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게 우려낸 별하늘에 달 한 방울, 36.5℃에서 취향껏

하늘에는 금빛을 두른 보름달이, 그 옆에는 총총히 뜬 별이 반짝이거나 말거나 귀갓길을 걷던 알하이탐은 눈앞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것을 언뜻 보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귀에 들린 소리는 분명,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땅에 부딪치며 울린 것이다. 수메르성의 길은 보통 석재로 포장되어 있으므로, 낙하하여 부딪쳤다면 성대한 소리가 나야 한다. 그러나 주점에서 모처럼 한잔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걷던 알하이탐 앞에서 느닷없이 땅에 떨어졌으리라 추청되는 그것에게서는 예상외의 소리가 났다. 위에서 떨어져 땅에 격돌했으니 제법 요란한 소리가 울리리라 예상하고 미리 미간을 찌푸렸는데, 실로 묘한 소리였다.

무언가, 폭신한 것이 떨어진 듯한.

그렇다고 솜이라기에는 은근히 소리가 큰 것도 같다. 둥근 형체를 가진 무언가로 예상된다.

대체 무엇이 눈앞에 떨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굳이 시선을 내려 발밑을 확인하기도 귀찮았기에 알하이탐은 그 무언가를 피해 가기로 결정했다.

방향을 살짝 틀어 작은 물체를 피해 간다.

피해 가려 했다.

이번에야말로 알하이탐은 시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발을 붙잡고 있는 둥그런 물체가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하도 작아 잘 보이지 않았기에 알하이탐은 고개를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발등에 앉아 발목을 붙잡고 올려다보는 무언가와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었다.

동그랗고 보송하고, 머리로 추청되는 곳의 양옆에 돋아난 것은 아마도 귀. 작은 몸을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발길을 옮기려는 알하이탐의 기척을 느끼고서 지면에 떨어지자마자 후다닥 움직인 모습이었다. 발에 착 달라붙어 발목을 감쌀 요량이었나 본데, 앞발이 짧아 제대로 잡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앞발로 한껏 발목을 끌어안고 고개를 들어 필사적으로 올려다보는 눈에서 지금이라도 눈물이 또르륵 흘러 떨어질 것 같다. 토끼처럼 빨간 눈에는 마치 달처럼 둥근 빛이 떠 있다.

……토끼? 그렇다, 생각하고 보니 이것은 영락없는 토끼였다. 아주 작고 폭신하고, 앞발은 짧고 귀는……, 머리 위로 쫑긋 서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토끼는 양옆으로 돋아나 있었다. 왼쪽 귀 언저리가 작은 청록색 깃털로 장식된 것을 보니 누군가가 키우던 토끼인가. 참고로 늘어져 있다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그나마 달린 귀도 작아 ‘돋아났다’라고 하는 쪽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시선을 살짝 옮겨 토끼의 엉덩이 쪽을 보자, 역시 달린 듯 만 듯 짜놓은 크림의 뿔처럼 작고도 확고한 존재감을 가진 꼬리가 달려 있다. 긴장해서 나름대로 세운 것 같은데,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아 뜯어낸 솜 같은 것을 파들파들 떨고 있으니 신기하게 보일 따름이다. 크림, 크림이라. 그러고 보니 이 토끼는 커스터드 크림 같은 털색을 가지고 있다. 평소의 하얀 달과 다르게 달콤한 금빛을 입고 뜬 오늘 밤의 달로부터 넘쳐흐른 한 방울이 톡 떨어진 것처럼.

집으로 데려가달라는 건가, 하지만 집에 동물을 키우는 건 사양이다. 생명을 돌보는 건 귀찮은 일이니까. 이 토끼가 버려졌든 혹은 가출을 했든, 겁 많고 예민한 초식동물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토록 달라붙는 건 신기했으나, 이 토끼가 아무리 절박하다 한들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은 애초에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일단 집에 데려갔다가 맡아줄 사람을 찾아야 할까. 그러기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니, 이 토끼가 알아서 그럴 만한 사람을 찾아주면 좋았을 텐데.

알하이탐은 발목에 달라붙은 토끼를 떼어내기 위해 한 번, 가볍게 발끝을 들었다가 다시 땅을 디뎠다. 가벼운 반동에 놀란 토끼가 다른 곳으로 튀어 가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토끼는 화들짝 놀라는 듯하더니 더 세게 발목을 붙잡았다. 부츠 너머로 작은 압력이 느껴진다. 올려다보던 고개가 움츠러들고 눈은 꼭 감겼다. 알하이탐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서 작게 말했다.

“……뭐야?”

동물이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사람은 동물과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질 때 꼭 말을 걸게 되는 걸까. 알하이탐은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다는 점을 깨닫고 가볍게 혀를 찼다.

들릴 듯 말 듯 작게 혀 차는 소리까지도 들렸는지 토끼는 흠칫했으나, 그제야 알하이탐의 발목에서 내려와 앞발을 맞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작은 무게와 온기가 얹혀 있던 발등이 괜히 서늘했다. 저것도 동물이라고, 자그마하지만 제대로 무게와 체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사실인데 직접 겪고 보니 아주 조금 감회가 다른 듯도 했다.

한편, 앞발을 마주 문지르던 토끼는 이내 얼굴 전체를 슥삭슥삭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털을 고르는 것처럼. 토끼란 아주 깔끔을 떠는 동물이라 저렇게 청결을 유지한다더니, 이 상황에서조차 세수를 할 줄은 몰랐다. 세수 삼매경인 토끼를 내버려두고 갈 길을 마저 가자니 아까처럼 후다닥 매달릴 것 같아 조금은 가엾게 생각되었으므로, 알하이탐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움직여가며 짧은 앞발로 어찌어찌 열심히 세수를 하더니, 이어서 토끼는 그 작은 몸을 틀어 몸의 털을 골랐다. 혀가 만족스럽게 닿지 않는 곳까지 신경 쓰기 위해 몸을 트는 바람에, 앞발을 쭉 편 채 앞쪽으로 뻗은 상태다. 저걸 뻗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얼른 집에 돌아가 쉬고 싶은데, 아무리 행인이 없다고는 해도 길 한복판에서 토끼가 털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니.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등 쪽의 털을 고르던 토끼의 몸이 기우뚱기우뚱하더니 기어이 뒤로 넘어갔다. 그래, 아까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도 이런 소리가 났다. 아까보다는 작지만.

곧바로 폴짝하고 일어나 포르륵 온몸을 턴다. 자세히 보니 울상이다. 그야 그럴 법하다. 여태까지 심혈을 기울여 몸단장을 했는데, 마지막에 뒤로 넘어가 털에 다시 먼지가 묻었으니까.

다시 처음부터 털을 골라야 할지 몹시도 망설이는 듯 보였으나, 여태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한지 토끼는 뒷다리로 땅을 디디고 쭉 일어나 알하이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었고 알하이탐은 서 있는 그대로였다. 작은 토끼가 커다란 사람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 한껏 몸을 뻗어봤자 거리가 좁혀질 리 없다. 그래도 토끼는 파들파들 떨어가며 안간힘을 썼고, 그러다가──다시 뒤로 나동그라졌다.

부드러운 털 뭉치가 땅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또 한 번 울리고, 이번에도 토끼는 금세 일어나서 한 번 포르륵 몸을 턴 다음 알하이탐을 올려다보았으나 넘어지기 전과 같은 기세는 없었다. 아마도 상심한 것 같다. 열심히 털을 고르다가 막판에 넘어져 말짱 도루묵이 된 것도 서러운데, 눈앞의 사람이 조금도 몸을 굽혀주지 않아 한껏 올려다보다가 다시 나자빠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증거로 아까처럼 뒷다리로 일어서는 토끼 특유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웅크린 채로 서러운 듯한 시선을 알하이탐에게 보내 왔다.

알하이탐에게서 두 번째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지못해 몸을 숙이고 땅에 한쪽 무릎을 꿇자, 시무룩하게 지켜보던 토끼의 양쪽 눈에 명백한 화색이 돌았다.

“그러니까, 뭔데? 빨리 말해. 나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라 시간을 더 뺏기는 건 사양이야.”

다시 묻는다. 동물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리도 없는데, 이번에도 무심코 말을 걸어버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드디어 날 제대로 봐주네!”

“……?”

토끼가 말을 했다.

 

 

토끼는 일평생 굳이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사는 동물이며,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는 일도 결코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토끼의 행동을 보고 의사를 추측하는 것이 보통인데, 눈앞의 이 토끼는 또렷한 목소리로 알하이탐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 따지고 보면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정체를 묻는 말과 무관하게, 토끼 역시 하고 싶은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봐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토끼는 알하이탐과 마주 보고 대화할 요량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나 열심히 털을 가다듬으며 단장을 한 것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화할 사람을 세워둔 채 한참 세수하고 털을 고르던 건 다소 예의에 어긋나지 않나 싶지만, 어쨌든 이대로 내려다보고 있으면 토끼가 알아서 이것저것 털어놓을 분위기라 알하이탐은 시간을 조금 더 내기로 했다. 말하는 토끼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인간의 언어를 습득한 토끼 연구란 꽤 신선할지도 모른다.

이내 토끼는 웅크렸던 몸을 조금 일으키더니, 아까처럼 양쪽 앞발을 삭삭 맞비빈 다음 가볍게 세수를 했다. 어지간히 깔끔 떠는 성격인 것 같았다.

그리고 토끼는 자기소개부터 시작했다.

“만나서 반가워, 난 카베라고 해! 인간인 네가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저 하늘 위의 달에서 왔어. 달에는 우리 같은 달토끼가 사는 나라가 있거든. 그러니까 나는 달토끼인데,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하계로 내려온 거야. 마침 오늘은 금색 보름달이 뜨는 날이니까! 금색 보름달은 좀처럼 뜨지 않아서, 우리는 평생 한 번 보면 행운이라고들 해. 그 기회가 마침 찾아온 거지.”

“……호오.”

“난 하계의 사람들이 집을 어떻게 짓는지 궁금했거든. 문헌이나 그림으로 공부하다 보니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었어. 말하자면 유학을 온 거지! 그래서 말인데…….”

짧게 돋아난 양쪽 귀가 미세하게 쫑긋 움직였다. 토끼는 앞발을 땅에 대고 정중하게 자세를 고쳐 앉더니 말을 이었다.

“나를 네 집에서 당분간 살게 해줄 수 없을까?”

“싫은데.”

“고마워.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 뭐??!”

“싫다고. 다른 데 알아봐.”

눈앞의 토끼는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알하이탐은 이때, 동물도 표정과 눈빛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애써 사람에게 말을 걸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으니 사정이야 안되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중간하게 떠맡았다가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는 쪽이 이 동물에게는 더 힘들 것이다. 평범한 토끼였다면 몰라도,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니 다른 이에게 말을 걸든가 유학인지 뭔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이 토끼가 다음으로 말을 걸 상대가 생론파의 괴짜 학자이거나, 혹은 희귀한 것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악덕 상인이 아니기를 바라며 알하이탐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잠깐만! 가지 마! 부탁이야!”

다시 내려다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절박한 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토끼는 폴짝 뛰어올라 알하이탐의 무릎 위로 올라오더니, 어깨에 두른 띠를 여며놓은 허리께의 그 작은 틈으로 머리를 쏙 들이밀었다. 아마도 안기려 했던 것이었을 텐데, 알하이탐은 팔을 벌려 받아주거나 하는 등의 협조적인 행동을 전혀 취하지 않았으므로 궁여지책으로나마 품에 파고들었을 터다. 따뜻한 온기와 보드라운 감촉이 배 부근에 닿았다. 바들바들 떠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아래로 착 내린 꼬리까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그 작은 몸으로 유감없이 드러내는 중이었다.

알하이탐은 또다시 길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훌쩍 들어 토끼를 떼어놓는 일은 간단하지만, 이제는 인간적으로 어떨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정심은 딱히 들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이토록 간절하게 매달리는 소동물을 더 모질게 뿌리치기도 내키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널 돌봐줄 사람이 구해질 때까지──.”

“싫어! 너여야 돼!”

“왜?”

알하이탐의 말을 도중에 끊은 토끼가 어느새 품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실한 눈으로. 폭신한 양 앞발이 이제는 배에 얹혀 있다. 원망하듯 그 양 앞발로 배를 여러 번 두드렸는데, 도도독하는 정도의 가벼운 자극밖에 되지 않았다. 확실히 이 밤길에 내버려두고 가면 위험할 것 같다.

타격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질을 하던 토끼가 진지한 얼굴로 늘어놓은 이유란 이러했다.

“하계에 내려와서 처음 본 사람이 운명의 상대라고 했어.”

“처음 본 사람이 나고? 그것참 영광이군. 그걸 믿나?”

“당연하지!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 통계적인 근거도 있다고!”

이 작은 크림색 토끼의 운명의 상대라. 이 토끼들의 사회에서 ‘운명의 상대’가 가진 뜻이 인간 사회와 다르지 않다면 느닷없이 프러포즈를 받은 셈인데, 상대가 토끼라는 점이 문제다. 아니, 사람이 말하는 것보다 이쪽이 오히려 나은가?

알하이탐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 작은 동물이 ‘운명의 상대’를 운운하는 상황도 제법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세간에서 ‘운명의 상대’라고 하면 대개 연심을 품거나 첫눈에 반한 상대, 즉 반려로서 마음에 둔 누군가를 뜻하지만, 이 토끼가 같은 뜻으로 말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네 운명의 상대라면, 같은 토끼가 아닐까?”

“나도 너처럼 사람 모습이 될 수 있는데? 하계의 사람들은 작은 동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굳이 이 모습으로 오는 거야. 귀여운 토끼가 눈앞에서 날 데려가달라고 하면 버틸 사람이 없다던데……. 넌 안 그래? 역시 책과 실전은 다르구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니까.”

토끼가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여전히 낙담한 듯 보였지만, 대화를 나누어서인지 조금은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사람의 모습이 될 수 있는데 굳이 토끼로 눈속임을 해서 남의 집에 눌러앉겠다니, 사기나 최소 기만 아닌가? 점점 의심스럽군. 너를 데려가기가 더 망설여지는걸.”

“아! 의심 진짜 많네! 너무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너한테는 귀여움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겠어……. 하지만, 나를 데려가면 분명히 너에게도 이득일 테니까…….”

“어디가?”

“그, 그건……. 어…….”

어디 한번 들어볼까 하고 지그시 내려다보자, 토끼는 대답이 궁색한지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나……, 나는……, 귀……엽잖……아.”

“…….”

“……대답 좀 해주면 안 돼?”

“………….”

보송보송한 털 뭉치의 시선이 흔들렸다. 본인, 아니 본묘(卯)의 말대로 귀여움이 통하지 않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하긴, 이들의 고향에 ‘인간들은 귀여운 것에 사족을 쓰지 못하니 귀여운 모습으로 매료시켜라’ 따위의 풍조가 만연하다면, 지금 같은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의 무게를 견디듯 입을 다물고 한 번 몸을 떨더니, 토끼는 결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너라면 날 쓰다듬어도 돼!”

“어디가 이득이지?”

“뭐어?! 이거에 안 넘어온다고? 말도 안 돼……. 내 털이 얼마나 부드러운 줄 알아?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하지만, 그래도 너라면 참아 주겠다는데……. 날 쓰다듬으면, 그……, 행복해질……걸……?”

호언장담이라기에는 갈수록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 즉 ‘운명의 상대’에게 귀여움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토끼는 애써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불안해하는 시선과 아래를 향해 처진 꼬리를 숨기지는 못했지만. 자존심이 상당히 센 성격인 것 같았다.

“히익…….”

위에서 엄습하는 그림자에 눈을 꼭 감는 토끼의 머리에다 손을 얹자, 흠칫하고 놀라는 기색이 전해졌다. 가볍게 슬슬 쓰다듬어주니 토끼는 순순히 몸을 맡겨 왔다. 아래로 축 내려앉았던 꼬리가 원래의 위치를 되찾는 것을 보니 긴장이 풀리나 보다. 몸에 닿는 따끈한 털 뭉치의 면적이 점차 넓어진다. 즉, 손길에 노곤하게 녹아서──소위 퍼지는 중이구나, 하고 알하이탐은 깨달았다.

“이건 너한테만 이득인 것 같은데.”

“……으, 어……? 어어…….”

헉, 하고 퍼뜩 자세를 가다듬는 토끼의 발이 허벅지 위에서 파다닥 움직였다. 이랬다저랬다 참 부산스러운 녀석이다.

“다른 걸 제시해봐.”

“너 성격 별로구나.”

“오늘 처음 본 녀석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조건치고는 파격적이지 않나?”

“윽…….”

토끼는 알하이탐의 품에 몸을 꼭 붙이고서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몸 안쪽으로 밀어 넣고 웅크린, 이른바 식빵 자세로 곰곰이 고민하더니 토끼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제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청소를 하면 어때?”

“그 꼴로?”

“꼴이라니! 당연히 청소는 사람 모습으로 하지. 이게 무슨 신세람……. 그리고 이 모습은 사람들이 귀……엽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보통은……! ……으…….”

자신의 입으로 ‘귀엽다’라는 말을 여러 번 하는 데 저항이 있는 모습이다. 그래도 아까처럼 의기소침한 기색은 눈에 띄게 가셔 있었다. 제법 진지한 제안이었을 게 틀림없다. 여기서 더 부추기면 이 작은 생물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궁금했던 알하이탐은, 토끼를 조금 떠보기로 했다.

“약한데. 다른 건 없나? 너를 내 집에 데려가면 온 집 안에 토끼털이 떠다닐 텐데, 청소는 당연히 네가 해야지.”

이 말을 듣고 토끼는 이런 생각을 했다.

쓰다듬어도 되는 권리를 허락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 내가 큰맘 먹고 허락했는데. 거기다 청소까지 덧붙였는데도 이 사람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나 보다.

하계의 사람에게 ‘귀여움’이 통하지 않는 상황은 예상외였지만, 토끼는 애써 침착하려 했다. 조금 전까지 이 사람이 쓰다듬는 손길에 사르르 녹아 푹 퍼질 뻔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계는 무서운 곳이구나. 역시 집을 떠나면 이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토끼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밥…….”

“음?”

이른바 ‘먹이’를 던져주는 작전이다.

귀여움이 아무리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사람 역시 살아 있는 동물이라면 본능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솔직히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토끼는 처음 본 사람이 운명의 상대라는 달토끼의 오랜 전승을 믿었으며 한편으로는 ‘이래도 안 넘어와?’라는 승부욕마저 살살 느끼기 시작했다.

“밥도 내가 할게. 이 정도면 됐지? 나도 많이 양보한 거라고! 이렇게 귀……, 귀여운 토끼를 부려먹으려는 녀석에게 걸릴 줄이야…….”

중얼중얼 불만을 토로하는 입이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평생 한 번 보면 행운이라던, 오늘의 특별한 금색 달빛은 토끼의 자그마한 몸 위에 닿을 때는 투명한 은색으로 비쳤다.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 표면에 설탕을 뿌린 것처럼 솜털 끝마다 촘촘하게 달이 맺혀 있다.

달콤한 디저트, 거기다 한 입 거리로 보이는 토끼의 귀에 목소리가 내려앉은 것은 그때였다. 말을 하려는 기척을 재빨리 감지하고 귀를 쫑긋거리자 낮게, 그러나 비교적 가볍게 던지듯이 ‘운명의 상대’로부터 흘러나온 말은 이러했다.

“가사 전반.”

“어?”

“그러면 데려가줄게.”

“너, 이……!”

꼬리를 바짝 세운 채 파들파들 떠는 것을 보아 가사 전반을 맡으면 데려가준다는 조건을 듣고 화가 났나 싶었으나, 이내 토끼는 다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귀와 꼬리를 추욱 늘어뜨렸다. 사실 작게 쫑긋거린 정도였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알았어…….”

“좋아. 이해가 일치했으니 이제 돌아가지.”

“이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밑지는…….”

“뭐?”

“아, 아무것도 아냐…….”

토끼는 말끝을 흐리고서 알하이탐의 몸에 딱 달라붙었다. 안아서 옮겨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행동이었다. 네 발로 따라오라며 모질게 내칠 기분은 더 이상 들지 않았기에 알하이탐은 한쪽 팔로 토끼를 받치고 천천히 일어섰다. 걷기 시작하면서 전해지는 진동에 떨어질까 겁이 났는지 팔에 감겨 오는 앞발의 감촉이 간지러워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자 품속의 토끼가 귀를 쫑긋대며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니, 이 기묘한 상황에서도 장난기가 스멀스멀 치밀어 짓궂은 말을 내뱉고 싶어졌다. 토끼를 상대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시점에서 이런 종류의 장난기나 호기심은 어찌 보면 타당한 것이었다.

“사람이 되어서 네가 직접 따라오는 게 낫지 않나?”

“내가 무거워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네 집에 처음 가는 거라 나는 길도 모르는데, 내가 못 쫓아오도록 네가 도중에 달리거나 하면 어떡해? 날 떼놓고 도망칠 생각이지? 하아……, 사람들은 토끼를 안고 집에 갈 땐 다들 기뻐한다고 했는데…….”

한 마디도 안 지는 녀석이었다. 이쯤 되니 제법 기르는 보람이 있을 것 같다.

“네 사람 모습도 이렇게 작은가? 그러면 못 쫓아올 만도 하겠어.”

“아니거든?! 제대로 너희 기준에서 어른다운 모습이니까 걱정하는 척하면서 비웃지 마! 그리고 나는 그……. 그! 미……, 미인……, 이거……든……. 아마도……? 보고 나서 잘해줄 걸 그랬다며 후회하지나 마.”

“……기대되네.”

“너 웃어?! 거짓말인 줄 알아? 진짜야!”

웃으면서 잘게 떨리는 기척을 민감하게 느낀 토끼가 다시 빼액 소리를 질렀다.

“발버둥 치다 떨어지면 너만 손해니까 얌전히 있어. 카베라고 했던가? 난 알하이탐이야.”

품속에서 몸을 쭉 뻗고 앞발을 내민 토끼가 이번에는 가슴팍을 두드릴 기세였기에, 알하이탐은 다른 한쪽 손을 뻗어 토끼의 등을 감싸주었다.

“어? 갑자기 왜 이렇게 다정해?”

“같이 살려면 이름을 알아야 하잖아. 너 좋을 대로 불러도 상관없지만.”

“상관없다니…….”

품속의 토끼가 다시 등을 둥글게 말고 얌전히 몸을 맡기듯 힘을 풀었다.

“그, 그럼 알하이탐.”

“응.”

“……잘 부탁해…….”

우여곡절이야 있었지만, 오늘부터 당장 신세를 져야 하므로 토끼는 작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으로 불러보는 그의 이름이 지금은 생소하게 느껴질지라도 곧 일상이 될 것이다. 토끼는 알하이탐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호오. 다짜고짜 집에 살게 해달라기에 제법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사는 할 줄 아는군.”

“야! 내가 그냥 살게 해달라고 했어?! 너도 부려먹을 만큼 부려먹을 거면서……! 왜 한마디가 많아?!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조금 더 타이밍을 봐서 내려왔을 텐데…….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았더니. 내 팔자야……. 먼저 유학 온 선배들은 제대로 성격도 좋고 동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눌러앉고 그러던데.”

“눌러앉아?”

알하이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에 맞춰 규칙적인 진동이 가해졌다. 덩치가 커서 빠르게 걸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이 남자는 품에 안은 토끼를 신경 써서 천천히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서늘한 밤의 한가운데를 둘이서 천천히 나아간다. 하계에서 올려다보는 달과 별은 토끼의 고향에서 볼 때보다 자그마해 보였다.

“어? 응. 하계로 내려온 달토끼가 처음 만난 사람과 결국 사랑에 빠지는 일이 많거든. 그래서 소위 ‘운명의 상대’라고들 해. 같이 지내다 보면 정이 드나 봐? 유학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연인처럼 살다가 새끼도 낳고. 결국 눌러앉게 되어서…….”

“……너도 그러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건가? 내 애라도 낳게? 너, 암컷이었──.”

“수컷이야!!! 아니, 그리고 초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막말에도 정도가 있지……!”

품에서 빽 소리를 지르며 다시 몸을 쭉 뻗은 토끼가 앞발을 한데 모아 항의하듯 알하이탐의 몸을 세게 한 번 두드렸지만, 가볍고 폭신한 솜방망이가 톡 두드린 정도의 감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웃는 기척이 전해지자, 토끼는 알하이탐의 몸에 앞발을 얹은 그대로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았다. 상당히 위협적인 모습을 힐끗 내려다보며 알하이탐은 토끼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가볍게 도닥거렸다.

“너와 지내면 심심하지는 않겠어.”

“무슨──! ……어?”

예상외의 말에, 반사적으로 화를 내려다 말고 토끼가 움직임을 멈춘 그때.

나아가던 발걸음도 멈추고, 이번에는 똑바로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잘 부탁해, 카베.”

깊어가는 밤과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은 길 한가운데, 작은 별로 장식된 금색의 달 아래라서일까. 얄미운 말만 툭툭 내뱉던 남자의 눈에 왠지 웃음기가 담긴 것처럼 보여서, 카베는 한동안 말을 잃고 가만히 알하이탐을 올려다보았다.

“……응.”

등을 도닥이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베의 머리 위로 옮겨 간 손이 조심스럽게 한 번 쓰다듬고 몸을 따라 내려갔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다. 지금은 카베를 품에 안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알하이탐의 얼굴이 조금 기뻐 보였다.

 

달콤한 금색 달이 뜬 밤.

하계에서 처음 만난 운명의 상대와 마주 보며, 카베는 달토끼들 사이에 전해지는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든 머릿속으로는 완벽하고 이상적이며 로맨틱한 첫 만남을 꿈꾸지만, 꼭 현실이 꿈과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누군가와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이름을 알려주고, 그리고 체온을 나누는 둘만의 밤이 특별하다는 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첫 만남도 있다.

개성이 너무 강해서, 성격이 독특해 보여서, 굳이 겉치레를 하지 않아서 알하이탐과의 첫인사는 다소 떫은맛이었다. 지나치게 우려내어 텁텁한 맛을 내는 차 같던 남자와 말을 섞는 동안, 진하디진한 차에서는 깊은 향이 난다는 걸 알았다.

 

한 손으로 카베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등을 감싼 채, 알하이탐은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을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늘하게 느껴지던 밤공기가 이제는 차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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