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 참고용 작업물

기타 샘플 01

자컾 개인작, 8000자 내외

모호함

살면서 깨달은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반드시 나를 상처입힌다는 것.

그러나 인간이 더없이 비합리적인 것은 끝도 없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으며 어떤 것에 생각이 온통 쏠리는 것은 생각을 고쳐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다, 십 대 후반의 풋풋한 시절이면 모를까 온 신경을 쏟았던 여러 가지에 전부 된통 상처받고 다시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겠노라 다짐하였던 삼 년 과거가 무색하게도. 도시의 네온이 온통 부딪혀 부서지는 잘난 옆얼굴을 바라보면서는 모든 다짐의 무상함을 되새겼다.

한때의 울렁거림을 짝사랑으로 정의해도 되는지, 어떨 때는 밤새워 보았던 조악한 영화와 드라마에 가득 담긴 복잡하고 추한 추상의 집합에 지금 나의 이 무책임한 감정을 빗대어도 될는지. 이 관념은 너무나 추상적이라 N의 딴에는 한없이 무책임한 짓으로 여겨졌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그 사람과 교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흘러가는 것은 이상하게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두 가지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그것이 왜인고 하면, 홀로 그러한 감정을 품어 버렸다는 사실마저 인정이 안 되었던 탓이다. 다른 누가 듣는다면 ‘그 성질머리에?’ 하며 황당해할 일인지는 몰라도, N은 모든 관계를 제 손으로 망쳐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여지껏 일어났던 불운에 모든 책임을 지고 비난을 당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발목이 부러진 것도 경기 성적이 안 나온 것도, 실질적인 경위가 어땠던 간에 전부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버렸던 것은 그 편이 탓할 사람을 찾기에 제격이며 참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지독한 멍청이로 여기는 마음은 근처로 다가오려고 하는 타인을 자꾸만 의심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N이 어릴 때부터 상냥하고 햇살같은 아기는 아니었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부러 평판을 말아먹는 것엔 나름의 이유는 있던 것이다. 의심과 방어기제; 남의 이런 사정을 알아줄 성인군자가 대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N은 타인 자체가 싫은 것이라기보다는 그를 마주하는 스스로가 싫었을 뿐이다.

N의 자기혐오는 유구했고 그가 휘청할 때마다 다시 고개를 디밀었다. 실은 사랑에서 비롯되어진 상처를 논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마음을 탓하여야 마땅하겠으나 으레 잘못한 놈이 성내듯 혐오는 절대로 혐오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비 오는 날이면 아직까지도 발목이 불편한 것은 십 대 중반의 앳된 카이N이 하키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상 이후 외면하고 도피해버렸던 시간들 탓이고, 가족이든 친구든 소중했던 상대와 영영 멀어진 것은 그를 좋아했던 순수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한심한 말밖에 내뱉지 못했던 스스로의 못된 입술 탓이다.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애먼 순수함에 책임전가를 하고 싶은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N은 자꾸 무언가를 사랑했던 자신을 편히 미워하였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다. 시계는 벌써 새벽 네 시를 가리키니 곧 동이 틀 것이다. 블라인드를 쳐 두어 한낮에도 어둑한 방안, 햇빛이 언제 새어들어왔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며칠 밖에를 나가지 않았더니 바깥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규격을 벗어나 정신없이 회전하는 쳇바퀴 속에서 무언가 달라져 봤자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궁금하지 않았다.

[뭐 해.]

마음이 가는 대로 문자를 전송하고 핸드폰을 어깨너머로 던졌다. 매트리스에 몇 번 튕긴 기기가 벽과 침대 사이로 빠져 쿵 소리를 냈다. N이 문자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는 없었으며 그 사람이 새벽 네 시에 뭘 하는지는 N도 알고 있었다. 자겠지. 떨어진 핸드폰을 주울 생각도 않고 손을 뻗어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었다. 분명 삼십 년 전쯤에 유행하였을 디자인의 구식 티비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몇 번 깜박이더니 불이 들어와 방안을 밝혔다. 그는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늘 마구잡이로 채널을 돌리다 엄지손가락이 멈추는 그 지점에 정지하여 몇 시간이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십중팔구 확률로 졸작을 맞딱트리게 됨에도 늘 그러했다.

능동적으로 영화를 고르지 않는 것은 여지껏 이렇게 본 영화가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그런 선택마저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옷장에는 온통 시커먼 옷만 있는 것도, 늘 먹는 음식이 비슷하고 하루가 똑같은 것도, 지금의 N에게는 무언가를 공들여 선택하는 일이 그렇게도 힘들었던 탓이다. 필수적인 선택들에 직면하면 - 예컨대 자주 가는 식료품점에 늘 진열되어 있던 주전부리가 단종되어 새로운 것을 골라야 한다던가 하는 - 죄다 몇 초 생각 않고 손이 가는 쪽을 골랐으며 나중에 후회한대도 그것이 편했다.

지독한 수동성으로 가득 찬 삼 년을 흘려보내고 나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은 너무나 능동적인 선택이고 인정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므로 더 나아가 그 마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맨몸으로 히말라야 산맥을 등정하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양철 나무꾼마냥 굴다가 애인에게 여러 번 차였던 카이N과 지금의 다 무너져버린 N은 다소 다른 존재였대도 여전히 같은 인물이다. 그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열정적으로 입술을 부딪히는 비급 성인영화를 무감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중간에 영화를 꺼 버렸다. 방안에 정적이 찾아들었지만 외설적인 키스 소리를 더 듣고 있는 것보다는 그저 조용한 것이 나았다. 그저 감독의 이상한 판타지를 담은 야동에 불과한 영상물이라도 영화라는 이름으로 대충 끝까지 봐 주었던 평소와는 달리.

N은 침대에 웅크려 벽을 바라본 채 눈을 감았다. 아마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것이다. 방안에 들리는 소리라곤 긴 한숨 소리뿐. 눈을 떴을 때 도시를 밝히는 것은 밝은 달 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시끄러운 벨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애석하게도 한낮이었다. 잠에 들기 전 벽과 침대 사이로 핸드폰을 떨어트려놓고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탓에 안경도 쓰지 못한 비몽사몽한 상태로 소리의 근원을 찾아 헤매야 했다. 줄여놓지 않은 벨소리가 고막을 울려대는데 기기가 어디 있는지 쉬이 찾을 수가 없어 눈 뜨자마자부터 잔뜩 짜증이 났다.

문자와 마찬가지로 전화가 올 상대라고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누가 전화했고 무슨 용건인지는 화면을 보지 않아도 뻔하다. 새벽에 항상 같은 말로 같은 상대에게 문자를 보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대충 끊고 다시 잠들 작정이었지만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침대 밑을 들여다보느라 잠이 깼다. 손을 훑어 겨우 집어든 폰은 먼지로 가득했다. 에이 씨. N은 짜증스럽게 다시 드러누우며 귀에 핸드폰을 얹었다.

“… 어.”

“자다 깼어?”

“응.”

불퉁한 기색이 역력한 N의 목소리에 상대가 작게 웃었다. 활기찬 상대에 비해 그는 잠에서 이제 막 깨어 잠긴 목소리였고 태도는 심드렁했다. 그럼에도 R은 밝은 목소리로 두 달쯤 전에 매대 앞에 선 그가 단종 사실에 역정을 냈던 감자칩의 재입고 소식을 N에게 전해주었다.

“… 나 그거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거짓말.”

“아니라고.”

“단종되고 일주일을 불평했으면서? 그만 자고 나와, 점심 먹어.”

“아, 싫어……. 귀찮아.”

N이 다시 이불을 주워와 끌어안으며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모닝콜 아닌 모닝콜을 하다가 N이 도로 잠든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또 잠들고 나면 저녁 네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깼고, 또 아침 여섯 시쯤에 잠들게 되었다. 갈수록 가관인 수면패턴이 고착화된다. 너 혹시 햇빛 보면 죽는 뱀파이어야? 종종 R은 그만 자라며 그를 깨웠다.

“그러다 또 7시에 일어나려고 그러지.”

“그 정도는 아니거든.”

끈질기게 말을 걸어주는 R 덕에 다시 눈을 감으려다가도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헤집으며 부스스 일어났다. 협탁을 더듬어 안경을 찾아 얼굴에 얹고는 잠옷으로 입던 목 늘어난 반팔티를 벗었다. 아직 끊기지 않은 전화. 약간의 잡음 사이로 그가 사람들에게 계산해주는 소리 같은 것들이 간간히 들렸다.

하품하며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은 뒤 거울을 바라보면 수염이 올라온 턱이 거뭇하다. 면도는 집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만날 때의 최소한의 체면치레였다. 물론 집앞 카페 사장에게는 그 정도도 차리지 않았다마는. 오늘은 그 정도는 해야 했다. 귀찮아 죽겠다는 기색으로도 나름 꼼꼼하게 면도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품 큰 후드를 뒤집어썼다.

유선 헤드셋을 핸드폰에 연결한다. 무려 유선이다.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저기 도시에는 귀에 딱 맞는 무선 이어버드로 최상의 음악 품질을 경험하라는 광고가 하루종일 흘러나오는데, N은 돈도 많은 주제 어디서 굴러다니던 구형 유선 헤드셋을 썼다. 그가 쓰는 전자 기기들은 가만 보면 전부 그랬다.

“씻고 왔어.” 헤드셋 단자가 꽂힌 핸드폰을 후드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도 여전히 눈꺼풀이 무거웠다. 다섯 시가 넘어 자서 그런지 해가 중천인데도 피곤하다. 시커멓게 내려온 눈가의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몇 번 쓸어내린다. 카페인과 니코틴 생각이 간절했다.

협탁에 나뒹굴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려는데 그의 졸린 목소리를 듣고 난 R의 짤막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친구가 누워 있기를 포기하고 나와 줄 작정임을 충분히 알아챈 탓이다. 고작 남의 웃음 소리 따위가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었던가. 기꺼움을 인정하지 못하였으나 불을 붙이려던 라이터를 옆으로 치웠다. 걘 담배냄새를 싫어했다.

“뭘 웃어…….”

침대에 걸터앉은 채 엄지손가락으로 오른쪽 발목을 몇 번 문지르다 보호대를 찼다. 다리를 심히 절면서도 꿋꿋하게 아무 조치도 하지 않던 옛적에 비하면 감복할 만한 발전이었다. 약 30년 삶 가운데 고작 삼 년으로는 몸에 익은 운동의 흔적을 완전히 벗겨낼 수 없다. 꼼꼼하게 보호대를 채우는 손길은 병원에서 해 준 것과 거의 비슷했다.

몇 달 전보다 미미하게나마 나아진 발걸음으로 현관까지 걸어가 신발에 발을 구겨넣었다. 종종 신는 낡아빠진 슬리퍼가 현관에 나뒹굴었으나 그 대신 택한 것은 운동화였다. 체면치레 그 이상의 성의를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게 티가 났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온 신경을 쏟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즉 N은 그 감정에 어떠한 이름도 붙이고 있지 않았다.

“나왔어. 가게로 간다?”

“으응~.”

어떤 것은 정의하는 순간 소중한 것이 되어 무게를 가지고 무섭도록 거리를 좁혀왔다. 제 진실된 이름마저도 직면하지 못하고 있는 한심한 자가 누군가와의 관계에 이름 붙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친구'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는 것이 버거웠다. 그래서야, ’짝사랑 상대'는? ‘애인'은?

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모호한 감정. 어항을 뒤집어쓴 듯 문득 숨이 턱 막혀왔다. 숨을 막히게 하는 것도, 숨을 쉬도록 해주는 것도 전부 한 사람 뿐이라 두렵다. 나는 어떤 앞날을 꿈꾸고 있는가. 자연스럽게 그 다음을 생각해도 되는가. 내게 그럴 자격 같은 것이 있던가.

그 날도 함께 밥을 먹고 나면 커피를 마시며 직원 사무실에 구겨져 앉아 있다가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옥상으로 올라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특별하고도 일상적이게 정의된 하루였다. N은 이럴 때 내려다보는 도시의 불빛을 좋아했고 R은 그 반대였다. 같은 곳에 앉아 다른 곳에 시선을 던지며 내도록 온기를 나누다 보면 N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허접한 네온사인 따위가 아니었다. 폭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의 꽁무니 따위도 아니었다.

치켜든 턱. 목울대, 목선, 더 타고 내려가면 쇄골과 어깨. 그러다가도 회귀하듯 다시 옆얼굴. 노란 눈. 속눈썹.

아.

바라보고 있던 것을 들킬세라 N은 핑계를 대듯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언N가 원정을 가서 보았던 광활한 자연 속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은 이곳에 없다. 여기엔 길바닥을 구르는 인공품 조각과 눈을 찌르는 빛 공해 그리고 배기가스의 폭음뿐. N은 도태된 도시의 구닥다리 인간으로 살아갔다. 자초한 불행이었다.

실은 평생 행복하지 못할 줄로 알았다. 평생 내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를 저주하는 일이 숨을 쉬듯 자연스러웠던 때. 그러나 불과 몇 달 새 그는 다시 병원에 다녔다. 재활치료를 받고 날마다 보호대를 찼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전처럼 힘들지 않았다.

행복하려고 했던 건가,

누군가의 곁에서?

문득 심장이 죄이듯 불편했다. 숨을 급하게 들이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가게?“ 아쉬운 듯 붙잡는 목소리에 잠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엔 이런 시선에 뭐라고 했더라. 5분만이야. 늘 N은 그렇게 대답했고 나직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정말 5분 후 자리를 파하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성미에 한 시간 단위로 늘어지는 유예를 늘 용인했던 것은 그 시간이 N에게도 꽤 좋았기 때문이었다.

좋아서. 그 시간들이 기꺼워서. 속이 울렁거렸다. 문득 언어를 잊은 듯 성대가 죄어들어 한 마디도 내지 못했다. 세상 만사를 증오하며 전부 죽여 버리거나 죽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도. 이곳 옥상에 서서 너와 함께 흐릿하게나마 웃었던 며칠 전을 자연스러운 추억으로 떠올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것이 언제부터 이리 당연해졌지. 꼭 우리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 추억. 소중한 기억, 소중한 사람, 인간관계….

호사. 역겨운 호사였다. 마음이 울렁거리다 못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좀전까지 그와 맞닿았던 어깨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몸서리를 쳤다. 역겨움의 탈을 쓴 두려움이 밀려들 때에 N은 온 힘을 다해 회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네게서 눈을 떼지 못한 나의 마음은 어느샌가 전 속력으로 어떤 결론을 향해 내달린다. 애를 써도 속도조차 늦출 수가 없다. 네 노란 눈은 하늘의 별을 닮았다.

부유하던 생각들이 실체를 이뤄낸다.

저 하늘에 별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알고 있을까. 디지털 화면이 그려낸 이미지 같은 것 말고, 인공 빛이 반절을 삼켜낸 이런 하늘도 말고. 정말 밤하늘을 가득 수놓는 광원 말이다. 거기까지 흐르는 생각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여상한 말을 내놓지 못한 입술이 달싹였다. 이제는 마주할 때였다. 궁지에 몰린 인간은 더없이 약해지고야 만다.

야.

네게 별의 갯수를 일러주고 싶어질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해.

너 하나 때문에 미래를 기약하고 싶어지는 건 어떻게 이름지어야 해.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야.

알려 줘. 너는 나보다 나은 놈이잖아.

모호하게 뒤엉킨 실타래 같은 생각. 풀어서 발화하는 방법 같은 건 몰랐다. 정신없이 꼬여들다가 손을 댈수록 처참하게 엉켜간다. 모르겠다, 기묘할 만큼 길게 늘어진 정적도 북받쳐오른 감정도 수습하기엔 이미 늦었다. 밤바람에 차가워진 그의 손끝을 R이 살짝 쥐었다. 추위 탓이라기엔 이상할 만치 붉어진 N의 눈가 때문이었다.

짜증 나. 시야가 흐려졌다. 너 왜 그래, 울어? 다급하게 돌아오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끈질기다, 그래서 배로 미웠다.

“… 보지 마. 안 울어.”

뻔히 얼굴이 흥건함에도 그는 뒷걸음질했다.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내어도 한 번 터진 것은 멈출 줄 몰랐다. 그저 미루었을 뿐이라 언N가는 이렇게 되어야만 했던 일이다. 온통 회피뿐인 삶이니 그것의 결과가 어떠한지는 N이 제일 잘 알았다.

“손 대지 마, 진짜 좆같으니까…….”

호흡이 흐트러졌다.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겠지. 부러져버린 발목처럼, 너와 나의 관계도. 두서없는 말이 마구잡이로 새어나왔다. 뻗어오는 손을 뿌리치다가는 결국 손목을 쥐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실은 미처 거부하지 못한 온기는 역겨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무서웠을 뿐이었다.

“왜…. 아침마다 나한테 전화를 해.”

…“왜 나를 걱정하고, 식사를 챙기고, 나한테 더 나은 내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네가, 그걸 바라는 것처럼…….”

발화 가득 원망이었으나 N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은 한 번도 역겨움이었던 적이 없고, 그저 애꿎은 네 다정에 화살이 돌아갔다는 것. 실체없는 모호함에 숨막혀하며 도망했을 뿐. 싫었던 적은 없어. 그냥 무서웠던 거야. 내가 전부 망쳐버릴까 봐.

잃기 싫다는 것은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 N은 이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아차려 정의하였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 입안에 비릿한 맛이 났다. 과분한 것은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N, 나 봐.”

지독한 자기혐오가 일어 스스로를 세상 밖으로 밀어던지고 싶었다. 좋아해 마지않던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무섭다. “… 싫어.” 하고 뇌까리다 일순 비릿하던 혀끝에 짠 맛이 느껴졌다. 말캉한 것이 입술에 와 닿는다. 고개를 숙인 N의 턱을 들어올리고,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안은 R이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개새끼야……. N은 입을 벌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는 네가 좋았다.

유감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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