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햇빛은 그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에

가난한 나그네에게 불행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깊은 숲속을 정처 없이 걷다가 겨우 발견한 호수였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꿈같은 호수에서 맛볼 휴식을 기대한 나그네가 기뻐하며 달려가는데, 무언가가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탄력 있게 통통 움직이는 동그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을 때는 숲속에 사는 작은 동물인가 싶어 멈칫하다가,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나그네는 가지고 다니던 대검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

 

나그네는 얼마 전에 무일푼이 되었습니다.

불과 몇 주 전의 이야기로, 그리 먼 과거의 일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몇 푼밖에 주머니에 남지 않았죠.

오랫동안 살던 집을 잃고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서 풍경화라도 그리면 울적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 싶어 숲에 들어선 데까지는 괜찮았습니다만, 입구의 아름다운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점점 깊은 곳으로 향하다 보니 어느새 길도 알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땅 위를 덮은 이끼가 폭신해서 좋았던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 위로 보이는 하늘은 그저 녹음이라 방향조차 알 수 없어, 나그네는 얼른 숲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오늘은 운이 좋기를, 안 좋은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한 숲에 들어선 것부터가 운이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앞으로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자신을 달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발아래에 융단처럼 깔린 이끼는 물기를 머금어서, 밟으며 나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발끝이 툭 걸리는 소리만이 이따금 울렸습니다만, 이름 모를 새나 벌레들이 우는 소리에 그마저도 뒤덮이는 조용한 숲이었답니다. 머리 위 아득한 곳, 하늘과 더 가까운 곳에 빈틈없이 드리워진 구름처럼 나뭇잎이 햇빛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어두운 숲속이라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양옆으로 몇 번 저으며 그런 생각들을 떨쳐내려 했습니다.

그러던 나그네의 시선이 비스듬한 곳에서 멈춘 것은 얼마 후의 일입니다.

해가 져서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쉴 곳을 찾아야 할 텐데. 숲속에 조그만 산장이라도 세워져 있기를 바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그네의 눈에 마침 물가가 보였던 것입니다.

물가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 수도 있지요. 사람이 없더라도 물이 있다면 오래 걷느라 지친 몸을 잠시 쉴 수도 있습니다. 기대를 품고 앞으로 향하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물가와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시야를 차지하는 잔잔한 물의 표면도 넓어져 갔습니다. 곧 한시름 덜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고서 호수에 막 들어서려는데 무언가가 휙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나그네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처음에는 숲에 사는 작은 동물이 튀어나왔나 했거든요. 그들의 보금자리에 멋대로 들어왔다면 더 조심히 행동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멈칫하고 눈앞의 무언가를 살피던 나그네의 얼굴빛이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답니다.

느닷없이 튀어나와 통통 움직이는 그것은 슬라임이었으니까요. 숲속에서 몬스터와 만나다니, 운도 없지.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깊은 숲속에 슬라임이 단 한 마리도 없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몇 마리쯤은 살 법하죠.

어쨌든 나그네는 호신용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이 물빛의 칼자루와 검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립니다. 칼자루와 검신의 경계에다 푸른색과 물빛의 리본을 풍성하게 묶고 그 위를 하얀 꽃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검이었습니다. 전적으로 나그네의 취향이죠. 물빛의 검신에도 파문을 새긴 것처럼 섬세한 문양 세공을 해놓았습니다.

나그네가 자기 취향대로 꾸민 아름다운 무기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어쨌든 이 대검을 높이 들어 올린 나그네는 결연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리쳤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나그네가 검을 쥐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편리한 가방을 들고 다니거든요. 나그네의 옆에서 새처럼 작게 짹짹거리며 허공을 나는 이 기계는 그를 도와 여러 가지를 대신해줍니다. 지금처럼 무거운 물건을 대신 들어주는 건 매우 편리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얗게 빛나는 칼날이 슬라임에게 정통으로 날아듭니다. 토옹 하는 탄력이 손끝에 전해졌습니다──이건 분명히 성공이야. 칼끝을 튕겨내는 반동은 공격이 제대로 맞았음을 감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운이 없는 건 내 쪽이 아니라 갑자기 눈앞에 뛰어들어 길을 가로막은 너다, 라고 생각하며 심심한 유감을 표하기 위해 나그네는 슬라임이 있던 자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슬라임은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그네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자리에서 아까보다 빠르게 통통 튀는 모습을 보아하니 제법 화가 난 모양입니다.

어째서?

대검을 다시 겨눈 나그네가 슬라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이내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슬라임의 정중앙에는 풀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거든요.

풀슬라임이었습니다.

즉, 나그네는 원소력을 쓸 수 없습니다.

방금은 원소의 힘을 담아 공격했으니, 아무리 힘껏 휘두른다 한들 먹힐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운이 이렇게 없을 수가, 하고 나그네는 오늘의 연이은 불운에 낙담했습니다만 거기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원소력이 통하지 않는 지금, 쓸 수 있는 수단은 단 한 가지입니다──물리로 두드리는 거죠.

다행인지 아닌지, 불행에 익숙한 건지. 나그네는 일곱 번 쓰러지면 여덟 번 일어나는 근성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흐읍, 하고 숨을 들이쉬며 자세를 가다듬고─본인이 무기를 드는 수고를 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마음가짐으로부터 나오는 자세란 중요합니다─다시 검을 내리쳤습니다.

아주 긴 시간인 듯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꽤 오래도록 나그네는 슬라임을 두드리고 있었거든요.

퐁, 퐁, 퐁, 포옹.

중간에 한 번 숨을 가다듬은 뒤─사실을 말하자면 부족한 체력 때문에 헉헉거렸던 것입니다만─신중하게 다시, 퐁, 퐁, 포옹.

여기에 사방으로 무성한 잎사귀를 가를 때 검이 내는 부웅, 붕 소리.

이따금 이이익, 하며 기합을 넣는 나그네의 목소리도 섞였습니다.

대검이라 꽤나 묵직할 텐데, 그래도 한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내 공격력이 이것밖에 안 되다니. 나그네는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슬라임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한 방입니다.

이것으로 풀슬라임의 HP는 제로마이너스.

이 한 방을 제대로 맞추면 호숫가에서의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대감은 검을 휘두르는 동안 온몸에 환희가 차오르도록 만들어서, 벌써부터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해냈어! 연이어 닥쳐온 불운을 극복한 나는 호숫가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물을 실컷 즐기는 거야.

고생한 자신에게 그 정도의 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을 그대로 비춘 호숫가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조용해서, 아예 이곳에 집을 짓고 살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어떤 집을 짓지? 숲이니까 목재는 충분히 조달할 수 있어. 이 녀석을 해치우고 나면 어떤 집을 만들지 종이에 스케치를 하자. 나만의 별장이 생기는 거야. 나무집 주변에는 화단도 만들어서 장미를 심어야지. 맑은 호수의 물을 주며 매일 정성껏 기르면 아름답게 꽃을 피워 내게 보답해줄 거야. 번잡한 도시에서의 삶보다, 숲속의 별장에서 조용히 사는 쪽이 좋을지도 몰라. 집 안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빛에 눈을 뜨면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집 안에 가득 찬 커피 향 속을 헤엄치며 문을 열고 나와 저 호수의 맑은 물을 내 장미들에게 줄 거야. 신선한 아침의 산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면 절로 몸에 활력이 돌지 않을까?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겠어.

마지막 한 방이 멋지게 풀슬라임에게 끝을 선사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왜 애매한 말투인가 하면, 마지막 한 방을 날리는 순간에 이런저런 잡생각을 폭발적으로 하는 바람에……. 나그네는 그만 칼자루를 끝까지 제대로 잡지 못했거든요. 한 방을 날리던 그때 그의 주의력은 칼자루를 떠나 있었습니다. 아직 도면조차 없는 드림 하우스를 떠올리느라요.

그렇습니다. 방심했습니다.

원래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는 타입이었지만 그만큼 지쳐 있었습니다. 숲에 들어온 것도 도피하기 위해서였죠.

결국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슬라임을 내려치며 토옹 하고 튀어 오르는 반동을 제대로 잡지 못해, 나그네의 아름다운 검은 잠시 허공을 날았습니다. 손아귀에 걸려 있던 무게가 빠져나가는 걸 곧바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찾아올 휴식에 들뜬 마음이 물리법칙조차 가볍게 만드나 보다 했죠.

뒤이어 들린 것은 이런 소리였습니다.

첨벙.

──어?

………….

나그네는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굳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슬라임이 남긴 잔해물과, 그리고 슬라임을 두드리는 동안 머릿속으로 그리던 아름다운 호수입니다.

옆에서 그의 날아다니는 가방이 「삑뽁……!」 하고 우는 소리가 비통하게 들렸습니다. 아니, 이 가방은 나그네가 만든 기계니까 기분 탓이겠지만요. 가방이 비통해할 리 없죠.

비통한 감정에 빠진 건 나그네입니다.

…….

비싼 칼인데.

직접 장식했는데…….

검을 휘두르던 자세를 풀고 호숫가 앞으로 걸어가는 몸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그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정말이지 운 없는 날이라고요.

 

✦︎✧︎✦︎

 

푸른 하늘을 그대로 담은 수면과 사방의 녹음으로부터 실려 오는 싱그러운 향기.

별장을 짓기에 더할 나위 없는 경치입니다. 그 별장의 스케치를 할 예정이었지만 칼을 물속에 빠뜨려버리는 바람에, 나그네는 호숫가에 털썩 주저앉은 채 수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중이었습니다.

다 망했어.

오늘 숲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기분전환은커녕 비싼 무기도 물속에 빠뜨려버리다니.

오늘은 정말 운이 없어…….

그때 수면이 일렁이는 듯 보인 것도 착각일까요?

숲의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물 위를 미끄러졌을지도 모릅니다.

수면에 새겨진 바람의 무늬가 햇빛을 머금고 흐르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립니다. 곱게 짠 실크가 살랑이며 닿을 때 기분이 좋은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을 어루만져주리라 기대하고서 수면을 계속 지켜보던 나그네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연이은 불행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헛것을 보나 싶었던 거죠.

잘못 본 게 아니었습니다.

수면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밀어 올리는 것처럼 커다란 파문이 몇 개나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물속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그네는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눈앞의 황당한 광경을 얼빠진 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물귀신인가? 나를 끌고 들어가려고?

도, 도망쳐야…….

어떻게든 여기까지 생각했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습니다.

굳어 있는 사이, 물속에서 올라오던 무언가는 어느새 모습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촤아악’이라든가 ‘첨벙’이라든가, 별다른 큰 소리도 없이 물 위로 올라온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라, 역시 유령인가 싶어 나그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두려워질 만도 합니다.

물속에서 난데없이 사람 모습을 한 무언가가 나타났는데, 그것이──상당히 언짢은 표정이었거든요.

나그네에게 불만이 많아 보입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다짜고짜 어느 부분에서 불만을 가졌는가 하면, 물속에서 올라온 그 ‘사람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한 손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검!” 

그렇습니다. 물속에서 나온 무언가는 오른손에 검을 들고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나그네가 아까 물에 빠뜨린 검이었습니다.

아끼는 무기를 보자마자 몸이 저절로 움직여 그쪽을 향했습니다만, 팔을 뻗고 발을 옮긴 곳의 아래는 땅이 아닌 물이었죠.

등 뒤에서 놀란 듯 「삐뽀──!」 하고 우는 가방의 비명이 길게 메아리쳤습니다. 놀랄 리가 없지만요. 기계니까요.

물이 얕으면 좋겠는데.

이 생각을 끝으로 나그네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불운이 여기서 그치기를 바라면서요.

그러나 물에 빠지면서 들려야 할 첨벙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굳게 다문 나그네의 몸에 물이 휘감기는 감촉도 없습니다.

물이라기보다는, 따끈한 무언가가 굳게 잡고 있는 듯한……. 

이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를 무언가가 유령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립니다.

경솔했습니다.

이대로 물속에 끌려 들어가더라도 최소한의 반항은 해야겠죠. 이런 기 싸움에서 얕잡아 보이면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는 걸, 나그네는 여태까지의 인생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답니다.

애초에 유령과 물 위에서 기 싸움을 해봤자 무엇을 어쩌겠어요? 하지만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란 것이 있으니까요.

유령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것이 온기를 가졌고, 더군다나 팔을 둘러 몸을 잡고 있다는 사실은 뒷전이었습니다.

나그네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요. 불행한 인생을 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굳은 결심이 필요하기도 한 법입니다.

굳은 결심을 마친 나그네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상대를 살핀다는 정석적이고 소심한──아니, 신중한 행동이었습니다.

한쪽 눈을 가늘게 떠서 눈앞의 그것을 살펴보자 곧바로 눈이 마주칩니다.

힉, 하고 목을 울리며 다시 눈을 질끈 감는 나그네에게, 이번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날아들었습니다.

 

“이제 눈 뜨고 이야기 좀 하지.”

남자의 낮은 목소리입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한심하다는 뉘앙스를 아주 한가득 담았습니다. 비꼬는 듯 들리기도 하는 말투로 짐작하건대 이 남자의 성격은 대단히 고약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잘못 걸린 거 아닐까요? 오늘의 불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실감에 마음이 꺾일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합니다. 단 하나뿐인 무기를 이 사람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나그네는 머뭇머뭇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제대로 눈을 뜨고 살펴보니 상당히 괜찮은 얼굴입니다. 머리카락으로 한쪽 눈을 가린 바람에 처음 얼핏 봤을 때는 언짢은 표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무표정이라고 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초면인 사람에게 실례라는 사실도 잊고 빤히 쳐다보는 나그네를 내려다보는 눈이 가깝습니다. 눈을 보면 좋은 사람 같은데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이 숲속의 호숫가처럼 맑고 고요한 색이어서, 나그네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습니다.

“와아…….”

“이러니까 칼을 빠뜨리지. 너도 물속에 빠지고 싶지 않으면 감상은 그만하고 꽉 잡기나 해.”

“어? ……헉!” 

외모에 정신이 팔려 깜빡했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서, 나그네가 양팔을 남자의 목에 단단히 둘렀습니다.

그랬죠, 칼을 보고 냅다 물 위로 뛰어든 나그네를 이 남자가 잡아주었던 것입니다. 나그네는 혼자 들 수 없어 항상 가방의 도움을 받는데 이 남자는 한 손으로 들고 있습니다. 거기다 다른 쪽 팔로는 나그네의 허리를 끌어안고 물에 빠지지 않도록 지탱해주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저기……, 내 검…….”

“아, 이거. 드디어 제대로 대화할 생각이 들었나?”

말 한번 예쁘게 하네요.

검을 건져준 데다 물에 빠질 뻔한 나그네를 구해주기까지 한 건 사실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놀라지 않았는지, 혹은 괜찮냐고 묻는다든지 해야 한다고 나그네는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한마디 날리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여기서 이 남자의 심기를 더 거슬렀다간 영락없이 물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 것이었기에 나그네는 참았습니다.

어쨌든 인사를 하고 기분을 맞춰주어 최대한 빨리 검을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나그네는 안 움직이는 입술을 여러 번 달싹거리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고……, 고마…….”

“나는 피해보상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반응을 보니 네가 이 검의 주인이 맞는 모양이군. 네가 분수에 맞지 않는 이 커다란 검을 휘둘러 대다 물에 빠뜨리는 바람에 내 집 지붕에 구멍이 났어. 나는 오늘 모처럼 휴일이었거든. 집에서 조용히 쉬다가 난데없이 재난을 당한 셈이지. 잘 들어. 난 오늘 쉬는 날이야. 소중한 휴일에 내 집에서 쉬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검이 지붕에 박혀버렸다고. 네 부주의는 나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지붕에 구멍까지 뚫어놨어.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오늘이 휴일이라는 점이야. 어떻게 할 거지? 나는 보상을 받아야겠어.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은 건 참을 수가 없거든.”

“………….”

성격 더럽네요.

나그네는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나그네의 부주의가 그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건 분명합니다. 슬슬 기분이 나쁘지만 사과는 해야겠죠.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야 나그네는 보상해줄 돈이 없으니까요……. 

“그, 그건 사과할게……. 내 실수야. 이곳으로 오다가 슬라임과 맞닥뜨렸는데, 원소력이 안 통하는 바람에 죽어라 때려야 했거든……. 그러다 놓쳤어.”

남자는 계속 말해보라는 표정입니다.

무표정이었지만 대강 그런 뜻이 전해져 왔습니다.

“네 휴일을 망쳐서 미안해. 하지만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이것만큼은 알아줘. ……그리고, 저……. 보상 문제는……, 내가 그…….”

돈이 없어서.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마자,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무정하게 선언했습니다.

“그럼 몸으로 갚아.”

“뭐??!!”

“나와 같이 내 집으로 가지.”

“안 돼!!”

나그네는 화들짝 놀라 남자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 파닥파닥 날뛰었습니다.

모르는 남자의 집에 끌려가서 몸으로 보상금을 갚느니 차라리 물속에 빠지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품속에서 몸부림치는 나그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끌고 가려고인지, 남자는 나그네의 허리에 두른 팔에다 더 세게 힘을 주었습니다.

“싫어! 그럴 순 없어! 검을 건져주고 물에 빠질 뻔한 나를 구해줘서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흑,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날 끌고 가서 음험한 짓을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절대로 안 할 거니까! 너야말로 잘 들어. 그런 건 좋아하는 사이에 하는 거라고……! 피해 보상이니 뭐니 하는 시답잖은 조건을 갖다붙여도 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난 처음인데! 어떻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랑……. 얼굴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이 파렴치한! 변태! 짐승! 이거 놔! 윽, 흐윽……. 그냥 물에 빠질래!”

버둥거리는 사이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허리를 감은 팔에서 벗어나려고 양손으로 그의 팔과 손을 떼어내려 하는 나그네였습니다. 파닥거리느라 물 위에서 허우적대는 발끝이 물을 차 올려 찰박찰박 소리가 났습니다.

“어이가 없군.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어. 사고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면 그딴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지? 돈이 없으면 네가 직접 내 집으로 와서 지붕 고치라고. 난 이 말을 한 거야. 이상한 착각하지 마. 피해를 입은 입장인 내가 그런 폭언까지 들어야 하나?”

“…………아.”

머쓱해졌습니다. 머쓱한 나머지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품속에 안고 있는 나그네의,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얼굴이 남자에게는 아주 잘 보일 것입니다.

사람은 이럴 때 같지도 않은 자존심을 부리게 되는 법입니다.

“지, 지금 생각 바꾼 거 아니고? 정말 지붕만 고치면 되는 거지? 어, 어휴……, 내 팔자야……. 오늘은 운이 너무 없다니까. 옛날이야기에선 호수에다 도끼를 빠뜨리면, 물속에서 나온 사람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차례대로 보여준 다음 정직한 나무꾼에게 상이라며 전부 주던데……. 역시 현실은 만만치가 않네.”

“오히려 내놔야 하는 입장이면서 금이나 은은 무슨. 기대한 방법대로 해주길 바라나? 내키지는 않지만,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선처하지.”

“고칠게요.”

나그네는 순순히 수락했습니다.

이 남자의 페이스에 말려든 느낌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보상해줄 돈이 없으니 가릴 형편이 아닙니다.

“숨은 잘 참나?”

“어?”

영문 모를 질문을 던진 남자에게 되묻자, 그는 나그네를 바라본 채 한숨을 한 번 쉬고서 설명했습니다.

“내 집이 있는 곳은 제대로 대기가 있지만, 거기까지는 물속을 내려가야 해. 그동안 숨을 참을 수 있겠어?”

“……얼마 동안인데?”

“글쎄. 난 숨 쉴 수 있어서 안 재봤는데.”

“무책임한 거 아니야?! 난 죽을 수도 있다고!”

뭐 이런 뻔뻔한 놈이 다 있어?

이런 뜻을 담아 원망하는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보았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고. 멀쩡한 사람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있다면 세기의 발견입니다. 연구 대상입니다.

결국 나그네는 물었습니다.

“너……는 역시 인간이 아니지? 물속에서 나온 것도 그렇고 물속에서 숨을 쉰다는 것도 그렇고……. 대체 뭐야? 난 이제부터 너희 집에 갈 건데, 아무리 피해 보상이라지만 정체도 모르는 수상한 사람의 집에 무턱대고 가기는 좀…….”

“수상한 사람? 내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이유도 없이 단순한 실수로 남의 집 지붕에 칼을 던진 네 쪽이 더 수상해 보이는데. 내 집을 고치는 건 최소한의 도리 아닌가?”

“윽…….”

역시 성격 나쁜 남자입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잘못을 한 건 맞으니까요.

그런데, 남자의 뒤이은 대답은 다소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대충 정령이라고 해두지 뭐.”

“정령이라고 하면 보통은 이렇~게……, 귀엽고 날개도 달리고, 상냥한 이미지 아냐? 넌 너무 건장하잖아. 성격도 나쁘……, 아니, 내 검은 제법 무겁거든? 그걸 한 손으로 든 데다 지금은 나까지 안고 있는데. 그리고 정령이 무슨 보상으로 돈을 내놓으래?”

“그냥 간다.”

“정령님! 저 숨 못 참아요…….”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 그래도 꽉 끌어안은 허리를 압박하기에, 나그네는 다급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대로 물속에 내려갈까 봐서 양손으로 남자의 어깨와 가슴께를 꼭 쥐었습니다. 기다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반복하며 잠수할 준비를 했습니다.

흐읍──, 하아──. 흐으읍──, 후우…….

이번에야말로 결연한 마음을 먹고 나그네는 남자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주……, 준비……, 됐…….”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나 똑바로 보기나 해.”

“엥?”

“내 숨을 들이마시면 물속에서 잠깐은 숨 쉴 수 있어. 고개 들어.”

“응?”

남자의 그 엄청난 발언은 마치,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가벼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곧바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고요한 색의 눈이 초점조차 맞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따뜻한 숨결이 닿는 감촉은 부드럽습니다. 얇은 막으로 뒤덮인 섬세한 입술에 찌릿거리는 전류가 간지럽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나빠야 할 상황인 것 같은데, 이 성격 나쁜 남자로부터의 정중한 접촉을 거절하기 싫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술에 닿으면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생각하자마자 입안의 점막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흘러들었습니다.

남자에게서는 햇빛을 머금은 종이 향기가 났습니다.

 

✦︎✧︎✦︎

 

무일푼이 되고, 쉬러 들어온 숲에서는 슬라임과 맞닥뜨리고, 검을 물속에 빠뜨리고, 남의 집 지붕에 구멍을 내어 피해 보상을 해줘야 하고, 돈이 없어 직접 고치러 가는 길에 오늘 초면인 남자, 얼굴은 잘생겼지만 성격이 별로인 사람에게 첫 키스를 빼앗기고.

역시 오늘은 운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남자에게 안겨 물속을 내려가는 도중에도 불평이라고는 한 마디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대화가 오고 가지 않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역시 남자의 입장에서는 피해를 입었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주겠다는 말을 했으면 되었는데. 그러면 이 남자와 필요 없는 논쟁을 할 일도 없었겠죠. 여태까지 나누었던 대화가 논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지만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스스럼없이 누군가와 이야기해보기도 오랜만입니다. 밖에서 쏟아져 들어와 물속에 가라앉는 두 사람을 감싼 빛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그네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름이 뭐야?”

“빨리도 묻는걸.”

“아, 그냥 알려주면 안 돼? 왜 이렇게 꼭 트집을 잡아? 네 집을 고쳐주려면 불러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리고 나그네는 남자의 목에 두른 팔에 살짝 힘을 넣은 뒤 말했습니다.

“난 카베야. 잠깐이겠지만 잘 부탁해. 검을 떨어뜨린 건……, 다시 한 번 사과할게.”

“알하이탐.”

사과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기분 탓이겠지만 무표정이 아주 조금은 누그러진 듯 보입니다.

뒤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끙끙대며 따라오는 가방을 힐끗 돌아보고서, 카베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

 

그곳에도 하늘은 있었습니다.

물 밖의 하늘이 비쳐서 그렇게 보일 뿐이었지만, 양지바른 따뜻한 곳에 알하이탐의 집이 있었습니다.

주변을 흐르는 물줄기와 잔디 사이로 자라난 꽃과 햇살과, 그리고 부드러운 공기로 둘러싸인 좋은 집입니다.

카베의 취향은 훨씬 화려하고 정교한 쪽이었지만, 눈앞의 이 집이 정말로 ‘집’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프게도, 알하이탐의 말대로 지붕 한구석에는 정말로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이 좋은 집에 내가 흠집을 내다니. 얼른 고쳐줘야겠어.

카베는 착실히 뒤따라온 조수 가방을 힐끗 보고 나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습니다. 걸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가 시야를 되찾았을 때는, 다시 알하이탐의 품속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비실거려? 이래서 제대로 고치겠어?”

이런 때까지 얄미운 소리입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말 한마디에 서운함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 남자에게는 당장 자기 집의 지붕이 더 소중하겠죠. 물에 빠지지 않도록 계속 안고 있어준 것도 키스를 한 것도 결국, 카베에게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필요에 의한 친절이 이토록 가혹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습니다. 

“걱정 마, 확실히 고칠 테니까. 나는 이래 봬도 건축가거든. 현장 일을 직접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어.” 

카베는 알하이탐의 팔을 물리며 일어서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베는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거든요. 진행하던 일이 잘못되어 무일푼이 되고 나서 숲에 들어와 헤매고, 여러 일을 겪다 보니 더 힘이 빠진 모양입니다.

“배고파…….”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 아득한 곳에서 메아리쳤습니다.

억누르고 있던 허기를 자각하자마자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립니다.

부끄러워……. 숨고 싶다. 이게 뭐야…….

귓가에 쏟아지는 한숨을 느끼며 카베는 생각했습니다. 속으로 울고 싶었습니다. 강한 척도 여기까지입니다.

“식사를 못 했어?”

“응…….”

“얼마나?”

“기억이 애매해서 잘 안 나……. 이틀은 넘은 것 같아.”

“…….”

결국 카베는 알하이탐의 팔에 안긴 그대로 집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천장에 뚫린 구멍이 계속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조차 없습니다.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몸은 나른하게 가라앉기만 했습니다.

소파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지않아 고소한 수프의 향기가 감돌기 시작합니다.

카베는 혼자 산 지 오래되었기에 누군가가 식사 준비하는 소리를 듣기는 오랜만입니다. 역시 이 집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상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알하이탐의 집은 겉보기뿐만 아니라 안까지 제대로 된 집이었습니다.

집 안이 잘 정돈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실내에 가득한 책들에 잡음이 스며들어 조용한 공간은 아주 편안했습니다.

알하이탐이 숨을 불어넣어줄 때 맡았던 종이 향기를 떠올립니다. 왜 그런 향기가 나나 했더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네요.

이렇게 식사까지 준비해주는 걸 보면, 성격만 조금 안 좋을 뿐 좋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앉아봐.”

눈을 감고 있는 카베의 귀에 차분한 목소리가 가라앉았습니다.

준비한 식사를 소파 앞의 테이블에 올려놓는 식기 소리도 들립니다.

눈을 뜨고, 알하이탐의 도움을 받아 소파에 앉은 카베가 테이블을 보니 따뜻한 수프와 부드러운 빵과 치즈와, 그리고 반갑게도 와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치고 간단한 음식이지만, 며칠을 굶어 속이 안 좋을 카베에게는 이 정도가 가장 알맞습니다.

눈앞의 따끈한 식사에 눈물이 배어 나올 것만 같습니다……, 이게 얼마 만인지. 거기다 다른 사람이 차려준 식사입니다. 역시 그는 좋은 사람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스푼을 들고 후후 불어 조심조심, 목 안으로 수프를 흘려 넣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수프가 온몸에 스며들어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습니다.

“맛있어……, 정말 고마워.”

“맛 평가하라고 한 적 없어. 먹기나 해.”

“칭찬을 해줘도…….”

사사건건 얄미운 말을 하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이번에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고마워’라는 말이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걸 보면, 카베는 그 사이 알하이탐에게 마음을 많이 연 듯 보입니다.

따뜻한 수프, 치즈를 올린 빵, 그리고 와인까지 머금자 금세 행복한 기분이 차올랐습니다.

부드럽게 녹아내린 마음은 속내를 털어놓게 했습니다. 모처럼의 다정한 식사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저 하소연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이 잘못되어 큰 빚을 지게 된 일, 그 빚을 갚기 위해 어머니가 물려주신 집을 판 일, 울적해진 기분을 달래기 위해 떠돌다가 숲에 들어온 일……. 카베는 식사를 하는 동안 알하이탐에게 전부 털어놓았고, 알하이탐은 조용히 들어주었습니다. 옆에 앉아 와인을 마시면서요.

혼자가 아닌 식탁이 이렇게 마음이 채워지는 곳이라는 걸 절절히 느끼며, 식사를 마친 카베는 스푼을 내려놓았습니다. 

“잘 먹었어. 이제 지붕을 고쳐줄게. 아까 말한 대로 나는 프로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말을 마치고 소파에서 일어나려던 카베였습니다만, 알하이탐에게 팔을 붙잡혀 도로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자세히 상황을 설명하자면, 팔을 붙잡은 채 아래에서 빤히 올려다보기에 버티고 서 있기가 껄끄러웠습니다.

“오늘은 맑을 것 같으니, 지붕은 쉬고 나서 고쳐도 상관없어.”

“어? 하지만 구멍이 뚫린 채로 내버려두면 보기 안 좋잖아.”

“마냥 나쁘지만은 않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려오기 전까지는 당장 고쳐야 한다는 기세로 몰아붙이더니.

카베는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알하이탐을 보았습니다. 

“밤에는 달빛이 내리쬐는데, 물을 한번 통해서 들어온 빛이 조각나면 별처럼 보이거든.”

“그건…….”

“집 안에 누워서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알하이탐은 처음으로 미소 지었습니다.

카베는 고민했습니다. 이 집에 묵고 가라는 뜻 같은데, 식사까지 얻어먹은 마당에 또 신세를 져도 될까? 카베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는지는 몰라도, 이 남자가 친절을 베푸는 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이었습니다.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요.

오늘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기대면 피해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여느 때처럼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카베는 대답했습니다. 왠지 그의 성의는 받아들이고 싶었습니다. 시종일관 무표정이던 알하이탐의 미소에 마음이 흔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고 싶어.”

긍정적인 답을 들려줄 때, 카베는 분명 자신이 웃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몇 년 사이를 통틀어 가장 마음이 따뜻한 순간이었거든요.

 

이렇게 가난하고 불운한 나그네는 드디어 조금씩 행복을 찾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나그네라고 부르면 안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에게는 따뜻한 집이 생겼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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