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 해부 - 샤넬, 디올, 입생로랑
커리어우먼 패션
어려운 얘기만 줄창 늘어놨으니 좀 가볍고 재밌고 만인이 사랑하는 패션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여성 이미지의 생성에 있어 패션을 빼놓는 건 애초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디까지나 이해하기 좋게 흐름을 다루는 거니까 더 자세하게 궁금하다면 복식사를 뒤져보길 권한다.
당연하지만 로맨스만큼이나 페미니즘 사이가 좋기 어려운 게 바로 패션이다. 뭐 그럴 만하지 않은가. 여성이라면 무릇 언제 어디서든 예뻐 보여야 한다며 외모강박에 여성을 가둬놓는 주범 중 하나이며, 옷에 비즈를 다는 데 작은 손이 필요하다며 제3세계에서 아동 노동 착취도 하고, 공장에 폐수/폐기 시설 뭐 하나 제대로 안 해놓고 싸게 때우면 그만이라고 대충 버려대서 환경오염은 오지게 시켜놓고 노동자들에게는 보호장치 하나 제대로 안 해서 일하다 죽게 만드는 산업인데 어떻게 페미니즘과 사이가 좋겠는가. 하도 이런 부분 때문에 욕 먹어온 세월이 긴데다가 전세계적으로 탄소 배출 줄이라는 압력이 거세지니 그나마 오늘날엔 재활용 패션 쪽을 눈독 들이면서 눈치 보게 됐달까, 뭐 그렇게 된 거다.
외모강박을 조성하는 패션 산업을 두고 '남성은 전통(classic)을 물려받지만 여성은 패션을 물려받는다'고 대놓고 비꼬기도 하는데 당연하지만 모든 페미니스트가 패션에 적대적이진 않다. 여성이 만들어낸 모든 전유물들은 그 계보를 상실하고 재발견하길 반복하기 때문에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이지만 않는다면야, 누려서 안 될 것도 없지 않던가. 무엇보다 우파 쪽에선 좌파가 추레하고 가난하고 미천하길 바라서 그런 척 하는 것도 있고, 패션 쪽에선 진보적 가치를 어필하기 위해 히피들로부터 유래한 '플라워 파워'를 자주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 적정선만 서로 지킨다면 잘 지내지 못 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물론 여기까지 오기 위해 엄청나게 싸워댔지만 그런 게 다 필요한 논쟁들인 법이다.
자 그럼 서론은 이쯤 하고,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엔 당연히 패션이 톡톡히 한 몫했다. 이 얘기를 시작하려면 코코 샤넬부터 얘기를 시작해야만 한다.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이고, 코코는 별명이다.
샤넬의 등장 이전에는 다들 알다시피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와 코르셋, 19세기 패션 하면 떠오르는 모든 것만 존재해서 여성의 의상에 활동성이라곤 개뿔 없었다. 그 좋은 예가 '승마용 바지'인데 샤넬이 이걸 직접 입기 전까지는 여성들은 승마용 드레스를 입었다. 19세기 드레스에서 패티코트나 버슬이 빠져있을 뿐이지 어쨌든 입고 움직이는 게 불편한, 겹겹이 입는 치마들을 말이다. 샤넬이 남성들이 입던 승마용 바지를 자신에게 걸맞게 수선해서 입었고, 이 대담한 크로스드레싱은 20세기 초반부터 여성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여성들이 태어나 처음 승마용 바지란 걸 막상 입어보니 어떻겠는가. 세상 편하지! 바로 이 지점이 샤넬의 특징이었다. 샤넬은 정말 한결같이 활동하기 편한, 그리고 직선적인 여성의 옷에 집중했고, 샤넬의 디자인이 먹혔기 때문에 여성에게서 코르셋과 패티코트가 버려졌다.
샤넬이 먹히기 시작한 건 1차 세계대전부터였다. 사회적 압력 때문에 허용되지 않았던 '편안한 여성의류'가 사회 체제가 흔들리면서 허용된 것이다. 샤넬은 남성용 속옷이나 선원처럼 거친 일 하는 사람들이 입던 더럽혀도 되는 티셔츠 등으로 쓰이던 저지(jersey)로 여성 의류를 만들었고, 저급으로 취급되던 이 원단을 고급스러운 여성스러운 소재로 치환시켜버렸다. 이건 아직도 통용되는 샤넬의 코드 중 하나다. 몸의 움직임을 크게 방해하지 않고, 따뜻하고 입기 쉬운 데다가 직선적인 디자인의 니트는 오늘날에도 샤넬의 기본이다.
이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게 된 샤넬은 프랑스 캉봉 거리에서 부티크를 열고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샤넬 라인(Chanel line), 치마의 허리선을 하이웨스트(배꼽 위)에서 허리로 내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던 치마 길이를 무릎에서 10센티미터 가량 아래까지로 깡총 걷어 올렸다. 이게 무슨 뜻이다? 치마단을 신경 안 쓰고 성큼성큼 걸어다닐 수 있게 된 게다.
이후 이어진 샤넬의 향수 사업 부분은 대중에게 브랜드 파워를 보여준 의의가 있단 것 정도만 대충 기억해도 되고, 다시 샤넬의 디자인에 집중해보자. 우선, 여성 의류에 주머니가 드럽게 안 붙어있는 건 다들 알 것이다. 하지만 손에 가방 들고 다니면 불편하잖은가? 그러니 끈을 달아서 어깨에 매고 다닐 수 있게 숄더 백을 고안한 것도 샤넬이고, 지금은 지겹도록 보는 옷에 달린 큐빅과 가짜 진주 등도 샤넬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지만 시각적으로 계급이 보이는 시대였기 때문에 당시엔 이게 정말 대담한 시도였다.
생각해보라. 모조 보석이 없던 시대에는 부유하지 않다면 뭐 대단한 장신구가 있었을 리가 없잖은가. 그러니 몇 대를 거쳐 내려오는 반지 등으로 청혼하는 게 더 로맨틱하게 받아들여진 이유 중 하나가 보석이 부의 상징이라 그렇다. 기술이 발전해서 모조 보석을 만들 수 있게 되니 계급을 보여주던 장치에서 냉큼 패션의 영역으로 끌어내려버린 거다. 물론 이후에 모조 보석이 아닌 진품 보석도 다루긴 했지만.
그런 샤넬의 디자인의 정점으로 보통은 1926년 발표한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로 꼽기는 한데...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고 나온 그 옷보다는, 여기서는 1928년에 시작한 샤넬 수트(chanel suit)를 주목하자.
오늘날 우리는 '커리어우먼 패션'이란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모습을 떠올리는가? 치마 정장일 수도 있고, 바지 정장일 수도 있고, 캐주얼 룩일 수도 있고, 원피스일 수도 있다. 샤넬 수트가 바로 이 '치마 정장'의 시초다.
투 피스, 직선적인 라인,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치마, 블라우스, 단발머리, 이런 게 다 샤넬의 영향으로 확 퍼져나갔는데... 다들 알다시피 곧 2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가 나치에게 먹히면서 당시 의상 조합 쪽 일들도 이것저것 많은데 아무튼, 샤넬은 이때 나치 장교 중 하나랑 눈 맞아서 이후 한 10년 정도 매국노라고 유럽에서 길이길이 욕을 먹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뭐 도덕적으로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업적은 기려야 한다고 본다. 특히나 남성에게는 흠이 있어도 은근슬쩍 정당화시켜주려고 하는 주제에 여성이 흠이 있으면 해낸 업적까지 무시하는 건 같잖은 이중잣대지 않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업적은 업적이고 추태는 추태인 걸 대충 받아들여라.
내 경우엔 오히려 샤넬이 평범하게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었던 게 오늘날에 시사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렇듯 '완벽하고' '순종적인' 여성이 아니더라도 후대에서 기억할만한 업적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덤으로 사랑에 지나치게 맹목적이지 않는 게 때론 인생에 도움이 된다거나 아무리 그래도 도덕을 그리 쉽게 버리지 않는 게 좋단 것까지 기억해준다면 더 좋고 말이다. 샤넬은 자신의 욕망에 굉장히 충실했던 사람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렇다.
아무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샤넬만이 아니라 스키아파렐리 등 당대의 쟁쟁한 디자이너들이 복귀를 노렸으나 정작 하이패션의 왕좌를 움켜쥐게 된 건... 크리스찬 디올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텀이 워낙 짧다보니 사람들이 급속도로 보수화된 경향은 이미 그동안 열심히 말해주었으니 더 짚어주지 않아도 되리라 믿는다. 프랑스는 개중에서도 고 대단한 자존심에 대단한 스크래치를 받았는데... 나치의 지배 아래서 배급되던 식량의 양이 유럽에서 제일 적었단 걸 알고 풍요에 더 미쳤달까, 괜히 1930년대부터 내내 벨 에포크 벨 에포크 타령해댄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올의 뉴룩은 딱 그들의 상한 자존심을 긁어줬다. 19세기에 먹혔던 풍만한 몸매(라고 쓰고 가슴만 커다랗고 허리는 가는, 이라 읽자.)를 가진 꽃 같은 여성을 위한 옷이라니. 디올의 저 허리는 잔뜩 조이고 치마는 꽃봉오리처럼 부풀린 라인을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원단의 양이 대충 8배 정도라 하니 하이엔드스러운 '부의 과시'도 가능하지 않은가.
당시 디올의 디자인은 여러 의미로 욕망의 폭발이었다. '전쟁 끝났으니까 여자들이 이제는 옛날처럼 예뻐졌으면 좋겠다'라는 고 욕망을 다르게 부르면 뭐가 될까? 바로 백래시다. 디올의 디자인은 샤넬이 관짝으로 밀어넣었던 코르셋을 다시 살려놨다. 오늘날까지도 디올은 아주 전형적인 아이콘을 고수하는데 꽃, 화려함, 곡선, 화이트 앤 골드, 백인여성이다. 디올의 프레이즈가 '사랑을 위해 당신은 무얼 할 건가요?(What would you do for love?)'인데 여러 의미로 짜증난다. 프랑스 독립시킬 거라고 (당연히 여성 활약이 상당했던)레지스탕스들이 그렇게 싸워댔는데 막상 전쟁 끝나니까 좋았던 옛날처럼 살자고 코르셋 입히려 드는 디자이너의 유지를 받드는 멘트라니, 괜히 디올 두고 올드하다고 투덜거리는 게 아니다.
어쨌든 50년대는 이렇게 디올이 흥하면서 패션 업계에서도 백래시가 불었는데, 그래도 샤넬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던 미국에서 오히려 잘 팔렸다. 그리고 60년대, 이브 생 로랑이 등장한다.
디올의 후계자로 들어온 입생로랑이었지만, 입생로랑은 무덤에 들어간 디올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올 요소로 두각을 드러내 금방 디올 하우스를 나왔다. 그리고 (입생로랑이 동성애자인 거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동성 연인의 도움으로 투자자를 구하고 디올 하우스로부터 보상금을 얻어내 자기 브랜드를 세우는데, 입생로랑은 1962년부터 샤넬을 뒤이은 수트 메이커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시절 인터뷰를 찾아보면 샤넬과 입생로랑의 사이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입생로랑이 디자인한 수트가 여성용 '바지 정장'이었단 점이다.
1966년, 입생로랑은 '르 스모킹 룩'을 선보인다.
입생로랑의 모든 디자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꼽히는 이 룩을 보고 누구는 턱시도를 여성에게 걸맞게 고쳐서 입혀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 룩에서 유래한 바지 라인은 이후 여성의 바지 정장의 근본이 된다. 허리와 골반은 딱 맞지만 허벅지 아래에서부터는 1자로 뚝 떨어지는 저 라인 말이다. 아직도 이 라인에서 벗어나는 형태의 바지 정장은 쫌... 촌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보면 볼수록 이 옷의 디자이너가 얼마나 여성과 남성의 구분을 올드하게 보는 게 여실히 느껴지지 않는가.
요 부분이 중요한데, 옛날엔 대중문화랄 게 크게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게 상류층 따라하기였다는 점을 짚어줬지 않은가. 패션이 특히 더 그랬다. 하지만 입생로랑은 자신의 시대에는 스트리트 패션, 즉 대중이 입고 다니는, 길거리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패션이 대세가 될 거라고 생각해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하이엔드와 스트리트의 디자인적 경계선을 허물어버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 때문에 디올 하우스에서 쫓겨난 거나 다름 없고 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디올은 올드하다.
브라 버너로 유명한 60년대인 만큼 입생로랑은 갑갑한 브래지어를 입지 않아도 되는 시스루룩도 선보이고(이미 여러 번 강조해줬듯이, 이 시대에선 여성의 몸을 찬사하거나 해방시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거다. 섹스어필에 대한 문제 인식은 이때는 좀 부차적 문제였다. 성희롱에 대한 관념이 90년대에 생겼다는 걸 까먹지 말자.), 몬트리올 룩이라고 예술 작품을 옷으로도 만들고, 이국적인 룩으로 히피들과도 영향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르 스모킹 룩이 70년대 커리어우먼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단 점이다. 이렇게 커리어우먼의 패션에 바지 정장은 당당히 여성의 것으로 자리 잡게 된다.
80년대 패션을 돌아보면 재밌는 현상이 보여진다. 위에서도 얘기했듯 실력 좋은 디자이너가 자신의 브랜드로 뭔가를 보여주면 게서 파생된 '룩'이 확 유행으로 도는데... 당연하지만 이 룩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조명해주는 건 미디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패션 잡지 보그처럼 말이다. 아직 인터넷이 생기기 전 시대다, 친구들. 까먹지 마라. 어쨌든 그런데... 80년대 대표 디자이너로 누구를 꼽고 싶은가? 펑크의 제왕 비비안 웨스트우드? 프라다 = 시크 공식을 만들어낸 미우치아 프라다? 80년대 음악계를 장악하게 된 래퍼들이 선호했던 루이비통이나 구찌?
미국 미디어가 주목한 건 라크르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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