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 2024. 05 🌱🪶 후기

2023년 11월부터 2024년 05월 19일까지 업로드된 탐카베 포스팅의 후기입니다.

분량이 많으니 한가할 때 킬링타임용으로 읽어주세요.

#으로 검색하면 다음 타이틀의 내용으로 넘어갑니다.

# 하얀 거울에 비친 죄악의 상자 속 이성의 경계에는

J.S. Bach: The Italian Concerto BWV 971

올리는 링크의 곡은 이것을 읽을 때 최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제가 생각을 정리할 때 듣는 곡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통 타이핑을 하며 문장을 만들 때는 골드베르크 혹은 평균율을 듣거나 아예 무언가를 틀어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흐의 곡을 듣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어서 좋더라고요. 이 이탈리아 협주곡은 제가 정말! 좋아합니다. 피아노 버전도 있다지만 이건 역시 하프시코드로 들어야죠. 악기 특유의 찰랑찰랑한 소리가 정말 아름다워요. tmi지만 저는 하프시코드 소리를 너무 좋아해서 이 악기로만 녹음된 음반을 자주 듣는답니다.

어쨌든, 촬영이라는 민감한 소재입니다. 전부터 한 번쯤은 써보고 싶었는데 생각만 하다가 쓰기는 했네요.

이것을 쓸 때 고민이 두 가지 있었으니,

첫 번째는 영상이 흑백일지 컬러일지 하는 점이었습니다.

쓸 때는 폰타인 업데이트 전이어서 티바트의 촬영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어요. 그저 상상에 맡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흑백으로 할까 했는데, 지인들에게 몰래 설문을 돌린 결과 컬러의 표가 더 많이 나왔습니다.

이 이유도 있고, 흑백으로 설정할 경우 나름대로 문제점이 있었기에 최종적으로는 컬러로 정한 것인데요…….

그게 무엇인가 하면, 흑백 영상을 글로 표현할 경우 제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컬러 영상을 접한 세대이기 때문이죠. 흑백은 일부러 찾아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마침 사진 찍는 이벤트를 했는데, 제대로 컬러 샘플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컬러 영상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소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과거에 찍은 영상 기록을 돌려 보는 카베의 상상이 주된 내용이므로, 소리가 들어갔다가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망가질 우려가 컸습니다. 과거의 영상이란 다소 앤티크한 느낌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고로 이것은 신음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수위글이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걸 싫어하지 않습니다. 대사 없는 수위 신을 쓰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 것 같네요. 리월 쪽 cp를 쓸 때 대사라고는 일절 없이 수위를 쓴 적이 있는데, 쓸 때는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나중에 책을 편집하면서 읽어봤더니 느낌이 나쁘지 않더라고요.

노골적인 신음 하나 없는 행위 묘사라는 것이 나름대로 낭만적이지 않나요?

한정된 앵글만이 화면에 비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부분과 청각적 정보는 영상을 보는 카베의 기억과 상상으로 채워진다는 점을 염두했습니다.

촬영이라는 다소 민감한 소재를 다루었기에 완충으로써 노골적인 신음 등을 배제하여 나름대로 고상하게 묘사하려 했으나, 이건 수위글이니 너무 아름다운 서술만이 나열되어도 재미가 없으므로 중간중간 환기를 시킬 겸 임팩트를 주기 위해 자극적인 단어가 들어갔습니다.

카베는 연인과의 애정 행각을 떠올릴 때도 머릿속으로는 세세한 부분까지 떠올리면서 정작 말로 할 때는 노골적이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왠지 부끄러워할 것 같은 인상이어서요.

타인과 깊게 접촉하고 얽히는 것은 고통이며, 카베 같은 타입에게는 아마도 더 그렇겠죠. 그러나 괴로운 과정을 견뎌냈을 때 상대와 완벽한 타인이기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정신적인 고양감으로 받아들였으면 했습니다.

카베가 이 점을 깨닫는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알하이탐이 함께할 테고, 둘은 하나부터 열까지 정반대이지만 그래도 타고난 학자이기에 본질적인 부분은 같으므로 관계한다면 그 바탕에는 성욕보다는 호기심이 앞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과 가장 비밀스럽고 밀접하게 접촉할 때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세상에는 존재하며, 그것을 향한 호기심을 공유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상대가 서로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말인데, 그냥 둘이 쇡스한다는 말을 대단히 길게 썼네요.

마지막 대사는 대구가 되도록 했습니다. 도입부의 회상 신 속 카베와 똑같은 말을 하죠.

도입부에서 카베가 알하이탐에게 제안하는 부분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는 설정입니다. 촬영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하고, 알하이탐이 대답을 약간 망설이기까지의 순간입니다. 그 카베가 짧은 시간에 알하이탐의 의중을 읽고 바로 반응하여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길게 늘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으로 이 트윗의 일부가 들어갔습니다.

알하이탐이 카베를 제압하는 식으로 하는 건 내가 쓴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충격이다……. 이런 똑같은 맛으로 괜찮은 거냐……? 가장 최근에 쓴 수위글을 쓸 때도 아 이렇게 깔아뭉개는 거 처음 써보는데~ 왜 내가 전에는 안 썼을까? 하고 생각했답니다. 정말 충격이네요. 제가 과거에 썼네요?

어쨌든 제 안의 알하이탐과 카베는 ‘두 사람은 너무 다르므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고 두 사람에게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완벽한 타인으로서 동등하게 존재하기에 사랑할 수 있다’이기 때문에, 카베가 상상하면서도 이 선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보통 하나를 쓸 때 2만 자 정도의 분량을 상정합니다만, 이건 대사가 없어 밀도가 상당히 높은 글이 되었으므로 1만 5천 자로 맞추었습니다.

# PM 09:20

Stephan Moccio - Matin

Stephan Moccio - Le Temps Qui Passe

모치오의 곡은 특유의 영롱한 서정이 있어 좋아합니다.

이 글을 쓸 때도 그의 곡들을 들었습니다.

마침 이 글을 마무리할 때는 2024년 1월 1일 0시를 넘긴 신년이어서 새해를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트윗이 많이 갱신되는 시기였어요. 1월 1일은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인 만큼, 여느 날들과 비교했을 때 조금은 모두에게 특별합니다.

이걸 읽고 있는 당신은 2024년 1월 1일 0시에 무엇을 하셨나요?

저는 이 글을 정리해서 올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이라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똑같거나 더 불행할 수도 있겠죠. 사람마다 특별하게 기억하는 날은 각자 다를 테고, 그래서 이 글은 평소와 똑같은 휴일이 될 뻔했지만 그날 만나게 된 누군가로 인해 특별해지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특별한 누군가가 찾아옴으로써 집 데이트라는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역시 알하이탐에게는 평소와 똑같은 휴일이었겠죠.

하지만 약간 다른 하루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알하이탐의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기에 이벤트가 일어나더라도 온화하고 평온해야 했습니다.

전편인 AM 09:20의 후편인데, 애초에 후편을 쓸 예정은 없었습니다. 카베는 알하이탐의 연락처와 주소가 적힌 메모를 받고 거기서 끝났어야 했죠.

다만 AM 09:20을 좋아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그걸 보고 고마운 마음에 ‘언젠가는 그 뒤를 써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을 결국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포스타입의 수익금을 못 쓰는 징크스가 있어서, 모아뒀다가 책 내는 데 사용하고 무료로 배포합니다. 멤버십 후원금이 모인 참에 새로 오픈한 사이트(구 펜슬, 글리프)로 옮길 겸 멤버십 가입자에게 배포할 책에 들어갈 새 단편이 필요했죠. 그래서 거의 90퍼센트는 그 당시 멤버십에 가입해서 후원해주신 분들을 위해 쓴 글입니다.

웹 공개는 멤버십 특전 책을 수령한 분들이 대부분 읽었으리라고 판단한 시점에 이루어졌습니다.

AM 09:20에 이어지는 알하이탐의 시점으로, 집 데이트입니다.

사회 경험 있는 두 사람이 어른으로서 만나면 어떨까를 생각했습니다.

원래 두 사람은 인격이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소년 시절에 만났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 경험을 하고 인생관이 조금은 유해지고 생각이 깊어진 이후에 만나면 어떨까 했죠.

알하이탐은 호감을 느낀 상대라고 할지라도 대화를 우선하기보단 본인이 먼저 관찰하면서 파악하지 않을까 해요.

그래서 카베를 관찰하며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파악하여 뒤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는 알하이탐의 섬세함을 넣었습니다(카베 한정).

특정한 누군가를 대상으로 답지 않게 섬세함을 발휘하는 것이란 즉 플러팅이죠. 이것은 알하이탐 필살의 플러팅입니다. 다짜고짜 ‘집으로 찾아오라’라며 주소를 던져줬는데 덥석 오잖아요. 딴에는 다 됐다 싶은 거죠. 알하이탐이 이 정도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기는 했는데, 세상을 지켜보기만 할 뿐 딱히 적극적으로 얽히지 않는 그가 카베에게만은 관심을 보이고 다가가는 것을 감안하면 타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산 사람은 타인이 가진 기척과 소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데, 처음에는 이걸 직접적인 문장으로 넣을까 했으나 좋지 않은 선택인 듯하여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끼며 의식하는 방향으로 의도했습니다.

알하이탐은 움직임이 많지 않은 타입이므로 집 안에서 소리나 기척이 난다 해도 작은 소리가 이따금 들리는 정도겠지만, 카베라면 알하이탐이 내는 작은 소리를 알아채주겠죠. 이 글에서는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매일 아침 만나면서 충분히 의식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알하이탐으로서도 본인 외의 누군가가 집에 있는 건 오랜만이라 나름대로 의식하며 신선함을 느꼈으면 했습니다.

누군가와 집에 있을 때 해야만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도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 알하이탐으로서는 대단히 희귀한 경험입니다. 이건 현대 AU지만, 게임의 스토리를 고려해봐도 알하이탐은 카베와 만나게 되면서부터 하나가 아니라 두 사람일 때만 겪을 수 있는 일을 비로소 경험했을 것입니다.

‘난생처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알하이탐이 처음 해보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서술이 들어간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내향형 집돌이이고 개인적인 시간에는 주로 독서를 하며, 타인의 인생을 간접 체험하지만 카베와 있을 때만큼은 책에서만 읽던 로맨스의 주인공 위치에 자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를 바랍니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할 때, 그리고 방 안에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할 때는 보통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고려하여 알하이탐의 서재를 지극히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묘사했습니다.

알하이탐은 개인적인 공간에 타인이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겠죠. 그곳이 개인적 취향이 십분 반영된 서재라면 더 그럴 것입니다.

전설 임무에서도 플레이어인 나는 멀찍이서 지켜봐야 할 뿐 죽어도 서재에 못 들어가잖아요.

오로지 카베만이 그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고,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 독서를 하다가 잠들기도 하는 타입이라면 그 개인적인 공간에 타인을 쉽게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출입을 허락한다면 그 대상에게 이미 마음을 허락한 후겠죠.

이런 생각에서 서재 신을 넣었고 그곳에서 펜도 건네주게 됩니다.

도입부를 쓸 당시만 해도 ‘선물을 꼭 건네야 하는가?’, ‘준다면 무엇을 줄 것인가?’, ‘알하이탐이 그 성격에 일부러 선물을 준비할 것 같지는 않은데’ 등등 생각이 많았지만, 결국 주게 되었네요.

전편에서 알하이탐이 카베의 마음에 보답하겠다고 했으니 뭘 주긴 해야겠죠. 그래서 카베가 서재에서 발견한 그 펜을 주게 되었습니다.

예정은 퀼펜이었으나, 퀼펜은 장식적인 의미가 강한 데다 잘 망가진다는 단점이 있어 다른 펜으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고급 만년필들을 찾아보며 카베에게 잘 어울리겠다고 판단한 것이 A사의 한정 만년필입니다.

이미지에서는 금속부가 은색인데, 카베의 이미지상 금색으로 변경했습니다.

본문에 만년필의 외관을 묘사해 두었는데, 실제로 불꽃무늬의 보디와 금속부에 장미 넝쿨을 새긴 예쁜 만년필입니다. 캡톱이나 닙에 대한 기타 디테일은 생략했습니다. 그 신의 주인공은 만년필이 아니니까요. 실제 만년필에 있는 디테일이니, 카베가 그런 것을 받았구나 하고 생각해주세요.

와인은 아래쪽 이미지의 것인데, 저는 못 마셔봤습니다. 맛과 향의 밸런스가 좋다……라고 하네요. 제가 직접 맛을 본 술은 아니지만, 일부러 고가의 제품을 선택했습니다. 지나치게 고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한 날에 마실 법한 것으로요.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도입부의 “어떻게 알아요?”-“어떻게 알았어요?”, “상관없는데”-“……상관없는데……”는 의도적으로 넣은 장치입니다. 서로 같은 말을 되뇌더라도 각자의 의미가 다르므로, 이 부분에서 생각할 여지를 넣고자 했습니다. 둘은 너무나도 다른 성격이지만 그래도 잘 맞는다는 것을 쓰고 싶었어요.

거의 마지막에 “처음~ ……한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부분도 비슷하게 들어갔어요. 서로가 특이하다고 생각하지만 서로가 상대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임을…….

첫 문장과 끝부분도 전후편이 대구가 되도록 했습니다.

카베 시점의 AM 09:20에서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종결로 끝나고, 알하이탐 시점의 PM 09:20은 종결로 시작해서 의문으로 끝납니다.

종이 위에서 알아보기 쉽도록 편집해 두었으니, 책을 받으신 분들은 한번 들춰보세요.

pv에서 영원한 의문에 대한 답은 영원한 침묵이라고 했던가요?

잠든 카베에게서 대답은 없겠지만, 처음 와보는 집에서 안심하고 잠들어버린 모습이야말로 곧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둘의 일상은 다를 바 없겠지만, 그 사이에 섞이는 서로의 기척과 소리에 점차 익숙해지겠죠.

성숙한 어른으로서 만난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온화한 연애를 하면 좋겠네요.

# 제로엔트로피 ; 환상경계 패러독스

Daniel Hope - Ludovico Einaudi - I giorni

알하이탐의 생일 기념이었습니다.

선물은 카베가 받지만, 알하이탐이 구국의 영웅이 된 이유란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며 그 일상에서 카베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알하이탐을 위한 선물이라는 논리입니다.

링크의 곡 타이틀도 영번역하면 ‘the days’ 정도가 되는 모양이라, 일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원본 트윗 타래

이 글은 소아 우울증을 다룹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우울해하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카베 역시 우울증을 겪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소아 우울증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는데, 찾아본 바 성인의 증상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나 했지만, 전문적인 영역이 반영될 경우 글이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에 멈추었습니다.

우울증을 앓아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증상이 심할 경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지금 본인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이럴 때는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조차 생각하기 어려워하죠. 거기에 방어기제 때문인지 당시의 기억이 잘 남지 않는데, 이걸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하려 했습니다.

우울을 표현할 때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물입니다만, 너무 흔해서 망설였지만 우울감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비유로 보았기에 결국 그대로 채용되었습니다.

어린 카베의 우울을 서술하는 초반 부분은 의도적으로 행갈이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열어보고 압박을 느낀 분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의도이므로 이렇게 느낀 분이 있다면 제가 기뻐합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 긴 문장 사이에 짧은 문장을 하나씩 배치하고 사용하는 단어의 한자와 한글 빈도를 조절하는 등 나름대로 많은 조정을 거칩니다.

카베의 내면에서부터 천천히 의식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색이 없던 세계에서 알하이탐의 등장과 함께 처음으로 보인 색이 주위로 확장되게끔, 부드럽게 차근차근 진행한다는 느낌으로 썼습니다.

알하이탐이 어린 카베를 만나 하루 위로해주는 걸 써야겠다고 생각한 뒤 전체적인 스토리를 어떻게 이어갈지 구상한 데까지는 좋은데,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묶어줄 키워드 하나가 부족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단테의 『신곡』으로 할까 생각했는데 이 관계에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았어요. 어찌 보면 역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관계 정의의 키워드는, 고민 끝에 플라톤의 『향연』으로부터 가져왔습니다.

책에서 논하는 연애 그리고 사랑에 관한 내용 중에 ‘소년애少年愛’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걸 채용했죠.

사랑을 주는 쪽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연상의 남성이며 사랑을 받는 쪽은 소년이어야 했답니다. 전자는 소년에게 아낌없이 봉사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인지해야 하고, 후자는 자신을 연인으로 삼아 지혜롭고 훌륭하게 만들어줄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서술합니다. 사랑을 주는 자는 소년이 도덕적으로 진보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열망을 가지며, 사랑을 받는 자는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네요. 이런 연애만이 옳은 형태이며 아름다운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제법 적용할 만하지 않나요? 좋은 말이죠.

이 소년애를 적용하는 데까지는 좋은데, 의미가 퇴색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카베가 성인 남성인 알하이탐을 보고 느끼는 미묘한 감정과 동경 등은 최대한 배제되었어요. 쓰기 직전까지 이 부분을 넣어야 할지 아예 제외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은 조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알하이탐은 어린 카베가 ‘아버지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접촉해보는 지적인 성인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처럼 어른 남자이지만, 결정적으로 아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을 성장시켜줄 ‘연애’ 대상으로서 인식하기를 바랐습니다. 이 묘사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살짝 들어가 있습니다.

카베는 어른 남자인 알하이탐을 보고도 시종일관 반말을 하죠. ‘형’이라고 불러도 좋았겠지만 이 두 사람이 어느 시점에 만나든 동등하기를 바라기도 했고, 윗사람을 칭하는 말을 뱉어버리면 캐릭터 붕괴라고 보았습니다. 만난 그때는 알하이탐을 ‘어른’이라고 칭하다가 남성을 뜻하는 ‘그’로 바뀌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임에도 알하이탐을 그저 어른이 아니라 성인 남성으로 인식하는 묘한 느낌을 주고 싶더라고요.

여기서 난제가 하나 생기는데, ‘낯선 어른 남자인 알하이탐이 어린 카베를 어떻게 데리고 나오는가’였습니다.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카베는 아마도 아카데미아에 들어가기 전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낯선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라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도 있었겠죠.

나히다 님의 배려로 어린 카베가 변덕으로 외출하는 타이밍에 맞출 수 있게 된 데까지는 그렇다 치고, 알하이탐으로서는 어떻게 카베를 설득해야 할지 생각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알하이탐이 모르는 카베라고 할 수 있죠. 차이는 얼마 안 나더라도 연상이자 선배인 그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원래라면 알하이탐이 절대 알 수 없는 시간대의 카베를 만나러 가면서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이를 위로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카베 본인으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어도 알하이탐은 추측만 할 뿐, 실제로 알하이탐을 모르는 카베를 만나는 건 알하이탐으로서도 처음이잖아요.

마땅히 경계해야 할, 처음 보는 어른 남자인 자신을 믿도록 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행동할까를 생각하다가, 보자마자 자세를 낮추어 우선 카베와 눈을 마주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싸우고 나서 소원하게 지내다가 재회했을 때 주점에서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는 이야기를 저는 좋아하거든요. 알하이탐이 어린 시절의 카베를 만나도 그러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카베가 천천히 말문을 열고 스스로 슬프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지긋하게 기다립니다.

유독 알하이탐이 카베의 이름을 많이 불러주도록 했는데, 단순히 저의 희망 사항입니다.

어린아이답게 감정을 자각하고 조금은 어리광을 부릴 수 있도록, 이름을 불러주면서 최대한 이끌어내 주었으면 했거든요. 부친을 잃고 나서부터는 어머니도 카베의 이름을 전처럼 많이 불러주지 못했을 테니까요.

알하이탐이 어린아이를 잘 다룰까요? 아마도 상대가 카베니까 잘 다루겠죠?

어쨌든 이 글 속의 알하이탐은 ‘어린 카베와 있을 때’ 단 한 번도 책을 펼치지 않습니다. 둘이 라잔 정원에 있는 신에서는 한 번쯤 펼치도록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어린아이를 보고 있으니까요. 걸터앉아 있는 카베가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줍니다. 그의 다정함을 넣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좋았네요.

라잔 정원의 돔형 건축물을 정식으로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못 찾겠어서 얼버무리려던 그때, 모 님께서 바쁜 와중에도 찾아주셔서 무사히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 써놓고 마지막에 타이틀을 고민할 때도 여러 조언을 들었습니다. 이과 쪽 용어를 쓰겠다고 결정한 상황이라, 이걸 써도 되나 싶던 차에 의견을 말해주셔서 이 타이틀이 나올 수 있었어요. 저는 전공도 쭉 해온 일도 그야말로 문과라 이런 일에는 어두운데, 기묘하게도 주변에 현직 이과계분들이 계셔서 다행이었습니다. 결론은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니 오타쿠 문학적 허용이라 치고 마음대로 써라’여서 안심했답니다.

시간을 거슬러 어린 카베의 기억에 간섭하면서 패러독스가 발생하지만, 둘의 특수한 관계성으로 인해 제로엔트로피라는 완벽한 질서성을 되찾았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사실 ‘제로엔트로피’는 이론상 불가능하다고 하네요.

시간에 간섭하는 데서 생긴 패러독스 때문에 카베의 기억에 남아서는 안 될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버렸지만, 그것은 큰 영향을 미치는 일 없이 일상 속에서 안정되어갑니다.

원래는 선물 같은 것도 패러독스의 원인이 될 테니 해서는 안 되었겠죠. 그것을 어기고 형태 있는 물건을 남긴 채 알하이탐은 돌아갔지만, 그때 카베가 받은 선물 역시 인과에 잘 녹았다……라는 것을 쓰고 싶었습니다.

‘패러독스’와 ‘콤플렉스’ 중에서 어떤 것을 고를지 생각하다가, 시간에 얽힌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가 ‘m’ 발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패러독스’를 선택했습니다. 기존의 용어가 아니라 이 둘을 설명할 단어를 독자적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환상’과 ‘몽환’ 중에서는 앞에 서술한 것과 같은 이유로(m 발음을 넣지 않기 위함) ‘환상’이 채택되었습니다.

작년 카베의 생일에는 카베가 알하이탐의 온전한 시간을 선물받는 것으로 썼으니, 알하이탐의 생일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카베의 시간으로 가서 일부를 공유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시점은 모든 일이 끝난 지혜축제 이후가 됩니다.

업로드한 직후에도 썼는데, 각각 생일 편지의 “……”과 “!!”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트윗도 섹슈얼한 분위기를 전부 배제한 버전이 들어갔고요.

아카데미아에서 카베가 알하이탐에게 말을 거는 신은 흐름상 삭제했는데, 나중에 소장본을 편집할 때는 넣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반에서 어린 카베의 우울감을 쓸 때가 힘들었지만, 어렵게 나온 만큼 어느 정도는 마음에 들게 완성되었습니다.

# 진하게 우려낸 별하늘에 달 한 방울, 36.5℃에서 취향껏

Gabríel Ólafs - Nightsong

원본 트윗

곡의 타이틀과 내용을 딱히 매치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나중에 곡의 타이틀을 보니 나이트 송이었습니다.

올라프스의 곡은 다 좋으니 각 음반을 통째로 들어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이것은 정말 지능을 OFF로 돌리고 썼기 때문에 제대로 완성한 느낌이 들지 않지만, 지금 읽어도 웃기고 귀엽기는 하네요. 쓸 때도 재미있기는 했습니다.

저는 원래 동물 모에화 같은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토끼는 불가항력이죠……. 저는 토끼를 좋아하거든요. 카베가 주로 토끼에 빗대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토끼 좋아합니다.

‘그루밍’이라는 단어는 표준어가 아니라서 쓸지 말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기억이 나네요. 결국 퇴고 단계에서 전부 고쳤습니다.

이 글에 사용된 의성어 및 의태어도 다른 글과 다르게 비표준어가 꽤 사용되었으나, 이건 지능을 끄고 쓰자는 마음을 먹고 시작했으니 예외적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귀여운 걸 쓰고자 했으니 이 정도는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했어요. 제가 사랑하는 토끼의 모습을 담고자 노력했습니다만, 토끼라는 소재에 카베의 캐릭터가 묻히면 안 되므로 자제는 했습니다.

타이틀은 거의 다 썼을 때쯤 정했는데, 모 사이트에서 밀크티를 살까 하고 장바구니를 들여다보다가 결정했습니다.

밀크티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너무 달지 않은 것으로요.

브렉퍼스트나 얼그레이 베이스를 좋아해요.

밤길을 걷던 알하이탐은 눈앞에 톡 떨어진 크림 한 방울과 앞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체온을 나누게 될 텐데……. 여기에서 체온을 타이틀에 넣자, 하고 생각했습니다.

알하이탐의 체온은 평소 어떨까요?

저는 평균보다 살짝 높으리라고 봅니다. 몸에 근육이 있으면 체온이 조금 높다고도 하니, 제 희망입니다.

사람마다 체온이 각자 다르겠지만, 테마는 ‘온기를 나눈다’라는 것이므로 누구나 한눈에 ‘사람의 체온’이라는 점을 알아보기에 가장 좋은 숫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카베 토끼에게 “너 암컷이야?” 하고 묻는 알하이탐입니다. 넣을지 말지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초면이라 섬세함이 다소 결여된 모습으로부터 cp적인 요소를 끌어내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이 대화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섹슈얼한 뉘앙스 단 0.1도 없이 무심하고 다소 무례하게 툭 던져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 장난 아닌 장난에 카베 토끼는 열렬히 반응합니다. 하지만 수컷이면 뭐 어떻단 말입니까?

카베가 귀엽다거나 미인이라거나 하는 말을 본인이 할 때 주저하는 건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본인의 외모가 화려하다는 점을 알고는 있어도 대놓고 말하는 일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운명의 상대에게 ‘데려가달라’라고 어필해야 하기에 수치를 참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데 있으며 만족은 짐승조차도 좋아한다’라는, 좋아하는 모 작가의 모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 저에게도 적용되어서 배가 부르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고로, 원래 뭔가를 쓰는 동안에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만 이건 잘 자고 잘 먹으며 썼네요.

알하이탐은 카베 토끼와 살면 옷에 토끼털을 붙이고 다니겠네요. 카베가 열심히 떼주겠죠?

# 두 번째 술잔에 차오른 것들을 비우는 시간, 기호도연嗜好陶然

Michelangelo '70 (Arr. P. Ziegler for 2 Pianos)

Muerte del Ángel (Arr. for Strings & Piano)

Hedonic

쓰는 데 두 달이나 걸렸습니다. 그래서 들었던 곡도 많습니다. 링크된 피아졸라의 곡 두 가지는 각각의 앨범이 특히 개성적이라, 많은 연주곡 중 인상 깊은 것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링크는 애플 클래식의 추천에 떠서 듣게 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의 곡입니다.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면서 틀었는데 선율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다시

앉아 피아니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출근하는 사람을 멈춰 세우는 곡을 만들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그날 이후로 블롬크비스트의 곡들을 쭉 듣다가 『Hedonic』이 특히 인상적이라 딱 멈추었는데, 그때가 마침 이 글을 쓸 때였습니다. ‘쾌락적인’이라는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정적입니다.

원본 트윗은 이건데, 당초의 의도보다는 훨씬 하트풀해졌네요. 그래서 다행이죠.

술을 마실 적에 두 번째로 채우는 잔은 쾌락을 위해서 마신다고 합니다. 진실은 술 속에 있으며 마음의 문을 여는 묘약이라는 말도 있죠. 그러나 이 둘이 직접 음주를 한 것은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기호嗜好’라 하며, ‘도연陶然하다’란 거나하게 취하거나 감흥이 북받쳐 누를 길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번 타이틀에는 수메르 쪽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한자를 넣어보았습니다. 고민을 하긴 했지만, 한자만이 주는 운치가 있으니 한 번쯤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당초의 방향성은 알하이탐이 카베를 깔아뭉개고 시종일관 가학과 피학으로 가득한 내용으로 이끌어가려 했지만, 쓰다 보니 달달한 엔딩이 되었습니다. 달달한 거 맞죠? 나름대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취향을 고려하면 정말 달달한 내용입니다.

일부러 알하이탐이 카베의 이름을 많이 불러주도록 했는데, 후기를 정리하다 보니 저는 거의 매번 이걸 넣는 것 같네요. 좋아하나 봅니다. 하지만 알하이탐의 목소리로 온전히 카베에게 집중해서 이름을 조음하여 발성해주는 순간이라는 건 좋지 않나요?

이름을 불러주고 온전히 집중해주고, 몸은 괴롭지만 그것이 점차 묘한 감각으로 바뀐 끝에 카베가 제정신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말들을 내뱉습니다. 쓰는데 죽고 싶더라고요. 읽는 쪽에서는 괜찮으셨나요^ㅡ^? 안 괜찮았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안 괜찮았으면 지금 이 구구절절 후기를 여기까지 읽고 있겠어요?

일정 기간에 쌓인 것들을 형태 있는 것으로 털어낸다는 감각으로 매번 쓰고 있기 때문에 평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데(그래서 과거에 쓴 것들을 웬만하면 다시 읽지 않습니다), 이건 올리면서 조금 겁나더라고요. 적폐 아냐……? 했거든요.

뒤로 하는 자세여도 나름 중반까지는 카베의 상태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만, 후반으로 갈수록 줄여서 거의 언급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맞지만, 알하이탐이 정신없이 하면 좋겠더라고요.

# 내 시간의 연속과 네 소리의 에테르, 그 특수한 동시성에 대하여

Piano Concerto No. 3, Op. 30 in D Minor: Allegro ma non tanto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II. Intermezzo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III. Finale. Alla breve

단언하건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모든 연주가 아름답습니다. 세 개의 링크는 순서대로 협주곡 3번의 각 1악장, 2악장, 3악장입니다. 라흐마니노프 곡의 공연이 있으면 되도록 보러 가는데, 이걸 쓰기 전에도 공연을 하나 다녀왔습니다. 이때 갔던 공연에서 협주곡 3번 연주가 인상적이었기에 내친김에 당장 찾을 수 있는 음반을 거의 다 들어보았죠. 링크는 제 취향대로 고른 연주들입니다만, 첫 번째로 링크된 호로비츠의 연주는 전곡을 들어보는 걸 추천합니다.

쓸 당시에는 2악장 『Intermezzo』를 주로 들었네요.

어쨌든, 현대로 치자면 당연히 알하이탐으로서는 초인종을 누르고 카베가 인터폰으로 대답하는 것이 맞겠죠. 그러나 소리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일부러 두드리는 것으로 했고 카베가 대답하는 부분도 인터폰을 통했는지 문 너머로 직접 말했는지 애매하게 서술했습니다. 이걸 나중에 고칠지 말지는 그때 생각할까 합니다. 아마 그대로 두지 않을까요?

초인종이 버젓이 있는데도 부담을 주기 위해 일부러 쾅쾅 두드린다고 생각하면 귀엽기도 합니다. 알하이탐은 본인의 얼굴과 체격이 타인에게 위압을 준다는 걸 잘 알고 있을 듯해요.

위의 『기호도연』을 쓰는 데 두 달이 걸렸으므로 4월에는 글을 올리지 못해서, 하나 더 올리고자 급하게 썼습니다. 그래서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세부 묘사도 많이 뺐습니다만, 그래도 1만 자 가까운 분량에 맞추기는 했습니다.

여기서 세부 묘사란 카베가 알하이탐에게 커피를 가져다줄 때 어떤 잔을 쓴다거나, 둘이 구체적으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으며 대학 시절에 어떤 일을 겪었는가 같은 것들이죠. 1만 자 이내로 정리하기 위해 다 덜어내니 남은 것은 서로를 향한 미련이 철철 넘치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타이틀은 상대성이론으로부터 가져왔습니다. 저는 이런 학문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과학과 철학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용어는 시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발음도 예쁘고요.

혼자만의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고 싶은 남자가 소리에 자극당해 찾아간 옆집에서 대학 시절의 첫사랑과 재회한다는 내용으로, 타이틀에도 본문에도 시간에 관한 서술이 많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내는 건 소음이지만 카베라면 말이 다르겠죠. 실제로 그는 카베가 모형을 두드리느라 내는 망치 소리도 참아주잖아요. 최근의 그 둘을 보면 카베도 망치질을 자제할 것 같긴 합니다. 아무래도 알하이탐이 잘 수 있도록 차츰 배려해주지 않을까요? 알하이탐이 카베에게 시간을 들이고, 그것을 일상 속에서 절절히 느낀 카베가 바뀌어가는 건 픽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인의 패턴이지만 저는 오타쿠라서……. 결국 이 둘이니까 좋은 것 같아요.

일요일 하루라는 타임리미트 속에서도 고민한 건 카베의 시선 처리 문제였습니다. 과연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지, 아니면 이리저리 다른 곳을 보며 피하다가 마주할지 생각하다가 후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과거에 크게 싸운 데다 미련이 남았으니만큼 카베에게는 주저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요. 카베는 솔직히 말하라며 채근하거나 강요한다고 해서 털어놓을 타입이 아니니, 시간을 들여 은근하고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능숙함을 알하이탐이 갖추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이페이스라고 한들 카베 상대로는 배려심과 관찰력을 십분 발휘하므로, 알하이탐은 카베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다룰 것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걸 솔직하게 말하는 일에 카베는 익숙하지 않을 테니, 세상에서 카베를 가장 잘 아는 알하이탐이 그것들을 부드럽게 끌어내 주었으면 했어요.

자기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알하이탐이 카베에게 시간을 들이는 건 상당한 특별 대우입니다. 소중한 휴일의 몇 시간을 함께 보내니 헤어져야 할 때는 찾아오고, 알하이탐은 적극적으로 미련을 어필하죠. 사실 넣어야 할지 말지 망설였습니다. 이건 플러팅이잖아요. 하지만 알하이탐이 미련을 내비칠 것인가? 이 점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답은 ‘그렇다’일 것입니다. 실제로 알하이탐은 카베에게 네 이상은 어떻게 되어가냐는, 프러포즈 비슷한 말을 하니까요. 이 대사를 현대식으로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한 끝에 이런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현대를 사는 청년답게 너무 애매하지 않도록, 다소 적극적으로 묻지만 질문을 듣는 상대방에게 결정권을 맡기는 형태가 되었죠.

망설이며 드문드문 끊기는 카베의 대답을 한 문장으로 이으면 ‘당연하지, 나는 너 말고 아무도 없었어’가 됩니다. 알하이탐의 예상대로라는 전개로요.

저는 정말로 지독한 고정러라서, 한 번 cp를 정해놓으면 다른 건 아무것도 못 보기에 매번 이런 요소는 넣으려 합니다.

낭만적인 곡을 들었던 만큼, 급하게 썼지만 그럼에도 제법 로맨틱한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해 질 녘의 따뜻한 빛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알하이탐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겠죠. 행복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