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엔트로피 ; 환상경계 패러독스

말하자면 이건, 수메르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 중 한 명인 네게 주는 특별 포상이야.

서기관으로서 매일 출퇴근하는 네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인센티브’, ‘보너스’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오늘 너를 이곳으로 부른 건 그런 이유 때문이고, 너는 내가 주는 이 포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다만, 네가 바라는 것을 이루려면 추가로 일을 더 해줘야 해. 현재 공석인 현자를 임시로 대신하는 데 더해서 대현자의 업무 중 일부도 네게 맡길 거야. 나는 네게 포상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과하게도, 혹은 부족하게도 줄 생각이 없거든.

세계수에서 그 아이의 가지에 달린 잎새 하나를 찾는 일은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야. 거기에 접촉하고 기억에 간섭하는 건 더 어려워. 원래는 금기시된 일이지. 너도 알 거야. 하지만, 규칙에 주의한다면 나는 네 희망을 들어줄 수 있어.

미래에 큰 영향을 가져올 정보를 그 아이에게 주어서는 안 돼. 네가 그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은 지극히 제한적이야. 너는 총명하니까, 그 선을 잘 판단하리라고 생각해.

그 아이는 너와 함께한 시간을 꿈이라고 여길 거야. 아무리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불러온 하룻밤의 꿈으로 치부되어, 성장하면서 점차 잊혀지지. 자라면서 시간은 흐르고, 한 겹씩 쌓여가는 기억의 가장 밑바닥에서 양분이 되어 그 아이에게는 기시감 정도로만 남을 거야.

그러니 그 아이의 꿈 밖으로 나갈 만한 행동을 하거나, 필요 이상의 정보를 주어서는 안 돼. 아직은 어린 그 아이에게 너는 그저 꿈이어야 하니까.

그래도 상관없다면, 이제부터 네게 선물을 주려고 해.

잘 다녀오렴. 그 아이와 아름다운 꿈을 꾸기를──알하이탐.

 

 

눈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어른의 눈을 보았을 때, 아이는 비로소 자신이 우울로 가득 차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공간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다란 케이프 자락이 땅에 닿아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유란 아마도 아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겠으나, 워낙 키가 커서인지 자세를 낮추어도 어른의 시선은 아이의 눈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는 여전히 아이를 조금 내려다보아야 했다.

이 어른은 아이를 보자마자, 정확히는 아이의 바로 앞까지 걸어오자마자 주저하는 기색을 일절 보이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집을 나선 아이가 문을 닫고 한동안 멍하니 앞쪽만을 바라보며 어떻게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아니, 아이는 망설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랜만의 바깥공기를 한껏 들이쉴 수도 없을 만큼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푹 젖어 있었다. 폐 속에 따스한 햇빛과 공기 대신 미지근하고 무거운 습기가 들어차 그 안에서 아무리 본능을 따라 숨을 쉬어봤자 몸을 채우는 것은 눈물뿐, 가득한 우울의 습기 안에서 고개 숙인 그녀의 머리카락과 팔을 타고 흐른 눈물이 옷자락에 스며들고, 그렇게 아이가 있던 공간은 숨 막히는 눈물로 채워져 갔다. 그곳은 밀폐된 수조 같았다. 헤엄조차 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눌러 오는 탄식과 한숨의 수압에 호흡조차 버거웠지만 아이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포근한 태양의 온기를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다가 밤에는 달빛을 입어 빛나는, 이 숨 막히는 수조 바깥의 온기가 그녀에게는 필요하다고 불현듯 떠올렸던 것이다. 슬퍼하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도 알 수 없고 위로하는 말을 건네보았자 슬픔에 잠긴 그녀가 버거워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집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아이가 건네는 말이 설령 어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고집 섞인 투정이라도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온통 뒤덮은 비탄을 숨기고서 아이를 끌어안아 주었을 테니까.

그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의 슬픔을 헤집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된 그 공간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지만, 이것이 벌이라면 얌전히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수조가 되어버린 집 안의 풍경은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따뜻한 빛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두꺼운 유리 너머에서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아이는 오랜만에 햇빛 아래로 나왔다. 끝없는 비극에 빠져 그대로 가라앉아 가는 그녀에게 온기의 파편이라도 전하기 위해, 우울한 공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흠뻑 스며든 슬픔이 아이의 몸을 타고 흘러 발밑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햇빛만으로는 도저히 마를 것 같지 않았다. 아이에게서 배어나 방울방울 떨어진 슬픔은 아이가 서 있는 땅 위에 그림자처럼 고였다. 자신이 만든 웅덩이에 빠져버릴 것 같아서, 수조를 빠져나와 혼자 걸어야 할 길이 무서워서 이대로 돌아갈까 하고 마음이 가라앉던 그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채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아이의 시야에는 짙은 이끼 색의 옷을 걸친 어른이 들어왔다.

혼자 집을 나선 아이의 눈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어른을 경계할 법도 한데, 아이는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그대로 뒤돌아서 수조 안으로 돌아가야 할지, 혹은 다리를 움직여 눈앞의 어른을 향해 다가가야 할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사고하고 판단을 내리는 일이 두려웠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다. 생각의 끝에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작은 행동이 무서운 결말을 가져올 것만 같았다. 손을 움직일 때 손가락으로 무심코 가른 공기의 파동이, 몸의 반동을 따라 흔들리는 금빛 머리카락으로부터 흩뿌려진 잔상이, 존재의 모든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아이는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혹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지나간 과거에 미련을 품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 리 없다. 아이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야 속에서 점점 다가오는 커다란 어른을 보며 이런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어른은 아이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곧바로 자세를 낮춘 것이었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는 얼굴에 표정이라고는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부터 무언의 배려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똑바로 꽂히는 시선이 이상하게도 두렵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는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우울에 잠겨 감각과 감정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기 직전의 처연한 아이가 낯선 이를 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어른은 말도 없이 충분한 시간을 기다렸다.

우울로 가득 찬 수조 바깥의 세상은 전과 같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색채는 그대로였어도 마음이 그렇지 못했다. 물 아래로 가라앉아 두껍게 진흙이 쌓인 거울처럼, 세상의 색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가 시간을 들여 뒤바뀐 색에 적응할 만한 여유는 현실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잔혹하게 흐르는 시간 속 현실은 변하지 않고, 아이는 그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져 눈으로 좇을 새도 없이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슬픔에는 색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 바로 앞에는 선명한 색의 눈이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마주 보고 있는 어른의 왼쪽 눈이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치우면 될 일인데도 아이는 쉽게 팔을 뻗지 못했다. 닿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만에 목격한 이 선명한 색을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아이의 작은 움직임을 보고 나서야 이제 목소리를 내어도 괜찮겠다고 판단한 어른이 나직하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카베” 하고, 경쾌함이 담긴 짧은 파동은 아이의 귓속에 흘러들어 여태 잠들어 있던 감각을 두드렸다. 셀 수 없이 여러 번 들어왔던 익숙한 발음과 울림이었으나 낯선 이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낮고, 생소하고, 정적인 목소리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다.

모르는 어른의 목소리다. 자신을 정의하는 이름의 법칙에 따라 똑같이 한 발음이었으나, 이 어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카베는 비로소 자신이 집을 뛰쳐나와 햇살 아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침체된 실내와 대조적으로, 살아 있는 대기 안에서 머리카락과 뺨을 스치는 바람도 그제야 느껴졌다. 바람은 카베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부에 부드러운 감촉을 남기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어른의 머리카락도 살짝 흐트러진 덕에, 뒤덮여 있던 왼쪽 눈이 그 사이로 얼핏 보였다.

그리고 어른의 두 눈으로부터, 카베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은 원래부터 여러 색으로 넘치고 있었으니 여태 카베의 눈앞에 드리워진 우울의 장막이 이제야 걷혔다고 해야 한다.

오늘 처음 본 이 어른이 어떻게 카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그래서 경계해야 하는지. 당연할 법한 의문은 떠오르기도 전에 바깥의 색채에 묻혀 사라졌다. 카베는 이 어른이 말하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 들었지만, 마치 전부터 카베를 불러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기 때문이다.

“내게는 네가 슬퍼하는 것처럼 보여.”

이어진 어른의 말을 듣고 카베는 그제야 의문을 떠올렸다.

나는 슬픈가?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등 뒤의 수조 속 어머니가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그녀일 테니까. 슬퍼하는 그녀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것이 카베의 의무이다. 그녀의 슬픔은 카베 때문이다. 슬퍼할 자격이 없어 따라 울 수조차 없었다. 하염없이 흐른 눈물이 집 안을 가득 채운 후로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는 그녀를 두고 슬퍼하기는 망설여졌다. 이것은 죄책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눈앞에 나타난 낯선 어른에게 속마음을 다 들켜버린 것 같았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나, 해서는 안 될 생각을 들켜버린 건 아닐까, 나를 혼내기 위해 찾아왔을까.

그러나 어른은 너무나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화를 내는 기색도 없으며 전혀 무섭지 않았다. 카베는 자신이 슬픈지, 그리고 슬퍼해도 되는지를 생각하려 했으나 갑자기 되돌아온 세상의 색이 사방에서 뒤얽혀 혼란스럽기만 했다.

“카베.”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렸다. 낮은 파동이 이름의 형태를 그리며 귀의 안쪽까지 파고들자마자 가슴속에서 타고 올라온 응어리 때문에 목이 메어, 카베는 입을 조금 열고 숨결에 그것들을 섞어 토해내려 했다. 호흡할 때 오르내리는 가슴을 오랜만에 의식한다. 매끄럽게 대기로 섞여들어야 할 숨결이 목 안에서 걸려 툭툭 끊겨 나왔다. 어른은 처음 봤을 때와 다름없이 담담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어른은 아마 카베가 손을 뻗기 전까지는 절대로 먼저 접촉하지 않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다. 눈앞에 나타나 서서히 세상의 색채를 돌려주고, 그 색이 감각의 혈관을 타고 흘러 아이의 마음을 비로소 간지럽힐 때까지. 심장이 아직 뛰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깨닫고 도움을 구하려 손을 뻗어 오기까지.

“슬퍼……? 내가……?”

멍하니 되뇌는 목소리가 꺼질 것처럼 흘러나왔다. 분명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낯설어서, 카베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태 마음을 옭아매던 것을 정의하는 말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귀에 맴도는 동안, 카베는 눈가에 감돌기 시작한 위화감을 의식했다. 차오르는 위화감이 무거워서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자 뺨을 타고 미지근한 액체가 흘렀다.

어른의 눈이 정확했다. 카베는 그저 슬펐다. 매일 눈물을 흘리고 우울해하다 이제는 공허함에 사로잡힌 그녀를 위해 눌러오던 것들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에서 배어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턱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숨이 막혀왔다. 마음이 밀어 올린 여태까지의 압박감과 죄악과 혼란과, 어린아이가 아직 담아두기 버거워 정의조차 내릴 수 없던 것들이 뒤섞여 호흡과 함께 토해졌다.

“……슬퍼…….” 

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카베의 몸은 쓰러지는 것처럼 어른의 품으로 기울었다. 이 어른 앞에서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카베를 보자마자 몸을 낮추어 시선을 맞추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준 이 사람이라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우느라 잘게 들썩이는 몸에 그제야 손이 닿았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서서히 윤곽을 타고 내려가, 가볍게 토닥이는 제스처도 없이 카베가 우는 동안 그저 등에 손을 올려두기만 했다. 손의 무게와 온기가 옷 아래 피부에 스며들자 떨림은 점차 잦아들었다. 어른은 올려둔 손에 힘을 주어 어린 카베가 무겁게 느끼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손이 닿을 때는 이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그리고 온전히 지탱해주는 느낌이었다. 옷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을 때의 온기와 무게를 카베는 알고 있었다. 이 어른은 아마도, 작은 카베의 몸을 배려해 손의 무게와 열이 전부 실리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카베가 머리를 기댄 어깨는 단단하고 따뜻했다. 파묻고 있던 이마와 눈을 문지르니 어른에게서는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났다. 처음에는 얼핏 화사한 꽃향기인가 했는데, 그것은 서서히 다른 것으로 바뀌어갔다. 카베는 여전히 어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감싼 누군가의 온기와 친절에 대해 생각하기도 오랜만이다. 슬픔을 자각한 뒤에 오는 것은 이러한 안도감이었다.

생소한 줄 알았던 이 어른의 향기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주로 생활하는 곳의 향인지 완전히 몸에 배어 있는 그것은, 햇빛 아래에서 책을 펼쳐 들고 페이지를 넘길 때 코끝을 스치던 포근한 향기였다. 여기까지 걸어오며 스친 풀과 이끼의 싱그러움을 입은 어른이 손에 아주 조금 힘을 넣어 등을 안는 것처럼 감쌌을 때, 카베는 이 어른에게서 어렴풋하게 느끼던 아버지의 향수를 완전히 지워 버려야만 했다.

같은 어른이지만 그의 키도 그가 가진 색도 손의 크기도 향기도 체온도, 모든 것이 아버지와 달랐다. 아버지 외의 남자 어른과 이렇게 닿아보는 일은 처음이다. 착각할 뻔했지만 그가 색채를 돌려준 덕분에 감각으로, 이어서 사고로 알 수 있었다. 과거 사랑받았던 기억으로 카베는 누군가가 자신을 향헤 쏟는 애정을 민감하게 알아채고 반응할 수 있었다. 그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깨닫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던 움직임도 멈춘 채 가만히 안겨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커다란 비밀을 끌어안은 기분이었다. 이런 부끄러움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무뎌진 감각과 사고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혼란과는 달랐다. 가슴속에 간질거리며 피어오르는 것들을 다시 가라앉히기 위해 카베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가 두른 향기와 체온이 폐 속을 가득 채우고, 오르내리는 등에 얹힌 손의 윤곽이 더 잘 느껴졌다. 주저하면서도 카베는 양손을 움직여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품속에 더 파고들었다. 낯설고 포근한 향기를 제 몸에 옮겨 오려는 것처럼 남자에게 매달렸다. 슬프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 이제 그는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베가 붙잡는다면 조금 더 머물러줄 것 같았다. 기대하고 있다. 설렘과도 비슷했다. 오래도록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심장 박동이 귀를 울리기 시작했다. 작고 빠르게 반복되는 아이의 고동에 묵직한 소리가 겹쳐지고 있었다. 이 남자의 심장으로부터 전해지는 박동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카베에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그가 지금 떠나버리면, 그로 인해 되찾은 감각들이 금세 다시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힘을 넣었을 때, 호흡하면서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던 가슴의 움직임이 길어졌다. 그는 아마도 길게 숨을 내뱉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세 번째로 카베의 이름을 불렀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을 직접 울리는 파동이 기분 좋게 피부로 스며든다.

“내가 널 위로해줘도 되겠어?”

귀로 파고들기 전에 맞닿은 몸으로 전해진 목소리가 안도감이 되어 카베의 눈에 고였다. 카베는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목이 매어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다시 입을 닫고 간신히 신음 같은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깨에 대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도 충분했겠지만, 그래도 카베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의 말로부터 전해지는 파동이 지독하게도 안심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와 박동도 그에게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느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렇게 슬픔을 일깨워 끌어안아주는 어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응…….”

울음을 참는 아이가 보채듯 웅얼거리는 소리였지만, 카베의 등에 올리지 않은 그의 다른 한쪽 손이 마침내 움직여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그것으로 대화는 충분했다.

그는 우는 사람을 받아주는 데 능숙한 모습이었다. 받아준다기보다, 어떻게 상대해야 가장 위로가 되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익숙해질 정도로 그의 앞에서 울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옷자락을 붙들었던 손을 풀고 커다란 몸을 마주 끌어안으며, 카베는 그의 향기와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희미하게 흔적을 남긴 누군가에 대해 생각했다.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걷는 동안 까마득한 위를 올려다본다. 손을 잡았다기보다는 남자의 손가락을 카베가 붙들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남자의 키는 아주 커서, 올려다보려면 고개를 한껏 들어야 했다. 길을 걸을 때는 앞을 잘 살펴야 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주의를 들은 적이 몇 번인가 있지만, 지금은 그를 올려다보며 걸어도 넘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카베에게 맞추어 충분히 느릿한 속도로 걸었으며, 이따금 카베를 힐끗 내려다보고 따라오기 힘들어하지 않는지 살펴봐주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를 올려다보며 걷던 카베와 눈이 마주쳤는데, 처음 한두 번은 부리나케 고개를 돌려 앞을 보는 척했던 카베였으나 그에게서 주의를 주거나 타박하는 말이 들려오지 않아, 눈이 마주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 그를 올려다보고 걷게 되었다.

그는 아주 신기하고 이상한 사람이었다. 큰 키와 단단한 몸을 가진 남자는 무거워 보이는 케이프를 걸치고도 수메르성의 온화한 대기 속을 여유롭게 나아갔다. 움직임에 따라 기다란 케이프 자락이 펄럭이고, 허리에 달린 금속 장식들이 작게 찰그락거리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양쪽 귀를 무언가로 덮고 있는데, 아까 기어들어가듯 내뱉은 카베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린 걸까. 남자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한데 잡은 손에 꼬옥 힘을 넣었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에서 두드러진 관절 부분에 굳은살이 있기에, 카베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조심스럽게 문질러보았다. 어린 카베가 말을 걸지 못하고 그 행동으로 자신을 부른다고 여겼는지, 이내 남자는 카베를 내려다보며 “왜, 힘들어? 쉬었다 갈까?” 하고 물었다. 카베는 고개를 젓고 나서 “아니”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는데, 남자는 카베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안 힘든데…….”

“카베. 나는 너와 산책을 하고 싶거든.”

“응.”

“내가 천천히 걷기 위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너도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뭔데?”

“내가 널 안고 가는 거지.”

“…….”

“어때, 괜찮겠어?”

남자와 대화하는 동안 카베는 대답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짧은 말밖에 돌려주지 않았으므로, 남자의 귀를 덮은 저것 때문에 카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해도 그가 일방적으로 ‘안고 가겠다’라고 제안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는 카베의 의사를 묻고 대답을 기다렸다. 아까처럼, 카베로부터의 승낙이 없다면 그는 이대로 계속 걸을 것이다. 고개만 끄덕일까 하다가, 카베는 역시 목소리를 내기로 결정했다.

“응, 괜찮아.”

내려다보는 남자가 작게 웃은 것 같았다. 카베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카베는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를 내면 대답이 돌아오고, 말을 걸어주고, 의지해서 걸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 기뻤기 때문이다.

손을 잡은 그대로 남자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다른 한쪽 팔은 카베를 향해 살짝 펼쳤다. 카베의 바로 앞에서 어른이 이런 움직임을 하는 건 대개 끌어안아줄 때였으므로 카베는 주저하면서도 한 발짝, 두 발짝을 다가가 남자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에게서 나는 책더미의 향기 너머로는 부드러운 햇빛과 녹음과 하늘이 보였다.

 

 

함께 산책하자는 말대로, 카베를 한쪽 팔에 안아 든 남자는 주위가 온통 녹음으로 뒤덮인 나선 모양의 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처음에는 걸음에 맞추어 가해지는 반동에 떨어질까 무서워서 남자의 목을 꽉 잡고 있던 카베였으나, 그는 카베를 안정적으로 지탱해 주었으므로 이내 그 규칙적인 반동으로부터 오히려 안정을 찾게 되었다.

훅 높아진 시야에서 둘러보니 매일 봐왔던 수메르성의 풍경이 전보다 눈에 잘 들어왔다. 하늘과 나무가 가깝다. 풀과 나무의 향기로 가득한 이 나선형 통로는 카베의 기억에 있는 길이어서, 아카데미아로 가는 건지 묻자 남자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아로 가는 길이잖아.”

“이 길을 알아?”

“응……, 전에…….”

“엄마랑 아빠를 따라왔었나?”

“……응.”

주저하는 카베를 대신해 남자가 대신 부모님을 언급하자 카베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아를 거쳐서 가야 하거든.”

“어디 가는데?”

“글쎄.” 

허리께를 잡고 있던 팔을 더 단단히 두르는 기척에, 카베는 꼭 힘을 주어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내 큰 반동을 한 번 주어 카베를 고쳐 안고 허리를 잡은 손에서 단단한 힘이 풀렸을 때 남자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아이답게 캐물으며 떼를 쓸 법도 한데, 카베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대답이 없어도 둘이 향하는 곳에 머지않아 도착하면 알게 될 테니까.

연꽃이 핀 작은 못과 그 옆에 펼쳐진 하늘 사이의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자, 돔을 얹은 차트리가 녹음 속 공중정원처럼 서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 빛의 입자가 떠다녔다. 입자 하나하나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걸러진 햇빛이 입혀져 은은하게 빛났다. 거기까지 가서야 남자는 카베를 내려 조심스레 중앙의 석제 화분 모서리에 앉히고 그 옆에 몸을 기댔다. 유리에 여러 번 걸러져 찬란한 색을 입고 녹음 위로 떨어져 내리는 햇빛과, 온몸으로 그 빛을 입고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이는 풀과, 습기를 머금은 이끼의 향기가 단번에 눈으로, 피부로, 감각으로 밀려들었다. 하얀 기둥과 돔 아래 유리의 저편으로는 저 멀리 펼쳐진 하늘의 조각들이 보였다. 우울에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온 어린아이가 넋을 잃고 바라보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음에 들어?”

“응. 나도 이런 걸 만들고 싶어.”

“그럼 아카데미아에서 열심히 공부해야겠군.”

“맞아, ……난 엄마처럼 건축가가 될 거야.”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기대되네”라는 한마디를 끝으로 입을 닫고 카베와 같은 쪽을 바라보았다. 카베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어떤 곳에서 사는지, 그곳은 그의 마음에 드는지. 그의 여기저기에 누군가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 혼자 살지는 않는 모양인데,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는지. 그 공간이, 집다운 집인지.

“넌 어디 살아?”

생각들은 뜬금없는 질문의 형태로 튀어나왔다.

남자는 시선만 움직여 카베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 근처”라고만 짧게 대꾸했다. 이 근처라면 이곳에서 가깝다는 말인지, 그렇다면 아카데미아에 다니는 사람인 건지, 집은 마음에 드는지 등, 쏟아지는 카베의 궁금증에 남자는 마지막 질문에만 대답했다.

“마음에 들어.”

“어느 부분이?”

“일단 아카데미아와 가깝고.”

“응!” 

남자 쪽을 향해 상체 대부분을 돌리느라 위태롭게 앉은 카베를 보더니, 그는 곁으로 바짝 다가와 자세를 고쳐주고 나서 말을 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아래로 빛이 가득 들어오는 광경도 좋아.”

“그리고?”

“우리 집은 방이 세 개거든. 가장 큰 방은 서재인데.”

“서재가 있어?”

“있지. 책이 많아.”

“보고 싶어……!”

눈을 빛내며 올려다보는 카베에게 남자는 “다음에 오면 보여줄게”라고 말했다. 다음이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고서. 카베는 ‘언제? 오늘 가도 돼?’라며 묻고 싶었지만, 그가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 목 안으로 삼켰다.

“그리고 햇빛이 덜 들어오는 안쪽 방은 내 침실이야.”

“남은 방은?”

“다른 녀석이 쓰고 있지.”

 

누구?

하마터면 그대로 목소리가 나올 뻔했다. 가까스로 내뱉지 않고 발음하려다 멈춘 채 어중간하게 벌려진 입으로 카베는 숨을 들이쉬어, 습기 찬 대기와 함께 말을 깊숙이 삼켰다. 그리고 누구냐는 질문을 대신해 다른 것을 물었다. 단순히 집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그가 집을 좋아하는 이유 중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남자에게는 표정이 거의 없었지만, 지금 집을 이야기하는 그는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가족이야?”

“음……, 글쎄.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면, 네가 조금 더 자라야 해.”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도 알 건 다 알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때는 신중해야 하거든. 나중에 싫어도 알게 될 거야.”

“그게 언제인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게는 꼬박꼬박 말대답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에는 가까스로 참았지만, 어린아이 취급하는 말에 울컥한 카베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담겨 있었다.

“네가 아카데미아에 입학해서 공부하다 졸업하고 어른이 되면.”

“한참 남았잖아.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었어?”

“나는 안 그렇지만, 네게는 그렇지.”

“안 어려워! 마음에 드는 집에서 같이 살면 가족인 거 아니야?”

“…….”

“왜 웃어!”

남자는 고개를 숙였지만, 웃고 있다는 기척만큼은 전해졌다.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을 이야기할 때 그토록 기분 좋아 보였으니 가족이 아닐 리가 없다고 카베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의하기가 어려워서 어른이 되어야 알 수 있는 관계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녀석보다 네가 더 현명하네.”

“그렇지?”

“그래. 널 좀 본받으면 좋겠어.”

웃다 말고 고개를 들어 카베를 본 남자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어서, 카베를 발견하자마자 눈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기다려주었던 상냥함이 드러난 것 같아서 카베는 잠시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나중에…….”

카베 쪽에서 다시 말을 시작하자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되돌리며 “음” 하고 대꾸했다. 들어줄 테니 이어서 말해보라는 것처럼.

“집에 놀러 가도 돼?”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너는 안 된다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이 있으니 방해가 된다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러나 그는 흔쾌히 “그럼” 하고 승낙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 쪽으로 몸을 휙 돌리려 하는 카베에게 곧장 팔을 뻗어 자세를 고치도록 한 다음 이어서 말했다. 아예 살아도 좋다고.

“……정말?!”

“응.”

“나……, 커피 내릴 수 있어! 아침마다 내가 커피를 줄게.”

“그거 잘됐는걸. 난 커피를 좋아하거든.”

“청소도 할 줄 알아!”

“부탁할게.”

“안 외롭게 매일매일 같이 자줄게!”

“음……. 그건…….”

“혹시 싫어……?”

“……아니, 좋을 대로 해.”

한숨 한 번의 간격이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카베의 제안을 전부 수락해주었다. 그가 받아주었다는 데 신이 난 카베는 남자의 손을 꼭 붙잡고 확인하듯 “약속이야” 하고 선언한 뒤, 거기에 나직한 목소리로 “도움이 될게”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는 그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한 손을 카베에게 내준 그대로, 다른 한쪽 손을 들어 카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시 남자의 팔에 안겨 걷고 있다. 아카데미아 중턱의 공중정원에서 내려와, 지금은 상점가가 늘어선 번화가였다. 이제 혼자 걷겠다는 카베의 말을 그는 한사코 듣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놓치면 곤란하다나. 듣고 보니 그를 놓치고 길을 잃으면 어른인 그에게 더 안 좋은 상황이 될 것 같아, 카베는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먹고 싶은 거나 뭔가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으면 말해.”

활기로 가득한 바자르를 걸으며 남자가 말했다.

아까 차트리 안에서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는 약속의 증표로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고 제안했다. 음식이든 물건이든 원하는 것을 선물하겠다고. 남자의 옷깃을 양손으로 붙잡고서 주위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카베는 한쪽 팔을 뻗어 한 상점을 가리켰다.

“저건 먹는 게 아닌데?”

“저게 좋아.” 

그는 이유를 더 묻지 않았다. ‘저게 좋다’라는 카베의 말을 듣자마자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가 가게 앞에 서서, 카베가 가리켰던 물건을 포장해달라고 했다. 머지않아 훌륭한 선물로 포장된 꾸러미를 건네받은 남자가 품속의 카베에게 그것을 안겨주었다.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카베는 소중하게 손에 든 꾸러미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 안에는 깃털 장식이 들어 있었다. 어디에 쓸지는 아직 못 정했지만, 바자르를 열심히 둘러보던 카베의 눈에 단번에 들어온 물건이었다. 깃털 윗부분에 금색으로 문양이 그려진 깃털은 남자가 걸친 옷의 색과 아주 비슷했다. 그래서 이게 좋았다. 이 물건이 있으면,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와 다시 만난다는 약속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언젠가 만났을 때, 그 역시 이것을 보고 카베를 기억해줄지도 모른다.

홀연히 나타났으니만큼 카베의 곁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오래도록 만나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기억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싶었다. 다시 만나기까지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다시 우울로 가득한 수조로 돌아가 수압 속에서 다시 감각이 마비되더라도, 그가 가진 색의 단편이라도 지니고 있으면 오늘 본 하늘을, 녹음을, 꽃의 색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베는 선물을 한쪽 팔로 조심조심 끌어안고, 남은 손으로는 남자의 옷깃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시 만날 수 있어……?”

대답이 없어도 상관없다. 목소리를 내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일에는 이제 익숙해졌다. 다만, 그가 말할 때의 진동이 카베의 몸에 스며든 것처럼 카베의 작은 목소리도 그에게 조금이나마 배어들기를 바랐다.

“그럼.”

카베는 퍼뜩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인파로 북적여 소란스러운 거리에서도 카베의 말을 제대로 듣고 대답해준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카베를 힐끗 내려다보았다가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언제?”

수많은 이들의 웅성거림, 여기저기서 울리는 높다란 외침, 둔탁하게 서로 부딪치며 길을 지나는 행인들, 땅을 디디고 걷고 달리는 발소리, 어딘가에서 뿌려진 꽃잎들이 바람에 실려 흩날리고 찬란한 등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 그것들을 전부 등지고서 유유히 걷는 두 사람의 공간만이 고립된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 한가운데서 단둘이 길을 나아간다. 외부의 모든 자극들이 눈앞에서 흐르듯이 스쳐 지나가고 둘만의 공간에는 체온을 머금은 향기가 감돌았다. 만났을 때부터 그가 두르고 있던, 희미한 꽃과 햇빛을 머금은 종이의 향기가. 잊기 싫다. 하지만 그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이 그리움과도 같은 감정은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 카베는 마음의 깊은 밑바닥에서 밀려 올라오는 것들을 내비치지 않으려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가 이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날 필요로 할 때.” 

그제야 차분한 대답이 돌아왔다. 격리된 둘만의 공간에서 그것은 아주 잘 들렸다. 카베가 말을 돌려주지 못한 채 계속 응시하는 동안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보고 싶어지면 나를 찾아와. 난 항상 같은 곳에 있어.”

“그걸 어떻게 알아…….”

“알게 될 거야.” 

만났을 때, 우울에 빠진 어머니를 뒤로하고 그곳을 빠져나온 카베 앞에 나타난 그가 슬픔을 알려준 그 순간에 느낀 감정과는 다른 슬픔이 찾아왔다. 공허한 슬픔과는 달랐다. 더 가슴이 답답하고, 거기서 치밀어 오른 애달픔을 삼키려 해도 목 밖으로 울컥 튀어나오고, 흐르지 못한 열기가 차올라 눈가는 뜨거워져 갔다.

“괜찮아, 카베.”

“………….”

달래주는 말은 고여 있던 눈물이 흐르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크게 뜬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져 뺨을 타고 흐르는 미지근한 감촉에 이어서 따뜻한 손가락의 체온이 닿았다. 그로부터 더 이어지는 말은 없어서, 카베는 여전히 한 손으로는 선물을, 다른 한쪽 손으로는 남자를 붙들고 소리 없이 울었다. 이따금 목 안쪽에서 울컥하고 격앙된 감정이 치밀어 올라 어깨가 들썩였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 바로 앞에서 희미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우는 사람을 안아 들고 웃는 것이 야속해서 무어라고 불만을 말하려 했지만 작게 히끅거리는 소리만이 날 뿐이었다. 남자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물리고서, 카베의 등을 감싸 안고 둥글게 어루만졌다. 역시 이 사람은 울음을 달래는 데 능숙하다. 호흡은 서서히 안정되고,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바람에 날아가 피부 위에 서늘함을 남겼다.

“아카데미아로 와. 거기서 날 볼 수 있을 거야.”

“정말……?”

“그래. 약속이야.” 

여전히 등을 어루만져주는 손의 온기에 의지하여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면 가슴속을 가득 채웠던 공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그의 잔향이 남았다. 끌어안고 함께 호흡한다는 실감은 머지않아 안도의 형태로 스며들었다. 서서히 눈을 감고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에 몸을 맡긴다. 그가 주는 모든 것이 따스하고 편안했다. 세상의 색채를 되찾은 것도, 오랜만에 눈물을 흘린 것도, 꿈을 되새길 수 있었던 것도 그와 만난 덕분이다. 잊지 않겠다고, 잠들었다 일어나면 이 선물을 열어 그를 다시 떠올리겠다고, 아카데미아에 갈 수 있을 만큼 크면 꿈을 좇으러 가고 싶다고, 카베는 잠에 빠지기 전에 이런 생각들을 했다.

 

 

카베는 방의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이미 밤이 되어 실내에는 온통 어둠이 가득했다. 누운 채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다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려보니 카베는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낮의 일은 꿈이었을까. 혼자 남겨진 방 안을 채운 상실감이 몸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들 것만 같아 양팔로 몸을 꼭 끌어안으려 한 그때, 품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귀에 들리고 나서 카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품속에 끌어안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틀림없다. 아까 그에게서 받은 ‘증표’이다.

조심스레 포장을 풀자 안에는 카베가 고른 깃털 장식이 들어 있었다. 그가 두르고 있던 의복과도, 눈의 색과도 비슷한 녹음의 색, 거기에 하늘이 녹아 푸른빛이 도는 우아한 깃털이다.

꿈이 아니었다.

그는 아카데미아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아카데미아에 입학하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하니, 멀리서도 그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에다 장식하고 싶었다. 펜으로 만들기에는 이 깃털이 너무 아름답고, 필기구는 잘 보이지 않으니 안 된다. 가슴에 고정하고 다니자니 여기저기에 스쳐 금방 망가질 것 같다. 아카데미아 교복의 모자는 어떨까. 머리에 쓰고 다니면 눈에 잘 뜨일 텐데. 하지만 모자는 썼다가 벗었다가 하니, 마침 벗었을 때 공교롭게도 그가 옆을 지나간다면 소용이 없다.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던 카베는, 알기 쉽게 머리에 직접 꽂아보기로 했다. 머리카락을 조금 길게 길러서 핀으로 고정한 다음 깃털로 장식하면, 잘 떨어지지도 않고 멀리서도 잘 보일 것 같았다.

아카데미아에 입학하기까지는 아직 더 기다려야 하지만, 벌써부터 그와의 재회가 기대되어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다시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그는 어디에 있을까. 번잡한 것을 싫어하니 인적 없는 길로 다닐까. 오늘 그와 함께 걸었던 길로 다니다 보면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른다. 하늘과 녹음 한가운데에 놓인 나선의 길을 따라 금빛의 꽃이 여기저기 핀 공중정원의 차트리 안에서, 스테인드글라스가 쏟아내는 빛의 조각들을 이끼 색 옷 위에 덧입은 그가 서 있는 풍경을 상상한다. 혹은, 그의 몸에서 나던 책더미의 향기를 따라 책이 가득한 곳에 가면 있는 게 아닐까. 뭐라고 인사하면 좋을까. 그는 어떤 얼굴을 할까. 우선은 이름을 물어보고, 다시 자기소개를 하고…….

창밖에 깔린 감색의 하늘 한가운데에 달이 걸리고 별이 지나가는 동안, 카베는 몇 년 후를 상상했다.

 

 

원두를 갈 때의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다. 처음에는 투박하던 소리가 부드러운 저항감과 함께 점차 완만해지면, 그것을 뜨거운 물에다 정성껏 내렸을 때의 그윽한 향기를 기대하게 한다. 그러는 사이 어지러웠던 마음도 정리되어 차분해지므로 커피 내리는 과정이란 카베에게 중요한 일상 중 하나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더라. 어릴 적 어머니를 위해 무언가 하겠다는 마음에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지만, 이 과정에 의미를 두고 평온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카데미아에 다니던 시절, 그곳에서 만난 귀엽지 않은 후배에게 몇 번 대접했던 경험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때는 나름대로 귀여웠는데. ……귀여웠던가? 여전히 건방지긴 했지만. 소문의 천재가 궁금해서, 그가 도서관에 있을 만한 시간을 노리고 찾아가 인사를 건넨 것이 화근이었다. 지금 이 집에서 태평하게 원두를 갈며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니, 인생이 이토록 공교로울 수는 없다.

“알하이탐.”

“…….”

“이제 좀 일어나지그래? 이거 나 혼자 다 옮기고 갈기까지 하는 중이거든?”

“넌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면서 쓸데없는 생각하는 거 좋아하잖아? 우리 대건축가님께서 영감을 떠올리실지도 모르니 방해 안 하려는 거지. 다 갈면 말해.”

“네가 좀 하면 덧나? 아니, 지금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했어? 내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알고?”

원두를 갈던 손을 멈추고 홱 뒤를 돌아보자, 바로 뒤에 드러누워 시선을 책에 고정하고 있는 남자의 무심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집에 살면서 어차피 서로 커피를 즐겨 마시니, 아예 둘의 취향에 맞는 원두를 하나 고르자며 날을 잡은 것이 오늘이다. 그런데 이 나태한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카베가 집 청소까지 마친 시간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식사하고 서재에 틀어박히기에 ‘원두를 고를 테니 나와라’라며 끌어냈더니, 서재에서 읽던 책을 그대로 들고나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카베가 커피 내릴 준비를 하거나 말거나 방만한 자세로 느긋하게 책이나 읽는 것이었다. 일부러 바싹 붙어 앉아 시끄럽게 갈아 댈 생각이었는데,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에서 원두 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무심코 상념에 잠겨버렸다.

“안 그래도 근력 부족이니 그런 거라도 해야지. 그라인더로 원두 가는 건 운동 축에도 못 들어가지만, 지금 네게는 딱 어울리는군.”

“뭐?!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넌 내가 이것저것 다 하니까 떠넘기고 싶을 뿐이잖아?! 너야말로 그렇게 게으름 피우다간 나중에 배 나온 아저씨가 될 수도 있어!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말 중간에 끼어든 목소리에 흠칫하고서 다시 뒤돌아보자, 알하이탐은 읽던 책에서 시선을 옮겨 카베와 눈을 마주쳤다.

“이 집에서 나가기라도 할 건가?”

그런 짓궂은 말을 하면서도 입 끝은 희미하게 올라가 있어서 확실히 장난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도 카베는 곧바로 받아칠 수가 없었다.

‘네가 설마 그러겠느냐’, ‘괜찮다’라는 대답을 해야 맞는 상황이다. 그것이 정답인데, 조금 전까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탓인지 무심코 망설여버렸다.

“어……, 어어──. ……그건…….”

물론 이 남자의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겉치레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망설여버린 잠깐의 시간이 더 민망했다. 알하이탐의 외모가 뛰어나다는 점은 인정하는 바였다. 띄워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키가 크고 비율 좋은 몸매에 근육도 훌륭하다. 펜을 들고 있을 때 눈앞에 있으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귀퉁이에다 그 모습을 끄적여버릴 정도로는. 얼굴도 괜찮고. 성격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카베의 속마음을 그대로 다 읽은 것처럼 야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내 얼굴과 몸을 그렇게나 높게 평가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여태 못 나간 이유 중에는 금전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나도 포함되는 모양이야.”

“너, 너……! 너란 녀석은……! 지금은 젊으니까 별거 안 해도 그렇게 근육이 붙는 거라고! 나중에 정말로 그렇게 됐다간 두고 봐. 당장 박차고 나가줄 테니까! 그리고 여러 번 말하지만, 난 네 선배거든?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그래? 그렇게 안 되면 계속 살겠네.”

“결론이 왜 그렇게 돼?!”

말을 도중에 끊는 목소리가 담담해서 더 울컥한 카베가 테이블에 그라인더를 탁 내려놓았다. 조용히 원두나 갈걸 하고 잠시 후회하던 카베였으나, 하마터면 학생 시절에 처음 만났을 때를 추억하며 이런 녀석과의 감상에 젖을 뻔했다는 것을 떠올리자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어떤데?”

“아, 그만 좀……!!”

알하이탐은 질문을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읽던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틀어 한쪽 팔로 카베의 허리를 감싸더니 서서히 체중을 기대어 왔다. 갈다가 만 원두의, 아직 조금 거친 향기 사이로 햇빛을 머금은 종이의 향기가 뒤섞인다. 알하이탐이 곁에 있을 때는 항상 이런 향에 감싸인다.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던 향기 같은데, 그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카베는 우울과 죄악감에 푹 젖어 지냈으므로 감정이나 감각이 무뎌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갑작스러운 주변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 당시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거의 지워버리기도 한다는데, 실제로 카베 역시 그 시절의 기억은 모호했다. 단편으로 조각난 기억들이 가라앉아 있다가, 불현듯 기시감처럼 이렇게 떠오르고는 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였더라. 몸을 감싸는 커다란 손과 햇빛과 책더미 향기와──그러고 보니 커피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카베?”

귓가에 직접 부어지는 낮은 목소리에 사고가 부드럽게 단절된다. 끈적한 액체가 길게 늘어지다 서서히 끊기는 것처럼, 그렇게 끊어진 사고의 한 방울이 마음의 밑바닥에 떨어지자 카베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당분간은…….”

알하이탐은 말이 없었다. 지금은 말 없이 들어줄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집에 둘이 있는 게 나쁘지만은 않더라. 그리고……,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냐.”

“어떤 점이?”

말을 잇기 쉽도록 가볍게 섞여 들어오는 목소리다. 카베는 자신의 배 위에 얹어진 커다란 손을 의식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아랑 너무 가깝긴 한데, 그래서 편한 점도 있고…….”

“응.”

“문을 열고 들어오면, 거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아래로 빛이 가득 들어오는 광경도 좋아해. ……지금처럼.”

“그리고?”

“방이 세 개라 청소하는 데 시간은 좀 걸리지만……, 서재가 크니까 거기에서 작업하기도 편하고. 아, 다시 말하겠는데. 책 읽으면 제자리에 좀 꽂아놔. 내 일이 늘잖아.”

뒤에서 몸을 기대던 알하이탐이 어깨에 머리까지 얹는 바람에 제법 무거워졌다. 카베는 “무거워”라고 작게 항의했지만, 팔을 들어 알하이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작게 웃었다.

“내 방은 햇빛이 잘 들어와서 좋아. ……왜 네가 굳이 안쪽 방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처럼 늦잠이나 자려고 그런가?”

“글쎄.”

“대답이 왜 그렇게 애매해?”

고개를 어깨에 묻고 어리광을 부리듯 파고드느라 약간 억눌린 발음이 나오는 것을 듣고 있자니, 역시 이 남자를 혼자 두기에는 염려되기도 했다. 입 밖에 냈다간 ‘내 걱정은 네 앞가림이나 제대로 한 다음에 해라’라는 둥 귀엽지 않은 말이 들려올 것이기에, 이번에는 꾹 참았다.

“이제 제대로 앉아. 원두가 거의 다 떨어져서, 오늘은 확실히 골라야 해. 지금 간 것부터 내릴게.”

카베는 알하이탐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자신의 배 위에 얹어진 알하이탐의 손에다 포개었다. 가볍게 잡았다가 토닥토닥 두드리며 제대로 앉으라고 채근하는데도 불구하고, 등에 기댄 체중이 물러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예 양팔을 둘러 꼭 끌어안기에 카베는 알하이탐의 이름을 한두 번 더 불러 항의했으나, “한숨 자고 나서 하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 그 시간까지 자놓고…….”

“누구 씨가 아침부터 소란스러워서 도중에 깼거든. 더 자야겠어.”

알하이탐의 태평한 제안에 기가 막혔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체온에 기대어 잠드는 건 기분 좋은 일이고, 모처럼 한가하니 그의 말에 따라 낮잠을 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테이블에 늘어놓은 원두가 신경 쓰였다. 이렇게 어질러둔 채로는 도저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잠은 이따가 밤에 자고 지금은 원두를 골라야 한다고 말하려던 그때.

“안 외롭게 매일 같이 자준다면서.”

“!!” 

알하이탐치고는 드물게, 밀착한 상태에서도 들릴 듯 말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또 이 느낌이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언제, 누구에게──알하이탐에게?

부드러운 바람처럼, 기시감은 의식의 숲을 간지럽히며 가슴속을 간지럽혔다. 분명히 기억에 있는 것 같은데, 언제인가 경험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그리운 느낌이 들어 알하이탐의 중얼거림에 대꾸하지도 않은 채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원두들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카베.” 

이번에는 또렷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알하이탐이 부를 때는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예민해진다기보다, 침체된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느낌이다.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봤지만, 알하이탐이 부를 때만큼은 주위의 색이 한순간 뒤바뀌었다가 돌아온다. 낮게 울린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어 마음속 밑바닥에 파문으로 번지는 것처럼, 항상 듣는 그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은 항상 신선하다.

원두가 이제 곧 동나는 건 맞지만, 굳이 지금 고르지 않더라도 함께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므로 다른 날을 새로 잡으면 된다.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이 집으로 돌아오고, 카베 역시 그럴 테니까. 일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무심코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스스로도 자각하며 카베는 고개를 돌려 알하이탐을 바라보았다. 초점도 맞지 않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이는 두 눈에는 자신이 비치고 있다.

섞이기 시작한 호흡 사이로, 카베는 속삭이듯 알하이탐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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