애들이랑 영화 볼 거거든요. 선배도 같이 보자구요.”
카페 벽 한쪽에는 대형 TV가 설치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영화, 드라마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고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주말이 되면 시끄럽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틀고, 다들 제 마음대로 채널을 바꿨다. 방송 소리가 싫으면 개인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거나 한다. 자연스럽게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영업이 끝난 밤에는 몇 명씩 모여서 영화나 스포츠 경기를 보고도 했다. 오늘도 그런 밤이 될 것 같았다.
“그래. 그럴까... 알았어. 언제 시작이야?”
잠깐 망설이는 것 같다가 곧장 시간을 물어보았다. 무슨 영화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마유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고, 다행히 마유는 히구루마의 태도에 별 의문을 품는 일 없이 시간을 알려주고 일어나 다른 사람에게 향했다. 보이는 사람마다 물어볼 생각인가. 마유답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녁, 학생들은 각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지참하고 카페에 모여 있었다. 담요와 쿠션을 잔뜩 가져오고, 테이블을 붙여두고, 그 위에 음식을 늘어놓고, DVD플레이어를 브라운관에 연결하는 등 다들 영화를 감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섞여 돕고 있던 히구루마는 마유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선배! 저랑 술 사러 가요!”
선배라는 말에 반응한 건 히구루마 하나였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마유보다 연상이었지만 선배라는 말이 자기를 부르는 거라고 착각한 사람도 한 명 없었다. 마유는 입주민들 전원을 선배라고 불렀지만 히구루마 외에는 모두 성까지 붙여 부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나서 조금 웃음이 났다.
“부르네, 히구루마. 갔다 와.”
“나 과일맥주 사다 줘~”
히구루마는 과자를 사다달라, 편의점 치킨이 좋다 등 사방에서 아무렇게나 던진 말을 기억하고 그 자리에서 읊어내려 빠뜨린 게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문가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마유를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선배 기억력은 여전히 대단하네요!”
“사다 달라는 건 항상 비슷하니까. 취향 기억해 두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아.”
태연하게 대답하지만 마유의 감탄에 벌써 몸이 따뜻해졌다. 히구루마는 가게와 편의점을 들르며 주문받은 상품들을 하나하나 구입하다가 슬쩍 마유가 좋아하는 치즈 두 개를 바구니에 넣었다. 치즈를 좋아한다는 마유는 술을 마실 때가 아니라도 간식으로 주먹만한 덩어리 치즈를 통째로 들고 씹어먹고는 했다. 기억해 주었다고 기뻐할까, 사 줬다고 고마워할까. 온전히 자신에게 쏟아지는 감탄과 감사의 말을 상상하니 흐뭇해졌다. 막 편의점을 나와 돌아가려던 참에 마유가 전화를 받더니 잠깐 기다려 달라며 편의점 옆쪽으로 돌아갔다. 누구의 전화일까. 생각하며 기다리던 히구루마는 편의점으로 다가오던 고등학생들 중 하나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채려는 바람에 크게 비틀거렸다.
“장난이 심하잖아. 놔라.”
히구루마는 봉투 손잡이를 힘주어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직은 장난으로 끝날 수 있는 단계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첫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달아나거나 당황하기는 커녕 히죽거리면서 히구루마를 보고 있었다.
“뭐야, 아저씨. 잘난체 하지말고. <놔>!”
옆에서 보고 있던 학생이 소리친 말에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아 뇌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소리친 학생을 바라보는 히구루마의 모습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저씨 서브인가 본데!”
“뭐야. 명령받고 싶었구나? <앉아>!”
“아, 아니.”
아니야. 부정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벌써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히구루마는 어떻게든 다리에 힘을 주려고 했다. 짐은 포기하더라도, 편의점 안으로 도망쳐서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속해서 명령받고, 그 중 어느것도 이행하지 못한 신경계는 히구루마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의 돔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면서 삐걱이고 있었다.
“<앉아>”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히구루마는 충실히 딱딱하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음엔 뭘 할까,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어른이 친구의 말 한마디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모습을 봐 신이 난 다른 학생들이 이것저것 떠들었다.
“저기, 그거 시켜 봐. 신발 핥는 거!”
여학생이 꺅꺅거리며 새된 소리로 외친 말에 히구루마는 식은땀으로 등이 젖어가는 걸 느꼈다. 싫다. 이런 곳에서. 신발을. 강제로. 저런 녀석들에게. 더러워. 싫어. 싫어. 누가 도와줘.
“그럴까! 자, 아저씨. <핥아>.”
그 말에 일말의 생각도 없이 명령을 내리며 발을 내민다. 히구루마는 턱이 아플 정도로 힘을 주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복종욕이 높지 않아 아직은 저항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복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부 의사까지 표현하는 모습에 무리가 명령을 내린 돔을 비웃었다. 너무 약한 것 아니냐. 저런 아저씨 상대로. 별 것 아니네. 그리고 친구들의 놀림에 화가 난 돔은 히구루마를 노려보며 연거푸 명령을 쏟아냈다. 엎드려, 입 벌려, 핥아, 굴러... 하지만 히구루마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따를 수 없었다. 시선과 명령이 연달아 쏟아지니 마치 신경줄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 아-”
말이 되지 못하는 소리만 내면서, 학생의 말이 더해질 때마다 경련한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서브드롭 상태였다.
“야, 슬슬 놔두고 가자.”
반응이 없는 히구루마에게 질렸는지, 아니면 너무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했는지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고 히구루마의 옆에 떨어져 있는 편의점 봉투를 주우려 다가왔다.
“<무릎 꿇어>”
언제나와 같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변화가 없어 보이는 표정까지 더해 그렇게만 들렸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면서 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실린 명령에 학생들은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 어?”
방금 전까지 히구루마에게 마구잡이로 명령을 내리던 돔 마저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누군가는 단 한 번의 명령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마유는 휴대폰을 꺼내 영화를 볼 준비를 하던 인원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짐을 들 수 없으니 한 명쯤 더 데리고 편의점 앞에 오라는 말에 전화 너머의 상대방은 아무 의심 없이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유는 엎드린 학생들의 배나 다리를 한 번씩 걷어차고 지나쳐 히구루마에게 다가갔다. 길가의 돌을 차는 정도의 힘으로, 단순한 분풀이 정도였다. 마유는 히구루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히구루마의 초점 풀린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배.”
반응이 없다.
“히구루마.”
눈이 약간 흔들렸다. 마유는 살짝 안도하며 히구루마의 눈높이로 손을 들어 딱,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히로미. <이거 봐>”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그것과 명령에 반응했는지 히구루마의 눈이 한층 더 흔들렸다. 초점이 자신의 손을 향하려고 애쓰는 걸 본 마유는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착하다> 제대로 내 손가락을 봤네요. <굿 보이>”
히구루마의 몸이 떨리던 게 잦아들었다. 마유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히구루마를 칭찬했다.
“불합리한 명령에 저항했네. 대단해. 역시 히로미는 멋져. 짐도 빼앗기지 않았고. 모두 고마워할 거야. 나도 히로미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마유는 욕구가 강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플레이는 주기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서브드롭 상태인 서브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서브드롭 상태일 땐 편안하게 해 줘야 한다는 건 지식으로 알고 있었기에 마유는 어떻게든 히구루마를 칭찬하려고 애썼다. 그가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히로미. <내 손을 잡아>”
“...으, 어.”
마유는 히구루마의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아직 조금씩 떨리고 있는 히구루마의 손이 천천히 마유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고, 땀으로 젖어있었다.
“<잘했어> 히로미. 노력했네. 열심히 했구나.”
마유는 히구루마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계속해서 속삭였다.
“<일어나> 그래. 그렇게. 내 손을 잡고, 기대도 괜찮으니까.”
히구루마는 마유의 손을 잡고, 팔에 매달리며 천천히 두 발로 섰다. 금방이라도 다시 넘어질 것처럼 휘청이는 히구루마를 끌어안고 몇 번이고 속삭였다. 굿 보이. 대단해. 훌륭해.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썼지. 잘했어. 폭력에 의지하지 않았네. 혼자 버텨냈어. 히로미는 좋은 사람이야. 이름을 부르며 칭찬을 속삭일 때마다 팔 안에서 떨리는 몸이 조금씩, 조금씩 진정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마유는 귓가에서 들리던 짧고 빠른 호흡이 안정되자 다시 히구루마를 불렀다.
“선배.”
“...알고 있었어.”
마유는 몸만 클 뿐, 아직 어렸다. 풍족하게 자라 어려움을 모르고 지낸 그였지만 히구루마가 절망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히구루마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처절하고, 새까만 페인트처럼 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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