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의 연속과 네 소리의 에테르, 그 특수한 동시성에 대하여

문 너머에 대체 어떤 작자가 사는지는 몰라도, 잘났든 아니든 간에 직접 면상을 보고 주의를 환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고 알하이탐은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그로서는 드물게도 이웃집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명목상은 ‘주의 환기’였다. 제법 잘 지어져 벽이 그다지 얇다고도 할 수 없는 이 고급 맨션에서 어찌 그렇게 매일매일 벽을 뚫고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넘어 소음을 낼 수가 있는지, 이웃으로서 다른 집에 대단히 민폐라는 점을 모르는지, 댁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나처럼 조용히 휴식을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피해를 보고 있는지, 그전에 대체 무슨 일을 하면 뭔가 두드리는 소리를 끊임없이 내는지. 적어도 내가 출근해서 없는 낮에 하던가 늦은 시간에 사리는 기색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지. 관리실에도 수차례 민원을 넣어보았으나 당장 ‘알겠다, 조심하겠다’라는 대답만이 돌아온다고 할 뿐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민원을 받는다고 해도 어차피 당사자는 아니니까. 매일 심야까지 소음에 시달리는, 무고한 독신 남성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그들로서는 알 바 아닌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알하이탐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아 매일매일 들리는 그 소음에 일상 속 휴식을 방해받지 않는 남들로서는 결코 해결할 의지를 발휘할 수 없다. 이웃집의 문 앞에 메모라도 남겨볼까 했으나, 이웃 간의 예의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옆집 사람에게 그런 조심스러운 방법을 쓰고 싶지도 않거니와 굳이 그자를 위해 종이를 쓰고 필기까지 한다는, 번거롭기 그지없는 과정을 거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자에게는 이 방법으로 충분하다. 반응이 있을 때까지 문을 두드리고, 혹시라도 나오지 않으면 문 너머로 말을 걸어야겠다. 점잖지 못한 수단이라는 점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알하이탐은 그만큼 화가 나 있었다. 모처럼의 휴일 낮에, 어김없이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다, 잘 걸렸다. 어디 오늘 면상 한번 보면서 타이르고, 그래도 막무가내로 뻔뻔하게 나온다면 한 대 패버리겠다는 다짐으로 오늘 이 앞에 서 있다. 알하이탐은 본인의 얼굴과 체구로부터 상대가 느낄 위압감을 잘 알고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싶었기에 굳이 그것을 십분 활용할 생각은 평소 하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타고난 걸 잘 써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정중하게 똑똑 세 번을 두드렸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문 너머에서는 여전히 혼신의 망치질 소리가 들려온다. 일과를 마친 뒤 쉬고 싶은 평일 밤이든 휴일 밤낮이든, 오래도록 알하이탐을 괴롭히던 그 소리였다. 알하이탐은 조용한 분노를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반드시 끝장을 봐야겠다. 물론 이웃집 문을 두드리는 건 처음이고 얼굴도 처음 보는 거지만. 조용히 좀 삽시다, 하는 말을 하며 어디까지나 ‘가만히’ 타이르면 여간해서야 알아듣겠지.

정중한 노크 소리에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 이번에는 가볍게 주먹을 쥐고 제법 묵직하게 쾅 두드렸다. 주먹은 아껴놓으려고 했는데. 역시 이웃에 이 정도로 오랫동안 폐를 끼치고 살려면 상당히 둔감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알하이탐이었다. 이건 ‘가만히’ 타이르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일이 더 성가셔지면 귀중한 휴일이 줄어든다. 휴식 시간이 줄어들겠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알하이탐의 입에서는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멋대로 상상했던 것보다 톤이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다시 한 번 쾅 두드리려던 손을 문 앞에다 멈춘 채 알하이탐은 방금 흘렸던 한숨을 추슬러야 했다. 나오느라 시간이 걸린 건가, 그렇다면 노크 소리를 들었나. 내가 다소 성급했나,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도 노크 소리는 착실히 듣나 보다, 아예 둔감한 건 아닌 듯한데, 그렇다면 평소 그렇게 시끄러운 이유도 잘 모르겠다. 아닌가? 상당히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걸 고려하면, 예상과 달리 의외로 이야기가 쉽게 끝날 수도 있겠다. 더 두드릴 기세로 문 앞에서 멈춘 주먹을 내리고서, 알하이탐은 이 집의 주인이 얼굴을 내밀기까지 얌전히 기다려보기로 했다.

“옆집인데요.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나와봐요. 얼굴 보고 이야기합시다.”

“아……, 네! 잠시만요.”

망설이는 기색을 비친 것으로 보아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상하지 못하나 보다……라고 지금 막 떠올렸는데, 대체 왜 이 결론에 이르렀는지 의문이 들 때쯤 찰칵하고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 의심 없이 바로 문을 열어주다니 상당히 경계심이 옅은 사람이다. 적어도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진짜 옆집에 사는 사람이 맞는지 정도는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지간히 헐렁한 성격인가. ……하긴, 그러니 밤마다 남 생각은 못 하고 그렇게 시끄럽지.

“어?”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놀라는 목소리가 먼저였다.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 간발의 차로 조금 후에 알하이탐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

“너 여기 살아?”

흘러 떨어질 정도로 동그랗게 뜬 투명한 붉은색의 눈을 알하이탐에게로 향한 채, 금발의 젊은 남자가 물었다.

그의 화려한 외모를 잊을 리가 없다.

얼핏 보았을 때 시선을 잡아끄는 수려한 얼굴에서는 예상외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라고 하더라도 제법 멋쩍었는지 흔한 인사말로 말을 걸더니, ‘네 소문은 들었어. 혹시 괜찮으면 나랑 같이하지 않을래?’라고 먼저 제안해주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의 이야기이다. 졸업을 위한 필수 과목이라 어쩔 수 없이 수강했던 수업에서, 타 학과생과의 팀 과제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그때 그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아예 별로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악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관계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알하이탐은 그와 단둘일 때‘만’ 좋았다. 사실 외모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천재성이었다.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전공 분야가 다른 데 더해 아예 상반되는 성격과 기질은 차치하더라도, 의견의 충돌은 빈번했지만 몇 차례인가 말을 섞으며 부딪치고 나면 후련함과 함께 성취감 같은 것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혼자서 책을 읽을 때나, 혹은 의무적으로 듣던 대학 수업에서는 얻지 못한 신선한 경험을 그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격렬하게 논쟁한 뒤 화사하게 웃어 보이며 ‘네가 내 친구라서 다행이야’라고,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다가도 결국 눈을 마주치고 읊조리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목소리를 듣는 그때가 좋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크게 도움되는 것도 아니니 둘이서만 하는 일이라고, 나아가서는 세상에 둘밖에 없으니 타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면 편했을 텐데 그는 끝까지 그렇지 못했다. 이 의견을 입에 담았다가 결국 그와는 크게 다투고 친구보다 못한 관계로 갈라서게 된 것이었다.

그가 여기에 산다니, 더군다나 매일 같이 시끄럽게 소음을 내던 이웃 주민이었다니. 이토록 기가 막힌 우연은 없다──그러나 막상 눈앞에 닥치고 보니 이런 일도 있는 것이라고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전부 파악했다. 그를 잘 알기 때문이다. 시선을 알하이탐 쪽으로 고정한 채 떼지 못하는 그의 얼굴에는 명백한 당황이 떠올라 있었다.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이 여태 저지른 죄에 대한 질타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적어도 눈앞의 알하이탐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다. 곤혹스러워하는 그의 시선 뒤편의,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해도 어쩔 수 없이 떠오르고 마는 저 색은 무엇일까. 알하이탐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용건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 여기 살지. 이 문제야 어찌 되었건, 나는 네게 주의를 주러 왔어. 밤이나 휴일에 대체 뭘 하기에 그렇게 시끄럽지? 여태 관리실을 통해서 여러 번이나 조용히 해달라는 말을 전했는데도 전혀 먹히지를 않더군. 무시하는 건가? 난 적어도 내 집에서는 쉬고 싶으니, 앞으로는 주의해줘.”

“윽…….”

“오늘 이후로도 계속 시끄럽게 굴면 또 찾아와서 네 얼굴을 볼 수밖에 없으니 서로 조심하자고.”

“…….”

의외였다. 그로서도 악연이라고 여길 테니, 반박을 하든지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든지 하는 반향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알하이탐의 말에 반박 혹은 대답하기는커녕 크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으로 보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 그래도 그는 “아……” 하고 애매한 신음을 내뱉더니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미안해.”

그리고 황당하게도 순순히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렇게까지 쉽게 사과를 받으니 알하이탐으로서는 조금 맥이 빠졌다. 그래도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사과를 한 이상 앞으로는 확실히 주의해줄 것이기에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으리라.

“다른 이유를 들거나 반박할 줄 알았는데.”

“넌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어떻게 보고 말고도 없어. 넌 ‘카베’일 뿐이지. 어쨌든 용건은 전했으니 난 이만 가볼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을 그토록 의식하는 성격인 그이기에 자신이 내는 한밤중의 소음이 이웃에 어떤 영향을 줄지 신경 쓰지 않을 리 없다. 궁금했지만, 지금의 알하이탐으로서는 물어볼 입장이 못 되었다. 그가 불러 세우기를 마음 한편으로 기대하면서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발길을 돌리는 척할 수밖에. 알하이탐이 알던 카베라면, 그는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을 당장이라도 털어내고 싶어 할 것이 분명하다. 예전처럼, 겉으로는 완벽을 가장하면서도 혼자 틀어박히기 직전에 보내던 시선을 몇 년 만에 다시 보았으니까. 알하이탐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발을 떼기 직전, 그 짧은 순간 동안에 하던 많은 생각과 고민과 망설임을 마지못해 토해내는 그 순간의 절박한 목소리가 곧 들려올 것이다.

“알하이탐!”

그래, 이렇게.

이때 부르기를 기다렸다는 듯 냉큼 돌아보았다가는 심중을 다 들켜버리는 데다, 카베 역시 당황할 것이므로 알하이탐은 멈춰 선 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카베로부터 이어질 목소리를 기다렸다. 제안이자 부탁이자, 알하이탐에게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한마디를.

“그, 잠깐……, 괜찮으면 들어왔다가 갈래?”

뒤돌아본다면 지금이다. 고개만 살짝 틀어서 시선만을 그에게로 향한 채 되묻는다.

“의외로군. 예전처럼 커피라도 한잔하자고?”

그에게는 여유를 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와 대화하는 방법이다. 크게 다투고 헤어진 지 몇 년이 흘렀어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전부 습관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성급하게 굴었다가는 ‘역시 됐어’라느니 ‘말을 잘못했어’라느니 변명을 늘어놓으며 문을 굳게 닫고 도망쳐버릴 테니까.

시선 끝의 그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한쪽 손으로 다른 한쪽 팔을 꼭 잡고 있다. 손가락이 파고 들어간 그대로 긴소매의 팔 부분에 주름이 새겨졌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응. 오랜만에 얘기하고 싶어서.”

그제야 서서히 몸을 돌려 그의 앞에 선다.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어 알하이탐 쪽으로 내밀다가 이내 거두고는 가볍게 주먹을 쥔다.

“아, 물론……. 네 시간이 괜찮으면.”

“시간 괜찮아.”

이번에는 즉답이었다.

그 역시 이 대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시간을 들이고 고민해서 겨우 건넨 목소리에 제대로 돌아올, ‘네게 내 시간을 주겠다’라는 알하이탐의 한마디를.

집 안은 그답지 않게 어수선했다. 짐이라도 싸는지 여기저기 널린 세간과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대놓고 둘러볼 수도 없어 알하이탐은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짐들을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카베가 권하는 대로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실내가 어질러졌다는 점만 제외하면, 오후의 부드러운 빛이 창으로 비쳐드는 따뜻한 주말이다. 저쪽의 주방에서는 카베가 커피를 준비하는 달그락 소리, 원두가 둔탁하게 마찰하는 소리와 물 끓어오르는 소리가 차례차례 들려 왔다. 알하이탐이 앉은 자리의 맞은편에는 카베가 걸어두었을 그림이 있다. 왜 짐을 싸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실의 짐들을 대부분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그림을 떼어내지 않은 걸 보면 이사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의 심정도 알 수 있었다. 망설이면서도 알하이탐을 집으로 초대한 것치고 곧 이사라도 갈 모양새처럼 어수선한 집, 아직 걸려 있는 그림. 지금 카베가 처한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카베는 그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과거의 껄끄러운 일은 전부 뒤로 미뤄두고 알하이탐을 불러 세웠다. 소리에 이끌려 눈앞에 우연처럼 나타난, 그의 말을 가장 경청해주는 가장 친밀한 자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알하이탐에게 전부 들려주기 위해서.

집 안의 풍경을 보는 동안, 그는 말 없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와 당연하다는 듯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알하이탐 역시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와는 이 위치가 편하다.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주고받고 자연스럽게 체온이 오가고, 그러는 사이 시선이 마주치면 호흡마저 섞여버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꼭 그런 일들을 바라고 그를 앉히기 위해 옆자리를 허락하는 건 아니었지만, 반사적으로 상상하게 되어버린다. 그가 앉기 위해 몸을 낮출 때 공기의 파동, 파동을 타고 흘러드는 향기, 훅 다가오는 체온과 부드럽게 귓가에 감기는 목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예전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이후의 연인다운 행동을 기대해도 좋겠지만, 지금 알하이탐과 카베는 그저 남일 뿐이다. 함께 커피 한잔하자고 집 안에 들였다 해도 그저, 그의 쌓아둔 속내를 들어주는 데 그쳐야 한다. 가슴속에 어렴풋하게 피어오르는 기대들을 목 안으로 삼키려는 것처럼 알하이탐은 카베에게서 받아 든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처지는 상당히 바뀐 것 같았지만, 그가 내린 커피의 향과 맛은 그대로였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본질이다. 한 손에 들 수 있는 커피잔 안에 그것들이 전부 담겨 있다.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커피가 알맞게 식어가는 동안, 그는 혼자서 감내해왔을 이야기들을 토로할 것이다. 아직 머뭇거리느라 양손으로 커피잔을 든 채 뜸을 들이는 그의 옆에서, 이번에는 들려올 목소리를 기대하며 알하이탐은 변함없는 커피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이달 안에 이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혼자서 외롭게 커리어를 쌓아가던 중 맡게 된 큰 프로젝트에서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었다고. 집도 그러다가 넘어갔는데, 그래도 마냥 손해인 건 아니란다. 각종 미디어에서 몇 번인가, 카베의 이름과 함께 크게 다룬 적 있는 건축물을 떠올리고 ‘그걸 말하는 건가’ 생각했다. 어렵게 완성한 작품을 그 역시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로 연락이 없는 사이 알하이탐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궁금한 얼굴이었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알하이탐 역시 묻지도 않았는데 솔선해서 신변 이야기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으므로 말하지 않았다. 카베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만으로도 버거울 테니까.

그의 성격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을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이곳에는 어쩌다가 살게 되었는지──그리고 만나는 사람은 생겼는지.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답하면서 서로가 부재했던 시간을 메우기란, 지금 와서는 어려운 일이다. 아쉽더라도 어른스럽게 상대의 미래가 안녕하기를 빌어주며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카베의 집을 나서기 전, 해가 지기 직전의 진한 등색 사이로 알하이탐은 작별 인사를 했다. 카베 역시 별말 없이 잘 가라고 답해주었다. 미련과 옛정만으로 서로를 붙잡기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각자의 사정은 생기고, 어른이 되어버렸다. 서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외란 존재한다. 오늘 바로 옆에서 들린 그의 목소리가 예외를 바라고 있었다.

“카베.”

두 번째로 몸을 돌리고 걸음을 떼기 직전, 이번에는 알하이탐이 카베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어도 그의 동요가 전해졌다. 그리고 알하이탐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대단히 상투적이고 식상한 대사를 입에 담았다. 그가 애써 미련을 누르고 있다면, 그것을 불러일으켜야 하니까.

“다른 사람 만난 적 있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있는 침묵이 흐르고, 카베는 나직하게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알하이탐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 부리는 일말의 허세이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 우연히 찾아온 이웃집 남자를 집 안에 들이고 커피를 대접하고, 여태 누르고 누르던 마음을 고백할 정도로 그는 철저한 외로움 속에 살았다.

그의 말에 ‘그래?’라는 말을 알하이탐이 돌려주기 전에,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너 말고…….”

다시, 시선만을 움직여 힐끗 쳐다본다. 알하이탐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그의 눈이 황급하게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아무도 없었어.”

시간을 되돌리는 데는 그의 목소리면 충분하다.

바로 몸을 돌려서 성큼 다가가 카베의 바로 앞에 다가갔다. 당황한 카베가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가까스로 뒷걸음질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다.

“지……, 지금은 아쉬움을 안고 어른스럽게 뒤돌아야 할 타이밍 아니야……?”라는, 기어 들어갈 정도의 항의가 다였다. 잠깐의 정적 속에 울리는 심장 박동의 파동이 기분 좋았다. 해 질 녘의 부드러운 색에 바람을 불어넣어 물결을 새기는 것처럼 박동이 시간에 녹아들 때, 알하이탐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알하이탐을 올려다보는 카베의 눈에 스쳐 지나간 잔물결이 그대로 눈가에 맺혔다.

“내가 너 말고 누구랑 연애를 하겠어…….”

이어지는 카베의 호소는 말 끝부분이 흐려져 있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와락 끌어안겨 오는 바람에 안도와 애원과, 그의 절실함이 뒤섞인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알하이탐은 카베의 얼굴을 확인하는 대신에 양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그의 소리는 시간과 함께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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