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선율을 타고

Dusk by 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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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AU. 이름 없는 엑스트라 등장. 설정은 대충 마음대로입니다. (주간창작 챌린지 주제로 어쩐지 전력 60분을 하고 있습니다…)


“고죠 군, 제발!”

“아, 귀찮은데.”

“딱 한 번만! 우리 좀 살려준다고 생각하고!!”

이름도 가물가물한 동기(추정)가 울며 매달리는데도 고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여름 감기로 앓아 누운 보컬 대신 사흘 후 축제에서 공연을 해달라니, 밴드부라는 놈들이 자존심도 없나?

그러나 그는 끈질겼다. 대꾸도 하지 않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붙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 학교는 밴드 동아리가 두 개 있는데, 축제 때마다 공연 후에 인기투표를 하거든? 그런데 3년 전, 저쪽 밴드에 1학년 보컬 하나가 들어간 후로 한 번도 못 이겼어. 한 번도! 그것도 압도적으로!!”

“당당하게 말할 게 아니지 않나…….”

“원래 동아리는 3학년이 되면 보통 은퇴하는데……. 그래서 올해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쪽 애들이 졸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축제에 나가 달라고 졸라서 이번에 나온다잖아. 치사하게! 그래서 나도 나가기로 했거든? 준비도 엄청 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나 진짜 한 번은 이겨 보고 싶어. 네 얼굴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이렇게 부탁할게…….”

자세가 낮아지다 못해 무릎으로 걸어갈 기세의 남자의 모습에 고죠는 생각했다. 동기가 아니고 4학년인가 보네. 쭉 반말로 대꾸했는데.

그래서 뭐, 사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반말하는 후배한테 별 소리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이 남자가 조~금 불쌍하기도 해서. 그런 사소한 변덕으로 고죠는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기투표의 존재 때문인지 부르는 노래들은 다 웬만큼 유명한 것들이었다. 따로 외울 필요가 없다는 건 좋았지만, 상대는 유명하지도 않은 걸 들고 나와서 이긴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저 4학년은 역시 자존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부탁을 받아들인지 10분 만에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어 연습은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상대도 어차피 얼굴을 보고 부탁하러 온 거라 그런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마음을 바꾸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고죠 사토루는 웬만한 것은 다 잘해 버리는 인간이었고, 스스로의 장점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이 외모와 실력으로 졸업하는 4학년에게 좋은 추억 하나쯤을 만들어 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작년에 이긴 팀이 먼저 공연을 하는 것은 일종의 핸디캡이었다. 투표는 두 공연이 다 끝나고서부터 열리고, 사람은 더 가까운 기억을 강렬하게 느끼기 마련이니까.

리허설조차 제낀 고죠는 그래도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 대기석에 앉아, 3년의 무패 신화를 기록했다는 4학년이 뭐 얼마나 대단한지 봐 줄까 하는 생각으로 여유있게 무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독특한 앞머리에, 그냥 좀 착하게 생긴 얼굴. 키는, 여자치고는 큰가? 악기도 같이 하는지 베이스 기타를 메고 있었다. 옆에 4학년이 슬쩍 다가왔다.

“쟤가 걔야. 이오리 우타히메.”

“이름이 우타히메야? 웃기네.”

갑자기 존댓말을 쓰기도 뭐해서 고죠는 여전히 반말이었다. 상대는 그런 고죠를 신경도 쓰지 않고, 왠지 멍한 시선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이번에 이기면, 이오리한테 고백하려고.”

우웩. 고죠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이기면 고백하겠다다는 것도 어이없는데, 이길 수단마저 본인의 힘이 아닌 거 아무리 자존심이 없어도 좀 아니지 않나? 아니지, 어쨌든 이 몸을 섭외하긴 했으니까 그 공로는 인정해줘야 하려나? 아무튼 아련하게 말하는 모습이 꼴보기 싫다는 건 확실했다.

다행히 무슨 말을 더 듣기 전에 사운드 체크를 끝낸 무대 위에서 드럼 스틱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죠는 처음 들어 보는 전주가 흘러나오자, 서로 떠들던 관중들도 조용해졌다. 진지한 얼굴로 베이스를 튕기던 보컬이 노래가 시작되는 타이밍에 맞춰 마이크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고.

“하아…… 여전히 잘 하, 어라? 고죠 군?”

“화장실 좀.”

첫 번째 곡이 끝나는 타이밍에 고죠가 일어섰다. 그리고 어서 다녀오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무대에 오를 때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울며 겨자먹기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게 된 4학년은 첫 번째 곡 도중 시야 끝자락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집적대는 훤칠한 흰 머리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고, 분노와 울분이 실린 그 노래와 연주로 4년 중 가장 근소한 차이의 패배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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