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영원의 메르헨

눈앞에서 흐드러지며 떨어져 내리는 하얀 꽃잎을, 남자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달이 뜬 밤까지 열심히 일한 남자가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생소한 풍경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온 바닥에는 하얀 무언가가 군데군데 수북이 쌓여 있고, 그 한가운데서 왼팔에 든 바구니 안의 무언가를 한 움큼씩 집어 공중에 흩뿌려 대는 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 바구니 안에 든 것이 꽃잎이겠죠, 아마도.

물건은 항상 같은 자리에, 가구를 놓을 때는 조화와 실용성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빈틈없이 깔끔한 집 안을 유지해오던 남자였기에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일어날 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의 일상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제자리에, 정연하게 위치하여 제시간에 기능해야 하니까요.

있기는 했습니다. 이변을 일으킬 만한 존재가, 딱 하나.

정교한 퍼즐처럼 잘 끼워맞춰진 일상에 불쑥 끼어든 이후, 종종 이런 식으로 한 조각씩 어긋하게 하는 사람.

어스레한 등불이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과 섞여 그 사람을 비추었습니다.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누군가가 그를 위해 일부러 만든 장치 같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방 안의 등은 집을 어지럽히고 있는 저 사람이 켜놓았겠죠. 그것이 하얀 달빛과 어우러진 결과 우연히, 우아한 조명 효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아니, 우연일지 고의일지는 모릅니다. 그림책 같은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놓은 저자가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이렇게 집 안을 어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은 무엇 때문일까요. 일을 마치고 쉬러 돌아온 집이 엉망이라서인지, 집을 어지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몽환적이라서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 남자의 성격대로라면, 현장을 목격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 나가 저자의 팔을 잡아서 당장이라도 이 정신 나간 짓을 멈추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욕을 마칠 때까지 깨끗하게 치워라’라는, 협박 같은 말을 남긴 뒤 그를 뒤로했겠죠. 그런데 당장은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 엉망이 된 집을 보고 반사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 정도로 현실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쏟아지는 빛의 중심에서 춤추는 것처럼 팔을 높이 들어 올릴 때마다 하얀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집니다. 그 동작은 아주 느릿하게 보였습니다. 결코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을 시간의 흐름이 마치 정체된 것처럼요.

바구니로 손을 가져가서 꽃잎을 가득 쥔 다음, 그 손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대기를 가르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궤적에 맞추어 흰 꽃잎이 흩어졌습니다. 부드러운 노란빛으로 가득한 방 안에 하얀 달빛이 별가루처럼 퍼져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에 내려앉습니다. 그가 움직이면서 흔들린 대기가 작은 바람이 되어 피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에 섞인 희미한 꽃향기가, 꽃을 흩뿌리는 그를 막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얀 달빛과 꽃잎과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한 이 공간 속에서, 빛을 입어 투명해진 꽃잎 사이 나비처럼 춤추는 그 사람의 모습만이 선명합니다. 평소에는 날카롭게 치켜뜬 눈이 지금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 그리던 그림과 비슷해서 기분이 좋은 거겠죠. 그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격무를 마치고 쉬러 돌아온 남자의 집이라는 점은 아예 고려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문득, 응시하던 남자를 그제야 눈치챘는지 서서히 시선이 이쪽을 향합니다. 빛 속에서 달콤하게 녹아 흘러내릴 것 같은 눈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였습니다. 허공에 멈춰 있던 팔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꽃을 뿌리던 손을 멈춘 그가 미소 지은 그대로 남자를 돌아봅니다.

“알하이탐!”

웃는 얼굴과 달콤하게 울리는 목소리. 아주 기분 좋은 상태입니다. 그에게서 비롯된 진동이 알하이탐을 현실로 이끌었습니다. 멈추어 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뭐 하는 거야?”

꿈같은 공간에 울리는 알하이탐의 목소리가 대기를 가르고 그림의 주인에게 닿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는 중인가’라는 질책은 귀에 안 들어오는 모양인지, 그는 상기된 목소리 그대로 자기 할 말만 지껄이기 시작했습니다.

“눈 내리는 것 같지 않아? 수메르에서는 눈을 볼 수가 없잖아. 너무 궁금해서 하얀 꽃을 한가득 뿌려보기로 했어. 천재적이지? 꽃잎은 차갑지도 않고 체온에 녹아버리지도 않아서 눈과 많이 다르기는 해도, 대충 이미지한 느낌은 나올 것 같더라. 어때? 향기로운 눈이라니, 제법 로맨틱…….”

“카베.”

“?”

“눈 내리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집 안을 이렇게 어질렀다고?”

“응.”

카베의 눈은 아직 꿈속에 있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설명한 걸 왜 되묻는가 하는 눈이었습니다. 이 난장판은 결국, 카베의 머릿속에 있던 그림이 맞는 모양입니다. 알하이탐이 집 안을 보고 예상한 그대로 말이죠.

얹혀사는 주제에 남의 집을 이렇게 어질러 놓았다는 자각은 아직 그에게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이상과 호기심을 현실에 꺼낸다는 목적만으로 움직이는, 아주 단편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하고, 어린애 같으면서도 감정적인 행동이라고 알하이탐은 생각했습니다.

터무니없는 녀석이라고.

알하이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아주 변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세간에서 미쳤다는 평가로 자자한 알하이탐이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이성적으로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집을 벗어난 그때부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그저 옷을 걸치고 다니는 동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오만한 시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알하이탐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사람으로서 대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죠. 당연합니다. 그의 높은 기준에 들어오는 자는 없었으니까요. 지금 눈앞에 있는 변종, 카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만이 이 세상에 자신과 함께 남겨진 지성체인 것 같았습니다. 같은 언어로 이야기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들과 달리, 그와는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질문을 보내면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대답에 반박하면, 언성은 다소 높아질지언정 또다시 날카로운 목소리가 되돌아와 귓가에 꽂혔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이야기할 때의 카베와는, 대화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타인의 신체에서 만들어진, 자신과 명확히 다른 파동이 끊임없이 고막에 파고들어 뇌를 자극하는 감각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습니다. 카베가 만들어내는 목소리와 그가 가진 지혜는 알하이탐이 가진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알하이탐에게는 없는 것이었죠.

자신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고하는 동급의 지성체.

이것이 알하이탐이 카베에게 가진 첫인상입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나와 다르지만 같은 종의 다른 이를 갈구하며 찾아헤매는 것.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

사람들은 이것을 외로움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만의 이상적인 논리로 점철된 이기적인 철학자도 외로움을 느낀 걸까요? 그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역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빈틈없이 짜맞추어진 일상의 퍼즐 한 조각을 내어줄 정도로는 카베를 각별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알하이탐에게 일상은 아주 소중하고, 카베는 이 넓은 세상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인간이었으므로 자리를 내줄 가치는 충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베는 종종 이해 못 할 행동을 하고는 했습니다. 지금처럼요. 집에 들이기 전에는 그의 즉흥적인 행동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았습니다만, 요즘은 이렇게, 깨끗한 집에서 쉬고 싶은 알하이탐을 방해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런 일뿐만이 아닙니다. 아카데미아에 나간 사이 가구의 배치를 제멋대로 바꾸어놓기도 하고, 이상한 물건들을 예쁘다는 이유로 사 와서 집 안 여기저기에 장식하기도 하고(걸리적거려서 실용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치우게 했습니다만), 기분에 따라 화병의 꽃을 매일같이 갈아 꽂는 등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짜증이 났습니다. 쓸데없는 행동으로 느껴졌습니다.

‘나와 대화가 가능할 정도인데, 어떤 사고회로를 거치면 저런 행동이 나오는가’.

현재 카베에 대한 알하이탐의 감상은 이러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부딪치는 빈도가 자연스레 늘어났는데, 기묘하게도 말 없이 서로의 곁에 조용히 머무는 시간 역시 늘어났습니다. 정적 속에서 시계의 초침 소리가 분명히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때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둘 중 누구도 목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는, 호흡을 내뱉을 때의 미세한 진동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이따금 천 너머로 스칠 때 스며드는 피부의 온기가, 마주쳤을 때 부드럽게 휘어졌다가 다시 먼 곳을 향하는 시선이 언어를 대신했습니다──이러한 것들이 동물적인 교감이라는 사실을 알하이탐은 아직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교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만, 알하이탐은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이성과 논리로 대화해야 한다고 여겼기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화하고 싶은 상대 역시 같은 생각인지 의견을 묻는 일은 논외였습니다. 알하이탐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인간은 둘뿐이잖아요.

 

그리고 시간은, 사고는 다시 카베가 대답을 마친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무표정으로 응시하기만 하는 알하이탐을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베가 눈앞에 서 있었습니다. 어이없다느니 철이 없다느니 이해할 수 없다느니, 곧바로 비난하는 말을 쏟아낼 줄 알았던 알하이탐이 조용해서 의아하다는 표정입니다. 카베는 감정표현이 풍부한 타입이라 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지만, 지금 알하이탐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망설이는 중이었습니다. 아주 드문 일이죠.

“야.”

“…….”

“여……, 역시 기계처럼 딱딱하고 고지식한 너도 뭘 좀 느꼈구나? 감사한 줄 알아. 내 덕에 진귀한 걸 본 참이잖아. 감상 한 마디쯤은 말하는 게 어때?”

“…….”

저 산더미 같은 꽃을 살 돈으로 저축을 한다든가 빚을 미리 갚는다든가, 조금 더 건설적인 데다 사용하면 좋을 텐데요. 생각이라는 게 있나? 아니, 있지. 그 나름대로는 있겠지만 지나치게 비상식적입니다. 그는 역시 이상주의자입니다. 상상에만 존재하는 동화적인 요소를 현실에다 구현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과 재화가 필요한데, 카베는 항상 꿈을 좇느라 현실을 안 보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을 놓쳐버립니다. 이상을 위해 실리를 내던지는 사람이죠. 이해할 수 없는 부류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날아들었습니다.

“왜 말이 없어? 괜히 무섭잖아. 혹시 그렇게 감동적이었냐? 후후……. 우리 서기관님, 오늘 일기라도 쓰셔야겠네.”

“…….”

“……알하이탐.”

“…….”

“화……났어?”

카베는 항상 주인공입니다. 단, 그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동화 속에서 말이죠. 현실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으니 다른 의미로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화났으면 화난 티라도 좀 내……. 너, 말이라도 안 하면 진짜 무서우니까.”

“…….”

“……잘못했어.”

“…….”

“이거 내가 치울게.”

하얀 달빛과 꽃잎과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빛을 입어 투명해진 꽃잎 사이 나비처럼 춤추던 그가 눈앞에 서 있습니다. 부드럽게 뒤섞인 빛이 미세한 물방울처럼 맺혀 그의 모습만이 선명합니다. 시간이 다시 느릿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화 속으로 빨려들어갔는지, 집 안이 카베의 기묘한 행동 때문에 동화처럼 바뀌었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말없이 그저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두 사람 주변으로 희미하게 흐르는 건 시계 초침 소리입니다. 시간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간신히 인식하게 해주던 그 소리마저 차츰 옅어져 갔습니다. 호흡하면서 작게 파문처럼 번지는 대기의 진동을 의식합니다. 공기에 별가루처럼 섞인 달의 입자는 아련하고 서늘한 맛과 함께 목 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 안에 아주 조금 섞여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무언가는, 그의 호흡에서 비롯된 잔향일 것입니다.

꽃잎을 뿌리다 말고 알하이탐에게 다가와 신나게 주절거릴 때만 해도 달콤하게 녹아 있던 눈에, 지금은 서서히 경도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눈이 다시 유리처럼 얼어붙기 전에, 동화의 주인인 그가 이 자리에서 도망가버리기 전에, 시간이 정체된, 바로 지금.

손을 뻗어 카베의 팔목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자, 예기치 못한 힘이 가해지는 바람에 그의 몸이 휘청 기울었습니다. 넘어질 수도 있다는 본능의 경고와 반사신경 때문에 시선은 잠시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알하이탐을 올려다봅니다. 지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해서, 경도를 되찾던 눈동자의 시간도 멈추었습니다. 알하이탐은 남은 한쪽 팔을 뻗어 카베의 허리에 둘렀습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 공중에 머물러 있다가 중력에 이끌려 땅에 떨어지는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입니다. 눈 깜빡이는 사이 떨어져버리는 순간이 애틋하고 안타까워서 사람들은 꽃을 찾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졌다가 피고, 다시 질 때 흩날리는 꽃잎이 추락하여 동화 같은 이 순간이 끝나버리기 전에.

떨어지는 한때, 부드러운 대기의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내려앉는 꽃잎에게는 그 순간이 화려한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꽃잎을 손에 쥐는 사람은 꽃이 가장 빛나는 한순간을 영원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스한 공기, 은은한 흰꽃의 향기, 깊어진 밤 어스레하게 빛나는 입자들 속에서, 품에 떨어져 내리는 그를 의식하고 팔에 힘을 넣습니다. 품속에서 당황한 듯 굳어 있다가 몸을 작게 들썩이다가, 끌어안은 팔에서 힘이 빠져나갈 기색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내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내, 주저하며 등을 마주 끌어안는 손의 감촉이 닿았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이제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마주 끌어안은 채로, 그저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카베의 몸에 베어들었을 흰꽃의 향기를 다시 맛보기 위해, 알하이탐은 그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이 아련하고 달콤한 향기야말로 순간을 품속에 가두어 영원으로 만든 증거라고 생각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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