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
되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사카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영화 속의 파노라마처럼 수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 모든 장면에는 사카타가 있었고, 타카스기가 있었다. 어떤 때에는 웃고 있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화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온몸이 탈진할 정도로 울기도 했었다. 서로의 앞에서는 절대로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을 것만 같은 두 사람이 절대로 하지 않을 것만 같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느 누가 무어라 할 것 없이 애절하고도 간절한 모습이 오래된 연인을 붙든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을 에워싸는 것은 참혹하리만치 아름답게 빛을 뽐내는 붉은 석산이었다. 그것들은 언제 어느 곳에나 그들을 끝이라는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겨우 버텨 볼 손톱 하나 박힐 일 없는 매끄러운 죽음 속으로.
팅, 하고 팽팽하게 스쳐 지나가던 필름이 끊기는 듯이 파노라마가 멈추었다. 사카타는 기도를 역류하는 구역질을 간신히 삼켜내렸다. 속이 울렁이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토해낼 것 같은데. 참는 것으로도 한계였다. 사카타는 찢어져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짓이겼다. 연약한 살이 뜯어져 따가울 법도 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양손을 주먹 쥐었다. 짧은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어 살점이 박힐 정도로 강하게. 얼마나 세게 쥔 것인지 팔까지 부들부들 떨려왔다. 행복했던 기억은 모두 새하얀 눈 속에 깊숙하게 숨어버렸다. 햇빛이 아무리 강하게 내리쬐어도 절대로 녹을 일이 없는 만년설 속으로. 이대로 겨울이 오면 또다시 눈이 쌓일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눈은 녹는 일없이 계속 쌓여만 가겠지. 심해의 수압에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릴 만큼 깊숙하도록.
발끝과 손끝이 시려왔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는데. 온몸이 춥다.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시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사카타는 이대로 깨어나는 일 없이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리한다면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긴토키."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너를 두고 내가 어떻게. 나만 편해지자고. 사카타의 양 뺨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훅, 하고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사카타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제 무릎을 베고 제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아.
"어째서 울고있어."
먼지라도 끼였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구나. 사카타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한껏 맺혀있었다. 양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사카타의 눈가로 옮겨가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랬더니 흐렸던 눈앞이 겨우 보이기 시작했다. 타카스기. 사카타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은 것인지 입 모양만 벙긋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울지 마."
그렇지 않아도 못난 얼굴 더 못나지겠다. 타카스기는 사카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눈도 붉은 주제에 눈가도 붉어졌네. 타카스기가 작게 웃었다. 타카스기. 사카타는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제대로 목소리가 나왔다.
"죽는 거야?"
"응."
"안 죽으면 안 되려나."
타카스기는 곧바로 대답을 이어가지 않았다. 사카타의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양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답이 바뀌는 일은 없을 터이니. 타카스기는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도 않고 말했다.
"응."
"…그런가."
사카타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사카타는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렇구나. 또 죽는 거네. 타카스기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카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가 보는 일이 없도록. 있지, 타카스기.
"가지 마."
나도 데려가 줘. 다시 혼자 두지 말아줘…. 그리 말하는 사카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마치 부모의 손을 놓쳐버린 아이처럼. 수많은 인파에 치여 결국에 길을 잃고 마는. 온전히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해 겁에 질린 아이처럼. 타카스기는 제 뺨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비가 오지 않으니 이것은 네 눈물이겠구나. 타카스기는 쓰게 웃었다. 타카스기는 다시 눈을 돌려 사카타를 마주 보았다. 눈물에 일렁이는 사카타의 눈동자는 바다 아래로 져버리는 석양을 떠오르게 했다. 그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네 우는 모습은 적응되지 않아. 적응하기도 싫고. 침묵이 흘렀다.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심장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느낌이었다. 긴토키. 응.
"눈 감아."
"싫어."
무서워. 칭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 옛날, 축제에 데려가려는 쇼요에게 가기 싫다며 웅얼거리던 서당에서의 네가 보이는 듯했다. 안 무서우니까 괜찮아. 그래도 싫어. 싫다는데 왜 자꾸 그래. 울음을 삭히는 목소리였다. 너는 매번 이랬지. 타카스기는 생각했다. 사카타는 어쩌다 눈물이 흐를 때를 제외하면 울고 싶어도 그것을 매번 목구멍 뒤로 삼키기 일쑤였다. 예전부터 봐왔던 버릇이었다.
"긴토키."
타카스기는 팔꿈치를 이용해 약간의 몸을 일으키며 한쪽 손으로 사카타의 눈가를 덮었다. 쉿, 이대로 감아. 사카타는 아무런 말 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하겠다는 뜻이었으니. 천천히 손을 치워 사카타의 눈꺼풀이 덮였음을 확인한 타카스기는 그대로 사카타의 뺨을 쓸었다. 전쟁에서 굴렀다는 사내답지 않게 보드라운 피부에 그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그대로 사카타에게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사카타의 눈물이 흐르며 입술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울지 마.
사카타는 조용히 눈을 떴다.
제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타카스기가 애용하던 곰방대 하나가 달랑 놓여있을 뿐이었다. 주먹을 쥐었던 손을 펴니 보라색 가루가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그로서는 그저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남아 지켜보고 있었다. 시야에 흩날리던 가루가 모두 날아간 후, 사카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곰방대를 주워 소매에 넣어놓고는 해결사 사무소로 향했다.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무소로 돌아온 사카타는 늘 앉던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첫 번째 서랍을 여니 이미 수없이 많은 양의 곰방대가 서랍 안을 꿰차고 있었다. 사카타는 그 서랍을 닫고는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역시나 첫 번째 서랍과 같은 상태였기에 다시 서랍을 닫고는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이번 서랍도 마찬가지로 곰방대 여럿이 들어있었지만 하나가 더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자리였다. 사카타는 소매에 넣어둔 곰방대를 꺼내어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탁, 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카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두 시에 달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앞으로 두 시간 후면 다시 시간이 되돌아갈 것이다.
새벽 네 시.
타카스기 신스케가 가장 처음으로 죽은 시간이었다.
타카스기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눈앞에는 사카타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 또 찾아온 건지. 타카스기의 머리는 어느새인가 사카타의 무릎에 눕혀져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죽으려고 할 때면 너는 귀신같이 나를 찾아내고는 조용히 그 옆을 지켰다. 조용히 죽으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죽어서, 혹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가능한 만큼 최대한 발견이 늦어지도록 하게끔 죽으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니까. 그가 사카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으므로.
제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카타를 죽이는 일이었으며 타카스기는 그가 죽는다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죽을 바에는 차라리 제가 죽는 것이 나았다. 그렇지만 타카스기는 여전히 죽지 않았고 사카타는 그런 자신을 살리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타카스기는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네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진심으로.
타카스기 신스케가 죽으면 사카타 긴토키는 산다. 그러나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타카스기, 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앞으로도 이 사실을 사카타가 아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터였으니. 타카스기는 이렇게 해서라도 사카타를 계속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 무슨 우스운 꼴인가. 타카스기는 사카타가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본인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 우리는 서로조차 구할 수 없기에.
사카타에게 입을 맞춘 타가스기는 제 몸이 스러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또 다시 새벽 네 시가 되면 시간이 되돌아갈 것이다.
새벽 네 시.
사카타 긴토키가 가장 처음으로 죽은 시간이었다.
20.10.17 작성 23.11.03 퇴고없이 백업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